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에 해당되는 글 45건

  1. 2007.12.31 새해라니 6
  2. 2007.12.10 같은 고민 8
  3. 2007.10.18 습관 14
  4. 2007.10.14 취향 11
  5. 2007.09.29 싫은 사람 13

새해라니

투덜일기 2007. 12. 31. 16:13
겨우 하루 차이로 헌해와 새해를 나누는 건 아무래도 억울하지만
아무리 앙탈을 부려도 2008년은 몇 시간 있으면 시작될 것이다.
어차피 우주의 세월에 비하면 인간들의 1년 그까짓것 찰나에 불과하다고 위로는 해보지만
나이가 들수록 지난 1년은 정말로 찰나처럼 느껴져 허허로운 마음이 드는 걸 막을 도리가 없다.

벌써부터 사두었던 새 달력을 며칠 전부터 걸어놓은 걸 보면
마음의 준비는 해놓은 것 같기도 한데
연말모임에서 덕담과 함께  지인들이 일깨워준  나의 나이는  꽤나 어마어마하여 더럭 겁이 난다.
남들의 잣대로 나를 재단하지 말자고 다짐해도 시기적으로 한해를 정리해야하는 순간이 오면
은근히 주눅이 드는 걸 어쩌랴.

게다가 외형상으로 나의 2007년은 참 보잘것없었다.
표지갈이를 하거나 보급형으로 다시 나온 책을 빼고 순수한 신간 번역서는 겨우 두 권.
번역작업을 마친 건 5권.
핑계를 댈 수 있는 큰일을 치렀으니 나름 수긍은 가지만
'직업인'으로서 그다지 열심히 살지는 않았음은 확실하다.

그래도 '딸'로서 '고모'로서 '누나'로서 '친구'로서
그리고 '블로거'로서는 꽤나 아등바등 노력했다고 생각하며 자책만 하지는 않을 작정이다.
이만하면 잘 산 거지 뭐!

새해에도 돈벌이나 재테크 따위로 성공과 행복을 가늠하는 남들의 잣대에 휘둘리지 말고
'나'답게 소박하고 씩씩하게 자알 살아갈 수 있기를 빌면서 새해를 맞이해야겠다.

아 끝으로...(원래는 이 이야기를 하려고 글을 쓰려던 것이 변질되고 말았다)
이 공간에서 새로이 관계를 맺게 되어
알게 모르게 나에게 기쁨과 힘을 전해주신 여러 블로그 이웃분들께 깊이 감사한다.
인간관계란 참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래도 잘 도모한 관계는 늘 내게 큰 재산이고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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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고민

하나마나 푸념 2007. 12. 10. 14:47
작년 12월에도 분명 똑같은 고민을 여기 적어두었던 기억이 있다.
12월이라서, 한해를 마감해야 하므로 꼭 만나서 밥이든 술이든 나눠먹자는 지인들의 청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고민.

돌이켜보면 다사다난하지 않았던 해가 한 해도 없었고
연속되는 시간 속에 나이 한 살 더 먹는 것이 '까짓거'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는데
왜 꼭들 그렇게 '연말연시'를 외쳐대는 것인지 원.

'송년'과 상관없이 만날 일이 있으면 그냥 만나고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냥 만나서 먹으면 그만인데...
솔직히 나 역시 한해 자알 살았으니 굳이 꼭 만나서 등 두들겨주고 어깨 토닥여 받고 싶은 이들이 있기는 하다.
올해는 엄마 지킴이 핑계로 집에 콕 박혀 지낸 시간이 많았던 터라
계속 만남을 미뤄온 미안함이 앞서는 지인들도 없지 않으니
더욱 무거운 마음으로 연일 달력만 째려보고 있다.

남은 날은 겨우 스무날.
반드시 2007년에 못을 박아 나를 채근할 친구는 없다는 걸 알면서도
갑자기 마음이 바빠지는 12월이다.
인간 관계가 역시 어려운 것인지, 어려울 필요는 없는데 나 홀로 소심하게 어려워하며 고민하는 것인지
일단 모두에게 나중에 다시 연락하겠노라고 말미를 받아놓고는
사방에 전화 걸고 연락하는 게 또 귀찮고 싫어서 진저리가 난다.
촌스럽게 난 왜 전화하는 게 이리도 어려울까.

