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에 해당되는 글 76건

  1. 2012.06.20 서도호 <집속의 집>
  2. 2012.01.14 올 첫 그림 구경 5
  3. 2011.09.27 휘트니미술관전 13
  4. 2011.06.22 오르세미술관 전 11
  5. 2011.02.26 장욱진 20주기 회고전 4
  6. 2010.12.31 2010 한해 정리 16
  7. 2010.12.24 샤갈전 8
  8. 2010.11.21 장 뒤뷔페 전 6
  9. 2010.10.10 아시아 리얼리즘 展 10
  10. 2010.04.26 사흘간의 일본 여행 둘쨋날 23

거의 해마다 연초가 되면 그해 예정되어 있는 '볼만한 전시' 목록을 포스트잇에 적어 벽에 붙여놓는다. 그도 못 미더워 탁상달력에도 표시를 해둔다. 게으름부리다 놓치지 말라는 나름의 독촉질을 미리 해두는 거다. 그런데도 올해는 좀처럼 굼뜬 엉덩이를 들기가 쉽지 않았다. 작년말부터 3월초까지 했던 <하늘에서 본 지구> 특별전은 차일피일 벼르다 정 보고 싶으면 나중에 책으로  사보지 뭐, 그랬고,  1, 2월에 있었던 <김환기 회고전>은 나중에 '환기 미술관'에 가서 보면 된다고 스스로 핑계를 대며 건너뛰었고, 3-5월에 열린 <한국의 단색화> 전은 마감일정에 쫓기는 중인데다(언제 안 쫓기는 적 있었냐? 쳇;;) 과천까지 가야한다니 더욱 떨치고 나서기가 힘들어 놓치고 말았다.

 

그 다음으로 적어놓은 것이 서도호의 <집속의 집> 전시. 서도호에 대해서 내가 뭐 쥐뿔이라도 알았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았는데도 가야겠다고 마음 먹었던 것은 '한옥 위주 설치미술'이라는 문구 때문이었다. 설치미술보다는 회화쪽을 더 좋아하지만 한옥이라니! 무조건 가야해, 싶었다. 전시일정은 3월 22일부터 6월 3일까지 리움미술관. 4월쯤에 보러가면 딱이겠다 계획했던 이 전시를 결국 나는 끝나기 겨우 며칠 전에야 겨우 보고 왔다. 그러기까지 이러다 기회를 놓치고 말 것 같아 어찌나 조바심을 쳤는지 원.

 

뜨거운 한옥 열풍 덕분인지, 리움미술관에서 홍보를 잘한 건지, 나만 몰랐을 뿐 서도호 작가가 워낙 유명한 예술가인 건지, 어디나 '촬영금지'를 원칙으로 삼는 우리나라 미술관에서 드물게 사진 촬영을 허락한 전시라 특히 입소문이 힘을 발휘했기 때문인지, <집속의 집> 전시는 시종일관 호황이었대고, 당연히 마지막주 평일에도 사람들이 드글드글했다. 뉴스를 보니 리움에서 역대 최고의 관객수를 자랑했던 앤디 워홀 전시에 버금가는 사람들이 찾았다나 뭐라나. 역시... 한옥 좋아하는 건 한국인은 나뿐이 아니었다. 대개 설치미술 작품 전시는 회화 작품보다 관객이 적게 마련일 텐데... 놀라워라.

 

암튼 전시를 보러가기 전부터 방송에 소개된 전시장과 작품 설명, 블로그 사진들을 꽤 많이 봤던 터라 정작 가서 실망하면 어쩌나 하는 마음이 마음 한구석에 없지 않았는데, 다행히도 그건 기우였다. 실제로 보지 않고선 여간해서 그 느낌을 실감할 수 없는데도 너도나도 카메라를 들이대는 사람들의 심정이 나도 충분히 이해가 되더라니까!  

사진은 전시장 입구에 매달려 있는 <투영>이란 작품. 철사로 틀을 잡고 한복 갑사 같은 천으로 한옥의 문을 형상화해 매달아놓은 형국인데, 어우 내가 딱 좋아하는 '파란색'이 아닌가. 다른 블로그에서 이 작품사진을 접하며 밖에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어 미술관 유리창 벽에 빗물이 맺혀 있다면 더욱 운치가 있겠다고 말도 안되는 상상을 했었으나, 내가 보러 간날은 해가 쨍쨍했고 설사 비가 내렸다 해도 건물 구조상 통로 옆면이라 저 유리창에 빗물이 맺힐 수는 없었다. 혹 천창에 빗물이 떨어질 수는 있었을지 모르겠으나...

 

암튼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1층 전시장으로 내려가며 곧장 내 눈을 사로잡은 건 역시나 철사와 실크로 탄생시켜 천장에 매달아놓은 한옥 <서울집>이었다. 청덕궁에 있는 연경당을 본떠 작가의 아버지가 지었고 실제로 작가가 어린시절 살기도 했다는 한옥을 재현한 것이라고. 모든 작품이 섬세함과 꼼꼼함의 궁극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정교한 문창살은 물론이고 복잡한 구조의 분합문까지 완벽하게 만들어 놓았다. 이 정도로 재현하려면 한옥 건축에 대해서도 일가견이 있을 뿐만 아니라 설계도 잘 알아야할 것이다. 바느질이야 다른 전문가가 했다지만, 존경심에 감탄만 발할 뿐이다. ㅠ.ㅠ  

시카고 전시 때 영상을 보니 관객들이  이 작품 아래 바닥에 드러누워 서까래도 올려다보면서 실제로 한옥에 누운 듯한 기분을 체험해보던데, 용기가 없어서 차마 나는 그래보지 못했다. 그저 구석구석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고 이런 집에 살았던 작가의 추억을 부러워하다 사진으로 찍어 남기고...

 

이 인상적인 한옥의 한쪽 벽면은 또 다른 작품으로 탄생했다. 이름하여 <북쪽 벽>. 

서도호, [북쪽 벽]

바글바글한 사람들이 잠깐 주변을 비운 틈을 타 이 사진을 찍어오느라 한참을 기다려야 했는데, 투명하게 비치는 이 작품 앞뒤로 사람들이 한가롭게 걸어가는 모습을 보니 옛날 이 집에 살았을 사람들이 안에서 거니는 것으로 보아도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게 바로 설치미술의 묘미겠거니.  바람이 불면 하늘하늘 연기처럼 흔들릴 것만 같은 느낌의 <서울집>(재질이 실크라고 하니까 더욱 그렇게 느껴졌을 수도;;)과 달리 이 작품은 폴리에스터와 철사로 구현된 것이라 만지면 까슬까슬한 모기장 느낌이 날 것도 같았으나 확인할 길은 물론 없다. ㅋ

 

순전히 내 느낌이 그렇다는 것이고, 암튼 작품 재질 때문에 손상을 우려해 브로셔도 못 갖고 들어가게 하는 (아마도) 실물 크기의 <뉴욕집>은 콘센트 하나 경첩 하나까지 일일이 천과 바느질로 정교하게 표현해놓아, 그 탄생 과정을 상상하면 숨이 막힐 정도였다.

 

하지만 한번에 다섯 명만 작품 '안'에 들어가 관람을 할 수 있는 탓에 15분쯤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던 이 <뉴욕 집>보다 나는 그 뉴욕 집이 있는 건물의 전면과 현관을 표현한 작품이 더 마음에 들었다. 작품제목에 348이라는 저 주소가 들어갔던 것도 같은데;; 하나같이 작품 제목이 벽이나 기둥 한 귀퉁이에 숨어있다시피 해서 일일이 찾아보며 다녔는데도 벌써 전시 다녀온 지가 한참 되다보니 많이 까먹었다. 흑...

아무려나 이 작품이 줄 한참 서서 구경한 <뉴욕집>보다 좋았던 건 내가 초록색보다는 무작정 파란색을 더 선호하기 때문만은 아니겠고, 어느 공간으로든  어느 공간으로든 들어가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문>에 대해서 원래도 좀 관심이 많다.

나의 한옥 열망에는 가로지른 빗장을 풀고 삐그덕 소리를 내며 열리는 솟을 대문으로 드나들고 싶은 욕망도 포함되어 있으니 말이다. 외국으로 공부하러 떠난 작가가 느낀 정체성의 혼돈과 공간적 이질감 때문에 특히나 <집속의 집>이라는 주제와 이런 작품들이 탄생했으니, 작품에서 유독 눈길을 끄는 여러 종류의 문들도 예사로운 소재는 아닌 것 같다.

