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에 해당되는 글 45건

  1. 2009.11.05 지인과 지기 사이 13
  2. 2009.11.05 축의금 12
  3. 2009.09.15 늙음에 대하여 4
  4. 2009.07.21 어떤 죽음 2
  5. 2009.07.16 참 잘했어요 6
  6. 2009.04.29 호의는 전염된다 12
  7. 2009.04.04 관계의 강요 23
  8. 2009.03.13 그런가? 14
  9. 2009.02.22 반듯함의 이면 12
  10. 2008.12.24 짜증 22

지인: 아는 사람
친구: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
벗: 비슷한 또래로서 서로 친하게 사귀는 사람
동무: 1. 늘 친하게 어울리는 사람.  2. 어떤 일을 짝이 되어 함께 하는 사람
지기: <지기기우>의 준말. 자기를 잘 알아주는 친구. 자기를 잘 이해해 주는 참다운 친구.

쓸데없이 개인사를 많이 털어놓는 블로그라 부지불식간에 글에 등장하는 <지인>들이 꽤 되었는데, 결국엔 나에게 그만큼 쓸데없이 <지인>들이 많다는 이야기도 되는 듯하다. 물론 나의 블로그에 자신이 등장했음을 아는 <지인> 정도라면 그냥 아는 사람이 아니라 <친구>이거나 <지기>인 경우가 많아, 뭉뚱그린 <지인>의 호칭에 슬며시 불만을 표하기도 한다. 하지만 <친구>라고 하면 어쩐지 <벗>과 비슷하게 비슷한 또래여야 할 것 같은 강박증이 들어 나이가 밑이거나 위인 친구에게는 막연하게 거리를 두는 <지인>이라는 표현을 들먹이고 말았던 것 같다.
이번에 새삼 <지인>부터 친구를 뜻하는 여러 낱말을 찾아보고 나니 반성이 필요하긴 하다. 영화 <아는 여자>에서 <그냥 아는 여자>라는 정재영의 소갯말에 이나영이 얼마나 상심했는지 남녀관계를 떠나서 얼마나 공감했던가. 이쪽에선 뭔가 특별한 관계라고 여겼는데 저쪽에선 <그냥 아는> 사이로만 규정하고 있거나 믿음을 저버리는 해악행위까지 서슴지 않는 위해인물임음을 깨달았을 땐 마음의 상처를 피할 수가 없다. 얼른 관계 재수정에 돌입해 처리하면 그만일 수도 있겠지만, 기대에 대한 배신감이랄까, 인간 자체에 대한 실망까지 겹쳐 그간의 모든 다른 관계까지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게 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 쪽에선 정말로 <그냥 아는> 사이로 남았을 뿐인 관계인데도 상대쪽에서 뭔가 특별한 관계로 인식하고 있다는 낌새를 보이면 차마 냉정하게 쳐내지 못하고 뒷구멍에서나 구시렁거리게 된다. 세월이 좀 더 지나면 어떻게든 정리가 되겠지, 그런 한심한 바람이나 품으면서.

작년에 휴대폰을 바꾸면서 전에 있던 휴대폰에 저장됐던 번호를 모조리 옮기긴 했지만 상당수의 번호를 과감히 지우고 정리한 뒤엔 <가족> 외에 딱히 유용하게 정리해두진 못했던 그룹별 번호 정리에 돌입했었다. 휴대폰을 을 잃어버려 나쁜 사람 손에 들어가는 경우를 대비하여 <가족> <친구> 따위의 솔직한 그룹명은 피하는 것이 좋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설마 그런 일이 나에게 벌어지겠어 싶은 생각에 난 고집스레 가족/친구/동창/후배/선배/er/비즈니스/기타/받지마 9개의 분류를 정했다. 물론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한 이들은 첫 그룹인 <미지정>에 남겨둔 채로. (예를 들어 ㅌㄹ 주민들은 아직 미지정 그룹에 속한다 ^^; 블로그이웃이라는 그룹을 만들 수도 있겠지만, 좀 더 세월을 견디다 고민 없이 친구 그룹에 넣을 수 있는 사이가 될 날을 꿈꾸는 중이다;;)

처음 그룹을 일일이 나눌 땐 벨소리도 다르게 해서, 전화오는 소리만 듣고도 척, 어떤 부류의 인물인지 알아보겠다는 심사였으나 당연히 뻘짓이었다. 내가 9종류나 되는 벨소리를 기억할 리가 없지 않은가.
우선은 가장 많이 울려대는 <가족>의 전화를 차별화하고, 자다가도 안잔 척 목소리를 맑고 씩씩하게 내야 하는 <비즈니스> 전화의 벨소리만 식별하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친구>와 <동창>을 굳이 나눈 이유야 뻔한 것일 텐데, 내 경우는 <후배>와 <친구>의 분류에서 이리저리 고민을 좀 해야했다. 나이로는 밑이지만 이래저래 연이 닿은 지인들과 차츰 동등한 우정을 쌓아가다 보면 그냥 <후배>라고 칭하기 미안한 느낌이라 <친구>라고 불러야할 것 같기 때문이다. 나이로는 선배뻘이지만 당연히 친구 폴더에 정리된 사람들도 물론 존재한다. 하기야 싸이월드 시절 일촌에도 급수를 나눠야한다고 여겼던 것처럼, <친구>도 사람마다 심리적 거리감이 퍽 다르다. 사전상의 뜻처럼 가깝게 오래 사귀었어도 새삼 멀어지는 과정에 있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오래 사귀지 않았어도 누구보다 가까움을 느끼는 친구도 있으며, 멀찌감치 오래 사귀어 친구로 여겨지는 이들도 있다. 유독 <지기>라고 마음속에 꼽아두게 되는 이도 있음은 물론이다.

