몇년전까지는 싸이질에 대단히 심취했지만 사람들이 죄다 그곳을 떠나고 블로그질을 더 많이 하면서 나 역시 싸이월드를 거의 떠나 살았다. 2002년부터니까 꽤 오랜 세월 거기 담겨 있는 삶의 흔적들이 아깝기도 하고 몇몇 친구와 가족은 아직 그곳에서 소통하고 있으니 누구처럼 확 폐쇄하거나 닫아둘 결정은 내리지 못했다. 그냥 막연한 방치상태랄까.
그러다 조카들 사진을 구경하러 간만에 로그인을 해보니 쪽지가 도착했다는 표시가 보였다. 그간 싸이 쪽지는 기분 나쁜 홍보글 아니면, 전화번호가 바뀌었다거나 결혼소식을 알리는 지인의 단체 쪽지가 대부분이었으므로, 이번엔 또 뭘까 지레 이맛살을 찡그리며 쪽지를 열어보았는데 상상을 초월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누군가 내가 번역한 문제의 시리즈물 소설을 <꼭> 읽고 싶은데 곧 유학을 가게 되었다면서 시리즈별로 다 책이 너무 두꺼워 가져갈 수가 없으니 나더러 번역원고를 보내줄 수 없느냐는 것이었다. pmp에 다운받아서라도 읽고 싶다나. 기가 막혀서... 책이 저가형 보급판으로는 출간되지 않아 사 보기 부담스럽다면서 간곡히 부탁을 한다고 적혀 있었지만, 너무 어처구니 없는 요구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유학을 안 가봐서 모르지만 짐이 얼마나 대단하다고 겨우 책 몇권 넣을 공간이 없다는 것인지 나로선 도저히 이해가 안가고, 유학을 간다는 것부터가 핑계 같다. 책 사기는 아까운데 그렇게 읽고 싶으면 서점에 가서 서서라도 읽든지! 아무래도 돈 한 푼 안 들이고 책 읽어보겠다는 꼼수일 것 같다. 순진하게 원고를 보내줬다간 온라인 공간에 원고 파일이 영원히 떠돌 것이 분명하다.

그러다보니 오도독 소름이 끼쳤다. 내 이름이야 워낙 드물어서 동명이인을 찾기 힘들다는 건 익히 알고 있는 일이지만, 사적인 사진들은 모두 일촌공개로 돌려놓은지 오래라고 해도 미디어 서평이나 책 사진 같은 건 그냥 공개해놓은 터라 그런 인간들의 검색에 속수무책으로 걸려들고 말았겠구나 싶었던 거다. 이런 공간에 조금씩 노출된 사생활만으로도 얼마든지 개인정보를 뽑아낼 수 있다는 기사를 보고 섬뜩했었는데, 실명까지 드러나는 싸이월드 같은 데선 더더욱 발가벗겨진 채로 내던져지는 꼴이란 걸 생각하지 못했으니 내 불찰이다. 얼른 모든 메뉴를 일촌공개로 바꾸어 놓고도 영 기분이 찜찜하다.

물론 어처구니 없는 요구는 단칼에 거절했다. 버럭 화가 치밀어서 답장 쪽지를 보내긴 했는데, 그냥 무시할 걸 그랬나 후회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어차피 번역 원고의 저작권은 이미 출판사에서 갖고 있으니 원고 파일을 유출하는 건 내가 민형사상 처벌을 받게 될지도 모를 엄청난 일이란 걸 그 멍청한 인간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불법 다운로드가 판을 치는 나라와 국민이다 보니 별 일을 참 다 겪는다. 몇달동안 낑낑대며 골빠지게 작업한 번역원고를 거저 달라는 인간이 다 있다니 참 두고두고 기가 찰 노릇이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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