작품이 허공에 붕 떠있으니 당연히 그렇겠지만, 현관 입구의 계단부터 정겹다기보다는 어쩐지 위압당하는 느낌을 받은 건 내 착각이었으려나?

 

 

2층으로 이어지는 전시에서도 인상적인 문이 하나 더 있었다. '리움버전' <문>이라는 작품으로, 방처럼 따로 마련된 전시실에서 그 문에 여러가지 영상물을 비춰 볼 때마다 느낌을 달리했다. 작품의 반대편에서도 볼 수 있고 둥근 아치 밑으로는 사람들이 드나들 수도 있게.

새들이 날아가고 매화가 피어나고, 노루가 지나가고, 시나브로 날이 저물고...

살아 움직이는 노루와 매화 그림, 서예 글씨체를 보며, 작가가 한국화를 전공했다니 직접 쓰고 그렸나보다, 완전 천재로구나 싶었는데 브로셔를 읽어보니 일본을 비롯해 다른 유명 작가의 작품을 차용한 거란다. 아시아 예술의 접목과 만남.. 이런 주제였던 것 같은데 브로셔를 벌써 홀랑 잃어버려 확인할 길이 없다. 결론은 2층 전시에서 이 작품 <문>이 제일 좋았다는 얘기. ㅋ

 

 

나와 달리 2층에서 가장 인기있는 작품은 꼼꼼함과 정교함의 승리라고 할 수 있는 <별똥별>이라는 작품이었으나, 재미있는 발상과 섬세함에 감탄하기는 했어도 역시 난 한옥!이 더 좋았다. ㅎㅎㅎ 

낙하산에 매달려 날아온 한옥이 영국 어느 건물에 부딪혀 망가진 모습을 일일이 아파트 소품 하나하나까지 축소해 만들어 놓았던데, 사진으론 도저히 그 사실적인 정교함이 찍히질 않는다.

 

영상물을 보니 영국 무슨 비엔날레에서 실제로 한옥이 서양 건물 두채 사이에 날아와 떨어진 것처럼 작품을 전시한 적도 있던데, 이건 그 작품의 축소판인 셈. 

 

그밖에도 작품의 탄생과정을 짐작할 수 있는 여러가지 평면도와 축소 모형, 빨간색 실을 풀분무기로 붙여 만든 듯한 작품도 있었으나 나는 다시 1층으로 내려가 한옥 작품들 주변에서 좀 더 서성거리다 돌아왔다. 앞으로도 <서도호 전시>라고 하면 지체없이 달려가 보게 될 것 같다.

 

 

어느덧 올해도 반년이 다 지나가려고 하는데, 돌아보니 이게 제대로 본 첫 전시인 듯하다. 이인성 회고전도 벌써 시작했으니 그건 놓지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하며, 마무리하는데 3주도 더 걸린 전시관람 후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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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첫 그림 구경

놀잇감 2012. 1. 14. 03:37

예술의 전당에서 저녁약속이 있어 갔었는데, 딱 10분 남는 시간에 지하에 있는 갤러리를 어슬렁거리다 뜻밖에 고흐를 만났다. ^^; 사실은 갤러리 입구 유리 전시실 안에 걸린 작품이 신기해서 들여다보고 있자니, <무료관람> 팻말이 눈에 띄었고 옳다구나 들어가는 순간 정면에 걸린 고흐의 해바라기가 나를 반겨주어 완전 횡재한 기분이었다.

여러 작가들의 최신작이 전시되어 있어 죄다 흥미로웠지만 고흐 추종자로서 역시 내 눈엔 다양한 고흐의 해바라기 작품을 패러디한 이승오 작가의 <교차된 결> 연작만 기억에 남았다. 모두 네 명인가, 다섯 명의 작가들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사람 얼굴과 눈빛을 조명으로 표현한 작품도, 미세한 철망의 음영으로 놀라운 인물 형상을 만들어낸 작품도 다 좋았으나,  아쉽게도 다른 이들은 이름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째뜬 언제까지 전시하는지는 모르겠으나 혹시 조만간 예술의 전당에 갈 일이 있으면 지하1층 갤러리7의 '무료' 관람을 놓치지 마시라! ㅋ

게다가 혹시나 해서 물으니 플래시만 터뜨리지 않으면 사진을 찍어도 된다니 금상첨화! 처음엔 고흐의 해바라기 작품 셋만 찍었다가 한바퀴 더 돌고 나선 앤디 워홀의 캠벨 수프 패러디도 찍고, 대표작인 듯한 (비슷한 작품이 입구에 걸려 있었다. 그림을 비스듬히 한쪽에서 보면 여인이고 반대편에서 보면 앤디 워홀의 마오쩌둥 모습인;;) 주름 작품(?)도 찍어왔다. 모두가 색색깔의 종이를 차곡차곡 접어 쌓아 만든 작품이었다. 작품 제목은 모두가 <교차된 결> 영어로는 <Layers>였고 재료는 paper stack이라고 적혀 있었다. 어떻게 염색한 종이를 접어 쌓고 끼워서 고흐의 꿈틀거리는 붓터치 느낌까지 이렇게도 정교하게 살려낼 수가 있는 지 원... 화가들의 창의성이란 암튼! 신기신기...

같은 작품을 오른쪽에서 본 모습

왼쪽에서 본 모습


내가 잘 몰라서 그렇지 이 여인들도 앤디 워홀의 작품 패러디가 아닐까나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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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트니미술관전

놀잇감 2011. 9. 27. 22:23

6월부터 시작해 9월 25일까지 석달도 넘게 한 전시를 끝나기 며칠 전에 간신히 다녀왔다. 처음엔 시간 많으니 애들 방학 끝나고 천천히 가지 마음 먹었다가 점점 갈까말까 망설이는 쪽으로 기울게 된 이유는 아무래도 <이것이 미국 미술이다>라는 전시 제목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누구 아이디어인지 모르겠으나 어쩜 이리도 오만하고 건방진 제목을 정했을까 공연히 빈정이 상했다. 아무리 휘트니 미술관의 역사가 유럽 미술 중심의 흐름에 반감을 품고 미국 화가들을 독려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고는 하지만, 거기서 겨우 80몇점 그림 빌려와서 보여주며 그게 미국 미술의 전부라고 큰소리칠 수가 있단 말인가? (미술관을 다 돌고 나서, 진짜로 내가 무식하기 때문에 궁금하여 던지고 싶었던 질문: 에게게... 정말 이게 미국 미술의 전부라고? -_-;)

가기 전부터 이미 고까운 마음이 들어서 그랬을 수도 있겠으나, 어쨌든 앤디 워홀과, 로이 리히텐슈타인, 에드워드 호퍼 딱 세 사람의 그림만 보고 와도 '본전'은 뽑겠다고 생각했던 전시회는 퍽 실망스러웠다. 현대미술과 추상화에 완전 무지한 내 탓일 수도 있고, 무조건 예쁜 그림만 선호하는 내 취향 탓일 수도 있으나, 아무튼 나는 그랬다. 앤디 워홀 작품도 어쩜, 수프 깡통이랑 세제 박스 같은 것만 두어개 가져왔더라. 리히텐슈타인 작품도 딱 두 점. +_+
<아메리칸 아이콘과 소비문화>를 주제로 한 방이었던가? 죄다 앤디 워홀 아류작 같고 그밥에 그나물 타령인 대중적인 상업 미술을 보며

로이 리히텐슈타인, [크리스털 그릇이 있는 정물] 1993.

난 아무 감흥도 일지 않았다. 리히텐슈타인의 경우도 <크리스털 그릇이 있는 정물>을 좋아하긴 하지만 뭔가 더 크고 새롭고 유명한 작품이 왔기를 바라고 있었던 모양이다.

오브제와 정체성, 오브제와 인식을 2, 3부로 꾸민 전시실에서도 특별히 마음을 끄는 작품이 없어 몇번이나 방을 돌아다녔어도 관람은 금세 끝이 났다. 휘트니 미술관 가면 반나절 내내 쉬지 않고 그림을 봐도 다 못보고 지친다더만 이게 뭐람! 쳇...

그나마 귀엽다 느꼈던 작품은 축소한 옷을 연결해 놓았던 빨랫줄(사진 못찾았다 ㅎ)과 찰스 레이의 <퍼즐병>.

찰스 레이, [퍼즐병] 1995.

영국에서도 이런 좁은 병안에 엄청나게 정교한 범선을 넣어놓은 작품 본 것 같은데, 대체 어떻게 일일이 조립을 하는 걸까? +_+

미국 현대미술이 일상생활에서 발견할 수 있는 물건과 이미지로 작품활동을 했다는 건 얼핏 알겠으나, 나는 그래도 뭔가 좀 회화스러운 느낌의 작품을 더 좋아한다는 걸 확실히 느꼈다.