쓸데없이 넓고 얄팍한 인간관계는 과감히 청산하는 것이 나에게 이롭다는 생각은 이미 10여년 전부터 해왔지만 게을러서, 매몰차지 못해서, 맺고 끊음이 불명확해서 질질 이끌려온 관계로 엮인 <지인>들이 아직도 꽤나 많은 것 같다. 가끔 나를 친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인맥확장을 위한 디딤돌이나 그밖의 쓸모로 <이용>하려는 지인들에게 뒤통수를 맞은 적도 몇번이나 되면서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는 생각에 씁쓸하다. 이제부턴 정말로 서로 마음 다치지 않을 사람들로만 벗과 동무를 삼아 <지기>로 발전시키는 데 노력을 기울일 테다. <그냥 아는> 사람들에게 허투루 쏟아부을 에너지와 감정이 이젠 몹시 아까워졌다. 드디어 내게도 방만한 인간망 정리의 시기가 왔나보다(사실 이 말도 10년전부터 되뇌긴 했다. ㅠ.ㅠ). 늦었더라도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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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의금

투덜일기 2009. 11. 5. 14:55

이번주말에 이틀에 걸쳐 축의금을 내야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토요일은 돌잔치, 일요일은 결혼식.
원래 나는 주변인들의 대소사에 무조건 참석하는 편이었다. 좋은일이든 궂은일이든, 무얼 받을 걸 계산하고 미리 밑밥을 뿌린다는 생각 따위는 해본 적도 없다. 인간관계를 이어가다 보면 생일 같은 날을 챙기는 각별한 사이도 있고 <그냥 아는> 사이로 수년을 이어가다 스르르 잊혀지는 사이도 있기 마련인데, 내가 얼만큼 주었으니 또 얼만큼 받아야겠다는 계산이 깔린 관계만큼 서글픈 건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냥 문득 생각나고 뜻깊은 날엔 뭘 좀 챙겨주고 싶고 기쁜 일 있다면 달려가 축하해주고 슬픈 일엔 위로해주는 일이 <당연>하다고 느끼는 관계와 그런 감정적, 경제적 소모행위를 완전히 무시할 수 있는 관계로 칼같이 나눌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문제는, 청첩장이나 돌잔치 초대장을 받을 정도로 상대에게 비중있는 존재로 여겨졌다면 무조건 참석하는 걸 원칙으로 삼았던 과거의 나와 달리 요샌 뜬금없이 날아드는 <축의금 독촉장>이 괘씸해 버럭 화를 내는 일이 더러 일어난다는 점이다.

이번 토요일 대낮에 열리는 돌잔치를 갈까말까 고민하는 이유는, 장소가 워낙 멀고(분당선 종점이다) 혼자 가야한다는 것 때문인데 만약 장소가 강남쯤만 됐더라도 이렇게 고민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요번이 셋째인데 내가 학수고대했던 대로 공주님(!)이고, 위로 둔 두 아들 녀석도 나를 <고모>라고 부르며 함께 노는 걸 몹시 좋아하기 때문에 얼마 전엔 용인까지 가서 온 가족과 놀다 올 정도이니, 말로는 고민한다고 해도 갈 확률이 80%는 되는 듯하다. 요번에 돌을 맞은 아기공주가 태어났을 때 또 아들이면 아들 셋을 키워야하는지라 모두들 조마조마했었는데 딸이 태어나 나까지도 얼마나 기쁘던지, 그간 못해본 한풀이를 하듯 예쁜 여자아기옷을 사들여 택배로 보내주기도 했었다. 나의 지인은 엄마 쪽이 아니라 아빠쪽임에도. 이번 토요일에 혹시라도 돌잔치에 못가게 된다면 난 아마 미안함까지 겹쳐 대신 백화점에 쪼르르 달려가 돌잔치 주인공 선물은 물론이고 그 오빠들의 선물까지 사야한다며 객기를 부릴지 모른다. 차라리 멀고 외로워도 돌잔치에 참석하는 것이 빈약한 내 주머니를 위해선 이로울 듯;; -_-

하지만 이번 일요일에 결혼식을 맞는 지인을 생각하면 날이 갈수록 기분이 나빠진다. 결혼식장이 부산이라 당연히 갈 생각은 없었지만, 아마 서울에서 식을 올렸더라도 나는 누구에겐가 마뜩찮은 축의금을 들려보냈을 거라 여길 정도로 앞으로의 관계에 대한 희망은 전무하다. 별로 기대할 것 없는 인물이라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요번 결혼식을 앞둔 그녀의 행태를 보니 참 이기적이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결혼식장이 부산이면 초대하는 쪽에서 교통편을 마련해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과거 부산 결혼식에 두세번 다녀온 적이 있었는데, 매번 나는 새마을호(그땐 KTX가 없었다) 왕복표는 물론이고 두번은 호텔까지 잡아주어 전날 내려가거나 결혼식 당일날 신랑신부와 뒤풀이를 거나하게 한 뒤 아침에 다시 만나 해장국을 먹고 작별해 올라온 적도 있었다. 경상도 어드메쯤에서 있던 결혼식에 갔을 땐 아침 일찍 주최측이 마련한 관광버스를 타고 내려갔는데, 식이 끝나고 돌아오는 우리들에게 신랑신부는 관광버스에 올라와 막무가내로 하얀 봉투를 하나씩 나눠주기도 했다. 너무 멀리 오시게 해 죄송하다면서 올라가다 휴게소에서 군것질이라도 하시라는 의미라고 했다. 감격한 우리는 그 돈을 모아 간직했다가 나중에 집들이 선물 사이에 용돈으로 끼워주었고, 축의금도 주말 하루를 온통 소모한 시간도 아까운 줄을 몰랐었다.

헌데 이번 일요일 결혼식은 정말 축의금이 아깝다. 돌려받을 가능성이야 원래부터 염두에 없었으니 다 괘씸죄 때문이다. 그렇게도 최측근이며 절친임을 자랑하던 친구들에게도 그녀는 교통편을 마련해주지 않았단다. 오히려 친한 사이니까 그 정도 희생은 감수해야되지 않느냐는 식인 모양이다. 물론 지기의 경우라면 나 또한 내돈들여서라도 축하해주러 달려갈 용의가 있을 것도 같다. 간 김에 부산구경이나 하자, 그러면서 들뜬 여행계획을 세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초대할 때부터 서로에 대한 신뢰와 정이 돈독해야 가능한 게 아닌가! 
축의금을 들려 보내려고 내가 아는 그녀의 측근들을 접촉해보니, 그들 역시 마음이 몹시 상해 자기네도 갈지 말지 모르니, 축의금을 보내려거든 본인 계좌로 보내라고 권했다. 최측근에게도 <일단 부산에 내려오면 좀 보태주든지 하겠다>는 태도를 보인다니 대체 결혼식을 앞둔 신부로서 진정한 축복을 받고 싶기는 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혹시나 정말로 꿩먹고 알먹고, 호텔 밥값은 줄이고 축의금만 낼름 받아 챙기려는 이기심의 발로는 아닌가 하는 쪽으로 심증이 굳어지는 중이다.
어쨌거나 이번 결혼식 이후로 다시는 연락올  가능성이 없음을 간파한 나는  <옛다, 먹고 떨어져라>하는 심정으로 축의금을 보내기 위하여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축의금 전달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듯 하니 민망하지만 계좌번호를 알려달라고.  그랬더니 이런 답장이 왔다.
<언니.. 민망해하지 마세요! 계좌로 마니들보내셨어요..ㅋ저도첨엔참민망했는데..^^>
다음 메시지엔 당당히 계좌번호가 날아왔다.
생각해보니 축의금을 신랑신부 본인의 계좌로 보낸 건 이번이 처음이다. +_+
작년엔가 울산에서 결혼한 후배의 경우엔, 본인이 싫다는 걸 억지로 주소를 물어 우편환을 보내긴 했었다. 직접 가보지 못하는 대신 미안함과 축하의 말을 담은 카드를 써서 우체국에 가 전신환으로 바꾼 종이를 넣고는 등기로 부쳐야 했는데, 그런 잠깐의 수고도 거치지 않은 <인터넷 축의금 송금>이라니 정나미가 뚝뚝 떨어진다. 일생일대의 대사를 앞둔 신부로서 그렇게라도 축의금을 챙기고 싶었을까?

