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 편단(공정하지 못하고 편벽되게 결정함), 편벽(남에게 알랑거리며 그 비위를 잘 맞추는 일, 또는 그런 사람), 편법, 편식, 편심, 편애, 편파, 편취, 편협.
<편>자 들어간 글자 치고 잘한 일은 하나도 없다.
특히 편애는 나쁘다.
원래 공평무사한 인간이 극히 드물다는 점을 구실로 삼더라도 편파적이면서 잘했노라고 말할 순 없는 일이다.
어제 카니발 콘서트에서도 그랬다.
나는 표나게 김동률을 더 좋아했다. 이적 노래는 몇 곡 아는 것도 없었다.
같이 간 지인은 너무 편애하지 말라고 했지만, 자지러지는 비명은 당연히 김동률만을 향한 것이었다.
물론 이적에게도 환호하고 박수도 쳐주었지만 내가 느끼는 감동은 달랐다.
다른 관객들도 마찬가지였다. 내 옆사람은 이적이 노래를 부를 때 훨씬 더 열광했고 내가 모르는 노래들도 척척 따라불렀다. 반면에 김동률이 노래할 때는 상대적으로 조용했다.
정확히 나눌 수는 없지만 두 사람을 공히 좋아하는 이들과, 따로따로 편애하는 이들이 뒤섞여 있었으니 아무도 마음 다치는 이들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 다치는 이들이 생겨나는 편애는 정말이지 곤란하다.
오래 전 교생실습을 나갔을 때 확실히 나도 느낄 수는 있었다. 그냥 예쁜 아이들은 단박에 눈에 들어왔다. 공부를 잘하거나 모범생이어서 예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내 눈엔 심하게 잘나고 스스로의 잘남을 깨닫고 있는 우등생이나 상위권 학생들은 주는 것 없이 얄미울 때가 많았다. 성격이나 성적이 어떤지 잘 모르는 상황에서도 나는 그저 눈빛과 태도로 전달되는 맑은 심성 때문에 정이 가거나, 어딘가 측은함이 느껴지는 아이에게로 애정이 쏠렸다. 그러나 교사는, 특히 담임은 누구를 편애하는지 드러내서는 안된다. 누구나 고유의 팬을 확보하고 있는 대중가수와 달리, 아이들에겐 담임선생이 단 한명 뿐이니까.
편애를 받는 아이는 친구들에게 왕따가 되기 십상이고, 편애의 좁은 관계망에서 벗어난 대다수의 아이들은 어린 마음을 다칠지도 모른다.
매사에 잘난 척도 더럽게 많이 하면서 제 앞가림을 못하는 건 나의 가장 큰 단점임을 새삼, 그것도 옆구리를 세게 찔리고 나서야 깨닫고 속이 상해 밤새 가슴을 쳤다.
사탕발림처럼 얄팍한 사랑을 덧칠하며 꽂는 비수는 더욱 아픈 법이거늘 소중한 사람들을 다치게 한 죄는 너무도 크다.
온종일 자학, 반성모드.
인간관계의 6단계라나 뭐라나 해서, 여섯 단계만 건너면 세상사람들과 다 연결되어 있다는 인간관계망의 협소함을 토로하는 이론을 누구나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세상 살다보면 뜻밖의 곳에서 통성명을 하다 두어 다리 건너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 일은 흔하고 특히 좁은 출판계에선 세 다리까지 건널 것도 없이 두번 정도만 관계를 건너뛰면 정보를 입수할 수가 있다.
그런데 또 한번 좁은 세상을 실감하는 일이 생겼다!
결혼이 늦어져(사실 크게 늦은 것도 아니건만) 우리 세째 고모의 애를 태우던 사촌동생 녀석이 결혼하려고
날을 잡았다는데 아 글쎄 그 아가씨가 나를 안단다. 내 사진도 봤단다. -_-;;
서로 대면한 적은 없어도 학연의 고리로 엮였으니 후배가 선배 이름 정도 아는 것이야 당연하겠지만
나는 그 사람을 모르는 상태에서 익히 나를 안다는 사촌동생의 신부감이 과연 나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전해들었을지 궁금도 하고(부디 모두 칭찬이길! *.*), 다 늙어 공부하는 주제에 퍽이나 설레발을 치고 다닌 것 같아 괜히 <사돈댁>에 책 잡힐 빌미를 제공한 건 아닌지 돌연 뜨악해졌다.
학력이나 지식의 여부와 상관없이 집단이 커지면 말들이 많아지고 취향에 따라 파벌이 생기며, 좋은 이야기도 오래 입에 오르내리게 되면 변질되기 마련이 아니던가. 어딜 가나 쉽게 적을 만드는 유형은 아니지만 대학원에서 날 마뜩찮게 여긴 인간들도 분명 있었을 텐데! ^^
암튼 잘하면 사촌동생의 결혼식에서 대학원 후배들을 대거 만나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재밌기도 하고 세상살이에 좀 더 신중하고 조심해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세상 참 좁다!
20대 한창 시절 두 여자는 모두 미인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60년대였던 그 시절엔 물론 미의 기준이 지금처럼 천편일률적이지 않았으므로, 똑같이 미인이란 말을 들었어도 둘의 아름다움은 서로 크게 달랐다. S는 혈색이 좋고 피부가 매끄러운 데다 늘 미용실에서 손질한 최신 머리 모양에 곱게 화장을 하지 않고선 절대 외출을 하지 않는 멋쟁이였다. 더욱이 성형수술이라는 개념이 생겨난지 얼마 안 되어 쌍꺼풀 수술이라도 할라치면 눈병이 난 것처럼 한쪽씩 차례로 손을 댄 뒤 안대로 가리고 다니던 그 시절, S는 회사에 휴가를 낸 뒤 양쪽 눈을 한꺼번에 화끈하게 수술하고 영화배우 최윤희가 끼던 큼지막한 선글라스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나타나 모두의 놀라움을 살 정도였다.
Y는 유독 새하얀 피부와 시원한 미소 때문에 쉽게 눈에 띄긴 했지만 원체 가꿀 줄을 모르는 데다 치장에도 관심이 없어 늘 맨얼굴이었고 유일한 화장은 주홍빛 립스틱을 바르는 것뿐이었다.
화려한 미모를 자랑하던 S는 아는 사람의 소개로 부잣집의 훤칠한 미남을 만나 적당한 연애기간을 거쳐 결혼을 했고, 결혼과 동시에 집에 들어앉아 가정부를 거느리고 편히 살았다. 시부모를 모시지도 않았고 집안일을 할 사람도 있었으니 S는 전업주부가 된 뒤에도 꾸준히 몸단장을 했고 늘 또래보다 젊고 예뻐보인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Y는 같은 동네에 살던 착한 청년과 오랜 연애 끝에 결혼했고, 짐작보다 턱도 없이 가난한 시댁에 들어가 올망졸망한 시동생들을 건사하고 온 가족을 부양하느라 아이들을 낳으면서도 계속 직장생활을 했으므로 더더욱 몸단장엔 무관심해졌다. Y에게 화장이란 여전히 주홍빛 립스틱을 바르는 것이 전부였고, 신기하게도 립스틱만 바르면 창백해 보이던 얼굴에 생기가 돈다고 주변 사람들도 인정했다.