오브제를 통해서 미국 현대미술의 역사를 보여주겠다는 것이 이번 전시의 기획의도였다는데(현대미술도 잘 모르지만 오브제 싫다규~!), 스스로도 좀 민망했는지 특별코너로 <20세기 미국 미술의 시작>이라는 주제로 마지막 방을 하나 꾸몄고 내가 알현을 바라던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은 바로 이곳에 걸려 있었다. 비록 호퍼의 그림을 딱 한점 볼 수 있기는 했지만, <해질녘의 철로> 그림 앞에서 나는 이미 지나온 3개의 전시실에서 쌓였던 실망감을 어느정도 풀 수 있었다. 사실 호퍼의 그림을 실물로 보는 건 처음이다. 그간 온갖 책에서 호퍼의 이름과 작품 설명을 만나며 정말이지 궁금했다. 화집이나 사진으로 보는 호퍼의 그림은 얼핏 (무식하다고 욕먹어도 할 수 없다 ㅋㅋ) 약간 <이발소 그림> 같은 느낌을 풍겼고, 인물이 등장하거나 안하거나 늘 황량하고 쓸쓸함이 물씬 묻어났다. 뭔가 아주 복잡하고 기구한 사연이나 황망한 이야기가 깃들어 있는 것도 같고...  어쩌면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들에서 풍기는 인상이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과 가장 잘 어울린다고 했던 누군가의 평론을 보아 생긴 편견 때문일수도 있겠다. 하여간 툭 트인 공간과 여백에서 느껴지는 막막함과 무심함이 호퍼 그림의 매력이라고 나름 상상하고 있었는데, 나의 상상과 어울리는 아름다운 그림을 만난 것 같았다. 
 

에드워드 호퍼, [해질녘의 철로] 1929.

이전까지는 모두 합해 30분도 안되는 시간 동안 휙휙 작품을 스쳐지나다가 호퍼의 이 그림 앞에서는 정말 넋이 빠진듯 한참이나 감상하고 서 있었다. 노을에 물든 하늘 빛깔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철로변이라는데 나는 이 그림을 본 순간, 문득 할머니, 할아버지 묘소가 있는 파주를 향해 자유로를 달리다 왼편으로 만나게 되는 한강변 철책과 군초소가 떠올랐다. 오래 전 무언가 속이 상한 일로 질질 눈물을 짜다가 통닭 한 마리랑 소주 한 병 들고 할아버지 할머니 무덤 앞에서 엉엉 눈물을 쏟은 뒤 돌아오던 길에 오른쪽 차창으로 이런 노을빛을 본 것도 같고...

암튼 결론은, 그래서 미술관을 돌아다니며 계속 입이 댓발쯤 나와 툴툴거리다가 마지막 전시실에서 위로를 받았다는 이야기다. ㅎㅎㅎ 마음이 좀 풀리니 처음엔 조악하게 입구에 재현해 놓은 복제본 작품사진 앞에서 사진 찍는 사람들 비웃던 마음도 잊고 나도 한 장 찍어오기까지... ㅋㅋㅋ

마리솔, [여인과 강아지], 1964

마리솔이라는 화가의 작품을 입간판처럼 입구에 세워놓았는데, 실제 작품에선 왼쪽의 저 개 머리가 '박제'라고 해서 좀 놀라고 으스스했다. -_-; 이 사진에서 흥미로운 건 오른쪽 위에 구멍을 뚫어 보이게 해놓은 소화전(?)이다. 전에도 이런 구도로 다른 작품 복제본 세워놓았던 것 같은데, 그 때도 저렇게 구멍을 뚫어놓았던 걸 기억한다. 매번 저것도 작품의 일부 같아 웃기다!







'본전' 안 아깝게 호퍼의 그림을 보고 또 보고 그러다가 미술관을 나왔으나 뭔가 문화생활이 덜 충족된 것 같은 기분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 또 한 바퀴 덕수궁을 거닐며 밤궁궐의 정취를 느껴보기로 마음을 먹었고, 그러고 나서야 흡족한 심정으로 대한문을 나설 수 있었다. 갈까말까 망설여지는 전시회는 아예 안가고 아쉬워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교훈을 새삼 하나 새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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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세미술관 전

놀잇감 2011. 6. 22. 16:47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 전시작품에 포함됐다는 소식에 가야겠구나 벼르고는 있었다. 오르세미술관 전시회는 잊을 만 하면 몇년에 한번씩 기획되는데다가 몇해 전엔 <고흐의 방>과 밀레의 <만종>이 왔다고는 해도 작품수가 하도 알량해 보이코트했던 것과는 상황이 달랐다. 오르세 미술관 내부수리 때문에 작품을 '대거' 빌려올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들렸기 때문이다. 134점이면 소품이 포함됐다 해도 예술의 전당까지 흔쾌히 가줄 수 있는 작품량이었다. 6월 4일에 시작해 9월 25일까지 하는 전시라 '언제' 갈 것인가 그것만이 의문이었는데, 마침 어제 저녁약속이 예술의 전당 안에 있는 벨리니에서 잡혔다. 여름밤 산책도 하자면서. 이런 걸 하늘의 뜻이라고 하는 거야, 라며 설렘을 안고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별이 빛나는 밤> 말고는 또 무슨 그림이 왔는지 일부러 알아보지 않고 갔는데 그러길 잘했던 것 같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고, 꽤 유명한 그림은 10분의 1도 되지 않는듯했다. 오르세에서 빌려주는 작품만 가져오다보니 일관되는 주제나 사조로 전시실을 꾸미기에도 역부족이었던 것 같고...
고흐, 세잔, 르누아르, 밀레, 드가, 모네, 고갱, 피사로, 보나르, 로트렉, 쇠라, 루소 등등 그림책에서 봤다 싶은 화가들의 작품이 한두 개씩은 전부 포함되긴 했으나 이른바 오르세가 자랑하는 대표작은 많이 빌려주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도 난 뿌듯했고 만이천원이 아깝지 않았다. 실물 알현을 못했던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을 실컷 보고 왔기 때문이다. ^^; 데생과 스케치류의 소품도 꽤 많고, 대중화되기 시작한 20세기초의 사진 작품들도 더러 포함되어 있으므로, 134점 모두 대작일거라는 오해는 하지 않는게 좋겠다. 나는 최근 한국과 일본 근대문학을 좀 읽었더니 20세기초 사진과 작품들이 남다르게 다가왔고, 거리의 신문팔이 소년들이나 공장장에서 일하는 소녀들의 노동현장 포착 모습이 짠했다.  


게다가 뜻밖의 그림들도 몇점 만나는 바람에 마음에 드는 작품만 집중적으로 몇번씩 감상하며 눈호강을 할 수 있었다. 방마다 주제를 정해놓기는 했던데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서 모르겠고, 암튼 인물화를 모아놓은 전시실에서 맞닥뜨린 르누아르의 <소년과 고양이>, 모네의 <고디베르 부인의 초상>, 로트렉의 <여자 어릿광대 샤 위 카오> 세 작품은 거의 나란히 걸려 시선을 끌었다.

르누아르, [소년과 고양이]

포스터에 담긴 오른쪽 그림이 바로 르누아르의 초기작이라는 <소년과 고양이> 일부인데 정말 예쁘지않은가! @.@ 
르누아르는 항상 예쁘고 아름다운 대상을 화폭에 담아 눈을 푸근하게 해주는 그림을 그렸지만, 척 보면 르누아르 그림이라고 알 수 있을 듯한 특징이 작품마다 두드러진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초기작이라도 이게 르누아르 그림이라니 의외였다. 평소 보던 르누아르 작품과는 색감도 뭔가 다르고 분위기도 한층 어두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도슨트의 말을 들으니 누드화 가운데서도 남자 누드는 이 작품이 유일하단다. 고양이 표정까지 어쩜 저리도 사실적일고. 꽃소년에 열광하는 본성을 못속이고 이 그림 앞에서 한참이나 헤벌쭉 미소를 지으며 서 있다가 돌아섰다. ㅎㅎㅎ

상당히 작품 크기가 큰 모네의 <고디베르 부인의 초상>도 워낙 아름다워 한참을 감상했는데, 좀 더 인상적이었던 건 그 바로 옆에 걸린 로트렉의 작은 인물화였다. 어딘가 퇴폐미와 서글픔이 철철 넘치는 것 같은 로트렉의 그림도 꽤나 좋아하는데 공단 드레스를 떨쳐 입은 단아한 귀족 여인의 전신상 옆에서 더욱 초라하게 대조되는 어릿광대의 뒷모습이라니...
로트렉의 그 그림 사진 찾아올리려고 나름 검색해보았으나 못 구했다. 하기야 구한다고 해도 전시실에서 그 순간 느꼈던 기분을 전달할 순 없을 테니 그냥 통과.