그렇게 찝찝하고 불쾌한 관계라면 축의금도 보내지 말고 무시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조언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또 마음이 그렇지가 않다. 이것으로 완전히 청산될 관계라면 내쪽에서 조금도 찜찜하지 않게 개운한 마음으로 잘라버리고 싶은 심정이랄까.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조금 전 인터넷 송금하며 괘씸하고 불쾌했던 마음도 진정이 되는 것 같다. OO야, 소원대로 X사 부인 되었으니 잘 먹고 잘 살렴. 앞으로 다시는 우리 서로 연락하지 말자.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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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에 대하여

삶꾸러미 2009. 9. 15. 18:27
예전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주말에 놀러가 함께 저녁을 먹다 보면 늘 되풀이되는 광경이 하나 있었다. 밥상 아래로 자꾸만 밥풀이나 반찬을 흘리는 할아버지를 타박하시는 할머니의 목소리.
양반은 모름지기 매끄러운 놋쇠 젓가락으로 청포묵 하나를 집어 고개를 숙이지 않고 입까지 가져갈 수 있을 만큼 젓가락질에 능해야한다며 코흘리개 시절부터 우리 손주들에게 엄하게 젓가락질을 가르치셨던 바로 그 할아버지가 진지를 잡수시면서 뭔가를 흘린다는 건 나에게도 충격이었다. 물론 할머니도 가끔 입가에 밥풀 같은 게 묻었는데 느끼지 못하실 때도 있지만, 그런 사실을 잘 아는 할머니는 수시로 입가를 닦거나 스스로 밥상 아래를 살피셨기 때문에 마지막에 밥상을 치우고 나서도 매번 지저분한 할아버지 자리와 달리 할머니 자리는 늘 깨끗했다.
게다가 골초였던 할아버지한테선 늘 심한 담배냄새와 함께 할아버지 특유의 냄새가 났는데, 할머니는 그게 늙은이 냄새라면서 질색을 하셨다. 그러면서 당신은 늙은이 냄새 나면 애들이 싫어한다며 언제나 바지런하게 씻고 로션(할머니 용어로는 여전히 '구루무')을 바르셨는데, 정말로 우리 할머니한테선 노인 특유의 냄새를 느낄 수 없었다.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6개월쯤 다시 할머니와 한집에서 동침하며 살던 시절, 내가 새벽녘에 컴퓨터를 끄고 옆방으로 들어가 부시시 할머니 옆자리로 파고들면 할머니는 나를 꼭 안아주셨는데 팔순이 넘어서도 아기피부처럼 매끄럽고 반들반들한 할머니의 팔다리를 어루만지면 금세 잠이 들었다. 마지막까지도 우리 할머니한테선 흔한 노인냄새 대신 우리 할머니만의 달콤한 체취가 났던 것 같다. 역시나 팔순 넘어서까지 전국 방방곡곡 사찰로 성지순례를 다니실 만큼 정정했던 우리 외할머니한테서도 노인 냄새를 맡은 기억이 없다. 친할머니처럼 잘 때 껴안고 자는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자주 뵙고 팔다리 주물러드리고 했으므로 충분히 체취를 맡을 기회는 있었을 텐데.

