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

삶꾸러미 2008. 8. 20. 17:04
원래 정리정돈을 잘 못한다.
뭐든 사방에 늘브러지게 늘어놓고 써야지 꽁꽁 잘 정리해 숨겨놓으면 그 존재조차 잊어버리고야 마는 아메바형 인간이기도 하지만, 정돈해도 돌아보면 금세 어질러져 있기 일쑤이고 정돈하는 데 남들보다 훨씬 시간과 에너지가 많이 들기 때문에 언제부턴가는 그냥 그러려니 벌려놓고 사는 편이다.

얼마 전부터 내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어온 사람들이 잘 안들린다며 유선전화로 다시 걸겠다고 하거나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가며 통화를 해야하는 경우가 많더니 급기야 숫자판에서 아주 중요한 '0'(이응이기도 한데 다들 제일 먼저 안눌린다는 걸 보면 사용 빈도수가 제일 많은 모양이다)이 잘 안눌려 전화를 걸때나 문자를 보낼 때 속도가 현저히 떨어졌고, 한달 전부터는 '확인'도 잘 안눌렸다. 가끔은 폰카로 사진 찍으려다가, 또는 문자를 보내려다가  확인이 잘 안 눌려서 더러운 성질이 자칫 폭발하기 일보 직전일 정도였다.

내심 옳타구나 싶었다.
식별 번호도 안좋은 휴대전화 번호를 10년쯤 고집스레 써온 데는 내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기는 했지만
이 참에 나도 예쁜 신형 휴대폰을 장만하면서 확~ 번호도 바꾸고 인간관계도 정리해보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오래 전 내 휴대폰엔 이름이 뜨는 것도 싫어서 '받지마'로 저장해 놓은 인간들이 더러 있었는데
'받지마' 번호가 '받지마1, 받지마2, 받지마3'을 넘어가자 누가 누군지 기억도 나질 않아 전화를 따돌리는 건 몰라도 추후 대처하는 과정이 난감해졌다. 통화하기 싫더라도 그냥 이름을  저장해두어야 제대로 따돌릴 수 있다는 사실은 서글픈 인간관계의 아이러니로 느껴졌다.

어쨌든 휴대폰을 바꾸겠다는 결정을 내리기는 했는데, 문제는 또 어떤 기종을 살 것이냐 하는 것.
주로 부스스한 머리에 눈꼽 달고 사는 인간에게 영상폰은 필요도 없는 물건이고 난 그저 휴대폰 기능이 적당하고 '예쁘면' 그만인데 내 '예쁨'의 기준엔 '가볍고 작을 것'도 포함되어 있으니 요즘처럼 휴대폰이 나날이 커져가는 시대엔 엉뚱한 바람이 아닐 수 없다.

주변에선 아예 햅틱폰을 사라고 부추기기도 했지만
그 놀라운 기능을 내가 다 써먹을 리 만무한 것은 차치하고라도 내가 쓰는 알량한 요금으로는 80만원에서 몇천원 빠지는 그 어마어마한 기기값에서 겨우 15만원 쯤 할인 된다니 그야말로 그림의 떡!
'여우의 신포도'처럼 난 그렇게 '무식하게' 큰 전화는 필요없다고 중얼거리고는 눈을 질끈 감았고, 합리적인 가격선에 드는 기기 중에서 어렵사리 하날 고르고는 어제부터 계속 '예쁘다, 예쁘다'라고 최면을 걸고 있다. ^^

하지만 매장에서 기기를 고르고 나서도 고민은 이어졌다.
휴대폰 바꾸면서 쓸데 없이 광범위한 인간관계도 정리해보겠다고 마음은 먹었지만
옛날 번호를 새 번호로 연결해주는 '당연한' 무료 서비스를 무작정 거부하기엔 예상되는 파장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전화하기 싫어하는 내가 사방에 죄다 전화나 문자로 새 번호를 알릴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

결국 나는 무려 2년이나 새 번호를 안내도 해주고 연결해준다는 서비스에 동의하고 말았다. 그러면서 '2년간 연락 안하는 인간들은 그래도 정리 되겠지...'라고 중얼거렸다. 물론 나중에 전화를 따돌리고 싶을지 어떨지 몰라서, 이전 전화기에 저장되어 있던 233개의 전화번호들은 그대로 다운받아 달라고 한 상태다. -_-;

따져보면 정돈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앞으로 2년 안에 나에게 볼 일이 있어 전화를 거는 사람은 여전히 내 인간관계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겠지만
아메바 같은 나는 2년 뒤에도 정리했어야 할 관계와 계속 유지해야 할 관계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어리버리 널브러져 헤매고 있을 거다.

어쨌거나 새 번호 안 알려주면 삐칠 위험이 있는 가족들과 몇몇 지인들에게 문자질을 하다가
그것도 귀찮아져서 그냥 두고두고 서로 연락할 일 있을 때 알리기로 했다.
게으른 인간의 정체는 어떻게든 변하질 않는다. ㅋ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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