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값

투덜일기 2010. 11. 26. 14:40

처음도 아니고 두번째 계약인데 굳이 출판사로 나오라고 할 때 알아봤어야 했다. 2시에서 3시 사이에 아무때나 오라더니만 아침부터 일찌감치 다시 전화를 해서 나의 단잠을 깨워 2시까지 오라고 콕 찍어줄 때부터 조짐이 안좋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재미없으니 시리즈물의 계속 출간을 재고해보라고 내가 충심어린 부탁을 했던 청소년 소설의 두번째 책을 얼떨결에 계약하고 돌아와선 스스로가 한심해 엊저녁부터 계속 제머리를 쥐어박는 중이다.

어차피 책이 잘 팔릴지 안 팔릴지 예측하는 혜안 따위는 갖추지 못한 인간이니 출판사에서 계속 시리즈를 내겠다면 번역은 내가 맡아야한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중간에 어떤 문제가 있든 시리즈물의 번역자가 바뀌는 건 독자를 위해서도 좋지 못한 일이다. 다행히 편집 담당자는 책이 재미있다고 했으니, 내가 청소년물을 즐기기에 너무 '늙어'버렸나보다고 짐작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다음책을 논의하러 갔었던 것이고.

하지만 시장에서 콩나물값 깎는 것도 아니고, 사람 불러다가 계약서까지 뽑아놓고 눈앞에서 원고료를 깎는 건 너무했다. 이메일이나 전화로 그런 의향을 물어왔다면 내가 아무리 소심하다고 해도 당연히 거절했을 것이다. 다른 데는 내년 계약 건부터 어렵더라도 조금씩 몸값을 올려주는 형국인데 새삼 번역료를 깎아달라니. 시리즈물의 번역료를 권당 달리할 수도 있다는 건 난생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번역가별로 몸값이 거의 정해져 있긴 해도 책에 따라 번역료가 약간씩 조절되는 경우는 물론 있다. 분량이 너무 엄청난 책의 경우 출판사에서 미리 양해를 구하는 수도 있고, 상대적으로 번역하기 쉬운 책과 어려운 책은 출판사에서도 이미 알고 있지 않겠나. 지난번 계약도 가벼운 '청소년물'임을 빌미로 나로선 최대한 양보한 선에서 번역료를 책정했던 터였다. 하지만 출판사에서 책정한 제작비에 맞춰서 두들겨 패듯 가장 만만한 '인건비'인 번역료를 막무가내로 깎으려 드는 곳을 간혹 만나게 되면 정말이지 맥이 쭉 빠진다. 시리즈물이라서 뒷권은 번역하기 더 수월할 거라는 짐작의 근거는 대체 무엇인지.

일단 사무실로 불러들이면 내가 소심해서 면전에서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따위의 극적인 행동은 하지 못할 거라는 걸 저쪽에서 알아차리고 있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작전은 유효했다. 나름 굳은 얼굴로 입장을 밝히기는 했어도 결국 달변의 설득에 넘어가 자포자기 심정으로 계약서에 사인을 해주었으니 말이다. 저들이 칼자루를 쥐고 있는 '갑'이라서 '을'인 내가 져야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결과적으로 겨우 몇십만원가지고 서로 밀고 당기기를 하고 있다는 상황이 서글퍼져 어서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비루한 밥벌이 아닌 직업이 어디 있을까마는 드물게 겪는 이런 장면은 그저 도망치고 싶을 뿐이다. 시리즈물 끝나면 다시는 상대하지 않을 출판사로 블랙리스트에 올리는 것으로 소심한 복수를 하는 수밖에.

내키지 않아도 가끔씩 가게 되는 파주 출판도시는 이상스레 정이 가지 않는다. 삐까번쩍한 건물들이 즐비해도 인기척은 전혀 없이 회색빛으로 가라앉은 그곳에 가면 괜히 숨이 막힌다. 씁쓸한 심정으로 서둘러 집에 오니 파주에 있는 또 다른 출판사에서 보낸 증정본 택배상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도 올해 출간되는 마지막 책일 것이다. 책표지를 쓰다듬으며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나의 몸값이 여기 담겨 있으니 그만 잊어버리자고 마음먹었다. 헌데 새삼 구석에 던져둔 계약서를 보니 자꾸 울컥해서... 여기다 일러바쳤으니 이제 정말 툭툭 털고 웃어버릴란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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