내가 늙음에 대해서 새삼 생각하게 된 건 엄마 때문이다. 올해 나이 예순 아홉. 아직도 나에겐 아줌마 영자씨가 익숙하지만,  어느 누가 봐도 할머니라고 인정할 나이다. 요즘엔 특히 젊게 사는 노인들이 많아 칠순 넘어서도 펄펄 날아다니며 건강을 자랑하는 분들도 많지만, 지병도 많고 마음도 약하고 의존적이기까지 한 울 엄마는 그들과는 확실히 다른 그냥 할머니로 늙어가고 계신다. 그간의 여러 병력을 따져본다면 이 정도 회복도 고마워 해야 하는 수준이고, 노인으로선 그게 당연한 건데도 내 마음 속 어린아이는 젊은 엄마를 포기할 수가 없는 모양인지 자연스레 노인의 특징을 보이는 엄마가 매번 놀랍고 속상하고 서글프다가 버럭 짜증이 치민다. 
노인들이 밥풀이나 반찬 양념이 입가에 묻어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건 입주변의 근육과 신경이 노화해 정말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란다. 입술과 혀의 놀림도 자연히 전보다 날렵하지 못해 음식을 입에 넣거나 씹을 때도 흘릴 확률이 높아진다. 특히 울 엄마는 당뇨 합병증으로 말초신경이 상해 손가락 소근육의 움직임이 원할하지 못해 젓가락을 떨어뜨리기 일쑤이니 오죽하랴. 엄마 티셔츠를 보면 하나같이 앞섶에 보일락말락한 얼룩이 묻어 있다. 음식물을 흘린 자국이다. 미리 알아차렸을 때는 얼른 애벌빨레를 하거나 문질러 지우기나 하지, 몰랐다가 그냥 세탁기에 돌리고 나면 나중엔 잘 지워지지도 않는다. 식탁 밑 엄마 자리도 흘린 음식물로 매 끼니마다 어지럽다. 어린 조카 밥먹고 난 자리랑 똑같다고 농담을 하면서도 치우자면 버럭 화가 난다.
진짜 화가 나는 대상은 인간의 노화와 그걸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의 편협함인데, 짜증과 분노는 늘 엄마에게 날아가고 만다. 숟가락질에 서툰 아이가 밥을 흘리는 게 당연한데도, 그걸 치우는 게 짜증나서 애한테 화풀이는 하는 몹쓸 엄마처럼.
며칠 전엔 심지어 울 엄마한테서도 드디어 노인 냄새가 난다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에 사로잡혔다. 노인 특유의 냄새는 피부 노화로 떨어진 죽은 세포와 각질 때문이라 완전히 피할 순 없으니 잘 씻고 향수를 사용하는 수밖엔 없다고 들은 듯하다. 빨간 립스틱 하나 바르는 게 화장의 전부인 울 엄마가 향수를 쓸 리는 없고, 벌써부터 춥다고 매일 샤워는 안할 태세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새삼 느껴진 모양이다. 쓸데없이 민감한 나만 가끔 감지할 정도이긴 하지만, 끈적거린다고 바디로션 바르는 것도 싫어하는 왕비마마의 노인 냄새를 앞으로 어떻게 대처할지 나도 잘 모르겠다.
청력도 나빠져 TV도 거실을 왕왕 울릴만큼 틀어놓아야 하고, 돋보기가 없으면 작은 글씨는 전혀 볼 수가 없으며 기억력도 현저히 나빠져 했던 얘기를 자꾸 되풀이해 당부하는 엄마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그저 자연스러운 노화의 과정인데도 딸로서 선뜻 수긍하게 되질 않는다. 그건 본인도 마찬가지라 나보다 더 속상할 텐데 화를 내는 건 언제나 못된 딸이다.
조금 전에도 늙은 딸 먹으라고 복숭아를 주고 가면서 끈적끈적한 과일물을 사방에 뚝뚝 흘리며 먹고 다니는 엄마에게 와락 신경질을 부렸다. 식탐에도 여러종류가 있지만 울 엄마의 식탐 특징은 입 한가득 넣고 씹는 쾌감을 유독 즐기신다는 점이다. 예쁘고 정갈하게 자른 과일을 포크로 얌전하게 찍어먹는 건 절대 울 엄마 스타일이 아니다. 무조건 통째로 들고 우적우적 크게 베어먹어야 먹는 것 같은 느낌이 드나보다. 아오리나 홍옥사과는 나도 당연히 그렇게 먹어야 제맛이라고 인정하지만, 단물 뚝뚝 흐르는 복숭아 같은 건 좀!!!
당연히 눈도 어두워졌으니 늙은 엄마가 닦는다고 해봤자 끈적임을 말끔히 닦아낼 리 만무해 두어군데는 빼먹기 일쑤인데 걸레질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종목. 결국엔 내몸 편하자고 내는 화풀이였던 거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안계셨던 것도 아니고 팔순 넘어 시들어가시는 그분들을 익히 지켜봤으면서도 늙어가는 엄마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게 잘 안되는 걸 보면 나란 인간은 늙음에 대한 지극한 공포를 품고 있나 보다. 늙기 싫어서 발악하는 사람들의 흉한 모습을 손가락질하면서 말로는 자연스럽게 늙어가는 게 멋진 거라고 주장하지만, 나 또한 다른 방향으로 흉하게 발악하며 억지 용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닌가. 확실히 반짝반짝 빛나는 나이는 지나버렸으니 아쉽고 중년도 노년의 미래도 선뜻 받아들이는 건 싫으니 천상 이게 철 안든 사십대의 청승이 아니고 무언가. 스무살 무렵의 유치한 나는 예순살까지만 열심히 살다가 죽으면 좋겠다고 공언하고 다닌 적이 있다. 아마 그때도 죽음보다 늙음이 더 무서웠던 건 아닐까. 자연스러운 변화이자 이치라고 고개 끄덕이기엔 늙음이 가져오는 심신의 흐트러짐이 너무 못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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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죽음

삶꾸러미 2009. 7. 21. 17:10

최근에 목도한 어떤 죽음, 아니 죽음 이후 산자들에게 남겨진 의식의 절차와 과정을 지켜보며 마음이 참 착잡했다. 확실히 장례는 망자보다, 남겨진 산자들을 위해 그것도 남들에게 뵈주기 위해 치르는 의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름답게, 최소한 흉하지 않게 죽음을 치러내려면 참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 코미디 소재로 사용될 만큼 흔해진 상조회사들의 존재는 바로 그런 필요 때문일 것이다.
문제는 단순히 상조회사들의 도움과 비용, 제례 준비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의식이 장례라는 점이다.
혼례는 하객을 많이 부르지 않고 간소하고 조용히 치러도 의식 있는 이들에게 칭송받을 수 있으며 단 둘이서도 얼마든지 치를 수 있지만, 장례는 절대 그렇질 않다. 버젓이 배우자와 자식도 있고 친지들도 있는데, 문상객이 거의 없고 살뜰하게 곁을 지키는 사람들이 드물어 운구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지경이라면, 망자와 가족들이 살아온 방식에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어쩌면 그들은 의례적인 품앗이가 싫어 안주고 안받겠다 여기며 살았을 지도 모르고, 단순히 반사회적인 성향 때문에 은둔하며 살아왔을지도 모르겠다. 딱히 그들의 태도가 누구에게든 해악이 되는 것은 아니므로 말릴 도리도 없고 잘못이라고 여길 이유는 없다. 특히 그들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런데 죽음을 앞두고선 그런 삶의 방식이 주변인들에게 민폐일 수 있음을 이번에 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지인들의 좋은 일은 모른 체 해도 나쁜 일엔 모른체 하면 안된다는 옛말이 철저하게 옳다는 것도 비로소 새삼 깨달은 것 같다. 과거 조부모님, 외할머니, 그리고 아버지까지 상을 치르며 나는 오히려 너무 많이 몰려드는 손님을 버거워했고 슬퍼할 겨를 없이 문상객 접대에 힘써야 하는 장례문화를 개탄했을 뿐, 그렇게 찾아주고 상주들의 곁을 지키는 문상객들의 존재에 깊은 고마움을 느끼진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기막힐 정도로 한산하고 썰렁한 장례를 지켜보니 확실히 죽음도 사람의 일이기에 사람이 필요하며, 사람은 돈만으론 살 수 없는 복이고 재산이란 게 실감된다. 가끔 사람들과의 부대낌이 짜증스럽고 관계의 유지가 힘들어도 계속해서 <잘하고> 살아야할 이유가 생긴 셈이다. 단순히 물질과 노동의 품앗이를 위해 잘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사람의 도리라는 것, 사람들에게 마음의 곁을 내주는 역사를 쌓아간다는 것, 그래서 죽음의 순간까지 <선뜻> 지인을 지켜줄 진심을 얻는 것의 중요성을 무시해선 안되겠다는 말이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은둔이 자타에게 모두 편리함이겠지만, 죽음 이후엔 민폐일 수 있다는 점은 사실 이번에 내게 아득한 충격이었다. 사후세계를 부정하든 않든,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든 알든, 죽음이 남겨진 이들에게 민폐인 삶이라면 너무 비참하지 않겠나. 앞으로 현대인들 대부분은 더욱이 독거노인으로 살다 죽음을 맞이하게 될 거라는데 과연 내가 <잘하고>살려고 노력하더라도 마지막은 민폐를 면할 수 있는 삶일까. 그건 장담할 수 없겠지.
삶은 살수록 참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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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잘했어요