작년 재작년 말미에도 한 고민을 올해도 똑같이 되풀이하고 있고
내년, 후년에도 어김없이 우유부단하게 고민하고 있을 내 꼬락서니가 퍽이나 한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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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

삶꾸러미 2007. 10. 18. 23:43
반복되는 습관에서 벗어나면 못내 불안해지는 것.
그건 곧 변화를 두려워하는 '늙어감'과 동의어라고 언젠가 들은 것 같다.
'나는 가능한 한 평범하게 늙어가진 않을 테야!'라고 다짐하듯
사소한 습관을 바꿔보려 하지만
결국엔 늘 제자리다.

자는 방에 시계를 한동안 없앴었다.
방방마다 벽시계가 하나씩 꼭 걸려 있어야 하는 건 참 구태의연한 발상이지만
노친네들이랑 오래 산 터라 그게 너무도 당연한 듯했다.
그러다 부엌 시계가 고장나는 바람에 옳다구나 내 방 시계를 그리로 옮겨놓고는
벽시계 없이 살아보리라 생각했다.
밤마다 극도로 예민해진 순간 째깍거리는 소리 때문에 시계 건전지를 빼놓고 자는 날도
꽤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횡뎅그러니 못만 남은 벽을 나는 하루에도 몇번 씩이나 습관처럼 쳐다봤다.
집에 있을 땐 늘 휴대폰을 지니고 다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얼 그렇게 시간에 쫓기며 사는지 스스로도 피식 웃음이 났다.
그러나 늘 쳐다보았을 때 있던 물건이 졸지에 사라졌다는 상실감은 의외로 컸고,
흘긋 돌아본 벽에 남은 못이 너무 을씨년스러우니 빼버리거나 다른 액자라도 걸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무음시계를 사다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차츰 강해졌다.

습관이 얼마나 무서운지
몇달 전 조카 그림을 거실에 걸어두게 되면서 거기 있던 가족사진이 엄마 방 시계 걸린 자리로
물러나고, 벽시계는 다시 화장대 옆 자리로 쫓겨나고 말았는데
엄마도 나도, 시간을 확인하려면 먼저 10여년 이상 시계를 걸어놓았던 자리에 걸린 사진을 쳐다본뒤
아차 하면서 다시 새로 걸린 시계 자리로 시선을 돌린다.

별것 아닌 물건에도 이리 습관성 집착이 강한 인간이니
다른 것에야 오죽할까.
생각해보면 내 주변의 모든 관계와 만남 역시 습관에 의한 반복 행위인 듯하다.
그래서 가장 습관적이었던 관계의 단절, 아버지의 부재가 이토록 허망하고 크게 느껴지는 것일 게다.

결국 벽시계 없이 지낸 지 채 한달도 못 되어 내 방엔 소리없이 초침이 유연하게 돌아가는 무음시계가 걸렸다.
정신도 육체도 차츰 늙어간다는 걸 마음 편히 받아들이면
습관에서 못 벗어나는 것도 큰 흉은 되지 않으리라 생각하기로 했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데, 어차피 세 살은 지난 지 오래고 여든까지도 절반은 왔으니
이제 와서 제 버릇 남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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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

삶꾸러미 2007. 10. 14. 17:30
친구, 지인, 또는 그저 '아는 사람'의 범주로 분류되는 사람들과 나의 취향이
꼭 맞아 떨어질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성격이 정 반대인 사람들끼리 만나야 잘 산대"라는 말은 걸핏하면 툭탁거리는 커플들을 위해
확실히 조작된 위로이며, 실제로 잘 지내려면 친구든 가족이든 공통점도 많고 취향도 엇비슷해야 한다고
나는 굳게 믿는다.
때로는 비슷한 취향과 공통점 때문에 뜻밖의 상황에서 친구가 되기도 하지 않는가 말이다.
친구라 해도 당연히 취향이 같아야 우정의 깊이도 더 깊어지는 듯하다.
다만 친구의 경우엔 가족이나 파트너와 달라서, 이해심과 봐주기의 여유가 한껏 늘어나기 때문에
비록 취향이나 성격이 다르더라도 참아주고 넘겨주고 눈감아주게 되는 것 같다.

오늘 만난 지인들과 오랜 수다를 나누던 중에 친구와 떠나는 여행 이야기가 나왔다.
한국사람은 제대로 친해지려면(또는 그 사람을 잘 알아보려면) 밥(때론 술) 같이 먹고, 여행 같이 가고, 고스톱 한 판 쳐봐야 한다는 말이 있듯, 여행은 친구에 대한 새삼스러운 발견의 경험일 때가 많다.
절친한 친구가 아니면 쉽사리 동행을 결정하지 않겠지만, 어쨌든 '잘 안다고 생각했던' 친구가 여행길에서
의외의 골칫거리나 '웬수'로 돌변하는 경우도 있고, 우정과 이해의 폭이 더욱 돈독해지는 때도 있다.

