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에 해당되는 글 76건

  1. 2010.03.24 앤디 워홀의 위대한 세계 5
  2. 2010.01.02 2009 한해 정리 12
  3. 2009.09.07 페르난도 보테로 15
  4. 2009.08.04 천원어치 보테로 13
  5. 2009.08.03 고질병 10
  6. 2009.06.11 춘천의 추억 7
  7. 2009.05.14 뒷북관람 - 클림트 전 10
  8. 2009.05.08 미술관 옆 동물원 18
  9. 2009.04.16 흑백의 매력 18
  10. 2009.03.23 전시회 마지막날 10

3월 26일까지 유효한 전시회 표 두 장을 진즉에 이벤트로 당첨받아 놓고선 전시 끝나기 열흘 전에야 다녀올 수 있었다. 그나마도 이웃분들이 단체관람 날짜를 잡으며 펌프질을 해준 덕분에 어떻게든 짬을 내겠다는 생각을 했지, 안 그랬으면 조카와 올케에게 티켓을 주어보냈을지도 모를 만큼 그간 만사가 시큰둥했다.

게다가 앤디 워홀의 그림은 하도 유명해서 미디어에 자주 등장하는 탓에 직접 보지 않은 그림도 마치 본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말이다. 전시장에서도 순간순간 기시감에 시달렸는데, 가물가물한 기억을 억지로 뒤져보니 마릴린 먼로나 캠벨 수프 정도는 실제로도 과거 전시회에서 본 기억이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어떤 백화점 꼭대기의 전시장이었던 것도 같고, 어느 여행길이나 출장길에 들른 이국의 미술관이었던 것도 같긴 한데, 정확한 건 알 수가 없다. 기억력도 나쁜 주제에 기록 습관마저 부실하니 어쩌겠나.

하기야 뻔뻔스러울 정도로 미국적으로 느껴지는 앤디 워홀의 몇몇 작품을 처음 대중매체에서 접하며 과거의 나는 공장에서 찍어내는 게 (실제로 그는 자기 작업실을 <팩토리>라 부르고 조수들에게 실크 스크린 작업을 대신 맡기기도 했다) 어떻게 독창적인 예술이 될 수 있겠냐는 비판 쪽에 고개를 끄덕거렸으므로, 그리 높이 평가하지 않아 기억에 안남겼을 수도 있다. (사실 난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도 처음 뉴스에서 접하며 저 <따위>가 무슨 예술 작품인가 하고 어이상실을 경험했던 무식한 사람이다) 팝아트에 대한 무지의 소치였을 거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존경스럽기는 해도 격조 높은 양반들이 우아떠는 세상인 것만 같아 괜히 빈정상하는 구석이 있는 현대 미술계를 나름의 방식으로 조롱한 앤디 워홀의 삐딱한 정신이 나랑 맞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통조림 찍어내듯 뚝딱뚝딱 그림도 복제하는 것처럼 공장에서 쓱쓱 실크스크린으로 대량으로 밀어낸 뒤에 현란한 색채로 마무리하지만, 정작 똑같은 그림은 하나도 없지 않은가.

스스로 언론에 노출되기를 즐긴 괴짜 예술가로서의 그의 삶에 대해서는 막연하게만 알고 있을 뿐이지만, 단순하면서 명쾌하게 다가오는 앤디 워홀의 작품들은 확실히 <대중적>이어서 친근하고 편하다. 앤디 워홀의 작품이 아니었다면 지금까지도 마릴린 먼로가 그토록 인상적으로 현대인들의 기억에 남아 있을라고. 진한 주황색을 바탕으로 걸려 있던 수많은 인물 작품들은 벽 자체가 커다란 한 폭의 그림 같이 보이기도 했다. 튀고 싶고 주목받고 싶어 어쩔 줄 몰라하는 십대의 정서에서 평생 못 벗어난 것 같은 그의 자화상들도 좋았고, 얼굴이 무너지기 이전의 마이클 잭슨이랑, 비틀즈, 특히 믹재거 연작이 마음에 들었다. 

나야 퍽 보고 싶은 전시였지만 열세살 조카를 대동하고 관람하면서 내심 걱정을 했는데, 공주는 뜻밖에도 장 뒤뷔페 이후 두번째로 마음에 드는 전시라며 흡족해 했다. "나는 일상생활 그림들이 좋더라"는 촌평과 함께. +_+ 매번 그러듯 둘이 같이 이번 전시 최고의 그림도 선정했는데, 같은 그림이었다.


국내 최대 규모의 회고전이라고 엄청 광고하던데, 소장품과 서류 같은 것들도 포함된 탓인지 그림이 정말 많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고 색상별로 훨씬 다양한 마릴린 먼로도 몇 작품 안온 것 같아 아쉬웠다. 늘상 느끼지만 <질과 양> 모두 흡족하게 작품을 감상하려면 원 소장처로 가야한다는 것인데, 앤디 워홀 작품들이야 하도 고가에 여기저기 팔려다니니 앤디 워홀 미술관엘 가도 다 보지는 못하려나. 하여간에 봄맞이 미술관 탐방으론 딱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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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한해 정리

놀잇감 2010. 1. 2. 01:39

글 하나에 2009년을 정리해 담는 행위는 퍽 뿌듯하기도 하고 심란하기도 하다. 이른바 삶의 <낙>이라고 하는 것들이 이렇게나 많았구나 싶을 수도 있고, 요것밖에 없었나 싶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부실한 기억력으로도 요것밖에 없었나 허망한 느낌이 들 것이라는 데 심증이 가지만, 하여튼 꼽아보자. 나의 2009 B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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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난도 보테로

놀잇감 2009. 9. 7. 15:16

명화 속 주인공들을 찐빵처럼 부풀린 모습으로 패러디한 그림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그 그림을 그린 이가 페르난도 보테로라는 걸 확실히 두뇌에 저장해둔 계기는 작년에 덕수궁에서 본 <20세기 라틴아메리카 거장전>이었다. 그때 직접 본 보테로의 <시인>과 <브래지어를 하는 여자> 그림이 어찌나 유쾌하던지, 전시를 보고 돌아와 다시 한 번 다빈치와 벨라스케스의 명화를 따라 그린 그림들을 찾아보기도 했다.