삶꾸러미 2009. 7. 16. 12:46

일주일에 한번꼴로 장을 보러가는 집 근처의 OOO마트는 까마득한 옛날부터 있었던 낡은 상가 건물 1층에 있다. 재래시장과 마주보는 위치이기도 하고, 워낙 옛날 건물이라 지하 주차장 따위가 갖추어져 있을 리 없으니 건물 앞 도로에 구획이 그려진 노상 공영주차장을 이용해야 한다. 마트 바로 앞쪽 주차구획을 이용하면 무료 주차 확인 도장을 받아 처리할 수 있으므로, 뱅글뱅글 멀미나게 지하주차장에 내려가 폐소공포증 비슷한 두려움에 젖을 필요도 없고 오히려 시간도 절약된다. 
내가 식탐이 많기도 하지만, 고른 영양분 섭취까지 신경써서 나름대로 메뉴를 짜 사들이는 일주일치 장보기의 양은 꽤나 거대하다. 무거운 건 배달을 시키고 신선식품만 먼저 들고오는데도 낑낑거려야할 때가 많으므로 나는 최대한 마트 입구에 가까운 주차공간을 찾는 편이다. 따라서 마트에 갈 때마다 만나는 공영주차장 요원 아저씨도 늘 동일한 분인데, 내가 그간의 긴 공백을 어렵사리 접고 드디어 끼적거림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바로 이 아저씨다.

처음 이 아저씨를 만났을 때가 언제인지 모르겠는데 그리 오래 된 것 같지는 않다. 길어야 1년 반 정도.
낯선 사람과 쓸데없이 말 섞는 걸 싫어하는 내가 처음 차를 세운 뒤 이 아저씨를 만나고 뜨악했던 순간이 아직도 기억나기 때문이다. 마트 입구쪽에 차를 세우면 그간 다른 주차요원 아저씨들은 아무 말 없이 시간만 표시한 종이를 앞 유리창에 끼우거나, 그나마 친절한 분들이 "마트가냐?"고 묻고는 도장 받아올 종이 반쪽을 찢어 건네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 그 아저씨는 일단 차가 접근하면 운전을 잘하는 사람이든 아니든 무조건 양팔을 휘저어 반색하며 주차를 돕고는, 차에서 내리면 이렇게 말한다. "잘 하셨습니다!" 이면도로에 계속 오가는 차들이 있으니 주차과정이 험난할 때도 있는데, 이 아저씨는 위험하다 싶을 정도로 몸을 던져 주차를 도울 때가 있다. 저러다 차에 치이지 싶을 정도로...
그러고는 마트에 간다고 하면 "아유, 잘 오셨어요."라며 주차증 반쪽을 찢어주는데, "잘 다녀오세요."라는 인사도 잊지를 않는다. 과잉 친절에 어색해지는 나 같은 사람은 얼른 "네"라고 대꾸하고 머쓱해서 장을 보러 도망치듯 들어가게 됐는데, 처음 장을 보고 나와서 나는 좀 짜증이 났었다.
그 아저씨의 일처리가 어쩐지 굼뜨고 느렸기 때문이었다. 마트에서 찍어준 확인 시간을 초과하면 돈을 더 내야하는 상황은 이해하지만, 내 경우는 하도 장을 많이 봐서 대부분 시간도장을 넉넉히 찍어받기 때문에 주차증만 척 봐도 알텐데 이 아저씨는 주차증 시간과 자기 시계, 그리고 또 다른 장부에 적힌 기록을 꼼꼼이 확인하지 않고는 보내줄 생각을 않기 때문이다.
뭐가 그리 바쁜지 늘 빨리빨리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는 것에 길들여진 나는 몇분 안 되는 그 아저씨의 꾸물거리는 태도에 괜히 부아가 났던 것 같다. 실은 그게 일 처리의 원칙임에도 말이다. 처음엔 아저씨가 주차요원 초보라서 그러는 줄 알고 속으로 혀를 찼지만, 1년도 넘게 지난 지금도 그 아저씨의 주차증 확인시간이 빨라지지 않은 걸 보면 그 분은 그냥 원래 그런 분이라는 의미다.
"아유, 넉넉하네요. 잘하셨어요."라고 또 한번 칭찬의 말과 함께 무료주차 확인이 끝나면, 그 아저씨는 또 열심히 오가는 차를 살피고 양팔을 휘저으며 내가 차를 빼기 좋도록 안내를 한다. 이면도로의 주차구획선을 떠나기까지, 제 아무리 운전과 주차에 베테랑이더라도 "오세요, 오세요!" "천천히 하세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조심하세요." "잘하셨어요." "안녕히 가세요."로 이어지는 그 아저씨의 인삿말을 피할 도리는 없다. ^^
언젠가 한번은 그 아저씨가 잠시 화장실에라도 간 듯 옆 구역의 아저씨에게 주차증을 드리고 확인을 받아야했는데, 내가 차를 뺄 무렵 헐레벌떡 달려온 아저씨는 동료에게 "아유, 미안해요."라고 하더니 도장 찍힌 주차증을 확인해 장부에 끼우며 덧붙였다. "잘했어요."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고 늘 하던 자기 일에 <잘했다>는 칭찬을 들은 동료 아저씨의 표정이 궁금해진 나는 얼른 거울을 쳐다보았는데, 예상대로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반면에 칭찬쟁이 아저씨는 정말로 기쁜듯 싱글벙글.

어제도 장을 보러 다녀오며 나는 어린시절 숙제공책에 찍힌 선생님의 <참 잘했어요> 도장처럼 은근히 기분을 좋아지게 만드는, 그 아저씨의 익숙한 칭찬 3종 세트를 듣고 돌아왔다. 
"아유, 주차 잘하시네요." - 다른 차의 주차증을 발급하느라 미처 도와주지 못하는 새에 내가 냉큼  차를 대자
"잘 오셨어요." - 마트에 간다고 하니까
"아유, 넉넉하게 잘 받아오셨네요." - 30분 무료 도장 두개를 쾅쾅 받아온 나의 주차증과 유리에 끼워놓은 주차증에 적힌 시간과 자기 손목시계를 유심히 다 확인하고 난 다음에

도대체 그 아저씨는 어째서 그렇게 매사에 싱글벙글 감탄하고 칭찬하는 삶의 태도를 갖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일처리엔 고지식한 원칙주의자인 것 같지만 타인에 대한 예의와 마음의 여유를 잃지 않는 그 아저씨를 처음엔 버럭 짜증스럽게 여겼고, 아직도 그 아저씨의 "잘하셨어요"라는 말에 민망하다는 생각이 크긴 하지만 나도 본받아야할 점이라는 건 분명하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한다는데 말이지...
칭찬은커냥 입만 열면 뾰족한 꼬챙이로 콕콕 찔러대는 말만 뿜어대고 있는 초절정 까탈스러움을 떨쳐버려야하는데 참, 그게 쉽질 않다. 