S와 Y 모두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았지만 중년이 되기까지 두 여자의 삶의 질은 퍽이나 차이가 났다. 맞벌이를 오래 했으면서도 돈을 모으지 못했던 Y는 집세를 올려달라거나 아이들이 떠든다는 이유로 셋집에서 쫓겨나 새집을 구해야 할 때 늘 부족한 돈을 변통하러 자존심을 눌러가며 친척이나 이웃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했다. 결혼과 동시에 이미 마당 넓은 집을 소유하게 된 S는 Y가 돈을 꾸러 오면 그렇게 가난하면서 애들 옷은 뭣하러 철철이 사입히냐면서 쓸데없는 데 낭비하지 말라고 꼭 가시돋친 말을 던졌다. 집안에 잔치가 있거나 김장을 해야할 때, S는 어김없이 착하고 음식 솜씨가 좋은 Y를 불러 일을 시켰고 차비 정도의 수고비를 쥐어주며 생색을 냈다.
중년 이후 드디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Y의 삶은 그럭저럭 평온했다. 가끔 아이들 문제, 건강 문제로 사소한 높낮이는 있었지만 돌아보면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으며 보람있고 행복한 삶이었다고, 본인도 주변 사람들도 인정했다. 남편과 아이들도 젊은 시절 고생한 Y를 깊이 이해하고 위했다. 어느덧 몸매 흐트러지고 얼굴도 시커먼 할머니가 된 Y를 빤히 눈앞에 두고도, 오래 전에 알던 어르신은 젊은 시절 백옥 미인 소리를 듣던 Y는 어떻게 사느냐고 안부를 물을 정도로 외모는 몰라보게 변했지만, 여전히 Y의 화장법은 맨얼굴에 주홍색 립스틱을 바르는 것이 전부다.
S는 중년에 오히려 정신없이 바쁘고 고된 사업가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자신도 몰랐던 사업감각으로 이미 넉넉했던 재산은 더욱 풍요로워졌고 대인관계의 폭도 넓어져 끊임없는 외모와 자기 관리는 필수적인 삶의 요소가 되었다. 갱년기를 즈음하여 사업에서 손을 떼고 은퇴를 한 뒤에도 S는 여전히 바쁘게 지냈다. S역시 할머니가 되었지만 집안팎에서 여왕처럼 군림하는 자신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요새 백화점 문화센터에 사교댄스를 비롯해 활동적인 수업을 여러 개나 듣고 있고 꾸준히 헬스장에서 운동으로 몸매를 가꾼다. 별로 티나지 않게 주름살을 제거하고 가끔 보톡스를 맞거나 수십만원짜리 화장품으로 젊고 팽팽한 얼굴을 유지하는데 돈과 수고를 들이기도 했지만, S의 젊음은 근본적으로 절대로 나태하게 살지 않으려는 피나는 노력의 결과였다.
원래부터 적잖은 나이차가 있는 S와 Y는 이제 같이 늙어가고는 있지만 언뜻 보기에 나이차가 훨씬 더 많아보인다. 누가 뭐래도 허리 36인치 이상의 마담사이즈 브랜드의 옷이 편한 Y와 달리 환갑을 넘기고도 50킬로그램 내외의 체중을 유지하는 S는 절대 마담사이즈 브랜드에서 옷을 사지 않으며 3, 40대 주부들이 입는 옷을 거뜬히 소화한다. S는 어쩌다 노래방에라도 갈라치면 두어 시간 내내 쉬지 않고 노래하며 춤을 출 수 있을 정도로 체력 또한 막강한데, 한때 노래교실도 열심히 다녔던 Y는 운동이라면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외출마저 꺼리는 뒷방 노친네 노릇을 하고 있다.
S와 Y는 요즘도 종종 한시간씩 통화를 한다.
전혀 공통점이 없을 것 같은 그들의 화제는 드라마 이야기부터 사회문제, 손녀 손자들 자랑에 이르기까지 무궁무진하지만 제일 열변을 토하는 주제는 병든 몸과 병원 이야기다.
겉보기엔 건강하기 이를 데 없을 것 같은 S는 지인들이 갑작스레 유명을 달리하는 걸 지켜본 터라, 몸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느껴지면 득달같이 검진을 받아야 마음이 놓인다. 1년에 한번 하는 건강검진으로 성에 차지 않은 S는 아예 주변에 최고권위자인 의사들을 수소문해 그들을 찾아내 대학병원에 등록을 하고는 3개월에 한번씩 정기검진을 해서 이상 없다는 대답을 들어야 마음 편히 지낼 수가 있다.
워낙 지병이 많은 Y도 대학병원에 정기검진을 다니며 약을 타다먹고 있는데, S도 그렇고 Y도 워낙 찾아다니는 진료과목이 많다보니 병원 출입은 두 여자의 흔한 일상이 되고 말았다.
내분비 센터, 신장 센터, 심혈관 센터, 정형외과, 주치의만 다를 뿐 찾아다니는 진교과목마저 비슷한 두 여자가 병원 이야기가 나오면 말문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다만 S는 혈압약만 복용할 뿐 나머지 과에 순전히 정기검진을 받으러 다니는 건강염려증 환자에 가깝다는 것인데, 실제 성인병 환자와 건강염려증 환자는 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 오히려 손발이 더 척척 맞는다.
"언니, 퇴행성 관절염이나 척추관 협착증은 늙으면 누구나 다 걸릴 수 있는 거래. 언니만 운이 나빠서 걸린 게 아니야. 그러니까 너무 상심하지 말고 약 잘 챙겨먹어요."
"그래도 나이들어서도 운동을 꾸준히 하면 덜 걸린다는데 내가 게을러서 그렇지 뭐. 약은 잘 먹는데 좀체 팔다리 저린 게 나아야 말이지. 아무리 쑤시고 아프다고 해도 다른 사람이야 얼마나 아픈지 짐작도 못하잖아. 이렇게 살다가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더 살고 싶은 마음도 없어."
"언니, 그게 무슨 말이야! 악착같이 재미있게 오래 살다가 죽어야지. 그 예쁜 손녀 손자들 커서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도 다 봐야잖아. 998824 알지 언니? 99살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이틀만 앓고 죽는 거야. 암, 그래야지. 그런데 언니, 나 요즘 눈이 좀 이상한 것 같아. 백내장이 오나? 언니는 당뇨병 때문에 눈 검사 해봤어? 겁이 나서 나는 다다음주로 검사 예약을 했는데 말이야......"
두여자의 삶은 참으로 달랐다고 할 수 있겠지만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작게나마 상처를 주고받던 관계가 남긴 앙금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늙어감에 대한 동지의식과 서로에 대한 염려가 둘을 이어주고 있을 뿐이다. 어느 쪽의 삶이 더 훌륭한지는 누구도 판단을 내릴 수 없을 것 같다.
꼭 보고싶다고 생각한 영화는 아니었다.
그런데 주말 2시 결혼식과 6시 약속 사이의 공백을 홀로 메워야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불편한 구두를 신고 최대한 시간을 잘 보낼 방법은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제일 먼저 생각 난 것이 영화였고 상영표를 보며 <맘마미아>를 한번 더 볼까 하는 마음과 그래도 새 영화를 보자는 마음이 교차하던 끝에 선택된 것이 바로 하정우, 전도연의 <멋진 하루>.