보테로 - 12세의 모나리자

다들 그랬겠지만 내가 이번에 보테로 전시 소식을 듣고 기대했던 건 가장 유명한 바로 이 <12세의 모나리자> 그림이었으나, 이 그림은 물론 오지 않았다. +_+
명화를 따라 그린 패러디 그림들은 보테로가 수년에 걸쳐 꽤 여러 작품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혹시 한점쯤 볼 수 있지 않을까 했었는데, 보테로의 모나리자는 뉴욕 현대미술관과 콜롬비아 보고타 미술관에 있다는 듯하니 우리나라같은 데서 쉽게 빌려올 수 없었을 게 뻔하다.
그나마 이번에 전시한 그림들은 전부 최근까지 역동적으로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보테로 본인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이란다. 도슨트 설명을 들으니 아직 안팔린 그림들도 많아서 서명이 없는 작품들도 더러 있다고. 유심히 작품 연도를 살피니 2007년, 2008년에 그린 그림들도 꽤 많았다.
70대 중반임에도 대형 그림을 1년에 몇 작품씩 그리다니 사람 좋게 생긴 화가의 사진이 자꾸 떠올라 더욱 신기했다.
어쨌거나 반아이크와 벨라스케스 등을 따라 그린 그림들은 몇 점 볼 수 있었지만 통통한 모나리자를 못본 아쉬움을 완전히 달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내가 막연하게 보테로 전시회를 오매불망 보고파했던 이유인 사랑스럽고 유쾌한 느낌들을 이번 전시에선 그리 실감할 수가 없었다. 사물과 인물의 양감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원래

보테로 - 죽마를 탄 광대

보테로는 인물의 표정을 뚱하게 그린다는데, 내가 보기엔 뚱한 정도가 아니라 삶에 찌든 슬픔에 가까워보였고 투우, 서커스, 라틴의 삶, 등으로 나뉜 전시 주제들 역시 화려한 원색으로 표현된 것과 상관없이 무거운 분위기에 큰몫을 담당했다.
전시 팸플릿 표지이기도 한  <죽마를 탄 광대> 속 인물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두 사람 다 말못할 사연이 있어서 조금 있다가 돌아서서 눈물이라도 흘릴 것만 같다.
심지어 즐겁게 춤을 추는 무도장의 사람들 표정도 하나같이 슬픈 걸 억지로 참고 있는 듯한 느낌.










무식한 눈으로 늘 행복한 그림을 나만의 명작으로 꼽는 촌스러운 내 마음을 그나마 확 사로잡았던 건 정물화 쪽에 있었다. 작품 크기도 대형이라 시원시원하게 내 눈을 즐겁게 해준 작품은 바로 이 <꽃 3연작>

페르난도 보테로 - 꽃 3연작


내가 아무리 기억력이 별로이긴 하지만, 덕수궁 전시장에선 분명 노란 꽃이 가운데 있었던 것 같은데 노란 꽃이 가운데 있는 사진을 좀체 검색할 수가 없다. 내 기억이 왜곡된 것일까. *.* 같이 간 지인 하나는 다닥다닥 붙은 꽃이 인간의 뇌 같아서 섬뜩하다는 평도 했지만 나는 저 노란 꽃의 색감과 통통한 모양이 너무 예뻐서 엽서 세트 말고도 무려 5천원이나 하는 전시 포스터를 사가지고 의기양양 돌아왔다. 또 몇년간 빛바랄 때까지 방문에 붙여놓고 쳐다볼 때마다 흐뭇해할 요량이다. ^^;

며칠 안남은 전시가 끝나기 전에 보테로 그림들을 잔뜩 보고 온 건 뿌듯하고 잘한 일이다 싶지만 이상하게도 조각상 포함 93점이나 된다는 이번 전시보다 난 아무래도 두 세점에 불과했던 지난 전시때의 느낌이 더 강렬하고 오래 남을 듯하다. 아기처럼 통통하고 작은 손에 빨간색 알반지를 끼고 한손엔 담배를 들었던 <시인>의 모습과 뾰족한 구두 위에서 중심잡기 묘기를 하듯 브래지어를 채우던 통통한 여인의 뒷모습이 왠지 더 좋았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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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원어치 보테로

놀잇감 2009. 8. 4. 20:27

신체리듬도 깨뜨리지 않으면서 친구와 약속도 지키고 보테로 전시회를 보는 방법은 의외로 쉬웠다. 친구 일행도 전시를 오후에 보면 되잖아! 어차피 젖혀둔 일감이야 몇 시간 더 논다고 크게 달라질 진도도 아니었다.
그러나 난관은 다른 데 있었다.
다들 휴가 떠났을 줄 알았더니만 그것은 나의 오산. 점심을 먹고 느긋하게 뙤약볕 아래로 나서 덕수궁으로 향하니 놀랍게도 지난번 유명 전시회 마지막날만큼이나 매표소앞부터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가족끼리 친구들끼리 궁궐만 들어가는 이들도 바글바글. +_+
멀리 경기 외곽에서 날을 잡아 보러 온 친구 일행은 여유롭게 기다려서라도 전시를 볼 요량을 품었지만(방학이라서 그런지 덕수궁 현대미술관 전시는 고맙게도 8시 반까지더라), 계속해서 출판사의 독촉전화마저 날아드는 마당에 나 또한 여유를 부릴 순 없었다. 곧바로 헤어지긴 아쉬워 나는 일단 천원짜리 덕수궁 입장표만 사서 들어갔는데, 의외의 기쁨이 기다리고 있었다.
보테로의 조각품들이 궁궐 마당에 떡하니 전시되어 있는 게 아닌가! ^^

대한문으로 들어서 조금만 들어가면 나타나는 건 큼지막한 검정색 고양이 조각상.
보테로의 고양이 조각이 여러개인지 어쩐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사진을 퍼오며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 들여와 버젓이 실외 궁궐마당에 세워놓은 건 복제품이 확실하다는 것을.
새까맣고 매끄러운 질감이라 혹시 대리석인가 했더니 팻말에 <청동>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모름지기 정말로 청동이라면, 그리고 1999년에 제작한 거라면 당연히 이 사진처럼 칠이 벗겨져야 마땅하지 않은가 말이다. 덕수궁에 서 있는 건 갓 제작한 새것처럼 매끈하기만 하다. 실외 조각품 대여전시에는 언제나 복제품을 보내는 게 정석인지도 모르겠으나, 뭐 나로선 못마땅했다는 이야기.



