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함없음

삶꾸러미 2008. 2. 29. 22:03

사람들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스무살 시절엔 도저히 알 수 없던, 사람들의 변함없음을 서른살이 되고 마흔살을 넘어서면서
새삼 깨닫는다.

돌이켜보면 아득하기도 하고 눈깜짝할 새에 지난 세월 같기도 한 시절에 처음 만나
10년, 20년을 함께, 또는 따로 보낸 사람들과 한 자리에 모이면 친근함과 낯설음을 동시에 느낀다.
어깨를 휘젓는 걸음걸이, 듣기 좋은 낮은 목소리, 까르르 귀를 찌르는 독특한 웃음소리, 언제나 썰렁하기만 한 유머, 수줍은 듯 빙그레 웃기만 하며 술잔을 드는 손길, 시비를 거는 것 같은 거침없는 말투, 못마땅한 사회에 대한 투덜거림과 불평, 술자리에서 먼저 일어나는 건 절대 용서 안되는 고집 같은 것들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변한 건 운동화 대신 정장과 구두가 더 어울리는 외모의 까닭모를 반듯함, 그들이 내미는 명함에 새겨진 어마어마한 직함, 눈가에 살짝 내려앉은 주름살, 솟아오른 배나 숱이 엷어진 정수리와 넓어진 이마, 서로 다투듯 술값을 계산하겠다고 내미는 법인카드, 휴대폰에 저장해놓고 보여주는 아이들 사진, 가끔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흘러나오는 재테크와 골프 이야기 등이다.

그런 자리에서 나는 정말로 20년전으로 돌아가 탁자를 두들기며 웃다가도
금세 또 유체이탈을 해서 자기 몸을 내려다보는 혼령처럼 전혀 낯선 이들의 대화를 천장쯤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느낌을 수시로 오간다.

어딜 가나 제일 변하지 않았다는 소리를 듣는 게 이젠 뒤떨어졌다는 소리로 들리니
내게도 확실히 변한 건 있다.
뭐든 할 수 있다고 떵떵거리던 자신감과 낙천적인 사고는 이제 씁쓸한 자괴감에 쉽사리 자리를 내주고 만다.
그래도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약간 허황된 꿈과 로맨스를 기다리고
휘황찬란하고 복잡한 무대 한 가운데서 조명을 받는 것보다 어둑한 구석에서 소박하게 즐기는 게 더 좋고
재테크로 골치아프게 벌어들인 재산보다 인복 많은 게 더 기쁘고
편한사람들과 함께하는 술자리가 기대되고 지금껏 맺어온 인간관계 속에서 행복을 느낀다.

들여다 보면 하나도 변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세월과 함께 확실히 성숙한 사람들 틈에서
본래의 미숙함과 치기를 마냥 갖고 살면서, 나 하나쯤 그런 사람도 있어야지, 하고 위로하는
내 목소리에 점점 힘이 빠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세월의 무게일까.

변함없고 한결같다는 게 자랑일 수도 있지만
어쩐지 미련스런 집착처럼 느껴지는 날, 그게 바로 오늘이다.
그러고 보니 날씨따라 펄럭거리는 감상주의도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
이러니 내일은 또 펄럭펄럭 행복할 수도 있겠다. ㅎㅎ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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