헤어진 애인에게 1년뒤 다짜고짜 찾아가 "돈갚아!"라고 외치며 시작된다는 정도만 알고서(예고편을 어디서 봤더라;;) 보기 시작한 영화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제목에서 짐작되듯 두 사람의 하루 일정을 따라가는 내용이기에 템포가 느리고 흐름이 잔잔할 것임은 당연할 터.
등장인물도, 사건도 퍽 단출한데 두 배우의 내공이 워낙 대단하기 때문인지 따지고 보면 별것도 없는 이야기에 퍽이나 힘이 실린다.
도대체 믿을 구석이 하나도 없는 날건달이 되어버린 옛애인 조병운(하정우)은 영화에 나오는 모든 여자들처럼 나또한 미워할 수가 없을 듯했다. ^^
객관적으로 하는 짓이 정말로 한심한데도 계속 눈감아주고 이해해주게 되는 친구나 지인이 누구에게나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아니 이해도 안되고 돌아서면 짜증나는 상황임에도 그 인간의 근본적인 선함이나 악의없음 때문에 자꾸 마음이 쓰이는 사람이라고 해야하나.
어쨌든 하정우가 연기하는 조병운을 바라보며 다양한 유형의 지인들이 떠올라 킬킬거림이 더욱 은근해졌다.
겸연쩍으면 물개 우는 소리를 내며 웃던 K군.
본인은 절대로 바람둥이가 아니며 다만 모든 인간에게 친절할 뿐이라고 주장하던 공인된 플레이보이 J선배. (실제로 바람둥이는 모든 여자들에게 욕을 먹지만 놀랍게도 그 선배는 헤어진 모든 여자들이 그리움을 담아 칭찬을 했었다. *_*)
인생역전을 노리며 여전히 대박의 꿈을 찾고 있어, 측근들에게 나잇값 못하는 한심한 몽상가라고 손가락질을 받기는 하지만 이상스레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아 당장 밥 사주러 나올 여자가 백명(물론 나는 아니다;)이라고 자랑하는 H.
그들에게도 이 영화를 보라고 하면 단편적인 자기 모습이 캐릭터에 담긴걸 알아차리기는 할까? ㅋㅋ
어쩌면 주변에 한둘쯤 있는 다양한 캐릭터의 경험들이 영화에 녹아들어간 건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는데, 주인공 조병운처럼 그렇게 어김없이 현재와 과거의 여자들에게 노상 좋은남자일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현실감에 괜히 딴죽을 걸어보기는 했지만, 하여간 느물느물한 하정우와 스모키메이크업으로 까칠함을 강화한 전도연의 연기 덕분에 영화는 괜찮았다.
서울의 구석구석을 쏘다니는 배경 가운데 내가 알아볼 만한 곳들이 더러 있어서(아 글쎄, 내가 가끔 밥먹으러 가는 동네인 연희동 사러가 쇼핑 건물이 나오질 않겠나!) 마치 아는 사람이라도 본 양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고, 과연 저 동네는 어딜까 궁금해지기도 했다.
진한 감동도, 극적인 반전도, 흥미진진한 줄거리도 없이 그냥 조근조근, 누군가 우연히 헤어진 옛애인을 만나 인사만 나누고 헤어졌다거나, 어색하게 차 한잔 마셨다는 이야기를 조금 자세하게 듣는 느낌의 영화다.
그런 이야기를 싫어하는 사람에겐 따분하겠고, 모든 인간관계의 이야기를 흥미로워하는 사람(약간 늘어지는 부분도 있었지만 나는 대부분 눈을 빛내거나 킬킬거렸다)에겐 재미있을지도 모를.
신경숙의 작품이었는지, 강석경의 작품이었는지 모르겠는데 아주 오래 전 읽은 소설에서 <목욕탕 주인> 같은 존재라는 표현이 퍽 인상적이어서 아직도 뇌리에 남아 있다. 얼마 안되는 돈에 열쇠를 내주고는 사람들이 입던 남루하고 허름한 옷을 보관해주는 동네 목욕탕 주인 같은 존재로 주인공이 자신을 묘사했던 것 같은데, 요즘이야 목욕탕도 찜질방을 끼고 거대한 기업처럼 운영하는 추세이니 그때의 그 느낌을 지금 독자들은 아마 과거의 나처럼 공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려나 나는 요즘도 가끔 그 구절을 떠올리며 나도 주변 사람들에게 그렇게, 편하다못해 아무렇게나 대해도 되는 <목욕탕 주인> 같은 존재가 아닌가 슬며시 화가 치밀 때가 있다.
오래도록 변하지 않은 나의 신변, 그러니까 아직도 속박에서 자유로운(?) 상태라는 점과 밤에도 늘 깨어있기 십상인 직업 특성이 더해져 나는 지인들이 한밤중 찾아온 난데없는 불면을 가눌 길 없어 괴로워한다거나 취중 귀가길에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술주정이 발현했을 때 종종 통화상대로 낙점되고 만다.
따지고 보면 다 내탓이다.
옛날부터 나는 쓸데없이 친구들의 고민들어주기 및 상담에 뛰어난 척 행동했고, 연애도 잘 못하는 주제에 지인들의 연애사엔 언제나 처음부터 억지 조언자가 되어야 했다.
사실 모든 문제는 본인이 풀어나가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냥 귀담아 들어주다 간간이 맞장구를 쳐 용기를 북돋아주면 내 역할은 끝이 나는 셈이다. 물론 과거에는 강력하게 나의 주장과 충고를 해결책이랍시고 들이민 적도 있었지만, 파란 많은 연애로 고민하는 지인에게 <그딴 놈/년이랑 당장 헤어져!>라고 조언했는데 며칠 뒤에 도저히 못 잊겠다며 재결합하는 커플들을 몇번 겪은 뒤로는 특히 남녀문제의 경우 섣불리 내 의견은 섞지 않게 되었고 몇년 전부터 연애 상담은 골치아파서 아예 거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와 더불어 나이 지긋해진 주변 지인들이 차라리 결혼의 위기를 겪을망정 연애질을 하는 건 드문 상황이 한편으론 서글프면서도 어쩔 땐 오히려 반갑달까. -_-;;
물론 측근들에게 가장 속 깊은 이야기까지 털어놓는 상대가 된다는 건 친구로서 의미있는 일이고, 나 역시 앞뒤 잴 것 없이 고민거리를 주절거림으로써 그것만으로 속이 후련해지는 지인들이 곁에 있음을 다행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친척에도 촌수가 있듯 관계에도 급수가 있으니, 모든 지인들에게 똑같은 관심과 부담의 정도를 할애할 순 없는 일 아닌가.
취중이든 맨정신이든, 뜬금없이 몇달만에 전화를 걸어선 다짜고짜 자기 삶의 하찮음과 짜증을 나에게 같이 짊어져주기를 바라거나, 무조건 그 때가 좋았지, 옛날이 그리워 따위의 하소연을 늘어놓는 <급수 먼> 지인들의 투정은 이제 정말이지 버겁고 짜증스럽다. 그렇다고 확 관계를 끊어버릴 만큼 하찮은 급수의 사람들은 아니니, 앞으로도 나는 고요한 한밤중에 갑작스레 울려대는 전화벨을 무시하지 못하고 휴대폰이 뜨끈뜨끈해질 때까지 반복되는 푸념을 들어주어야 하는 목욕탕 주인 같은 운명이란 말인가. 젠장.