미술관 양 옆에선 이렇게 통통하고 귀여운 여체 조각상도 두개나 더 볼 수 있었다. ㅎㅎㅎ 9월을 기약하며 전시회 구경을 포기한 나의 아쉬움을 달래주려는 듯 요염하게 몸을 비틀고 앉은 저 사랑스러운 자태라니!

오늘은 설렁설렁 구경했지만 담엔 조각상들도 더 꼼꼼히 보고 말리라...
나는 까마득히 몰라는데 이번 전시회를 위해 페르난도 보테로 아저씨가 직접 내한도 했었다는군. +_+ 알았더라도 인파를 뚫고 만나러 갈 용기는 내지 못했겠지만 은근히 아쉽다.

사진을 보니 그림속에 담긴 오동통한 인물들보다는 훨씬 날렵하고 예리한 예술가의 모습이지만 어쩐지 동글동글하고 순진무구한 표정이 닮았다. 예술가의 생김새 때문에 그림을 더 좋아하거나 덜 좋아하는 건 말도 안되는 일이지만, 멋진 보테로 아저씨의 사진을 보니 그림 구경 열망이 더욱 커진다! 어쩜 이렇게도 만화 주인공 같이 생겼다냐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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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질병

투덜일기 2009. 8. 3. 16:21

고질병이 한두가지가 아닌 인간으로서 그래도 가장 큰 고질병은 게으름과 우우부단함, 미루기, 바쁠때 딴짓하기가 아닌가 싶다. 코앞 마감일을 앞두고 <7월까지만 놀자>고 했던 다짐도 당연히 물거품. 8월이 열린지 사흘이 지났건만 아직도 심신은 심각한 초절정 모드로 진입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게다가 마감전에 딱 한번의 예외를 두자며 정한 내일의 약속을 앞두고 고민하느라 또 다시 일손이 안잡히는 상황.
어차피 약속은 정한 것이니 나가면 될 터이나, 나의 고민은 딴 데 있다.
바로 보테로 전시회를 오전에 보러 갈 것이나 말 것이냐 하는 것.
친구 일행은 그 전시를 본 뒤 나와 만나기로 정했는데, 나도 부지런을 떨어 전시회를 같이 보고 나서 점심을 먹고 놀 것인가, 아니면 마감모드에 충실(?)하여 그냥 점심약속에만 나갈 것인가, 그것이 고민의 요지다. ㅠ.ㅠ

덕수궁 현대미술관에서 9월 17일까지 전시예정인 페르나도 보테로의 전시는 6월말 개관 이후 줄곧 별러오던 건데, 이번에 기회 될 때 그냥 확 같이 보는 것이 나을까 아닐까. 우유부단함 또한 극심한 나로선 결정을 못 내리겠다. 방학이니 당연히 아이들이 많을 것 같아 개학 이후로 관람을 미루는 게 좋다고 생각하다가도, 또 어영부영 게으름 부리다 아예 전시회를 놓치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도 든다.
어차피 약속을 잡았으니 반나절쯤 더 노는 게 뭐 그리 대수냐고 생각할 이들도 있겠지만, 초절정마감모드의 작업능률을 지키기 위해선 생활리듬이 깨지면 안되는 법이다. 왕비마마의 심신회복률이 거의 95%에 도달해 드디어 아침 노동(식전약+아침밥+식후약 챙기기)에서 벗어나 심야작업과 오전취침 리듬을 회복한지 얼마 안되는데, 내일 오전에 무리해서 전시회를 보러 나가면 게으른 몸을 재정비하는데 며칠 걸리까봐 염려가 된다는 얘기다. ㅠ.ㅠ 그럼 이번엔 그냥 포기하고 다음에 보면 되잖아!, 라고 생각하려니 지난번 라틴아메리카 전시회 때 맛만 본 보테로의 그림이 눈앞에 아른거려 호기심이 불끈 동한다.

이리보면 우유부단함의 요체는 쓸데없이 미리 생각을 너무 많이하고 고민한다는 점이다. 단순하게 생각하고 단숨에 결정을 내리면 될 일을 나는 매번 이리 재보고 저리 재보고 만일의 여러가지 경우를 떠올리고 가능성을 점친다. 확실히 고질적인 지병이 아닐 수 없다. <우유부단>병에다 <미루기>병, <바쁠때 딴짓하기>병까지 고질병이 삼중으로 겹친 이 상황은 더더욱 고민스럽다. 아 어떡하지. +_+ 전시 포스터를 오려붙이고 나니 그림이 더 보고 싶다. 젠장. 참 싫은 나의 고질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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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의 추억