그 방에 같이 걸려 있던, 처음 들어보는 아르망 스갱이라는 화가의 인물화 <가브리엘 비앵>도 눈빛이 오래 잊히질 않을 만큼 좋았고, <빨래하는 여인>의 뒷모습을 그린 폴 기구의 그림도 마음에 들었다. 미술 교과서에 실렸던 것으로 생각되는 세잔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도 볼 수 있었다. 생각보다 그림이 작군, 했다. 드가의 발레리나 그림도 한 점 왔다. 나로선 처음 보는 <계단을 오르는 발레리나들>이긴 하지만. 가장자리 인물을 가차없이 잘라 표현한 드가의 기법이 당시로선 대단히 선구적인 시도였으며, 그게 일본 판화의 영향이라는 도슨트의 설명에 조금 놀랐다. 화투의 새 그림까지 예로 들어 설명하던데 그 부분에선 시끄럽고 듣기 싫어서 딴그림에 정신을 팔았다. 그림을 볼 때 설명을 들으면 더 많이 세세한 부분까지 보여서 좋을 때도 있지만, 때로 그냥 아무 설명 없이 나 혼자만의 느낌에 사로잡히고 싶을 때도 있어 변덕이 부글부글 끓는다. 일부러 도슨트 시간에 맞춘 것도 아닌데 그림 설명을 만나 약간 반가운 느낌과 구름처럼 몰려다니는 사람들 때문에 짜증나는 기분 사이에서 어제도 오락가락했다. 

풍경화 가운데선 뭐니뭐니해도 고흐 그림이 인기 폭발이었지만, 밀레의 <봄> 앞에도 사람들이 계속 몰려들었다. 저 유명한 <만종>이나 <이삭줍기>보다(이번에 이런 작품이 왔다는 얘기가 아님;;) 나도 밀레의 <봄>이 훨씬 좋았다. 먹구름 잔뜩 낀 왼쪽 하늘에 드리워진 무지개도 예쁘고 농촌의 오솔길과 꽃을 피운 과일나무, 멀찌감치 나무 아래 서 있는 아주 작은 농부의 모습까지 정겹지 않은 구석이 없을만큼 최고의 완성도를 자랑하는 작품이 아닐는지. 하트만이라는 고객을 위해 그린 4계절 연작이라는데 겨울은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데고, <봄>이 연작중 가장 마지막 작품이란다. 계절 중엔 뭐니뭐니해도 봄이 최고지...

그밖

펠릭스 발로통, [공]

에 오호라 쾌재를 부르며 기쁘게 만난 그림은 펠릭스 발로통의 <공>. 작품 크기가 큰 것도 아니고 색감이 화려하지도 않은데 마음을 훅 후비고 들어오는 느낌이라 한참을 감상했다.
그림자까지도 행복해 보이는 것 같다가 또 좀 외로움이 풍기기도 하고... 저 멀리 서 있는 두 여인 가운데 이 아이의 엄마가 있을까 아닐까 혼자 한참 시나리오를 쓰다가 말았다.




해외 미술관에서 두서없이 주워담듯 빌려온 전시회는 통일감이 없어서 문제라고 속으로 구시렁거리다가 군데군데 마음에 드는 그림들이 눈에 띄어 불평이 쏙 들어갔다. 메인요리로 고흐의 별밤만 기대하고 갔는데 서비스로 주는 각종 디저트에 감동하고 온 기분이랄까. ㅋㅋ


벽 하나를 온전히 차지하고 있던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을 전시실에서 본 느낌을 그대로 간직해보려고 일부러 그런 사진을 구했다. 별빛을 심히 도드라지게 강조한 복제 그림들과 달린 원래 그림 느낌이 거의 고스란히 담겼다.  

사진 출처: http://moonsoyoung.com/90114994256


고흐가 이 밤풍경을 그리려고 밀짚모자에 촛불을 얹어놓고 작업을 하느라 뜨거운 촛농이 뚝뚝 떨어져도 아랑곳하지 않았다는 도슨트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암튼 하늘의 북두칠성도, 해안도로를 따라 켜진 진노랑색 가스등도, 밤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가는 부부의 미소띤 표정도 다 정겹고 아름답다. 코앞까지 가까이 가서 확인했는데 두 사람 다 웃고 있었다. ^^;


어제 만난 친구에게도 이야기했지만 인생은 참 공교롭다. 97년이었던가, 도서전 때문에 프랑크푸르트에 간 김에 파리와 런던 여행을 계획했다. 파리에서 2박 3일이었나 3박 4일쯤 보내는 동안 마침 파리에 와 있던 친구와 점심무렵 오르세 미술관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세 시간이면 그림 구경 실컷 하겠지 싶어 시간을 안배했으나, 오르세미술관의 작품수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했고 나는 인상파 전시관을 절반도 다 못돈 채 눈물을 머금고 약속시간에 맞춰 밖으로 나가야 했다. 그때 못봐서 제일 아쉬웠던 그림이 바로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이었다. 그날 친구는 오후에도 미팅이 잡혀있었다. 그래서 아마도 차를 마셨던가 간단히 점심을 떼우고 헤어져야 했으므로, 같이 지하철을 타다가 나는 뻬르라세즈로 친구는 미팅 장소로 향했다. 아쉬운 마음에 나는 파리일정을 하루 더 늘려 오르세 미술관을 마저 보겠다고 마음 먹었으나 런던행 비행기표 변경이 불가능했다. 하는 수 없이 다음날 파리를 떠나며 몇년 안에 다시 오리라, 파리 뿐만 아니라 유럽여행을 제대로 하리라 결심했다. 다시 가기는 개뿔. 그 결심은 지금껏 이루어지지 못했다.

어제 저녁에 만난 친구가 바로 그 때 오르세 미술관 앞에서 만났다가 파리 지하철에서 헤어진 장본인이다. 이 정도면 인생이 공교로운 거 아닌가? 물론 내가 예술의 전당 가는 김에 혼자 전시회를 볼 계획을 세웠지만, 먼저 벨리니로 장소를 정한 건 그 친구였다. 오래 전 그 친구를 만나려고 오르세에서 미처 못본 고흐의 그림을 십수년이 지난 어제 결국 보고 나서 또 그 친구를 만나니 뭔가 하나 빠졌던 퍼즐 조각을 마침내 끼웠거나 어그러졌던 아귀를 딱 맞춘 느낌이 들었다. 그날 파리 지하철에서 헤어지며 내가 친구에게 초콜릿을 주었다는데(나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요번엔 친구가 내게 쿠키를 싸주었다. 부른 배를 꺼뜨리겠다고 예술의 전당 주변을 거닐다 올려다본 밤하늘 색깔은 유난히 푸른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하늘 색깔이 '프러시안 블루'라고 친구가 말했고 나는 오후에 보고 나온 고흐 그림의 밤하늘 색깔을 떠올렸다. 확실히 인생은 오묘하다. 혹은 인간이 같다붙이기 선수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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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달력에 주렁주렁 포스트잇에 적어 붙여두었던, 가고픈 전시회가 여섯개나 됐는데 보지도 못하고 하나하나 떨어져나가고 있다. 샤갈전이나마 얼른 보고 오기를 잘했지, 3월까지 한다고 뭉기적거렸다간 어찌됐을지 장담을 못하겠다. 국내에 소장되어 있던 딱 한편의 고흐 그림, <마차와 기차가 있는 풍경>도 새 주인에게 넘어가기전에 전시되었었는데, 가야지 가야지 하다가 날짜를 놓쳤다. 그림 딱 한편에 관람료 만원이 비싸서라기보다는 내게 심리적으로 코엑스가 너무 멀었다. 거기만 다녀오면 지하철 멀미를 하는 바람에...  서로 사는 동네가 멀어서 데려다주기 불편하다는 구실로 헤어지는 연인을 비웃었는데 내가 똑 그짝이구나 싶었다. 고흐에 대한 애정이 그 정도는 아니었던 거지. 대규모 회고전의 경우 양적인 충족감은 있을지 몰라도, 작품 하나하나의 세밀한 감상이 불가능하다며 대규모 전시회를 마뜩찮아하는 이야기를 읽었을 때만 해도, 언제 또 만날 수 있을지 모를 그림이니 더욱 꼭 가야겠구나 생각했으나 결국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장욱진 화백의 회고전은 놓치고 싶지 않았다. 과천 현대미술관에도 꽤 소장돼 있고 장욱진 재단도 있으니 머지 않은 시기에 또 만날 가능성이 있지만 그렇다고 '한꺼번에' 앙증맞은 작품들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할 순 없었다. 게다가 전시장도 만만하게 경복궁 옆 갤러리 현대였다. 전시 막바지라 다들 조바심을 냈는지 홍보가 워낙 잘 된 때문인지 평일 오후에 갔어도 사람들이 꽤 많았다. 봄방학을 맞아 아이들을 데려온 엄마들이 특히 많았는데, 동심이 묻어나는 그림이라 아이들도 좋아하는 눈치였다. 여기저기서 그림 설명하는 엄마들 때문에 시끄럽긴 했지만, 엄숙하고 조용한 관람 분위기보다는 어쩐지 그런 소란함이 다정한 그림들과 어울리는 것도 같았다.