간만에 면벽하여 도닦듯 분위기 잡고 일 좀 해보려고 앉았다가 완전 기분 잡쳤다.
한밤중에 울려도 반가운 전화도 있으니 아예 전원을 꺼놓을 수도 없고 이거 원...
원래 정리정돈을 잘 못한다. 뭐든 사방에 늘브러지게 늘어놓고 써야지 꽁꽁 잘 정리해 숨겨놓으면 그 존재조차 잊어버리고야 마는 아메바형 인간이기도 하지만, 정돈해도 돌아보면 금세 어질러져 있기 일쑤이고 정돈하는 데 남들보다 훨씬 시간과 에너지가 많이 들기 때문에 언제부턴가는 그냥 그러려니 벌려놓고 사는 편이다.
얼마 전부터 내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어온 사람들이 잘 안들린다며 유선전화로 다시 걸겠다고 하거나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가며 통화를 해야하는 경우가 많더니 급기야 숫자판에서 아주 중요한 '0'(이응이기도 한데 다들 제일 먼저 안눌린다는 걸 보면 사용 빈도수가 제일 많은 모양이다)이 잘 안눌려 전화를 걸때나 문자를 보낼 때 속도가 현저히 떨어졌고, 한달 전부터는 '확인'도 잘 안눌렸다. 가끔은 폰카로 사진 찍으려다가, 또는 문자를 보내려다가 확인이 잘 안 눌려서 더러운 성질이 자칫 폭발하기 일보 직전일 정도였다.
내심 옳타구나 싶었다. 식별 번호도 안좋은 휴대전화 번호를 10년쯤 고집스레 써온 데는 내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기는 했지만 이 참에 나도 예쁜 신형 휴대폰을 장만하면서 확~ 번호도 바꾸고 인간관계도 정리해보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오래 전 내 휴대폰엔 이름이 뜨는 것도 싫어서 '받지마'로 저장해 놓은 인간들이 더러 있었는데 '받지마' 번호가 '받지마1, 받지마2, 받지마3'을 넘어가자 누가 누군지 기억도 나질 않아 전화를 따돌리는 건 몰라도 추후 대처하는 과정이 난감해졌다. 통화하기 싫더라도 그냥 이름을 저장해두어야 제대로 따돌릴 수 있다는 사실은 서글픈 인간관계의 아이러니로 느껴졌다.
어쨌든 휴대폰을 바꾸겠다는 결정을 내리기는 했는데, 문제는 또 어떤 기종을 살 것이냐 하는 것. 주로 부스스한 머리에 눈꼽 달고 사는 인간에게 영상폰은 필요도 없는 물건이고 난 그저 휴대폰 기능이 적당하고 '예쁘면' 그만인데 내 '예쁨'의 기준엔 '가볍고 작을 것'도 포함되어 있으니 요즘처럼 휴대폰이 나날이 커져가는 시대엔 엉뚱한 바람이 아닐 수 없다.
주변에선 아예 햅틱폰을 사라고 부추기기도 했지만 그 놀라운 기능을 내가 다 써먹을 리 만무한 것은 차치하고라도 내가 쓰는 알량한 요금으로는 80만원에서 몇천원 빠지는 그 어마어마한 기기값에서 겨우 15만원 쯤 할인 된다니 그야말로 그림의 떡! '여우의 신포도'처럼 난 그렇게 '무식하게' 큰 전화는 필요없다고 중얼거리고는 눈을 질끈 감았고, 합리적인 가격선에 드는 기기 중에서 어렵사리 하날 고르고는 어제부터 계속 '예쁘다, 예쁘다'라고 최면을 걸고 있다. ^^
하지만 매장에서 기기를 고르고 나서도 고민은 이어졌다. 휴대폰 바꾸면서 쓸데 없이 광범위한 인간관계도 정리해보겠다고 마음은 먹었지만 옛날 번호를 새 번호로 연결해주는 '당연한' 무료 서비스를 무작정 거부하기엔 예상되는 파장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전화하기 싫어하는 내가 사방에 죄다 전화나 문자로 새 번호를 알릴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
결국 나는 무려 2년이나 새 번호를 안내도 해주고 연결해준다는 서비스에 동의하고 말았다. 그러면서 '2년간 연락 안하는 인간들은 그래도 정리 되겠지...'라고 중얼거렸다. 물론 나중에 전화를 따돌리고 싶을지 어떨지 몰라서, 이전 전화기에 저장되어 있던 233개의 전화번호들은 그대로 다운받아 달라고 한 상태다. -_-;
따져보면 정돈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앞으로 2년 안에 나에게 볼 일이 있어 전화를 거는 사람은 여전히 내 인간관계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겠지만 아메바 같은 나는 2년 뒤에도 정리했어야 할 관계와 계속 유지해야 할 관계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어리버리 널브러져 헤매고 있을 거다.
어쨌거나 새 번호 안 알려주면 삐칠 위험이 있는 가족들과 몇몇 지인들에게 문자질을 하다가 그것도 귀찮아져서 그냥 두고두고 서로 연락할 일 있을 때 알리기로 했다. 게으른 인간의 정체는 어떻게든 변하질 않는다. ㅋ
새로 산 전화기는 이런데, 사진처럼 선명한 보라색은 아니고 자줏빛에 더 가깝다. 색깔 이름이 '버건디 핑크'란다. 그냥 '버건디' 였음 좋았을 것을. 내가 찍은 사진은 아니고 퍼왔음. ^^ 폴더형은 싫고 슬라이드폰에 전체적으로 동글동글한 예쁜 전화기를 사고 싶었지만, 게으름과 귀찮음이 더 큰 목소리를 냈으므로 문자 배열 때문에 결국엔 그냥 쓰던 회사 기기로 정했다. 빌어먹을 삼성.
어렸을 때부터 나는 집에 손님이 오는 게 싫었다. 숫기 없는 아이들은 원래 그렇지 않은가. 낯선 사람 앞에 불려 나가 꾸벅 인사를 하고, 의무적으로 몇 마디 질문에 대답을 하고 나면 무슨 시험에 합격한 것처럼 용돈을 손에 쥐기도 했지만, 나는 용돈 따위 필요 없으니 제발이지 집에 손님이 오지 않기를 바랐던 것 같다. 심지어 동네 친구들이 많았던 중학생 때를 제외하면 친구들을 집에 데려와서 노는 일도 극히 드물었다. 지금 사는 이 집에 다녀간 친구들이 더러 있기는 하지만, 다들 한두번에 그쳤을 뿐 "우리 집으로 놀러와"라는 말은 예나 지금이나 웬만해선 내 입에서 나오지 않는다.