추억주머니 2009. 6. 11. 18:11

춘천은 나에게 아련한 추억과 동경의 장소다. 김현철의 노래 <춘천가는 기차>가 나오기도 훨씬 전인 고3 여름방학때, 두 친구와 작당하여 아침부터 이어지는 따분한 자율학습을 과감히 제끼고 난생 처음 춘천행 기차에 올랐었다. 그 전에는 땡땡이라고 해봤자 저녁 자율학습 시간에 몰래 빠져나가 떡볶이를 사먹는다든지 조금 일찍 달아나는 정도였을 뿐, 하루를 온전히 빼먹는 땡땡이는 시도해본 적이 없었던 터라 전날부터 몹시 마음이 설렜다. 청량리역에서 만나 일단 성북역까지 가서는 거기서 춘천행 기차를 타야했는데, 두어시간 남짓한 그곳이 나에겐 마치 한반도 끝에 있는 부산만큼이나 심정적으로 먼 곳이라 생각되어 대단히 짜릿한 일탈로 여겨졌다. 이미 아는 오빠를 따라 춘천에 몇번 다녀본 전적이 있는 친구의 안내대로, 춘천 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간 공지천 주변을 거닐다 호숫가에 서 있는 <이디오피아>라는 카페에서 볶음밥과 빙수를 먹은 뒤 돌아오는 기차를 탄 것이 여행의 전부였지만, 우리 셋은 너무도 행복했다. 기차를 타고 오가면서 계속 만나게 되는 남한강과 북한강 주변의 경치도 아름다웠고, 완행열차에서 사먹은 삶은달걀도 감동의 맛이었다.
그날의 추억이 얼마나 인상적이었던지 나와 친구들은 남은 학기 내내 두고두고 춘천 기차여행 이야기를 되뇌다, 학력고사를 보고 나서 졸업 전에 다시 춘천으로 이별여행을 떠났다. 진학을 하든 재수를 하든 단짝 친구들과 헤어질 수밖에 없음을 서글퍼하면서. 두번째 춘천 여행에선 꽝꽝 얼어붙은 소양강댐에도 구경했고, 새하얀 눈밭으로 변해버린 공지천을 배경으로 사진도 여러장 찍었다. 열여덟살이던 당시 춘천은 나에게 짜릿한 일탈의 공간이었고, 어른을 동반하지 않고 내가 홀로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이었고, 여러가지 매력 넘치는 기차여행을 누릴 수 있는 여행지이기도 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나는 춘천 기차여행을 큰 자랑거리로 떠벌였지만, 전국 방방곡곡에서 상경한 친구들에게 겨우 두시간 남짓한 거리에 있는 춘천은 일탈의 장소이긴커녕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금세 다녀오거나 매일 통학할 수도 있는 지척의 도시였다. +_+ 그나마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서울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친구 하나가 동조해주는 바람에 눈이 펑펑내리던 어느날 충동적으로 다시 춘천행 기차를 탔던 날, 우린 눈이 너무 많이 쌓여 버스가 올라가지 못하는 소양댐을 굳이 걸어서 올라갔고 언 손을 호호 불며 맛없고 쓴 커피를 마시면서도 행복했다. 그날 처음 춘천 닭갈비라는 것을 먹어보았는데, 종일 눈에 젖어 덜덜 떨다가 들어가 먹어본 그 맛은 정말이지 잊을 수가 없었다.

그 뒤로도 몇년에 한번씩 춘천엘 간 적은 있지만 죄다 차를 타고 갔기 때문에, <춘천가는 기차>가 상징하는 춘천여행의 묘미와 추억을 더는 느껴볼 기회가 없었다. 완행열차 비둘기호는 사라져버렸어도 언제고 한번 꼭 기차를 타고 춘천엘 가봐야지 막연하게 마음은 먹었지만, 강원도 여행길에 일부러 들르지 않는 한 춘천 자체를 찾아갈 일도 아예 없는 편이어서 춘천은 점점 내 추억의 창고에서도 깊숙한 구석쪽으로 내몰리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러던 차에, 낭보가 들려왔다. 판화가인 막내고모가 춘천에서 열리는 강원아트페어에 전시를 한다는 소식이었다. 기차여행은 못하겠지만 간만에 춘천 땅도 밟아보고 고모 그림도 보고 닭갈비도 먹고 일석삼조, 일타삼피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그래서 지난 7일, 왕비마마를 모시고 춘천으로 달려가는 마음은 당연히 설레고 들떴다. 아직 철은 이르지만 가는 길에 가평 찰옥수수도 사먹을 생각을 하면, 막히는 길쯤은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왕비마마와 공주 일행이 납시었는줄 온 세상이 알았는지 전날엔 미치도록 막혀 되돌아가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는 춘천행 국도도 뻥 뚫려 오히려 병목현상이 나타나는 곳마다 서 있는 옥수수 장수들을 만나는 게 어려울 정도였다. 비가 오락가락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뜨겁고 매운 닭갈비를 먹기에 딱 좋은 날씨여서, 이번 춘천 여행에선 정말로 눈과 입과 위 모두 흐뭇하게 대접받고 돌아올 수 있었다. 서울에서도 가끔 닭갈비를 사먹긴 하지만, 역시 닭갈비는 춘천에 가서 먹어야 제맛이란 진리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겠다.
또 언제 춘천엘 가게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린시절 일탈의 공간이었던 춘천에 처음으로 가족들을 동반하고 간 이번 여행의 의미는 또 다른 추억의 겹으로 남아 돌이킬 때마다 흐뭇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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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에 전시회 시작됐을 때 연일 관람객이 바글거린다는 소식을 듣고서 나는 인파가 뜸해지길 바라며 꽃과 신록이 아름다운 계절에 소풍삼아 예술의전당에 가리라 마음먹었다. 3월엔 클림트 전을 보고 나온 지인 모녀를 만나러, 4월엔 카쉬 전을 보러 예전에 가기는 했지만 정작 클림트전은 못보고 조바심만 내고 있었는데, 어느덧 달력을 보니 이번주 금요일이면 전시회가 끝난다고 적혀 있었다. 정신머리 없는 내가 못미더워 밀린 숙제처럼 탁상달력에 적어놓고도 마지막 주까지 버티다니. 참 한심스러웠지만 아예 놓쳐버린 것보다는 낫다고 여기며 지난 화요일 잠을 줄여 헐레벌떡 구경을 다녀왔다.
관람료도 비싼 대규모 기획전시를 찾아다니는 건 자본의 논리에 잠식당한 문화산업에 편승하는 짓이니 지양해야한다고 익히 들었어도, 그림구경 욕심에 눈이 어두워져 늘 그 장단에 춤을 추고 있긴 하지만 이번엔 특히 마음이 찜찜했다. 평일 오전엔 원래 한가로운 아줌마 관객들이 미술관에 많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사람들이 어찌나 많던지! 입구부터 줄을 서듯 두겹 세겹으로 그림앞에 둘러 서 있는 사람들 사이로 안내직원들이 소리를 쳐댔다.
"다른 전시실 먼저 둘러보십시오! 안쪽으로 가시면 빈 공간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다른 전시실도 한가롭게 그림 하나를 오래 감상하는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곳은 없었고 끊임없이 사람들과 부딪치고 시야를 방해받고 누군가의 발을 밟거나 밟혀야 했다. 그동안 관람객이 어찌나 많았는지 전시 팸플릿도 다 떨어졌을 정도이니 오죽할까. 미리 준비된 게 다 떨어졌으면 다시 인쇄를 해야 마땅할 텐데, 아무리 마지막 주에 뒷북관람을 하는 관객이로서니 대놓고 푸대접을 받는 듯한 기분은 영 가시질 않았다. 전시 주최사인 동아일보사는 반성하라!
게다가 저 포스터에도 들어있는 <유디트I>을 제외하면 유명 작품들이 거의 오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마음의 준비를 했는데도 실망감은 줄지 않았다. 그나마 <베토벤 프리즈> 벽화와 정사각형 캔버스가 인상적이었던 풍경화를 직접 본 것으로 관람료 본전은 뺀 거라고 애써 위로하고 돌아왔는데, 기막히게도 그 <베토벤 프리즈> 원본은 오스트리아 박물관에 있고(현재도 전시중이라고 ㅠ.ㅠ) 훼손을 염려하여 한국에 보낸 건 복제본이란다. 완전 사기당한 기분!! 나만 몰랐던 것인가??