포스터 그림은 78년작, 가로수


동그랗거나 길쭉한 단순한 형태의 나무와 옹기종기 모인 마을의 집들, 정겨운 사람들의 모습이 아이들 그림처럼, 대부분 작은 화폭에 그려진 장욱진 화백의 그림이 나는 마냥 좋다. 어떤 화가의 그림이든 대체로 새 그림을 무서워하는 나에게 예외가 있다면 어린 시절 나도 그렸을법하게 선으로만 묘사된 까치로 대표되는 장욱진의 새 그림이다. 장욱진 그림 속의 새들은 어린시절 내게  본격적인 새 공포증을 각인시킨 학교앞 병아리 좌판이나 히치콕 감독의 <새>와도 다르고, 뚱뚱하고 더러운 도시의 닭둘기와도 다르고, 언젠가 내 팔뚝에 똥을 찍 갈기고 날아간 이름모를 새와도 다르다. 



'57 나무와 새, 34x24cm



거의 모든 그림에서 해와 반달이 공존하고 아이들은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나무에 올라가 있거나 가족이나 동무와 함께 걸어가거나 어디선가 놀고 있다. 동화 삽화로도 꼭 어울릴 것만 같지 않은가!

다 좋아하지만 특히 남색과 초록색이 예뻐서 마음에 드는 <나무와 새>, 갈색 배경이 정겨운 <수하>는 봐도봐도 느낌이 좋다. 국내 가방업체에서 장욱진의 그림으로 가방과 지갑류를 선보였기에 신나서 얼른 지갑 하나 골라사고는 요번 전시에 그 그림도 포함되면 좋겠다 생각했으나 아쉽게도 그 그림은 화집속에서나 만날 수 있었다. 그래도 언젠가는 어디서 한번쯤 실물을 만날 수 있겠지. 지갑을 한번 사면 3, 4년은 너끈히 쓰는 편이므로 일단 그 그림이 어디에 소장돼 있는지부터 알아봐야겠다.


이번 전시는 연대별로 화실 이름에 따라 초기, 덕소 시대, 명륜동 시대, 수안보 시대 등으로 그림이 나뉘어 있었는데 시기에 따라서 엄청나게 화풍이 달라지는 편은 아니지만 나는 초기와 덕소시대 그림을 제일 갖고 싶어하는 것 같다. 지난번 덕수궁 석조전에서도 보았던 덕소 화실의 물건들이 여기도 전시되어 있었는데, 화폭이 작으니 덩달아 작고 탄탄해 보이는 앉은뱅이 이젤이 참 탐났다. 그리고 만약에 작품 하나 누가 골라 가지라고 한다면 <수하>가 아닐까 싶다. ㅎㅎ

'54, 수하, 33x24.7cm


이 그림은 재작년 한국근대미술걸작전에 갔다와서도 올렸던 것 같은데, 또 올린다고 문제될 건 없겠지. 아우 예쁘다.

초기에 그린 노란 바탕의 <자화상>도 그렇지만 장욱진의 그림은 간혹 손바닥보다도 작은 캔버스에 오밀조밀 유화를 그려놓았다. 요번에 처음 본 1972년작 <가족도>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벽에 오도카니 홀로 걸려 있었는데, 7.5x14.8cm의 작은 크기임에도 보는 이를 감동시키는 힘이 뿜어져나왔다. 주최측에서도 그걸 느꼈는지 일부러 엘리베이터 건너편에 사진촬영용으로 확대해 벽화로 만들어놓았던데, 색감이 어찌나 다른지 도저히 같은 그림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정감어린 흙색을 왜 시뻘겋게 표현해놓았는지 원! 아이들 데려온 사람들이 너도나도 그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던데, 나는 불평용으로 찍어왔다. 제아무리 원작의 색감을 살려내기가 어렵기로서니, 자손들과 재단에서 기획한 전시에서 유일하게 벽에 새겨넣은 그림이 그모양이면 어쩐단 말인가. 수없이 기념촬영을 해갔을 사람들의 사진속에서만 장욱진 그림을 접한 이들은, 그 그림이 그토록 시뻘겋고 강렬한 줄로 착각할 게 아닌가. 안타까운 노릇이다.


원작은 이렇게 시뻘겋지 않다규!


문제의 가족도 벽화는 이렇게 생겼다. 원작 그림은 위에 있는 <수하>와 비슷한 색감이라고 보면 됨. 나무의 초록색도 영 아니올시다다.

그밖엔 대체로 흡족한 전시였다. 돌아가시기 불과 두어달 전에 그렸다는 <밤과 노인>도 처음 공개되었고 별로 본 적 없는 먹그림들도 만날 수 있어 좋았다. 생전 모습을 담은 영상물에서 육성도 들을 수 있게 해놓았는데, 주름 가득한 얼굴, 깡마른 체구에 거의 늘 담배를 손에 들고 있는 사진들을 많이 접한 때문인지 이젠 오래전부터 알던 먼 친척같은 느낌이 들 만큼 친근했다. 놓치고 못갔으면 아마 땅을 치고 후회했을듯. 역시나 내일이면 끝나는 <델피르와 친구들> 사진전도, 3월 1일에 끝나는 <피카소와 모던아트> 전시회도 포스트잇 메모를 조금 전 그냥 떼어버리며 아쉬웠지만, 하나는 건졌으니 장하다고 생각할란다. ㅎㅎ

마지막으로 고흐의 <아몬드꽃> 파란 지갑--낡아서 그림이 다 바래 하얗게 됐었다--에 이어 마련한 장욱진의 <나무> 지갑을 화집 옆에 놓고 사진을 찍었다. 아무래도 색감이며 섬세한 부분까지 살려내진 못했지만 (나무 위 노란 집안에는 어린아이가 들어 있다) 백화점에서 본 순간 마음을 빼앗기고 선물로 받으려고 목록에 적어뒀었는데 연말에 세일하길래 냉큼 사버렸다. 음화화핫. 브랜드 로고 옆의 금속 장식 두개만 없으면 금상첨화겠으나 (번쩍이는 거 싫엇!) 동그란 나무에 시선을 돌리면 이내 흐뭇하다. 고흐 지갑 살때는 살아생전 딱 한 편밖에 그림을 못 팔았고 평생 가난했던 고흐에게나 그의 후손들에게 아무런 혜택도 돌아갈 것 같지 않아 좀 찝찝했으나, 이런 그림 저작권료는 장욱진 미술재단으로 들어갈 게 틀림없으니 아깝지도 않다. ^^; 

'86, 나무, 33.4x24.2cm

표에든 그림은 73년작 부엌, 21.6x27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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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한해 정리

놀잇감 2010. 12. 31. 17:30

올 한해는 여러모로 정리정돈이 제대로 되지 않은 혼돈의 1년이었다. 그래서 한해의 마지막 날에라도 정리를 잘 하고 넘어가면 내년을 좀 더 쓸모있고 알차게 보내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후다닥 목록을 만들어본다. (실은 2010 베스트 포스팅 하고 싶어서 자꾸 블로그에 쏠리는 마음을 다잡아 보려는 의도다. 한해 마지막 날까지 원고독촉 전화를 받는 진상 떨기는 부디 오늘 날짜로 버리고 가면 안되겠니.)