다행히 부모님도 그리 숫기가 많은 편은 아니어서 가난한 살림살이를 드러내는 걸 꺼려하셨던 지라 집에 손님이 자주 들이닥치진 않았다. 친척들이야 워낙 많으니 무슨 날 때마다 오가는 일이 잦았지만, 우리 집에서 친척들은 손님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그냥 가족일 뿐. 하지만 아주 가끔 아버지가 술을 드시고 친구들을 몰고 오시거나, 학교에 다니실 때 학생들을 몰고 들이닥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럴 때면 나는 막 화가 났다. 낯선 사람들에게 내 영역을 침범당하는 기분이랄까... 게다가 온 식구들이 청소엔 젬병이라 늘 너저분하게 늘어놓고 사는데, 우리끼리야 편하고 좋지만 남들이 보고 게으르다거나 지저분하다고 욕할 게 뻔하니 창피했던 거다.
그나마 손님이 미리 온다는 걸 알면 눈가리고 아웅하듯 보이는 데만 대강 청소라도 해두지만, 그런다해도 낯선 이들과의 어색한 대면이라든지 손님접대 과정은 참 싫고 민망했다. 어른이 된 뒤에도 손님을 싫어하는 마음은 여전한데, 특히 회사를 관두고 집에서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중년 및 노년에 접어든 아줌마들의 취미가 몰려다니며 수다떨기임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수시로 이집저집 몰려가 끼니를 해먹고 와글와글 수다를 떠는 아줌마들의 취미가 가끔 우리 집에서 발현되는 경우, 내 입장이 몹시 난감해진 것이다. 특히 올빼미 생활에 빠져든 프리랜서 번역가가 집구석에서 낮동안 대체로 어떤 모습일지를 감안할 때, 상황은 더욱 괴로워진다. 쑥대머리 산발을 하고 나가서 엄마 친구들에게 인사를 하자니 꼬락서니가 말이 아니고, 인사를 안하자니 그 집 딸 예의없다는 소리를 들을 테고. -_-; 내가 오밤중에 일하고 대낮까지 잠을 자야하는 오묘한 직업을 가졌음을 나중엔 동네 아줌마들도 이해해 주셨기 때문에, 요즘엔 감지 않은 머리를 질끈 올려 묶고 눈꼽도 떼지 않은 얼굴로도 꾸벅 인사를 하거나 아예 태평하게 잠을 자고 있을 정도로 편해지긴 했지만, 우리 집으로 마실 오시는 엄마의 최측근 동네 친구들을 제외하면 여전히 집에 누가 오는 게 싫다.
아 그런데, 요샌 신경질나게도 손님들이 자주 들락거린다. 엄마가 깁스를 해 꼼짝 못하게 되었다는 소문을 만방에 자랑하듯 알렸기 때문에 문병객이 늘어난 것이다. ㅠ.ㅠ 물론 다리를 다친 걸 빼면, 엄마는 그 어느때보다도 컨디션이 좋으시다. 뭔가 당신 몸에 더 큰 위기가 닥치면 울 엄마의 우울증은 언제 그랬냐 싶게 꼬리를 내리는 오묘한 성격을 갖고 있는데, 한동안 심해지는 듯하여 나의 제주도 여행까지 무산시켰던 왕비마마의 우울증은 이번에도 발목 뼈에 금이 간 것과 동시에 급호전되었다. ^^ 온 가족은 물론이고 친구들, 친척들의 관심이 집중될 뿐만 아니라, 툴툴거리며 성깔 부리던 늙은 딸도 순한 양처럼 왕비마마를 보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아무래도 몹시 뿌듯하신 모양이다.
어쨌거나 여전히 올빼미로 살아야 하는 나로선 갑자기 늘어난 손님접대가 짜증스러울 만큼 짐스럽다. 바쁠 땐 집안 청소에 신경쓰기는커녕 사흘씩 머리도 안감고 질끈 묶고 있는 데다가 무릎 나온 추리닝이 기본 옷차림인데 사정 빤히 아는 동네 아줌마들이야 그렇다 치고 낯선 이들에게까지 그런 한심한 모습을 보일 수야 없는 법 아닌가! ㅠ.ㅠ 설상가상으로 오늘은 엄마가 다니시는 절에서 떼지어 문병을 다녀갔다. 원래 어제부터 온다는 소식에 기겁하여 일단 청소는 했지만 그럴 필요 없다고 극구 말렸는데 급기야 쳐들어 온 것이다. 그분들이야 아픈 사람을 문병하겠다고 생각하는 건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무슨 자랑이라고 사방팔방에 부상 소식을 알려 하루가 멀다하고 손님들을 불러들이는 왕비마마가 신경질나고 꼴보기싫었다. (나 못된 딸 맞다)
아무것도 준비할 필요 없다지만, 별 것 아니라도 과일 깎아 내고 차 끓여 내는 게 얼마나 귀찮은데!! 젠장. 게다가 처음 보는 것이나 다름 없는 아줌마들 사이에서 꿔다 놓은 보리자루처럼 구석에 앉아 있는 것도 완전 고역이다. 눈치 봐서 얼른 방으로 도망쳐 나오기는 하지만, 손님 접대는 정말 내 취향이 아니다! 어서 엄마가 깁스를 풀어 병문안 오겠다는 사람들도 없어지길 바랄 뿐인데, 앞으로 남은 3주가 참 길게만 느껴진다.
벨로를 시초로 블로그 이웃분들의 연이은 <자신감> 포스팅을 보면서
약간은 자아비판 비슷한 고백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겠지만 나도 스스로를 돌아보고 싶어졌다.
그런데 그간 바쁘기도 했지만 자꾸 뜸을 들이게 됐던건
과연 내 인생에서 자신감 100개인 시절이 있었던가, 아닌가 판단이 잘 서지 않아
그냥 내 인생에서 가장 자신감으로 충만했던 시기를 정점이자 100개의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 것일까
우유부단한 고민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미즈키님이나 키드님처럼 살아오는 동안 자신감이 100개로 온전히 채워진 적은 없다고 인정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생각하면서도, 내가 가장 자신만만하고 심지어 오만불손하기까지 했던 시기를 억지로라도
100개라고 우기고 싶은 마음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아마도 그건 <나를 믿는 마음>인 자신감이 앞으로 더더욱 고개를 숙이거나 고작해야 수평선을 유지할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일 게다.
그러므로 <자신감 백개>라는 말을 처음 뱉은 11살 이쟁그만 양이나 벨로의 <자신감 백개>와 비교한다면 나의 자신감 백개의 수준은 최소한 다섯개쯤 부족한 기준의 정점임을 미리 털어놓고 시작해야겠다.
돌아보면 내 인생은 초기엔 비교적 기복이 별로 없는 자신감 곡선을 그리다 비스듬히 상승해 정점을 찍은 다음 비교적 짧은 시기에 쌍봉낙타 혹 같은 굴곡을 겪은 후 계속해서 완만한 하강세를 보이고 있다고 생각된다.
어떻게든 재미있어 보이려고 나 또한 자신감 그래프를 덩달아 그려보았다.
컴맹답게 이면지에 색연필로.. -_-;;
이북에서 월남한 실향민 출신의 부모 슬하에서 자란 8남매 가운데서도 장남이신 우리 아버지의
첫딸로 태어난 나는 온 가족의 사랑은 물론 동네 사람들의 사랑까지 독차지하며 자랐다고 했다.
동네에 워낙 아기들이 없었기도 했고, 말이 빠르고 노래도 곧잘해서 재롱을 꽤나 많이 부렸다나 뭐라나..