물론 전시 끝나기 직전이라 더욱 복잡했을 시기에 그림을 보러간 건 순전히 내 잘못인 걸 잘 안다. 대작들은 많이 없는 대신 드로잉과 뜬금없는 디지털영상사진이 더 많아 속상했지만 그렇다고 괜히 보러갔다고 후회를 한 건 아니었고, 보길 잘했다는 생각은 확실하지만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더라는 속담이 어김없이 들어맞는 요란스런 거대자본형 전시에 머릿수를 보태준 것이 찜찜하다는 얘기다. 암튼 이러저러한 투덜거림은 전시회 자체에 대한 것이고, 다른 화가들에 비해 큰 애정을 갖고 있진 않았던 클림트에 대해선 이참에 조금이나마 관심이 생기긴 했다. 클림트와 황금빛 색채는 뗄레야 뗄 수도 없는 것이지만 나는 <키스>나 <포옹>, <유디트> 같은 그의 그림들이 너무 화려해서 오히려 눈쌀을 찌푸리곤 했다. 뭘 그렇게 유난스럽고 번쩍거리게 드러내나 싶은 무식의 잣대를 들이대고 있었던 건데, 이번에 극사실주의 기법으로 거의 사진처럼 묘사한 그의 초기작부터, 이미 대가로 칭송받던 시기에도 수없이 연습을 거듭한 드로잉과 스케치 작품, 중년 이후에 시도한 인상파 풍의 풍경화를 실제로 보니, 책과 화집에서 <읽어낸> 느낌과는 여실히 달라 나도 모르게 입이  헤벌어졌다. 살아생전 인정받지 못하여 늘 가난하고 힘겨웠으며 유명 화가들의 그림들을 따라 모사하고 연습하던 고흐의 그림들이 상대적으로 아마추어 같은 노력의 과정을 진하게 풍긴다고 한다면, 클림트는 천재적인 자기 재능을 거리낌없이 온갖 방식으로 시도해본 노련함과 여유가 강렬하게 뿜어나왔다. 클림트의 황금빛 찬란한 작품에서 평범한 이들을 약간 움츠러들게 만드는 천재 특유의 오만함을 (경외심과는 별도로) 느끼는 건 순전히 나만의 편견일 수도 있겠는데, 하여튼 나는 그런 색다른 인상이 신기했다.

그림전시회를 보고 나와서 소박한 의식을 거행하듯 천원짜리 엽서 몇장을 사며 우리나라 업자들의 그림 인쇄술이 조악하다고 늘 불평했던 것 같은데, 이번 클림트전은 아예 그림 엽서와 카드, 복사본 그림 따위를 독일에서 수입했더라. 지금까지 그런지는 몰라도 컬러 인쇄술은 독일이 가장 앞섰기 때문에 고가의 화집 같은 건 독일에서 만든 걸 사라고 익히 들어왔는데, 색감이 확실히 선명하긴 해도 <Made in Germany>라서 작은 엽서 한장에 3천원, 5천원씩 하는 걸 보며 또 한번 내 입에선 불평이 터져나왔다. 젠장!
오스트리아엘 간다 해도 만나볼 수 없는 <처녀>와 <친구들> 엽서를 어렵사리 한장씩 고르고, 실물 알현의 영광을 누린 <아담과 이브> 타일 자석을 받아들고 흐뭇하긴 했어도 이번 전시의 노골적인 상업성은 성토하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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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생각해도 저 영화 제목은 참 잘도 지었다.
과천 현대미술관과 동물원을 동시에 떠올리면 자연스레 우리도 영화 찍는 기분이 드니까.
가까운 미술관은 더러 기웃거려도 과천까지 가는 건 제법 큰 걸음이라 생각했는지, 영화 찍는 기분으로 미술관과 동물원을 한쾌에 둘러볼 작심을 한 건 돌이켜보니 무려 십수년만이었다. 소풍가는 아이처럼 기린도 보고 미술관 구경도 하자고 조르던 지인과의 약속을 한 달이나 질질 끌다 전격적으로 어제로 날을 잡으며, 더 늦어지면 너무 덥고 냄새나서 동물원 구경하기 어려울 거라는 위기감을 느꼈는데, 여름날씨를 방불케 하는 어제 기온은 이미 너무 더웠다. 좀 더 일찍 올 것을 그랬다고 후회하면서도 5월의 신록이 하도 아름다워 그늘로 짚어다니며 기뻐할 수 있었으니 후회는 없다.
그 옛날에도 상설전시 중이었던 백남준의 <다다익선>은 그대로였는데, 그 옆 벽엔 새로이 강익중의 <삼라만상>이 빼곡하게 뒤덮여 있었다. 25년째 이어지고 있다는 손바닥 반만한 나무판자 그림과 조형물들은 아이들 장난 같은 모양이 하도 많아 특히 아이들이 좋아하겠다 싶었다. 20년 넘게 6만 5천개나 된다는 나무조각을 하나하나 작업했을 화가의 끈기가 놀랍다. 나 같으면 짜증내며 중간에 내팽개쳐버렸을 텐데... ^^

사실 우린 이 중앙 전시실보다는 층층마다 마련된 우리나라 근대미술 작품들을 다시 보려고 했던 것인데, 교체전시를 하는지 기대했던 그림들을 만날 수는 없었다. 그나마 지난번 덕수궁에서 본 근대미술 걸작전 그림들을 몇 점 찾아내곤 뿌듯해 했으나, 나로선 영 이해도 못하겠고 훌륭한 줄도 모르겠는 현대 추상미술품들이 대부분이라 새삼 내가 왜 과천 미술관엘 십수년만에 왔는지 실감되었다. 미학적인 심미안 따위를 갖추지 못한 내 눈엔 추상적인 현대 미술품들이 죄다 젠체하는 화가들의 자기자랑일뿐 당최 '아름다운' 예술품이란 느낌이 안드니 어쩌겠나. 심지어 백남준 선생의 그 유명한 비디오 아트 작품도 난 그리 뛰어난 줄 정말 모르겠다. ㅡ.ㅡ;

이렇게 찍으니 예뻐보이는 것도 같고...

