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겁한 밥벌이

투덜일기 2010. 11. 19. 02:38

기획력 있는 번역자들과 달리, 나처럼 줏대없이 주어지는 일로 번역을 하다보면 못마땅한 책과 씨름해야 할 때가 더러 있다. 누가 간절히 부탁하거나 일감이 똑 끊기면 어쩌나 밥벌이 걱정을 해야하는 상황에 몰리면, 스스로도 민망한 자기합리화 과정을 거쳐 일을 맡게 되는 식이다. 당신 정도 경력이면 이제 마음에 드는 책만 골라서 해도 되지 않겠느냐고 반문하는 이도 간간이 있지만, 모르는 소리다. 먹고 살려면 말이다. -_-; 더욱이 인세 욕심에 눈이 어두워져 매절 계약일 마다하고 인세 계약일만 찾아하는 바람에 일년 내 수입이라고는 얼마 안되는 계약금 몇 건으로 버텨야 했던 해도 있었음을 감안하면, 죽도록 싫거나 너무 어려운 책, 또는 몹쓸 출판사의 일만 아니면 대개는 약간의 망설임과 고민 끝에 못 이기는 척 계약에 응한다.

문제는 그렇게 별 애정 없이 맡은 책의 경우, 프로답지 못하게 아무래도 홀대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그러니까 독자의 입장에서 어떻게든 책에 흥미를 느껴야 진도도 빨라지고 정성이 더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가능하면 어떤 책이든 애정을 품어보려고 자기최면을 걸곤 한다. 그리고 쉽든 어렵든 '골빠지는' 과정을 거쳐 번역원고가 마무리되면, 좀 모자란 자식이라도 똑같이 정을 쏟는 부모(에 비하면 너무 비약이 심한가? 맞다, 심하다)처럼 돌변해 칭찬일색으로 치장하여 민망하기 그지없는 역자후기까지 양산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주 가끔은 도대체 이런 책을 종이 아깝게 왜 만드나 싶은 생각이 들거나 도저히 최면이 안 걸리는 '문제작'이 있다.

예를 들면, 얼마 전에 원고를 넘긴 청소년 소설이 그렇다. 번역의뢰를 받고 상담을 하며 대강 훑어본 느낌으론 소재나 줄거리가 흥미로울 수 있겠다 싶었다(소녀의 탐정놀이 비슷;;). 분량도 얇은 데다 청소년 소설이니 내용도 문체도 수월하여 아주 가뿐하게, 잘하면 한달 안에 '해치울' 수 있는 '만만한' 작업이 될 듯했고, 더욱이 책 나오면 '조카가 좋아하겠다'는 생각부터 들어 덜컥 계약에 응했다. 헌데 아뿔싸. 눈높이를 낮추어 아무리 조카 같은 청소년 독자의 눈으로 봐도 통 스토리도 재미도 없고 유치하고 구성도 단순하여 영 마음에 들지를 않았다. ㅠㅠ 그러니 점점 일을 하기가 싫어질밖에... 한달만에 해치우겠다고 생각했던 작업은 계속 늘어졌고, 그런 책을 쓴 작가도, 번역서를 출판하겠다고 나선 출판사도 밉기만 했다. 물론 제일 등신 같다고 느껴진 건 쉬운 맛에 덜컥 번역하겠다고 나선 나였고. 

어쨌든 지난달에 번역 원고를 넘기며 양심 고백을 했다. 야심차게 4권짜리 시리즈물로 기획했다는 건 알지만, 일단 원고를 읽어보고 나서 계속 다음 시리즈도 출간할지 진지하게 재고해 보라고. 요즘 청소년들도 눈이 높아서 웬만해선 만족시키기 어려운데 이건 좀 아니다 싶다고. (처음 책을 추천했거나 검토한 사람 물 먹이는 짓이라 조심스럽기는 했다) 하지만 담당자는 책에 대한 자신이 있는 건지 일단 대뜸 다음 책을 계약하러 오라고 청했고 '다음주쯤' 출판사에 오면서 '역자후기'를 '재미있게' 써오라고까지 부탁했다. -_-; 날짜를 콕 찝어 정해주어도 외출이 어려운 나에게 '다음주쯤'이라고 했으니 내가 어찌했을 것 같은가. 게다가 재미 없어 멀미날 것 같은 책을 위해서 '재미있는 역자후기'라니!

한번쯤 독촉전화를 받으면 발등이 앗뜨거라 싶어 뭔가 써지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통 그런 자극도 없으니(전화 공포증 때문에 내쪽에서 먼저 어떻게 하기로 했는지 전화걸어서 물어볼 수도 없고, 후기를 못 썼으니 제발저려서 어떻게 전화를 건담!) 한달이 다 되어가는 오늘까지도 나는 옮긴이의 말을 아직 한 줄도 쓰지 못했다. 대개는 번역을 하면서 후기에 써먹을 아이디가 떠오르거나 인상적인 구절이 있을 때 미리 메모를 해두곤 하는데 이 책은 전혀 그런 빌미가 없던 터라 정말 완전히 막막강산이다. 다른 일도 해야하는데 이도저도 제대로 못하고 갈팡질팡 제 머리만 쥐어박고 있으려니 어찌나 한심스러운지. 그래도 이렇게 자아비판을 공개적으로 하고 나면 낯이 뜨거워 뭔가 어떻게든 진전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끼적이긴 했는데, 만날 이렇게 제 얼굴에 침뱉는 얘기만 쓰는 번역가라는 걸 출판사에서 알아채면 정말로 밥줄이 끊기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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