오늘은 왕비마마한테 "잘했다"는 말을 최소한 3번은 해보겠다는 다짐의 포스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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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처럼 잘난 척이 심하거나 자의식이 강한 사람의 경우 남들이 베푸는 쓸데없는 호의는 주제넘은 간섭이나 참견으로 여겨져 오히려 불쾌함을 느끼기 쉽다. 하지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호의는 확실히 전염효과가 있다. 여러 상황이 있겠지만 일단 떠오르는 건 경미한 접촉사고.
운전을 하다보면 정말 별의별 사람들을 다 만나게 되고 접촉사고가 나지 않더라도 양보나 운전예의 문제로 서로 빵빵거리거나 삿대질을 하거나 심지어 차를 세우고 길바닥에서 큰소리로 말다툼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모든 사고는 피하는 것이 최선이지만, 본의 아니게 사고를 겪는 경우에도 대처법은 참 여러가지다.
차가 크게 파손됐을 경우엔 별 도리가 없다. 현장증빙 사진을 찍어두거나 도로바닥에 표시를 해두고 직접이든 보험사를 통하든 잘잘못을 가려 물어주거나 수리해 받으면 된다. 물론 처음 사고를 당하면 경황이 없고 손발이 벌벌 떨려 필요한 조처를 하지 못하는 수가 많은데, 무조건 버럭버럭 소리부터 지르며 저는 잘못없다고 욕부터 해대는 성급한 진상을 만났더라도 최대한 침착하게 증거확보를 한 후 보험사에 전화하는 게 현명하다. 그냥 서 있는 차를 엉뚱하게 들이받은 경우를 제외하고 요샌 어차피 웬만하면 그냥 쌍방과실이니까.
그런데 정말로 살짝, 범퍼나 사이드미러에 살짝 흠집만 나는 정도의 사고일 경우엔 어떨까?

유난히 차를 아끼는 사람들도 있긴 하다. 성격상 범퍼에 흠집하나 나도 절대 못 견디고 깨끗이 고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또 본성이 고약하고 사악하여 사소한 접촉사고에도 옳다구나 하며 원래부터 부실했던 차를 이곳저곳 고치고 상대에게 수리비를 물리는 물귀신형 악당도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간 그리 사고를 많이 겪은 건 아니어도 내가 십수년 간 지켜본 바에 의하면 악당들 보다는 선량한 사람들이 더 많았고 그런 이들이 베푼 호의는 나까지 금세 전염시켰다. 공주가 꽤나 어렸을 때였는데, 왕비와 어린 공주를 뒤에 태우고 어디론가 가던 날 조카가 고모 옆 앞좌석에 앉겠다고 울고불며 난리를 피우는 바람에 운전하며 달래느라 정신이 쑥 빠진 나는 빨간 신호등을 미처 못보고 쿵, 앞에 서 있던 어떤 자동차를 받았었다. 다행히 도로가 막혀 천천히 가고 있기는 했지만 검정색의 꽤 좋은 차를 받았음을 깨달은 순간 나는 앞이 캄캄해졌다. 아무리 경미한 접촉사고라도 행여 못된 인간을 만나면 범퍼를 몽땅 갈아주어야 함은 물론 최악의 경우 병원 검사비(건강보험 적용이 안돼서 무지 비싸다)와 물리치료비까지 다 물어주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내 주변엔 크지 않은 접촉사고를 냈는데도 악덕 운전자나 못된 택시기사를 만나는 바람에 감정적으로나 재정적으로 뒷처리에 심히 골치를 썪은 지인들이 꽤 됐던 터라 더럭 겁이 났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얼른 차에서 내려 다가가자 50대쯤의 운전자 아저씨는 자기 차를 살피더니 내 차의 페인트가 옮겨묻은 뒷범퍼 부분을 손으로 쓱 문질러보고는 나에게 "아이가 타고 있던데 다친 데는 없죠?"라고 물었다. 옆에 서서 들릴듯 말듯 "죄송합니다..."라고 중얼거리고 있던 나는 뜻밖의 질문에 "네."라고만 대답했는데, 아저씨는 그럼 됐다고, 운전 조심해서 가라고 하고는 얼른 차에 올라타고 사라졌다. 나 역시 안도의 한숨을 쉬며 얼른 내 차로 돌아와 가던 길을 갈 수 있었다. 그래놓고 그 아저씨가 나중에 나를 뺑소니로 신고했더라는 반전 같은 건 없다. ^^ 어찌보면 당연한 듯한 상황에서 크게 호의를 입었다는 느낌만 남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 누군가 운전 미숙이나 잠깐의 한눈으로 슬쩍 들이받히는 사고를 당했을 때, 나 역시 그 아저씨처럼 범퍼에 난 흠집이 그리 크지 않은 경우엔 괜찮다고 흔쾌히 호의를 베풀 수 있었다. 선례가 없었다면 아마도 나는 범퍼를 통째로 갈 거나 도색을 다시할 만큼 돈을 받아야 할 것인가, 그 절반만 받아야 할 것인가, 보험사에 연락을 해야할 것인가, 흠집에 속 쓰리지만 그냥 보내야 할 것인가 우유부단하게 심히 고민을 했을 게 틀림없다. 물론 그 즈음엔 멀쩡히 세워놓는데 어느 틈에 누군가 긁고 지나간(양심없이 바퀴 위쪽을 찌그러뜨려놓고 도망친 인간들도 있어 그건 내가 생돈 들여 고쳐야 했다! ㅠ.ㅠ) 생채기들이 범퍼에 몇 군데 생겨났기에 더 너그러워질 수 있었다. 하지만 경미한 접촉사고로 옴팡 뒤집어쓴 전적이 있는 사람이 똑같은 사고를 당했을 경우엔 복수심에 불타, 다른 사람한테 받은 억울함을 대신 푸는 마음으로 굳이 갈 필요도 없는 범퍼를 새것으로 갈아달라는 요구를 하기도 한단다. 복수는 복수를 낳고 호의는 호의를 낳는 순환고리가 되풀이된다는 얘기다.