내눈엔 명멸하는 브라운관의 화면이 이루는 아름다움보다 작품에 뽀얗게 앉은 먼지가 더 눈에 들어오고 브라운관 아래 찍힌 제조업체 로고가 더 눈에 들어오는 걸 어쩌라고!

백남준과 강익중의 두 작품을 같이 전시해놓은 기획을 <멀티플 다이얼로그>라고 이름 붙였던데, 아쉽게도 나는 그 안에서 다양한 언어교류의 느낌을 받는 대신 새로 지은 건물이나 갓 도배한 집에서 나는 매캐한 본드 냄새 때문에 눈이 따가웠다. ㅎ
기획전시로 인도현대미술전을 하고 있던데, 역시나 현대미술품이라니 굳이 2천원씩이나 내고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고, 2, 3층 전시실 난간에서 내려다 보이는 코끼리 조각상과 금빛 오토바이 구경만으로도 우린 흡족했다. 

주린 배를 약소한 과일로 달래고 얼른 동물원으로 이동한 뒤에 허겁지겁 늦은 점심을 먹고나서 돌아본 서울대공원 동물원은 그새 참 많이 달라진 것 같았다. 못보던 동물도 많고(특히 아프리카 동물들!) 이름도 외기 어려운 신기한 녀석들을 건성으로 보며 감탄을 했는데 뭐니뭐니해도 나는 동물원에서 기린구경이 제일 신나고 즐겁다. 길쭉길쭉 늘씬하고 우아하게 돌아다니는 걸음걸이도 그렇고, 마스카라를 칠한 듯 짙고 기다란 속눈썹도 그렇고, 아래턱을 좌우로 요란하게 움직이며 풀잎을 씹어대는 모양새도 그렇고... 기린사 앞에 전망대도 높이 올려 바로 코앞에서 먹이를 먹는 녀석들을 구경하고 사진도 찍게 해놓아 더더욱 탄성을 내지르며 한참을 지켜보았는데, 생김새부터 정말 볼수록 신기하지 않은가! 게다가 안내판에 적힌 글을 보니 우리 앞에서도 끊임없이 풀잎을 씹어대던 기린은 원래 하루 12시간 동안 내리 먹이를 먹는 반면, 잠은 틈틈이 짬짬이 눈을 감으면서 고작 하루 20분밖에 자지 않는단다! 켁...

기린 무늬의 아름다움을 새삼 실감

기린 뿔 두갠줄 알았는데 세개더라

하마의 저 똥똥하고 귀여운 자태!


다리 아프고 덥다는 핑계로 사자랑 하마 코끼리, 바다사자 빼고 다른 동물들은 셔틀버스 타고 차안에서만 대충 훑어본 터라 찍은 사진도 별로 없다. 사자 같은 녀석들은 어차피 가까이 찍을 수도 없어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지만.
평일인데도 미술관, 동물원 모두 사람들이 꽤 많아 조금 놀랐다. 주말엔 얼마나 더 바글거릴까. 벌써부터 퀴퀴한 동물냄새가 진동을 하는 동물원은 앞으로 또 십년쯤 있어야 가볼 마음이 생길 듯하지만, 숲과 나무가 싱그러웠던 미술관옆 산책로는 날이 흐린 날, 아니면 비가 오는 날 또 가보고 싶은 욕심을 품고 돌아왔다. 평일 퇴근시간과 맞물리는 바람에 돌아오는 길은 죽도록 막히는 괴로운 경험이었지만, 이 하루의 행복한 나들이로 부디 일주일은 나의 심술이 잠잠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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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의 매력

놀잇감 2009. 4. 16. 17:35

내가 사진 보러 가는 걸 그림 보러 가는 것만큼 열광하지 않는 이유를 생각해보니, 사진에 대한 개인적인 무식과 더불어 도구의 보편성 때문인 것 같다. 물론 유명 사진작가의 작품은 아무나 흉내낼 수 없는 순간 포착의 예술이지만 여러장 <뽑을> 수도 있어 아무래도 그림보다는 희소성이 떨어지고(판화도 그러하지만;;), 사진의 질은 하늘과 땅 차이라 해도 예나 지금이나 카메라를 눌러 결과물을 갖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란 편견이 은근히 깔려있는 게 아닐까.
물론 앙리-카르티에 브레송, 윌리 호니스(왜 '로니스'로 표기하지 않았는지 지금도 궁금!), 요번에 본 요섭 카쉬의 사진들을 보면 확실히 한숨이 저절로 새어 나오게 만드는 <아우라> 같은 것을 뿜는다. 그런데 특히 나에게 그런 작품들이 강한 인상을 남긴 이유는 워낙 거장들의 사진이라는 사실 이외에도 죄다 필름 카메라로 찍은 흑백이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컬러 사진 전시회를 보러 갔던 기억도 더러 있지만, 기억에 남은 컬러 사진은 작년 제주도에 갔을 때 들렀던 두모악 갤러리에서 본 김영갑의 사진들뿐인 것 같다.
하기야 흑백 사진들만 있으리라 기대하고 일부러 흰색과 회색, 검정 색깔로 골라입고 나섰는데(간만의 외출이라 그냥 혼자만의 놀이 같은 치기가 들었다) 이번 카쉬 전에는 뜻밖에 선명한 빨간색이 인상적인 소피아 로렌의 사진도 한장 만나기는 했다. 그래도 여전히 카쉬의 사진들은 강렬한 흑백이 제격이란 느낌이다. 그리고 상상력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나 여운 같은 것이 느껴지는 흑백이라서 더욱 보는 이의 시선을 오래 잡아끄는 것이 아닌지. 전시장 끄트머리에 함께 전시되었던 한국 인물사진 5인전의 사진들을 봐도 같은 생각이었다. 이제는 돌아가신 장욱진, 오상순, 백남준 선생 같은 인물사진도 그렇고 현존 인물들의 사진도 그렇고 컬러였다면 누군가의 앨범 어디서나 흔하게 보는 느낌으로 남았을 텐데 흑백이라 한번 더 빛과 그림자의 오묘한 조화를 들여다보게 되는 듯했다.