2010 최고의 영화 3
토이스토리 3
인셉션
하하하

세편 모두 영화보고 와서 후기를 올렸으므로 긴 설명 생략; <토이스토리3>은 보자마다 올해 최고의 영화로 꼽힐 거라고 장담했고, 연이어 본 <인셉션>도 최고다 싶었다. 하반기엔 영화구경도 잘 안다녔던 터라 나머지 한편을 뭘로 꼽나 걱정스러워 나다 프로포즈에서 오늘 4시에 하는 <옥희의 영화>를 보고 나서 베스트 세 편을 뽑을 작정을 열흘쯤 전에 했으나 결국 이렇게 집구석에 있다. 영하 12도에 어딜 나가느냐고! -_-;


2010 최고의 전시 3
앤디 워홀의 위대한 세계
샤갈 전
아시아 리얼리즘 전

올해는 전시회도 그리 많이 안 다녀서 최고의 전시 셋을 간신히 꼽을 정도다. 대체 뭘 하며 산 거냐. 역시나 각 전시후기를 포스팅했으므로 긴말 생략.


2010 최고의 드라마 3
파스타
셜록
시크릿 가든

누군가는 주방에서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요리사가 정신병자 같다고 혹평했지만 나는 올초 <파스타>를 보며 오글오글 손발을 움켜쥐면서도 유경이랑 세프 때문에 진정 행복했다. 둘의 사랑에, 특히 유경의 솔직한 사랑법에 갈채와 응원을 보냈고 음식 만드는 장면이 나올 땐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신나게 봤다. ^^; 그 뒤론 오래도록 마음 붙이고 열광하며 볼 드라마가 눈씻고 찾아봐도 잘 없어서 어찌나 한탄스럽던지... 그러다 연말에 겨우 세편의 에피소드로 나의 마음을 빼앗은 영국 드라마 <셜록>과 아직은 끝나지 않았으나 여러가지로 마음 불편해지면서도( (최철원과 김주원을 동일시하지 않으려고 마인드콘트롤이 필요했고, 안하무인 개싸가지 김주원의 몇몇 행동은 확실히 계속 문제다) 중독된 듯 주말마다 본방사수하고 있는 <시크릿 가든> 덕분에 목록이 완성됐다. 생각해보니 이 셋 말고는 꾸준히 본방사수한 드라마가 없는 듯; 

아.. 사진 규격 안맞아서 속상하다. +_+ <파스타>는 공효진이랑 이선균만 나온 예쁜 사진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라 지쳐서 포기. <셜록>은 크리미널 마인드, CSI, 멘탈리스트를 뭉뚱그려놓은 듯한 천재 탐정 셜록과 왓슨의 명콤비도 일품이지만, 런던 시내 곳곳이 배경으로 나오는 게 참 좋았다. 시즌2를 눈빠지게 기다릴 작정이다. 마지막으로 <시크릿 가든>에서 나는 김주원과 길라임이 눈으로 대화하는 저 장면이 제일 좋았다(아직 완결되지 않았으나 더 좋은 장면이 과연 나올까? @.@). 하지원과 현빈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말도 안되는 스토리로 이렇게 놀라운 인물을 표현해낼 수 있었겠느냐고 볼 때마다 감탄한다.  

2010 최고의 지름 3
1. 일본 온천료칸 체험: 왕비마마 보필은 너무 힘들었지만 파트너를 달리해(이왕이면 친구들과) 또 가고 싶다. 
2. 실내용 자전거: 과거 옷걸이로 전락했다 버려진 전적이 있으나 요번엔 계속 사용중이라는 데서 점수 획득
3. 아이폰: 정액요금과 기기값, 부가세 포함 6만원을 넘는 요금 때문에 (이전엔 3만원 전후였는데!) 아깝고 후회스러운 구석이 있기도 하지만, 지난번 모니터 망가졌을 때 아이폰 없었으면 어쩔 뻔 했나 싶을 정도로 열심히 인터넷 검색에 사용했고 잘 듣지 않던 음악도 아이팟에 넣어놓으니 틈틈이 듣게 된 변화를 생각하면 잘 질렀다고 여길란다. ㅋ

2010 최고의 사건 3
1. 요가강습 1년 달성: 그렇다. 아직도 이 엄동설한에 추위를 뚫고 요가학원엘 다니고 있다. 작년 11월에 시작했는데 맙소사. 내가 1년 넘게 무언가를 꾸준히 한다는 게 정말 놀랍다. 다 조카 덕분이긴 하지만, 내년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요번 겨울방학이 마지막이 될 거라는 예감이 든다. -_-; 
2. 마감일 어기기 최고 기록 6개월: 한두달도 아니고 서너달도 아니고 무려 6개월이나 마감일을 어긴 건 16년째 번역인생에서 처음이다. 기록깨기 도전은 절대 안될 말이고, 다시는 이 기록에 근접하지도 않기를. 
3. 파랑이랑 친해지기: 아직도 다른 개와 동물에 대한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조카네 개 파랑이의 끈질긴 구애와 추근댐 덕분에 이젠 녀석을 쓰다듬어주는 수준을 넘어서 무릎에 올려 안아줄 수도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먹을 것을 손바닥에 놓아 먹일 수(!!!)도 있게 되었다. 애완견 혐오자로서 배신의 행위로 여겨질 수도 있는 일대 사건이라고 스스로도 생각한다. 

2010 최고의 업적(?)
올해는 번역서가 네 권(이 가운데 둘은 두권짜리 장편이라 역자교정에만 몇주일이 걸리기도 했다;;) 출간되었고, 번역 작업을 한 책은 무려 6권(물론 지금 이 순간도 마무리 중이지만 ㅠ.ㅠ) 이다. 
공장에서 물건 찍어내는 것도 아니고 평균 두달에 한 권 작업이라니 이 무슨 어이없는 짓인가 싶지만, 다 작년에 게으름을 부린 탓에 밀리고 밀린 작업이 맞물려 돌아갈 수밖에 없었고 그 와중에 어떤 책은 계약 마감일을 무려 6개월이나 어기기도 했다. 그러니 이건 업적이 아니라 만행이라고 손가락질 받아 마땅하지만, 스스로 업적이라고 믿어야 내년을 성실히 준비하며 자괴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이러고도 아직 나를 악덕 번역가로 매장시키지 않은 출판관계자분들에게 감사와 사죄의 인사를 보낸다. (그렇지만 그들이 여기 와보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 

2010년에도 최고의 공연최고의 음반은 꼽질 못했다. 공연은 아예 보러간 게 없고 (그나마도 예매한 유일한 콘서트였던 플라시보는 공연이 취소됐다. -_-;) 음반은 딱 네 장 샀던데 어쩌라고... 억지로 스팅의 Symphonicities를 꼽아볼까도 생각했지만, 솔직히 나는 신선한 느낌의 Roxanne 말고는 예전 편곡이 대체로 더 좋은 것 같다. 2011년엔 나도 최고 공연과 음반 목록에 넣을 수 있도록 분발했으면...

2010년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침몰 (또는 방황)
계속 이렇게 살면 정말 곤란하다. 자신감을 되찾을 것.

2011년 계획
삶의 '낙'을 좀 더 열심히 찾아보자.  _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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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갈전

놀잇감 2010. 12. 24. 15:36

2004년에 이어 6년만에 똑같은 장소인 서울 시립미술관에서 하는 샤갈 전시회에 다녀왔다. 내년 3월 27일까지 예정이라 12월 3일부터 전시 시작이라는 소식을 들은 순간부터 나는 줄곧 머리를 굴렸다. 과연 언제 가야 가장 한가하게 작품 감상을 할 수 있을까 하고. 대형 기획전시는 노심초사 기다렸던 사람들 때문에 첫주가 꽤나 붐비는 편이란 걸 알기에,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겨울방학 해서 바글바글 애들이 몰려오기 전에 가자는 것이었다.

미술관 입구를 그림으로 꾸민 건 맘에 든다

그렇게 해서 잡은 거사일이 바로 어제였고, 찬바람에 인적 드문 정동길을 지나 시립미술관 언덕을 오를 때만해도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오호라, 내 짐작이 맞았구나 하고.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해 나의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매표소와 광장 앞엔 사람들이 별로 없었건만, 건물 안엔 우글우글... 아니, 평일 오후에 웬 할 일없는 사람들이 그리도 많은지! 시끄러운 아이들만 없었지 관람객의 연령대도 몹시 다양했다. 여름방학 중이라 도깨비 시장 같은 분위기에다 거의 줄서서 돌아다니느라 사람들 머리 너머로 그림을 봐야했던 6년 전 그날만큼은 아니었지만, 와글와글 북적북적 어찌나 사람이 많던지 전시장을 절반도 돌기 전에 피곤해서 카페로 피신해 숨을 돌려야 할 정도였다. 게다가 원래도 시립미술관 도슨트 설명이 워낙 부실한 건 알고 있었음에도, 하필 그마저도 제일 형편없는 알바생 같은 '인공미녀' 도슨트가 걸린 바람에 어찌나 버벅버벅 말을 씹는지 한숨이 다 나왔다. 전시관마다 겨우 두세 작품 설명하고 넘어가는 걸 그리도 내용을 못 외운단 말이냐! 오디오 가이드는 그나마도 30점 정도 작품을 설명해준다니, 혹시 한번 더 보러 가게 되면 시도해볼 생각이다.  