동생들도 올케들도 다 운전을 하기 때문에 이런 얘기를 해보면 그들도 나와 비슷하다. 큰동생은 꽤 비싼 차를 몰기 때문에 범퍼가 살짝 닿는 사고에도 상대방이 식겁해서 당황한다는데, 범퍼나 거울에 난 사소한 흠집 정도는 괜찮으니 그냥 가라고 하면 오히려 사고 낸 쪽에서 엄청 놀라고 고마워한다나. 센서까지 들어있는 외제차 범퍼 잘못 흠집내면 국산 중고차를 몽땅 팔아도 안될만큼 어마어마한 돈을(과장인지 아닌지 몰라도 고급형 외체차는 범퍼 하나에 천만원이라고 하더군!) 물어줘야 한다는 비정한 도시의 속설을 모두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동생들 역시 비슷한 호의를 경험했기 때문일수도 있지만, 아마도 운전하는 가족과 지인들을 생각해서 무리한 욕심을 부리는 대신 사소한 호의가 사방에 전염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품고 사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어제도 나는 집앞에서 자동차 궁둥이를 찰싹 때리는 듯한 미묘한 접촉사고를 겪었지만, 그냥 보내주고 돌아왔다. 불법 유턴까지 했던 마당이라 그 자리에서 오래 승강이를 벌여 경찰이라도 개입했으면 범칙금까지 물어야 했을 그랜저 아저씨는 내가 까탈스럽게 굴지 않더라도 까진 범퍼랑 차체  도색하려면 생돈들여야 할 테니까. 그 차는 도색이 벗겨졌는데, 먼지가 많이 쌓였기 때문인지 내 차 범퍼는 검은 페인트만 옮겨 묻었을 뿐 멀쩡한 걸 보며 내심 궁금해졌다. 내가 운전하면서 호의를 베풀기 시작하니깐 차도 알아보는 건가, 하고. ^^
더불어 그 아저씨도 혹시 나중에 비슷한 사고를 당했을 때 범퍼에 살짝 흠집 난 정도는 흔쾌히 감수하고 보내줄 수 있는 호의를 베풀 수 있으면 좋겠다. 무서운 돼지독감 바이러스보다야 전염성이 약하겠지만, 세상엔 나쁜 사람보다 좋은 사람이 더 많으며 선량하게 베푸는 호의는 전염된다는 걸 더 많은 사람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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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강요