그건 그렇고.
오드리 헵번이야 워낙 아름다운 배우지만, 카쉬는 모든 인물을 예쁘고 잘생기게 찍는 작가인가 뭔가, 유치한 의문이 들 정도로 모든 인물의 아름다움을 이끌어낸 듯한 사진들을 보면서 엉뚱하게도 나는 요즘 사진찍히기를 두려워하는 내 마음을 바꿔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드리 헵번과 케네디 부인 시절의 재클린, 카쉬의 아내들, 공주 시절의 엘리자베스 여왕처럼 젊은 모델의 사진들도 좋았지만, 나는 각자 세월의 무게를 얼굴에 담고 있는 중년 이후나 노년의 인물사진들이 어쩐지 가슴에 와 닿았다. 물론 측근들의 카메라에 담길 내 모습이 카쉬의 모델들처럼 아름답게만 포착될 리 없고, 더욱이 흑백도 아니라 적나라하게 온갖 허물과 세월의 흔적이 담기겠지만 그래도 그 모습이 내가 살아가는 과정의 단면임을 인정하는 편이 현명하지 않겠나 싶었던 거다. 몇년 새 팔자주름이 깊어지고 처진 눈꼬리는 더욱 아래를 향하고 볼살도 힘없이 내려앉았음을 눈치채는 것은 확실히 본인 뿐인데, 어차피 더 젊어질 수도 없는 마당에 사진 찍히기를 두려워하는 건 비겁한 외면이다.
그렇다고 당장 카메라 앞에선 입과 뺨에 경련이 일어나는 어색함이 가실 리 없겠지만, 노년을 살고 있을 무렵 나의 중년을 추억할 흔적들을 애써 거부하진 말아야겠다는 얘기다.

예술의 전당이 워낙 멀다는 핑계로 아직 클림트전도 안보고 있었던 터라 누가 꼬드기지 않았다면 굳이 보러갈 엄두를 내지 못했을 텐데 그래도 보길 잘했다 싶은 전시였다. 입장료도 비교적 저렴한 8천원. 다 둘러보는데 1시간도 걸리지 않았으니 적절한 가격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도슨트 설명도 있던데 짜증스러운 목소리의 도슨트 아저씨는 감상에 참 부적절한 느낌이라, 피해다녀야 했다. 사진마다 인물과 에피소드 설명이 꽤 자세히 적혀 있어서 굳이 도슨트 필요 없겠던데 때로는 과잉친절이 공해임을 새삼 실감. 전시는 5월 8일까지 한가람 미술관 3층에서 한다. 엽서도 팔던데 한장에 무려 2천원. 인쇄 질에 비해 비싸다고 아무도 사지 않았다. 차라리 저 아름다운 오드리 헵번이 담긴 포스터를 팔지 그러냐고 벨로와 파피와 함께 투덜거렸다. 브레송 사진전때 <얻어온> 포스터는 4년째 내 방문을 장식하고 있건만...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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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 마지막날

놀잇감 2009. 3. 23. 18:00

늘 궁금했다. 미술관 전시회의 마지막 날엔 평소보다 관람객이 많을까, 적을까?
대부분 마지막날은 주말이므로 당연히 사람이 많을 것도 같지만, 또 대대적인 홍보가 뒷받침되지 않은 전시라면 오히려 한적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마지막 날이라고 개인 갤러리에서 열리는 전시회처럼 폐관시간 되기도 전에 오후쯤 그림을 회수해 버리는 건 아닌가 걱정이 들 정도였다.
단 한번의 경험으로 함부로 단정지을 순 없겠으나, 어쨌든 어제 나는 미술관 전시회의 마지막날이 꽤나 번잡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제는 최근에 내가 보고 감동했던 두 개의 전시회, <한국근대미술걸작전>과 <퐁피두센터 특별전>이 공교롭게 나란히 끝나는 날이었다. 서점에서 찾아볼 책도 있고 하여 겸사겸사 시내 외출을 준비하며 나는 며칠째 이어온 고민에 종지부를 찍었다. 두 전시 모두 한번 더 보고싶은 욕심이 들기는 했지만, 퐁피두센터 그림들이야 언제고 파리에 가서 볼 수 있을지 몰라도(재수없게 하필 그 시기에 다른 나라에 빌려주지만 않는다면;;) 유족소장품들이며 개인소장품이 많은 한국 근대미술 걸작들을 이렇게 대거 볼 수 있는 기회는 내 생전 다시 없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늦은 점심을 먹고 집을 나설 땐 그림을 먼저 보고 나서 서점에 들러 책과 자료를 찾아보겠다는 계획이었으나, 버스를 타고 시청앞을 지나며 보니 덕수궁 대한문 앞엔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마침 수문장 교대식 시간이라 구경꾼들이 많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뜻밖이었던 건 대한문 앞부터 줄지어 선 사람들이 담장을 따라 거의 영국대사관 입구까지 늘어서 있다는 점이었다. 궁궐 입장객을 제한하기 때문인지 단순히 매표소에서 표를 사기 위한 줄인지 확인할 순 없어도 내가 보기엔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몇명씩 문안으로 들어서는 듯했다. 나는 계획을 바꾸어 먼저 서점으로 가 일부러 늑장을 부리며 볼일을 죄다 본 뒤 6시가 다 돼서야 덕수궁으로 돌아왔고, 기다림 없이 천원짜리 표를 사 대한문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지난번엔 비가 내렸고 카메라를 가져갈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이번엔 똑딱이일지언정 부러 마음을 먹고 디카를 들고갔던 터라 여기저기 몇장 눌러대곤 석조전부터 먼저 들렀다. 또 언제 석조전에 들어가볼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다는 조바심이 첫번째 이유이기도 했지만, 현대미술관 측에서야 그곳을 동관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상일지 몰라도 본래는 고종이 신식 건물로 세운 석조전이 먼저이고 미술관은 나중에 들어선 것이니 미술관 서관 동관으로 칭하는 게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서양의 건축양식 대로 서양인이 설계한 건물이라 외국엘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건물이지만, 우리 궁궐 마당에 자리잡은 석조전은 느낌이 또 새롭고 주변 건물과 안어울리는 것 같으면서 은근히 어울려 멋진 자태를 자랑한다. 건물한테도 그런 말을 붙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잘 생겼다>는 느낌을 받는 건 나뿐이련가.