대형 기획전시 때마다 자랑스레 반복되는 광고는 늘 '사상 최대규모'라는 것이고 이번 샤갈전도 '아시아 최초'라거나 '마지막'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이례적인 기획이라는 '소문'을 들었고 164점이라는 작품 수도 나의 기대를 부채질했다. 그런데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속담은 이번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역시 기대가 너무 크면 실망도 큰 법. 2004년에 감탄하며 보았던 것처럼, 내가 생각하는 '샤갈스러운' 그림들은 그

산책, 캔버스에 유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러시아 미술관 소장

리 많지 않았다. 물론 인상적인 그림들도 꽤 있었다. 요번 샤갈전의 메인으로 쓰인 그림인 <도시 위에서>는 6년 전에 왔을 때 얼마 전시를 못하고 돌려줘야 해서, 내가 보러 갔을 땐 아쉽게도 복제품이 대신 걸려 있었다. 그런데 요번엔 전시기간 내내 원본을 볼 수 있다. 그와 더불어 지난 전시에도 인상적이었던 러시아 유대인 예술극장 장식벽화로 걸려 있던 패널 그림 네개 <무용>, <음악>, <연극>, <문학>도 다시 왔는데, 그뿐만 아니라 그밖의 대형 장식화들이 불타버린 천장벽화 빼고 모두 한꺼번에 전시되고 있었다. '아시아 최초'이고 '마지막' 전시라는 미사여구는 그러니까, 샤갈이 러시아 시기에 그린 이 예술극장 장식화 작품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최초이자 마지막 기회라는 뜻이다. 더불어 내가 좋아하는 같은 시기의 <산책>도 볼 수 있어 행복했다. 김춘수에게 영감을 주어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이라는 시를 낳았다는 <비테프스크 위에서>도 있었다.

하지만 '색채의 마술사 샤갈'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화려하고 몽환적인 그림들은 확실히 지난 전시회 때 더 많았다. 그리고 미안하지만 내가 보기엔 주제별로 그림을 나누어 놓은 전시관 구분이 좀 억지스럽고 혼란스러웠다. 샤갈의 그림들이 워낙 당대의 미술사조와도 다르고 독특한 양식이라 일정 주제로 뭉뚱그리기 힘들다지만, 그래도 유대인 예술극장 전시관과 마지막 석판화 작품방 빼놓고는 어쩐지 계속 중구남방 정신사나운 느낌이 드는 걸 피할 수가 없었다. 지난번엔 똑같이 성서를 주제로 작품을 모아놓았어도 통일성이 느껴지면서 아름답기만 하던데... 이번엔 내가 좋아하는 <아가서> 시리즈가 몇 작품 오긴 했어도 이상스레 자질구레하게 붙여놓은 듯 시선이 집중되질 않았다. 작품 수만 많았지, 정말로 대형 작품 몇 점 빼놓고는 죄다 오종종 작은 그림들을 다닥다닥 붙여놓은 때문일 수도 있겠고, 주제별로 작품을 나누느라 들쭉날쭉한 작품시기가 혼란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번 전시는 유대인 예술극장 벽화 시리즈에 가장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 나는 은연중에 화려하고 색감이 다채로우면서 신비로운 샤갈의 그림들만을 '샤갈스럽다'는 편견을 갖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 그리고 그런 시각으론 서커스, 사랑과 연인 주제로 나눠놓은 전시관 그림들이 제일 좋았다. 특히 서커스 전시관은 벽이 온통 빨간색으로 칠해져 있어서 약간 의아했는데, 다 돌아보고 나니 그게 작품과 어울렸던 것 같다. 어쩐지 크리스마스스럽기도 했고.

사람에 따라 다르겠으나, 이번 샤갈전은 내 경우 '샤갈 그림을 원없이 봤다'는 충족감이 아무래도 좀 떨어진다. 바로 옆 덕수궁 미술관에서도 3월까지 <피카소와 모던아트전>을 하고 있는데 원래도 가려 했지만 거기도 몇 점 포함된 샤갈의 그림이 뭘까 궁금해서라도 꼭 보러갈 작심을 했을 정도로. 나는 자꾸만 2004년 전시와 요번 전시를 비교하며 실망스러워했는데, 그 전시를 놓쳤던 일행들은 90년대에 있었던 호암아트홀 샤갈전과 비교를 하며 아쉬워했다. +_+ 이러니 전시 기획하는 쪽에서도 참 사람들 입맛 맞추기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어쨌거나 원래도 샤갈이 즐겨 사용한 상징인 새와 수탉 때문에 (그놈의 새 공포증 -_-;) 나로선 소장할 작품을 찾으려면 한참 고민해야 하는 형국인데 (누가 준대나? ㅋㅋ) 전시장을 두어바퀴 돌고도 어느 그림을 가질지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도시 위에서>나 <산책>은 너무 작품이 커서... 

대신에 엽서 몇장 사들고 왔다. 클림트 전시회 때 독일 직수입이라면서 엽서 한 장에 3천원, 5천원씩 받아서 심하게 욕한 적이 있다. 헌데 요번엔 프랑스에서 수입한 엽서를 국내 제작 엽서와 똑같이 저렴하게 팔아서 그건 몹시 기뻤다. ^^; 엽서 사들고 다시 전시장에 들어가 비교해봤더니 색감도 퍽 훌륭한 편이다.

아 참, 전시입장료는 12,000원. 별다른 할인카드는 없는 대신에 평일 저녁 6시 이후엔 2천원 야간할인이 된단다. 쌩쌩 강추위에 인적 드문 겨울 평일 저녁에 가보면 한가하게 전시장을 돌 수 있지 않을까나. 혹시 생각있으면 시도해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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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뒤뷔페 전

놀잇감 2010. 11. 21. 16:56

모 백화점에서 장 뒤뷔페 작품을 들여다 전시회를 했다. 까마득한 옛날엔 백화점마다 꼭대기층에 갤러리를 마련해두고 괜찮은 전시회를 자주 열었던 것 같은데(특히 '미도파'와 '신세계'에서), 장사에 눈이 어두워 이젠 갤러리라고 해봤자 코딱지만하게 명맥만 유지하는 수준이고 대부분은 아예 갤러리를 없애버리고 그 대신 '문화센터'를 운영한다. 몇십주년 기념으로 장 뒤뷔페 전시회를 한다는 요란한 '뉴스'에 나는 반색을 하며 아무리 백화점 갤러리라도 '우를루프' 작품들을 중심으로 가져왔다니 28점이라는 적은 수라도 설마 소품 위주는 아니겠지 안도했다. 하지만, 새로이 본점을 엄청 크게 지은 백화점이고 돈도 많아 미술관도 운영하는 재벌이니 백화점 갤러리라도 좀 다르려나 일말의 희망을 품었던 내 기대는 여지없이 깨졌다. 미술관이 꼭 커야하는 건 아니지만, 백화점 규모에 비하면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인색하게 작아서, 요번에 가져온 28점의 작품을 한곳에 다 진열도 못하고 반대편 에스컬레이터 앞 벽에 장식처럼 걸어놓기도 했다. 그것도 빛 반사 때문에 내가 제일 싫어하는 방식으로 유리 진열장 안에 가둬서! 나 뭘 기대했던 거니.. 으휴. 그나마도 뒤뷔페 작품을 보게 해줬으니 감사해야하는 건지도 모르겠으나, 사람들로 바글거리는 식당가와 이벤트 상품 나눠주는 행사장과 달리 담당 직원만 데스크를 지키고 있는 갤러리가 한가로운 건 고마운 일이어도 뒤뷔페 작품을 생각하면 서글펐다.

유일하게 마음에 들었던 건 사진찍는 걸 막지 않았다는 점. 외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모든 갤러리에서 강박적으로 카메라 들이대는 걸 금지하는게 나는 늘 너무도 궁금했는데, 여기선 갤러리 반대편 쪽 에스컬레이터 앞 벽에 넣어둔 작품(<피아노>랑 또 한 작품)만 찍지 말라고 하더군. (갤러리 내 작품은 괜찮고 밖에 있는 작품은 왜 안되는지 그것도 의문이다) 암튼 그래서 되는대로 이것저것 휴대폰을 들이대며 사진을 찍어왔다. 우를루프는 비슷비슷한 느낌이라 나중에 뭘 봤는지 기억도 잘 나질 않을 것 같아서 말이다. 내 기억을 믿을 수 있다면 몇년전 덕수궁 미술관에서 한 전시랑은 겹치는 작품이 거의 없었던 듯하다. <물주전자> 같은 작품은 제목은 같았어도 그땐 그림이었는데 요번엔 조형물로 온 식이다. 