나는 두 부류의 친구를 모두 경험해 보았는데,
솔직히 고백하건대 여행길에서 *웬수* 같은 존재임을 깨달았던 친구는 나와의 역사가 가장 오래된 친구임에도
그뒤로 많이 멀어졌다. 최소한 내쪽에선 그렇다는 뜻이다. ^^;;

여행뿐만 아니라 그저 사소한 만남의 자리에도 취향과 배려는 중요하다.
어떤 만남에서도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약속을 선도하는 주축이 있기 마련인데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내가 그런 역할을 도맡는 건 꽤나 드문 일이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그런 역할을
담당했을 경우 상대방의 취향에 맞을지 장소와 먹거리를 고민하는 일은 쉽지가 않다.

가령, 중년 아저씨가 되어버린 친구들은 주문하기도 복잡한 커피전문점이나 파스타집을 죽도록 싫어한다.
심지어 나이 40 넘도록 스파게티를 단 한번도 안 먹어본 이도 있을 정도다. ^^
그들이 선호하는 곳은 뻔하다. 편안하게 방바닥에 앉을 수 있는 고깃집이나 찜, 탕 같은 음식을 취급하는 곳이면 어디나 합격점이니, 이렇게 좋고 싫음이 분명한 친구는 차라리 별 문제가 없다.
골칫거리는 "네 마음대로 해. 난 아무데나 좋아."라고 *말*은 해놓고 가타부타 트집을 잡는 친구다.

지인들 중에선 그나마 활동범위가 많은 내가 아는 곳도 많을 것 같다며
가끔은 만나자마자 괜찮은 맛집이나 분위기 좋은 찻집, 커피집을 데려가라는 요구를 받는 경우가
드문드문 있다.
취향을 빠삭하게 아는 절친한 지인이라면 어딜 데려가든 걱정할 것도 없지만
어중간한 관계에선 은근히 고민스럽다.
나름대로 신경써서 데려간 곳인데도 취향에 따라 반응은 천차만별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사방에서 주워온 듯 똑같은 의자가 드물고, 테이블이라야 몇개 되지도 않아 긴 탁자에 남들과 나눠 앉아야 하지만 커피와 코코아 맛은 일품인 찻집엘 가서도
어떤 이는 분위기 독특하다, 탁자의 나뭇결이 마음에 든다, 코코아랑 와플 맛있다, 소품이 아기자기해서 재미있다...라고 내 선택을 칭찬해주는 반면에
어떤 이는 인테리어가 거칠어서 분위기가 을씨년스럽다, 이러고도 장사가 되는 게 신기하다, 와플와플 난리라서 어떤 맛인가 궁금했더니 별 맛도 없는 게 가격만 비싸다, 자기 같으면 20년 전에 갖다 버렸을 물건들을 빈티지라면서 생색내는 게 웃기다... 따위의 타박만 하기도 한다.

아 그럼 독특한 분위기의 찻집을 데려가라고 하질 말든가!!! -_-;;

농담삼아 늘 반어법을 쓰는 친구라든가, 매사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며 씹어대는 걸 사심없는 취미로 삼은 친구라면 또 나 역시 아무렇지도 않다. 취향이 촌스럽고 감각이 없다고 웃으면서 된통 빈정거려주면 그뿐이다. 상대 역시 내 반응을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을 테니까.
그러나, 내 취향과 노력을 감안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최소한 상대방에 대한 배려마저 잊은 채 시종일관 구시렁구시렁 타박을 일삼는 지인에겐 정이 똑 떨어질 수밖에 없다.
물론 나와는 맞지 않는 본인의 취향을 강요하는 이 또한 경계 대상이다.

책이든 영화든 먹거리든, 사람마다 취향은 가지각색임을 잘 안다.
그리고 나란 인간은 특별히 고급스럽거나 까다로운 취향을 지니지도 못했고, 최신 유행을 좇아서 차를 마시러 다니고 맛집을 찾아다닐 만큼 부지런하고 엽렵하지 못하다. 다만 뭔가 맛있고 멋스러운 곳을 '발견'하면 그 기쁨을 가족이나 지인들과 나누고 싶을 뿐이다.
그들도 나에게 그래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고.