외가에선 울보인 나를 <난이>(못난이의 준말인데, 외삼촌들은 내가 20대가 된 후에도 그렇게 불렀다 ㅎㅎ)라고 불렀지만 내심 나는 못난이 3형제 인형처럼 못생긴 건 <절대> 아니라고 자신했다.
여름에 태어난 아이를 억지로 7살에 입학시키고 할머니가 업어서 등하교를 시킬 때도
한글을 몰라 칠판에 적힌 숙제를 베끼느라 초반엔 늘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엄마가 손수 만들어준 원피스와 블라우스를 입고 다니던 <귀여운> 꼬마를 선생들도 다들 예뻐해서
나는 그들에게 항상 볼타구니를 꼬집히는 것만이 불만이었다.
특별히 공부를 열심히 했던 기억은 전혀 없고, 그저 선생님 말씀을 중히 여겨 숙제만은 빠뜨리지 않았던
나는 어느새 우등생 범주에 속했고, 유별나게 뛰어나진 않으면서 그림도, 글짓기도, 노래도 이것저것 두루두루 잘 하는 편이라 동생들에게 모범이 되는 의젓한 누나였다.
그럼에도 자신감이 백배할 수 없었던 이유는 부족한 숫기와 형편없는 운동신경 때문이었다.
반장 부반장 따위를 하는 건 죽어도 싫었고, 어려운 선생님들이 득실거리는 교무실에 들락거리는 것도 싫었으며, 몸을 써야하는 체육 시간엔 한숨만 나왔다. 심지어는 국민학교 5학년때 기계체조 특성교육을 실시하는 바람에 체육 성적 '양'을 받은 적도 있다. ㅋㅋ (방학날 충격을 받은 엄마는 당장 성적표를 들고 학교로 뛰어가, 우등상을 주지를 말든지, 체육 양을 주지 말든지 그런 게 어딨냐며 따지기도 했다)
그래도 내 유년시절의 자신감을 갯수로 따져보면 70개에서 조금씩 늘어났던 것 같다.
중고등학교 때도 양상은 비슷했다. 특별히 열심히 공부를 하는 편은 아니고 그렇다고 머리가 뛰어난 것도 아니라 있는 듯 없는 듯 눈에 띄지 않으면서 제 앞가림은 알아서 하는 편이랄까.
리더십도 숫기도 없으니 반장 재목은 결코 안되고(뽑아준대도 싫었다), 미화부장이나 독서부장 정도나 하면서 뒤에서 구시렁구시렁 거리는 인간이 바로 나였다.
집에서도 공부하라는 말 들어본 적 거의 없었고, 오히려 시험 때 반짝 낮엔 괜히 책상정리만 하다가 밤늦게 공부를 하려고 들면 부모님은 무리하지 말고 일찍 자라고 하셨더랬다. -_-;;
수업시간에 안 졸고 필기를 열심히 하기는 했지만, 그 외엔 정말로 별로 공부는 안했는데도 막연하게 우등생이라고 하니, 내심 진짜 열심히 공부하면 1등도 문제는 없겠군...이라고 건방지게 생각하면서 막상 실천은 하지 않는(아마도 겁이 났겠지) 비뚤어진 오만함도 있었다.
그림에 소질이 있다며 미대진학을 권유받기도 했지만, 대학 진학을 위해 뒤늦게 화실을 다니는 <공부 못하는 아이들> 부류로 취급받기도 싫고(아 재수 없다) 비싼 학원비로 부모님께 부담을 드리고 싶지도 않아서 그림은 취미로 삼아야지 마음 먹기도 했다. (자신감 갯수 80)
심지어 고3때도 열심히 공부를 한 기억보다는 야자 시간에 몰래 떡볶이 사먹으러 다니던 기억이 더 많고
연애하느라 고민에 빠진 친구 얘기 들어주느라 등나무 아래 벤치에서 수다를 더 오래 떨었다.
결국 혐오스러운 수학에 발목을 잡혀, 기대보다 낮은 학력고사 점수에 재수하겠다고 단식투쟁을 잠시
벌이긴 했지만, 대학엘 다니고 보니 학교 이름값도 전공도 내겐 그리 중요하지 않을 만큼 대학생 생활이 즐거웠다. ^^
얼마 차이도 나지 않는 점수 몇점 때문에 이른바 일류대학이라는 곳에 못 간 걸 후회할 필요도 없을 만큼, 내 주변엔 훌륭한 친구들이 많았다. 대학에서도 여전히 나는 친구들에게 노트필기를 빌려주는 우등생이었고, 문어발식 연애가 가능할 정도로 이상스레 인기도 높았다. ㅋㅋ (자신감 갯수 90)
졸업을 앞두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에 역시 공부는 하지 않은 채 술만 마셔대던 4학년 마지막 학기에 시험삼아 넣어 봤던 대기업 입사 서류전형에선 당연히 떨어졌지만(토익 점수표도 없이 서류를 접수시킨 내가 미친*이라고 했다^^) 곧이어 동기들 가운데 거의 두세 번째 취업자가 되었으므로 자신감이 꺾일 필요는 없었다.
미국 의류수입업체의 서울 지사였던 나의 첫직장은 참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게 해준 곳이었다.
영문과 출신이라고는 하지만 실용영어는 달달 외운 자기소개 내용밖에 없었던 내가 서바이벌 잉글리시를
익힌 곳도 그곳이었고, 가끔 야근과 철야를 불사하더라도 코피 터지도록 열심히 일해서 실력을 인정받고 말겠다는 꿈을 키운 곳도 거기였다. 패션과 무역에 대해서도 수박 겉핥기 식이나마 배울 수 있었다.
뉴욕 브로드웨이에 있는 본사로 출장을 다녀오고, 직접 개발했던 샘플 옷이 본생산을 거쳐 메이시즈, 시어스 같은 쇼핑몰에 걸려있는 걸 보게 될 때의 성취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내 본명 대신 영어 닉네임이 영어로 찍힌 명함을 들고 다녔던 그 시절엔 정말로 내가 실력 대단한 MD라도 된 듯 의기양양하여, 언젠가는 그 업계에서 지사장이나 지점장 자리 하나 꿰차고 있지 않을까 상상하기도 했다. 매일매일 너무도 바빴고 하루가 멀다하고 술 마실 일도 있었는데, 다음날엔 술냄새를 풍기면서라도 거뜬히 출근했다. 누구와 약속이라도 잡으려면 다이어리를 펼쳐들고 일주일 뒤쯤을 기약해야 할 정도로 쓸데없이 분주했다. 그 때가 바로 내 자신감이 정점이라 느껴지는, 그래프 상의 A 지점이다(드디어 자신감 100개!). ^^*
하지만 첫 직장에서 만 3 년을 지내고 보니 그동안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불합리한 인종차별과 가혹한 인사관리 문제를 개선하지 않고는 더 견딜 수가 없었고, 한국 노동위원회에 제소까지 하는 노력을 기울이다 결국엔 내가 떠났는데, 이후에 별 깊은 고민 없이 선택한 회사들은 더욱 가관이었다.