갤러리 입구 사진인데, 가운데 작품이 제목만 남기고 사라졌다. 대체 어디로 간 걸까? 설마 훼손된 건 아니겠지...
포스터에 들어간 작품 제목은 알레고리쿠스였다. 제목을 보고 나니 귀엽다는 느낌. ㅎㅎ


기억을 도우려고 작품 제목이랑 일부러 같이 찍어 왔다. <물주전자>말고도 <중사>도 낯이 익은 걸 보면 이미 본 작품일지도... 평범한 사물과 인물을 보고 어떻게 이런 표현을 생각해냈을지 정말 볼수록 뒤뷔페는 천재다. +_+


알록달록한 우룰루프도 예쁘지만 나는 이렇게 푸른빛으로 간결히 표현한 우를루프가 더 좋은 것 같다. 하나 훔쳐가라고 하면 이 작품으로 하겠다고 속으로 찜했음. ㅋ
작품 제목은 <푸른 요소 III>.









요번엔 우를루프 이외의 회화 작품이 몇개 오질 않았는데, 드물어서 더 인상적이었던 인물풍경화 두 점. 각 제목이 <인물이 있는 붉은 풍경>과 <네 사람이 있는 풍경>이었던 것 같은데 헐... 하루만에 까먹었다. ㅠ.ㅠ 역시 제목과 같이 찍어왔어야 한다는 의미.

서울에선 22일까지 전시하고 이후 부산과 광주에서 순회전시를 한다고 한다. 요번주에 짬 못내면 일부러 KTX타고 부산에 놀러가서 뒤뷔페 그림도 보고 바다도 보고 회도 먹고 그러면 좋겠다는 상상을 하며 혼자 흐뭇해하다가 정신을 차려 게으른 몸을 움직였다. 그림 구경만 하려고 부러 백화점 나들이를 한 사람은 그날 나 밖에 없지 않았을까. 전시를 기획한 측에서는 작품 감상 후 '쇼핑'을 유도했겠으나, 나는 알량한 모양새의 갤러리에 대한 질타의 의미로 눈을 질끈 감고 곧장 백화점을 빠져나왔다. 사흘 내내 유일하게 건설적이고 칭찬해줄 만한 '짓'이었다. -_-;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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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달전부터 덕수궁에서 열린 이 전시를 나는 볼까말까 망설이고만 있었다. 아시아 미술에 대한 무지가 가장 두드러진 이유였지만, 또 그래서 더 보러가야하는 게 아닌가 했었다. 유명 서양 미술가 작품에만 환장하며 좋아하는 내 태도가 걱정스러워 반성하는 의미에서라도 봐야하는 게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10월 10일이 전시 마지막이라(역시 10월 10일까지였던 이응노 전시회도 결국 못갔다 ㅠ.ㅠ 그나마 대전 이응노 미술관에 가면 볼 수 있는 작품이라 위로하기로 했음) 시기적으로 못보기 쉽겠다 여겼는데, 확실히 공짜는 게으름뱅이도 움직이게 한다는 게 맞다. ^^; 입장료가 비싸진 않았지만(덕수궁 입장료 포함 5천원) 그래도 초대권이 있으니 저녁 모임 이전에 구경하고 오라는 착한 지인의 권고에 지난 수요일 좋아라 달려나갔다. 잠이야 두 시간을 잤든 말았든...

염려했던 대로 '보기 불편한' 식민시대의 아픔과 전쟁의 참상이 주제인 그림들도 전시실 한두 개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난생 처음 보는 베트남, 인도네시아, 태국, 일본, 필리핀, 인도 등의 근대 화가들 작품을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또 어디 있겠나 생각하며 부지런히 발품을 팔았다. 우리나라 화가들의 작품도 있기야 하겠지 생각했지만, 별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가 횡재한 기분으로 만난 그림은 바로 이것.

이인성의 1944년 작품인 <해당화>다. 정물 해당화 그림도 아니고(과천 현대미술관에 있다는데 만날 교체전시중이라 난 구경도 못했다), 한용운의 시를 그림으로 표현하며 해방에 대한 염원까지 담아냈다는 이 거대한 작품을 만나게 될 줄이야! 삼성 리움 미술관에 있단다. 돈이 많으니 리움에서 대작은 참 많이도 갖고 있다. -_-;

요번엔 설렁설렁 맘에 드는 그림만 감상하리라 마음 먹었던 터라 도슨트를 따라다니지도 않았었는데, 바글바글 사람들에 둘러싸여 오래 설명하는 그림이 바로 이 작품이란 걸 깨닫고는 우리도 얼른 귀동냥을 했다.

먹구름 사이로 내리비치는 햇살이 머지 않은 광복의 희망을 상징하고 있으며, 그림 오른쪽 아래 놓인 우산이 접혀 힘겨운 시기는 이제 다 지나갔음을 뜻한다는 등이 조목조목 그림 설명은 관두고라도, 나는 이인성의 그림이 '예뻐서' 좋다. (이런 무지한 감상 태도를 버려야한다는데 그게 안된다;;) 그냥 척 보면 정감 가는 작품이랄까. 하얀 수건을 쓰고 앉아 있는 누이의 얼굴은 옛날 우리 할머니의 젊은 시절과도 닮은 듯하고 정말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갔더라도 이 그림 하나만으로도 기꺼이 뿌듯했을 심정이라 유난히 더운 날씨에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전시실을 돌고 나서 아픈 다리를 오래 쉬어야 했음에도 그저 좋았다.


이 그림 말고 가장 인상적이었던 그림은 포스터에도 실렸던 <병아리와 함께
있는 여자>였다. 인도네시아 화가의 그림이라는데 이유는 몰라도 소장은 싱가포르 국가위원회더라. 중앙에 있는 인물이 워낙 인상적이라 작품을 구석구석 자세히 보지 않다가 그림 제목을 보고 잠시 움찔했기 때문에 (나는 병아리가 무섭다 +_+) 그림을 검색해 찾아오지 않고 미술관 앞에 있던 걸개그림 찍은 걸 대신 자랑하련다. (기다란 그림 아래쪽에 병아리 둥지가 놓여있고 병아리들이 껍질을 막 깨고 나오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결혼식을 앞두고 머리 손질을 받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란다. 엄청 아름다운 신부가 되었을 것으로 짐작됐다.

인물화가 많았지만, 같은 여자가 봐도 아름다운 여인을 그린 그림들이 확실히 사랑스럽고 시선을 오래 끄는 이유는 뭘까 매번 궁금한데, 결론은 늘 하나다. 모든 동물의 수컷이 더 아름답다지만 인간은 예외라고. ^^; 이 그림이 포스터와 티켓에 실린 이유 역시, 전시 기획자가 나처럼 이 모델을 가장 어여삐 여긴 게 아닌가 의심했었는데, 그건 아니고 19세기말부터 20세기에 걸친 이번 작품들 가운데 시기작으로 딱 중간이라 선정됐다는 설명을 지인이 도슨트한테 듣고 와 전달해주었다. ㅎ


어쨌든 덕수궁에서 하는 전시회는 궁궐에 대한 끝없는 나의 선망 때문에 언제나 입구부터 행복해진다. 습관처럼 현대미술관을 나오며 계단 꼭대기에서 또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같은 구도의 같은 사진이라도 아이폰으론 처음 찍는 거잖아, 그러면서... 가을 단풍이 고울 무렵엔 다른 궁궐에도 꼭 가봐야겠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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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그때를 연상시키듯 비도 내리고 있겠다, 여행후기나 마저 올려야겠다.

비바람 속에 첫날을 보내느라 제풀에 지친 모녀는 전날 밤 일본 말도 모르면서 TV를 틀어놓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음날 일기예보를 살폈지만 안타깝게도 여전히 일본열도 아래쪽은 죄다 우산 그림이었다. 6시부터 울린 모닝콜에 눈을 떠 커튼을 젖혀보니 당연히 주룩주룩 내리는 비. 아침 먹기 전 온천욕 한판의 욕심은 내리는 비와 함께 꼬리를 감추었다. 비오는 날 뽀송뽀송하고 푹신한 이불에서 뒹굴거리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가 말이다! 고소한 부침개 냄새마저 풍겨준다면 금상첨화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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