말로는 모든 측면에서 사회구성원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부르짖으면서
뒷구멍에서는 은근히 주변 이들에게 취향의 공유까지 바라는 내 마음이 모순이란 것도 인정한다.
그렇기에 취향의 다름이 인간에 대한 실망이나 감탄으로까지 이어지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자꾸만 마음이 좁아지고 너그러움마저 줄어드니 안타깝다.
살면서 점점 더 편협한 인간으로 변해가진 말아야 할 터인데,
아무리 돌아봐도 가는 방향이 딱 그쪽이다.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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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은 사람

추억주머니 2007. 9. 29. 16:35
싫은 사람에 대한 키드님의 포스팅을 읽으며
퍼뜩 뇌리를 스쳐가는 이들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차피 평생 볼 사람도 아닌 남인 것을 왜 그렇게 지독하게도 싫어하며 전전긍긍 마음을 다쳤는지 모르겠지만 당시엔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도록 혐오스러웠던 사람들이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누구나 한둘 쯤 혐오스런 상사나 직원, 거래처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회사 조직 이외의 관계에서도 이상하게 싫은 사람의 덫에 걸리기도 한다.

내 경우 싫은 사람의 제1인자는 지금도 이름이며 얼굴 생김새, 걸음걸이까지 또렷이 기억에 남은 '이아무개' 이사였다.
작고 깡마른 체구에 고향이 '갱상도'였던 그는 미스 부산 출신의 아름다운 아내를 늘 자랑으로 여기며 '못생긴 여자'는 여자도 아니란 말을 서슴없이 해대곤 했는데
그가 말하는 '못생긴 여자'의 범주엔 무뚝뚝하고 목소리 크고 자기 주장 강하고 치마 잘 안입고 나긋나긋하게 남자들을 '먼저' 배려하지 않는 여자들(그 대표주자는 물론 바로 나였다^^)이 모두 포함되었더랬다.
말끝마다 "여자가 말이야..."라고 토를 단 뒤 못마땅하게 "쯧쯧쯧.."혀를 차는 그는 일개 평직원이었던 나와 업무체계가 이어지는 바람에 거의 6개월쯤 서로 원수지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워낙 인간이 싫기 때문인지, 여러가지 싫은 면모가 집약되어 싫은 인간으로 낙인 찍힌 것인지,
순서는 알 수 없지만 암튼 '이아무개' 이사는 점심식사나 회식 때에도 옆자리 회피 대상 1호였다. 쩝쩝거리는 흉물스런 소리의 대가임은 물론이려니와 내 음식 네 음식 가리지 않고 아무거나 제것처럼 먹어대는 탐식꾼이었고, 반드시 반말로 부하직원들에게 담배 사와라, 물 수건 몇 개 더 가져와라, 술맛 나게 여직원들이 술잔 좀 채워봐라, 소주 식었으니 시원한 걸로 "바까와라" 따위의 심부름을 시켰기 때문이다.
지금 같으면 말도 안될 직장상사의 횡포와 성희롱이 그 옛날엔 꽤나 자연스럽게 자행된 탓도 있지만, 업무 면에서도 사사건건 나에게 잔소리를 해대고 멀쩡한 문서의 꼬투리를 잡는(표의 선 모양을 바꾸라든지, 세미콜론을 콜론으로  바꾸라든지!) 그 인간 때문에 나는 월요일 아침에 출근하기 싫어서 일요일 밤부터 벌써 가슴이 벌렁거리고 소화가 잘 안될 지경이었다. 이북 사투리를 비롯해 걸쭉한 여러 지방 사투리를 재미있어 하던 내가 유독 '갱상도' 사투리를 싫어하게 된 것도 이 인간의 공이 크다.

물론^^ 서로에 대한 반감과 혐오감을 익히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 역시 늘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지만 일단 이사와 평직원이라는 직급의 차이 때문에 내가 불리한 입장이었는데,
이판사판으로 치달은 마지막 즈음에는 그 이아무개 이사가 총무이사를 붙들고
"내가 미스X 무서워서 정말 회사를 몬다니겠어요"라고 푸념했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뿌듯해했던 기억이 있다.
결국 그 인간에게도 나는 몹시 "싫은 사람"이었다는 얘기. ^^;
유치하게도 승패여부를 따지자면 그 회사가 인수합병 될 때 당연히 이사는 잘렸으므로 끝까지 버틴 내가 이긴 셈이라고 큰소리를 치지만, 사실 토할 것 같은 혐오감을 무릅쓰고 그 조직에서 버텼던 내가  지금 생각해도 기특하긴 하다.