인종차별은 있었어도 성차별은 없었던 미국 회사와 달리, 한국 회사들은 뿌리 깊은 성차별로 나를 좌절시켰고 늘 커피 타는 문제, 복사하는 문제, 승진문제로 턱턱 내 숨통을 막았다. *_*
내가 아이템을 잘못 선정하여 입사한 잘못도 있지만, 야심만만했던 내 의욕만큼 회사에서 나를 키워줄 수 없는 분야임을 알게 되었으니 자신감이 극적으로 꺾이기 시작한 건 당연했다.
나는 다시 미래를 염려하며 장기적인 안목으로 직업을 살폈고, 지겹도록 되풀이했던 매뉴얼과 계약서 번역이 아닌 진짜 번역을 평생 하고프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 무렵 우연히 지인의 번역원고를 몇 꼭지 도와주고 나서 재능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데서 대책없이 용기를 낸 것이었는데, 내가 손만 뻗으면 당장이라도 출판사에서 앞다투어 번역을 맡길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크게 어렵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던 번역가로서의 첫발은 그리 쉽지 않았다.
그렇게 서른을 앞두고 번역가를 지망하는 막연한 백수로 지냈던 6개월 정도의 시절이 바로 자신감이 60개 정도로 떨어진 그래프의 B 지점이다.
나름대로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처음 시험번역을 의뢰했던 출판사에서 "좀더 습작이 필요하다"는 통보를 받았을 때 좌절하긴 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도 놀라울 정도로 나는 머지 않아 또 기회가 찾아올 것이라고 믿었기에 자신감은 바닥을 향해 치닫지 않았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내게 습작이 필요하겠다던 출판사는 내가 낑낑대며 6개월쯤 습작을 하고 있을 무렵 다시 연락을 해왔고 1995년을 시작으로 내 이름을 달고 출간된 번역서들은 해가 갈수록 늘어났으며
나를 찾는 출판사도 차츰 늘어났다. ^^
비상근으로 외서기획을 맡아달라는 출판사도 있었고, 해외 도서전에 대신 다녀오기도 했다. 부족한 공부도 할 겸 가방끈도 늘릴 겸 대학원에 다닐 때는 평생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 적이 없다고 생각할 만큼 등록금 아깝지 않게 공부만 했다. 방학동안엔 다시 번역에 매달려 편집자들에게 <선생님> 소리를 들으며 원고독촉을 받았지만, 띠동갑에 가까운 아이들과 어울려 학교를 다니며 적게는 5살쯤, 가끔은 무려 열살이나 어리게 취급받으며 "학생!"이라고 불리는 묘미도 짜릿했다. 이제 더는 진솔한 인간관계를 새로이 맺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지만, 어딜 가더라도 마음이 통하고 생각을 공유하는 친구는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의 자신감은 정점까지 다시 오르지 못했다.
서른 살 이후로는 연애에도 자신이 없어졌다. 아니, 아예 낯선 사람들과 어울려 뭔가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는 것이 귀찮고 두려웠다. 말로는 "연애 빼고 내가 못하는 게 어딨어!"라고 하지만 그 목소리는 예전보다 확실히 덜 활기찬 게 느껴졌고, 사진 속에 변해가는 내 모습도 흠칫흠칫 놀라웠다.
물론 여전히 나는 자유로움과 소박한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내 일이 좋고, 남들의 잣대로 보아 크게 성공하겠다는 돈욕심도 없으며 더 큰 이름을 떨치겠다는 야망도 없다.
원숭이 줄타기 법칙 운운하며 엄살을 떨기는 하지만 지금보다 더 게으름만 부리지 않는다면 꾸준히 일감을 물어다줄 고마운 지인들도 충분하므로, 자신감이 아닌 행복의 지수로 따진다면 분명 80이상일 게다.
그럼에도
이제 더는 사람들이 나를 5살씩이나 어리게 보지 않는 것을 당연하다 여기면서 속이 상하다. -_-;;
"과학과 의술의 힘을 빌지 않고 이 정도면 내가 제일 예쁜 거야!"라는 망언을 서슴지 않던 내가
요샌 고모들의 성화대로 얼굴에 대거 포진한 점이랑 기미는 레이저로 제거하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겠다..는 놀라운 생각도 하게 되었다. ㅠ.ㅠ (물론 귀찮음과 아픔을 극복할 수 있을지는 나중 문제다)
누가 나이를 물으면 우선 흠칫 놀란다. 나도 내 나이가 놀랍지만, 과거의 내가 참 많은 것을 이루어놓았을 것이라고 꿈꾸었던 미래의 그 나이에, 그리 성장하지 않은 모습으로 살고 있음이 어쩐지 부끄러워해야할 노릇은 아닌지 반성되기 때문이다.
확실히 한 인간으로서 현재 내 자신감은 계속해서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다.
그나마 그래프를 그리다 보니 지금의 내 위치 C지점은 아직 10여년전의 나락보다 높으며,
엄청나고 드라마틱한 인생역정을 보내느라 심신을 소모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더 재미없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를 믿을 수 있었던 힘을 심어준 주변과 가족의 애정에 감사해야 될 것 같다.
내가 뭘하든 결국 내 가족과 지인들은 나와 내 선택을 믿어주었다.
펄펄 뛰는 자신감은 조금씩 잃어도 괜찮으며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자존감이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내 자신감의 바탕이었던 주변의 힘이 작용한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는 나의 자신감이 역사상 최저치를 지나 더욱 아래로 떨어져 바닥에 닿는 일도 생겨날지 모르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잘 살았으니 괜찮다고 스스로 등두들겨 줄 작은 용기는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예나 지금이나 나의 커다란 재산이자 든든한 빽인 <인복> 때문에라도 말이다.
사람들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스무살 시절엔 도저히 알 수 없던, 사람들의 변함없음을 서른살이 되고 마흔살을 넘어서면서
새삼 깨닫는다.
돌이켜보면 아득하기도 하고 눈깜짝할 새에 지난 세월 같기도 한 시절에 처음 만나
10년, 20년을 함께, 또는 따로 보낸 사람들과 한 자리에 모이면 친근함과 낯설음을 동시에 느낀다.
어깨를 휘젓는 걸음걸이, 듣기 좋은 낮은 목소리, 까르르 귀를 찌르는 독특한 웃음소리, 언제나 썰렁하기만 한 유머, 수줍은 듯 빙그레 웃기만 하며 술잔을 드는 손길, 시비를 거는 것 같은 거침없는 말투, 못마땅한 사회에 대한 투덜거림과 불평, 술자리에서 먼저 일어나는 건 절대 용서 안되는 고집 같은 것들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변한 건 운동화 대신 정장과 구두가 더 어울리는 외모의 까닭모를 반듯함, 그들이 내미는 명함에 새겨진 어마어마한 직함, 눈가에 살짝 내려앉은 주름살, 솟아오른 배나 숱이 엷어진 정수리와 넓어진 이마, 서로 다투듯 술값을 계산하겠다고 내미는 법인카드, 휴대폰에 저장해놓고 보여주는 아이들 사진, 가끔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흘러나오는 재테크와 골프 이야기 등이다.
그런 자리에서 나는 정말로 20년전으로 돌아가 탁자를 두들기며 웃다가도
금세 또 유체이탈을 해서 자기 몸을 내려다보는 혼령처럼 전혀 낯선 이들의 대화를 천장쯤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느낌을 수시로 오간다.