나중에 국립현대미술관엘 가면 또 볼 수 있겠지만 그래도 언제 봐도 눈이 즐거운 장욱진의 그림들을 유심히 감상하고, 다시 못볼 확률이 높은 개인소장품들을 남달리 찾아본 뒤 나는 미술관 본관으로 향했다.
뜻밖의 놀라움은 계속 이어졌다. 보통은 맨 마지막에 아트숍에 들러 도록이나 엽서나 기념품을 사는데, 어젠 이상스레 아트숍부터 찾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미술관 폐관시간보다 아트숍 문닫는 시간이 더 빠르면 어쩌나 걱정이 들면서.
그러고는 드디어 첫 전시실에 들어섰는데, 낯익은 얼굴이 눈에 띄었다. 지난번에 전시를 함께 본 후배였다. J야! 반갑게 부르니, 마지막 날이라 어떻게든 그림들을 한번 더 보려고 서둘러 동생과 함께 달려나왔단다. 어떻게 그런 우연이...
나야 혼자 갔지만 후배는 일행이 있으니 감상 잘하라며 금세 헤어졌지만, 우린 도슨트의 설명이 시작되자 자석에 이끌리는 철가루처럼 다시 그앞에서 다시 합류했다. 주말엔 아예 도슨트 설명이 없는 서울 시립미술관과 달리, 역시 국립이 다른 건지 덕수궁 미술관은 주말에도 전시설명이 있었다! 그걸 모르긴 했지만 알았대도 지난번에 이미 도슨트의 설명을 들었기에 이번엔 홀로 그림만 감상할 생각이었는데, 도슨트가 처음 설명을 시작하는 그림이 우리 때와 달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어제 전시의 마지막 설명을 맡은 도슨트는 지난번 우리가 구경왔을 때와 같은 사람이었다. 덕수궁 미술관을 자주 가면 다른 전시에서 과거에 만난 도슨트를 보는 일이 없지는 않지만, 특히 그 도슨트는 지난번 비오는 날 전시 설명때도 비가 와서 석조전엘 가지 못했는데도 정해진 1시간을 넘기고도 해줄 말이 계속 남아 마이크를 끄고 살살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를 들려주어, 역사상 최고의 도슨트라는 생각에 이름이라도 알아두면 좋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나중에 결국 우리는 팬클럽이라도 결성해야겠다면서 <이애선 도슨트>라는 그분의 이름을 동료들에게 알아냈고, 이왕이면 과천이나 덕수궁 미술관에서 또 그 분의 설명으로 전시를 보고 싶다는 소망을 품었다. ^^)
전시를 자주 다녀보면 매 설명 때마다 녹음기를 틀듯 똑같은 그림 설명을 반복하는 도슨트가 있는가 하면, 그날의 느낌에 따라서인지 아니면 반복해서 찾아오는 관객들을 위한 배려인지 그때그때 다른 설명을 하는 도슨트가 있다. 같은 전시를 두세번씩 다니다 보면 그런 것도 알 수가 있는데, 좋은 도슨트를 만나는 것도 그저 운이려니 여기곤 했지만, 역사적인 전시 마지막날 그곳도 마지막 전시설명에 그런 놀라운 도슨트를 또 만나다니. 복터졌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원래도 열정적인 설명을 하는 분이었지만 마지막이라는 의미가 덧붙여진 때문인지, 그 도슨트는 마치 학교가 마지막으로 문을 닫기 전에 어떻게든 아이들에게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려고 안간힘을 쓰는 훌륭한 선생님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열심이었다. 학교가 진정한 교육기관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평가와 행정 기관으로 전락해버린 요즘엔 도저히 만날 수 없으며, 예전에도 지극히 드물었던  존경스러운 선생님이 떠올랐달까.

다시는 못볼지 모른다는 아쉬움을 잔뜩 담아 또 다시 미술관을 둘러보며 새삼 여러 근대 화가들의 인생과 배경을 들으려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일제 강점기, 식민지 교육을 담당하러 온 일본인 미술 교사들은 놀랍게도 프랑스에서 유학하며 유명 서양화가의 사사를 직접 받았거나 대학에서 그런 스승들의 화풍을 배우고 일본내 수상경력도 화려한 진짜 화가들이었다. 그런 화가들이 일개 식민지 보통학교에 미술선생으로 부임하여 요즘 따지면 고등학생에 해당하는 아이들에게 너희도 화가가 될 수 있다고 가르쳐 정말로 화가를 만들어내다니... +_+
물론 천재적인 재능을 갖춘 사람들이기에 능력이 발굴되긴 했겠지만, 요즘으로 치면 중학생이 되도록 붓 잡는 법도 몰랐던 조선 아이들에게 일본인 교사가 정규 미술 수업 시간에 그림을 가르쳐 3, 4년 안에 조선미술전람회에 뽑히는 화가로 만들었다는 얘기가 아닌가. 
워낙 일본인들 가운데 미를 추구하여 보존하고 감탄하고 존경하는 성품을 갖춘 이들이 많은 것은 알고 있었지만(그래서 수많은 우리나라 고미술품이 일본에 팔려갔겠지만;;) 어쨌거나 식민지인 식민국민의 구분을 떠나 스승과 제자로 예술가로 관계를 맺은 그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로선 계속 신기하고 놀랍고 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었다. 

일제 강점기 때는 친일파로 손가락질 받다가, 해방후엔 좌파였다가 결국 월북하기도 하여 좀체로 이해하기 힘든 정치행적을 보이기도 한 근대화가들의 존재까지 알게 된 이번 전시는 그야말로 나에겐 소중한 경험이다. 고흐, 마티스, 샤갈 타령은 수시로 하면서 정작 우리나라 화가들은 그저 뭉뚱그려 생각했던 나의 태도도 반성할 겸, 근대미술사 책도 좀 읽어봐야겠고 <바람의 화원>으로 살짝 불붙었다 식어버린 옛날 그림들에 대한 관심도 지펴볼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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