이후 직장에서 만났던 싫은 사람은 일은 죽어라 못하면서 어리광이랄지 응석이랄지 엉겨붙는 것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 했던 어느 여직원. -_-;;
당시 수십 명이나 되는 여직원들은 모두 단정한 감색 치마에 흰색 블라우스, 체크무늬 조끼와 감색 재킷으로 구성된 유니폼을 입어야 했는데, 그 여직원은 마치 날나리 고등학생들이 그러듯 무릎 길이의 치마를 깡총하게 무릎 위로 잘라 늘씬한 다리를 드러내고 다니는 유일한 여직원이었다. (그 아이의 다리가 예뻐서 내가 질투를 한 건 정녕 아니었다고 부르짖고 싶다!^^)
그런데 타이트 스커트를 입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무릎 길이의 치마도 의자에 앉으면 민망하게 허벅지까지 올라가는 법이거늘, 짧게 자른 스커트야 오죽하랴.
남자 직원들의 절반은 사무실을 오가며 희멀겋게 드러난 그녀의 허벅지를 위에서 쳐다보는 걸 즐겼지만 놀랍게도 나머지 절반은 자기들을 암묵적인 관음증환자로 만드는 그 상황을 민망하게 여겨 나에게(당시에도 왕언니였다 ㅠ.ㅠ) 넌지시 시정을 권유했다.
게다가 그녀는 무슨 일이든 시키면, 일단 옆에 쌓아두고는 늘 책상에 올려두고 있던 손거울을 보며 얼굴과 화장을 매만지는 것이 주업이었고 독촉을 받으면 "아잉, 대리님, 제가 깜박했네요. 쬐끔만 더 기다려주세용. 제가 맛있게 커피 한 잔 타다 드릴께용~" 따위의 멘트로 얼버무리기 일쑤였으니, 내가 엄한 얼굴로 업무 독촉을 하거나 서류상의 실수를 잡아내도 "아이, 언니, 너무 무섭당~" 그러면서 확 끌어안는 작전을 쓰기도 했다.
물론 그녀가 해낸 일은 누군가 다른 사람이 다시 해야할 정도로 엉망이라 사무실에선 점점 그녀에게 일을 시키는 걸 '두려워'할 지경이었고, 그녀의 업무량은 점점 줄어 당연히 그녀가 손거울을 보며 노는 시간은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아... 모든 사람이 다 일을 잘할 순 없지만, 일도 못하고 게으르기까지 하며 집도 아닌 회사에서 응석을 부리며 아양을 떠는 그녀를 난 참 싫어했더랬다. 허스키한 그녀의 목소리가 멀찍이서 들리기만 해도 부르르 짜증이 날 정도로...

하지만 웃는 얼굴에 침 못뱉는다고 그녀는 속으로만 치를 떨며 싫어할 뿐, 회사에서 공공연하게 적대감과 혐오감을 드러냈던 건 이아무개 이사가 유일했던 듯하다.

흠.. 그리고
마지막으로 떠오른 '싫은 사람'의 유형엔 좀 미안한 감이 드는데;;;
"씩씩대는 네 숨소리가 싫단 말이야!"라는 충격적인 말로 이별을 고했던 기억 때문이다. ^^
숨소리가 싫다는 건 당연히 핑계였을 테고
그냥 그 사람이 싫어지니까 씩씩거리는 숨소리마저도 못견디게 싫었겠지만
못돼쳐먹어도 유분수지, 어린 마음(?)에 그에겐 얼마나 상처가 됐을지 지금도 미안하다.

이제는 첫인상만으로 철저하게 사람 됨됨이를 재단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않지만
돌이켜보면 첫인상은 여전히 중요하고, 좋았다가 싫어지거나 싫었다가 좋아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특히 싫었다가 좋아진 사람은 결국 다시 싫어져 처음에 싫어했던 단점들이 극대화되어 더는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는 수준이 돼버렸달까...


그나마 이제는 싫은 사람들 틈에서도 억지로 버텨야 하는 의무적인 관계의 홍수에서
벗어나 살고 있으니 참 다행이지 싶다.
여러가지 상처가 있지만 살아보니 사람에게 받은 상처가 가장 깊고 아픈 것 같다.
앞으로는 더더욱 상처를 주는 일도 상처를 받는 일도, 교묘하게 피해가면서 현재 있는 관계를 소중히 가꾸며 살아가야겠다. 그러면 나 역시 누군가에게 치 떨리게 "싫은 사람"으로 손꼽히는 일도 피할 수 있겠지. ^^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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