어딜 가나 제일 변하지 않았다는 소리를 듣는 게 이젠 뒤떨어졌다는 소리로 들리니
내게도 확실히 변한 건 있다.
뭐든 할 수 있다고 떵떵거리던 자신감과 낙천적인 사고는 이제 씁쓸한 자괴감에 쉽사리 자리를 내주고 만다.
그래도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약간 허황된 꿈과 로맨스를 기다리고
휘황찬란하고 복잡한 무대 한 가운데서 조명을 받는 것보다 어둑한 구석에서 소박하게 즐기는 게 더 좋고
재테크로 골치아프게 벌어들인 재산보다 인복 많은 게 더 기쁘고
편한사람들과 함께하는 술자리가 기대되고 지금껏 맺어온 인간관계 속에서 행복을 느낀다.
들여다 보면 하나도 변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세월과 함께 확실히 성숙한 사람들 틈에서
본래의 미숙함과 치기를 마냥 갖고 살면서, 나 하나쯤 그런 사람도 있어야지, 하고 위로하는
내 목소리에 점점 힘이 빠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세월의 무게일까.
변함없고 한결같다는 게 자랑일 수도 있지만
어쩐지 미련스런 집착처럼 느껴지는 날, 그게 바로 오늘이다.
그러고 보니 날씨따라 펄럭거리는 감상주의도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
이러니 내일은 또 펄럭펄럭 행복할 수도 있겠다. ㅎㅎ
별 근거가 없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철석같이 믿고 있는 혈액형별 성격분류는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하지만 형제자매 가운데 몇번째로 태어났는지에 따라 성격과 기질이 어느 정도 달라져 첫째는 첫째끼리, 둘째는 둘째끼리, 막내는 막내끼리 통하는 공통점은 확실이 있다고 생각한다. 언제 어디서든 예외없는 법칙은 없으니 모든 사람에게 '딱 떨어지게' 맞는 건 아니지만 주변 친구들이나 친척, 지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맏딸은 맏딸대로, 맏아들은 맏아들대로, 둘째나 셋째, 또는 막내 특유의 성격을 얼추 짚어낼 수 있다는 뜻이다. 하물며 맏딸이나 맏아들, 막내의 기질을 모두 갖춘 외동딸이나 외동아들의 특징도 따로 분류가 가능할 것 같다.
하지만 표본조사 같은 거창한 이론적 근거를 마련한 적이 없으니 절대적으로 맞다고 극구 주장할 수야 없는 일이고, 내가 직접 겪어보지 못한 둘째나 셋째, 막내로서의 삶을 속속들이 짐작해 기질을 파악해볼 재주 또한 없다. 다만 맏딸로 살아온 본인의 경험과 주변의 맏딸과 맏아들을 두루 살핀 결과 첫째 특유의 기질은 짚어낼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첫째는 자존심이 강하다. 만만하게 따라 배울 손위 형제들 없이 부모나 조부모를 역할모델로 삼고 성장했으며, 늘 주변에서 '너는 첫째니까 의젓해야 한다'든지 '누나 또는 형님으로서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큰 덕분에 은연중에 어른들과 자신을 같은 선상에 놓고 보는 자존감이 극에 달하기 때문인 듯하다. 따라서 누가 시키는 일은 견디질 못하고 스스로 다 알아서 하고 싶어한다. 심지어 부모가 하는 잔소리에도 부아가 치밀 정도여서, 스스로 하려던 일도 누가 채근하면 버럭 짜증을 내면서 아예 하기 싫어진다. 더욱이 잘못을 지적받는 일은 크나큰 수치로 여기기 때문에 스스로 잘못임을 알면서도 그 순간엔 수긍하지 못하여 반항을 하기도 하고, 비록 나중에 후회하고 잘못을 인정하는 일이 있더라도 처음엔 자기가 옳다고 박박 우긴다. 머리가 굵어지면서 부모 또한 약점 많은 인간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에 더욱 못미더워하거나 안쓰럽게 여기므로 철이 일찍드는 경우가 많다.
둘째, 첫째는 카리스마나 리더십이 강하거나, 최소한 그렇게 되려고 노력한다. 어느 집안이든 형제가 여럿인 가운데 첫째는 부모의 기대와 요구치가 높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동생들을 보살피고 이끄는 임무에 충실하다. 간혹 형제가 많으면 군림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첫째도 있을 정도다. 듬직함, 책임감, 솔선수범, 친화력 등 어린시절부터 첫째에게 흔히 요구되는 정서를 골고루 개발하는데 성공한 첫째들은 가족 이외의 공동체에 진출해서도 그 같은 기질을 발휘하여 주변의 우러름을 받지만 그렇지 못하여 약간이라도 비뚤어져 자존감만 앞세우는 첫째는 손가락질 받는 '못된' 독불장군이 되는 수도 있으며, 막무가내로 권위주의를 앞세우기도 한다. (물론 첫째로 태어나서도 병약하다든지, 심성이 유약하여 첫째의 운명이나 주변의 기대를 충족하지 못하여 카리스마는커녕 평생 그늘이나 뒷전에 숨어 투덜거리기만 하는 첫째도 없지 않다)
셋째, 첫째는 완벽주의 성향이 다른 이들보다 강하여 흔히 까다롭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이 기질은 자존심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도 있는데, 어려서부터 매사에 칭찬을 듣고 타의 모범이 되어야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이 머리에 박혀있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 완벽하게 끝마무리를 하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는다. 첫째들에게 '대충하고 넘어가기'란 웬만해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가끔 말로는 '대충한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완벽해야 만족하므로 종종 주변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들기도 한다.
넷째, 위와 같은 기질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첫째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데, 자존심 때문에 또 그렇다는 티를 내지 못하고 혼자서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어 속으로 끙끙 앓기 쉽다. (스트레스 때문에 생기는 병이나 우울증에 걸릴 확률 또한 첫째가 더 높을 것 같다는 심증이 있기는 하지만 확실하진 않다. -_-;;)
대단히 신빙성 있는 이야기처럼 적어놓기는 했지만, 사실 순전히 내 주관적인 의견일 뿐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성별을 불문하고 내 주변의 첫째는 내가 관찰하고 실감하는 공통적인 특질을 갖춘 경우가 많아 서로 이해의 폭도 큰데, 어떤 경우는 첫째 기질끼리 서로 부딪쳐 어려운 관계가 되기도 한다. 맏딸이었던 엄마가 막내딸이었던 엄마보다 첫째를 더 잘 이해하기도 하지만 자존심과 완벽주의를 앞세우는 첫째 출신 두 모녀의 성격이 더 첨예하게 부딪칠 때도 있다는 얘기다.
어쨌든 내가 보기에 첫째는 확실히 쉬운 일도 어렵게 하며 살려는 경향이 없지 않다. 첫째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내가 유별난 성격과 기질을 갖춘 인간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이왕이면 내가 별난 인간이라 세상 참 팍팍하게 산다는 결론보다는 '첫째라서 그런 거야'라는 위안을 받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억지스럽게 꼽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수많은 인간적인 결점을 단순히 혈액형 때문이라고 믿으며 위안을 받으려는 마음과 별로 다르지 않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