추억주머니 2009. 4. 4. 22:01

국민학교 4학년때의 일이다.
그 시기에 특히 또래 집단들과의 긴밀한 우정이 형성되는 모양인지, 반엔 유독 끼리끼리 어울리는 무더기들이 많이 생겨났던 것 같다. 꽤 조용한 아이였던 나는 우정을 과시하듯 서너명씩 몰려다니는 그 아이들이 꼴같지 않기도 했고, 당시 유행하던 고무줄 놀이에 낄 수 없을만큼 엄청난 실력(밑바닥이란 의미다) 때문에 어차피 같이 놀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유독 나를 자기네 무리에 끌어들이려고 공을 들이는 아이가 하나 있기는 했다. H는 나와 집이 같은 방향이 아닌데도 괜히 빙 돌아서 시장 언저리까지 나와 동행하기도 하고, 친구들에게 막 우겨서 나를 고무줄 놀이 깍두기로 껴주었다. 나는 그 아이의 마음이 고맙다기 보다는, 1, 2단을 넘기지 못해 놀림감이 되기 쉬운 내 고무줄 실력을 아이들 앞에 보여야 한다는 게 곤혹스러웠지만, 그래도 나랑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의향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H의 바람대로 학기초에 써내는 가정환경조사서에 그애의 이름을 적어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기가 막히지만, 부모의 학력과 직업은 물론이고 집에 TV 따위의 가전제품이 있는지 없는지, 말도 안되는 항목까지 써내야 했던 그 종잇장에는 친하게 지내는 학우관계에 관한 항목도 있었고, 그 종이를 내기 전날 H는 나에게 다가와 "나는 친한 친구 이름에 니 이름 쓸 거니깐, 너도 내 이름 써야한다. 알았지?"라고 말했었다. 
H가 특별히 내 마음에 드는 것도 싫은 것도 아닌 상태에서 나는 그냥 귀찮아서 그애와 친구로 지내는 걸 <눈감아주기로> 했던 것 같다. 도시락을 먹을 때나 점심시간 이후 운동장에서 놀 때, 방과후 집에 갈 때도 난 오히려 요란하게 휩쓸려 놀기를 강요하는 분위기가 불편했음에도 거의 모두 끼리끼리 무리를 이룬 반 분위기 때문에 차마 싫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 4월 중순쯤 우리반에 전학생이 등장했다. 뿔테 안경을 써 모범생 분위기가 나고 꽤 얌전해 보이던 그 아이는 전학생이 흔히 겪어야 하는 따돌림의 운명을 고스란히 겪기 시작했다. 학기초이긴 해도 이미 <파벌>이 형성된 이후에 전학을 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느 점심 시간 짓궂은 남자애들이 그애를 확 밀어 넘어뜨리는 장난을 한 순간 그애가 "아부지!"라고 외치며 울음을 터뜨린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대부분 아이들은 깜짝 놀라거나 위험에 처한 순간 본능적으로 "엄마!" 또는 "엄마야!"라고 하는데, S는 그러지 않았다는 사실이 모든 아이들에게 이상하게 비쳤던 거다.
육성회 임원인 엄마를 둔 H는 당장 자기네 엄마를 통해 S의 뒷조사에 돌입했고, 전학시키던 날 학교에도 온 적 있던 S의 예쁜 엄마가 친엄마가 아닌 새엄마라는 사실, 그날 등에 업혀 있던 유난히 어린 아기동생은 배다른 남동생이라는 사실까지 알아내 온 반아이들에게 떠들어댔다. 이혼율이 높아진 지금도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당시엔 이혼이든 사별이든 재혼 가정이나 홀부모 가정은 무조건 <결손가정>이라며 잠재적인 문제아를 양산하는 가정으로 손가락질 했던 것 같다.
나도 2학년때 그 학교로 전학을 와 한동안 빙빙 겉돌던 기억이 있기도 했지만, 나는 새엄마와 함께 사는 S를 안쓰러워하진 못할망정(사실 나의 무작정 동정심도 문제였지만;;) 괜히 따돌리는 반아이들에게 분노했고, 마침 집도 서로 그리 멀지 않은 S를 우연히 등교길에 만난 날 나도 모르게 먼저 말을 걸었다. 그때도 친구를 본격적으로 사귀는 건 꽤나 뜸을 들이는 성격이라, 내가 S의 친구가 되어 주겠다는 의협심 같은 건 전혀 없었고 그냥 편견없이 전학생을 지켜보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와 S가 몇번 등하교를 같이 하는 것을 목격한 아이들은 즉각 수군대기 시작했고, H는 나를 운동장으로 불러내 <절교선언>을 했다. "S랑 같이 다니면 너랑 절교할 거야. 어쩔래?"라는 식으로 말하는 H에게 나는 기가 막혀서 니 마음대로 하라고 대꾸하고는, 보란듯이 S와 친한 척을 했다. 당연히 나까지 따돌림을 당하는 추세였는데, 어린 마음에도 나는 그들의 패거리 횡포가 부당하다고 느끼며 분노했다. 다행히 한동안 지켜본 결과 S는 나와 책읽는 수준도 비슷했고, 나처럼 운동도 싫어하는데다 나처럼 아기들을 예뻐해서 자기네 아기동생을 만날 업어준다고 자랑을 했다. 우리집보다 훨씬 책도 많은 S의 집에 놀러가 보니, 동화속의 악독한 새엄마들과 달리 S의 새엄마는 특별히 다정스럽진 않아도 그저 평범한 엄마였다.
내 인생의 책 첫권으로 꼽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도 바로 이 친구가 선물해준 책이었다. 여자애들의 전반적인 따돌림 속에서 나는 얼떨결에 S와 단짝이 되고 말았지만, 나에게 정말로 각별한 친구의 존재는 S가 처음일 정도로 반발심이랄지 분노에서 시작된 우정은 퍽이나 성공적이었다. 한편, 나에 대한 H의 응징은 단순히 절교로 끝난 게 아니었다. ^^; 자신의 우정을 <감히> 거부한 배신자(실제로 H는 고무줄 놀이에 나를 끼워주었던 무리들에게 나를 <배신자>라고 칭했다)를 가만둘 수 없었는지, 따돌림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은 듯 H는 화장실 낙서사건을 공모했다. 당시엔 재래식 화장실인 <학교 변소>에 남녀 학생의 이름이 나란히 쓰이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스캔들이었다. 그런데 하트 속에 내 이름과 나란히 적힌 남자애가 우리반에서 제일 말썽쟁이에다 잘 안씻어서 더럽고 공부도 못하는 또 다른 왕따였다는 사실이 H가 꾸민 복수극의 핵심인 모양이었다.
화장실 벽에 분홍색과 노란색 분필로 그린 하트 속에 이름이 적히는 사상최대의 스캔들을 직면하고 엄청난 놀림을 받기 시작한(내가 지나다닐 때마다 아이들이 떼지어 "얼레리 꼴레리, 라니하고 OOO하고 얼레리 꼴레리~"라고 놀려댔다) 나는 처음엔 화가 나서 눈물을 흘렸던 것 같다. 하지만 욱하는 성질머리와 삐딱한 반항심은 그때도 여전했는지, 스스로도 잘난 척하며 나와는 터무니 없는 조합이라고 생각하던 코찔찔 말썽쟁이 OOO에게 일부러 보란듯이 연필도 빌려주고 전에없이 다정하게 구는 것으로 대처하기 시작했다. 왕따들의 연대감이라고나 할까? 그때부턴 유독 잘난 아이들이 못되게 따돌리던 힘없는 아이들에게 마음이 쓰이기 시작했다. 유독 뚱뚱해서, 말을 더듬어서, 잘 안씻고 꾀죄죄해서, 숙제를 잘 안해와서, 그밖에 사소한 이유로 따돌림을 받던 아이들은 각자 받은 마음의 상처 때문에 쉽게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다. 드러내놓고 엄청 친한척을 하진 않았지만 심정적인 지지와 응원을 보내는 사이였던 셈이다.
마침 그해 담임은 2학기부터 이상하게 좌석배치를 자율에 맡기겠다며 조장 몇명을 임명하곤 마음에 맞는 친구들끼리, 대신 남녀 비율은 반반씩 섞어 조를 꾸리게 했다.  폐품수집이든, 환경미화든, 용의검사든, 학예회 준비든 모든 경쟁평가는 조별로 한다는 것이 원칙이었다. 조장으로 뽑힌 내가 멍하니 앉아 있는 사이, 이미 패거리는 정해졌고 나는 굳이 조원을 선별할 필요도 없었다. 아무데도 뽑히지 않은 왕따 아이들은 전부 우리 분단에 앉으면 되는 거였다. ^^
그래서 우리 왕따 조가 모든이들의 예상을 뒤엎고 전분야에서 최고 평가를 받았다든가 하는 드라마 같은 일은 물론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단언컨대 꼴찌 조는 우리가 아니었다. 육성회 임원 자식들이 대거 모여있던 H의 조가 단연 극성스러운 1등을 차지한 건 말하나 마나일 것이다. 하지만 왕따들도 모이면 힘이 세지는 걸 우린 느꼈고, 근거없이 화장실 벽에 이름을 적혀 스캔들을 내는 복수극 같은 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반에서 제일 키 큰 코찔찔 OOO이 주먹을 휘두르며 누군지 들키면 죽을 줄 알라고 으름장을 놓은 것도 효과가 있기는 했지만, 스캔들 당사자인 내가 바락바락 아니라고 하며 울고불고 해야 재미가 있을 텐데 오히려 의연하게 구니까 소문은 더 빨리 잦아들었던 것 같다.

쓰다보니 나 혼자 옛생각에 재미가 들어 쓸데없이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왜 내가 새삼 이런 사연을 적고 있는고 하니, 제목에도 적은, 최근 경험한 어떤 관계의 강요 때문이다. 나는 고집스러운 구석이 많아서 누가 느닷없이 강요하면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수긍하기 보다는 반발심이 먼저 생기는 편이고, 특히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결과적으로 상처를 입더라도 제3자의 판단을 따르기보다는 내가 스스로 겪고 판단을 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런데 꼭 나를 염려한다는 명분으로 관계를 대신 정립해주려 시도하는 이들이 있다. 지금껏 경험한 바로는, 그렇게 다가와서 간섭한 이들과 오히려 관계가 틀어지고 말았던 것 같다. 이러이러한 사람이 있으니 각별히 친하게 지내라거나, 새삼스레 그 사람 이런저런 사람이니 가까이 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말을 지인에게 듣더라도, 나는 의심이 많은 성격인 때문인지 덜컥 그 말을 수긍할 수가 없다. 사람은 겪어봐야 안다지만 십수년을 겪어도 뜻밖이라 생각되는 면을 발견할 만큼 한 인간을 파악한다는 게 어려움을 알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나는 느닷없는 관계의 강요에 제일 먼저 불쾌감을 느꼈다. S와 놀면 자기와는 절교라는 식으로 극단적인 협박을 한 H와는 전혀 다른 사건이지만, 어쨌든 나는 내 판단력과 관계망을 간섭하려는 그의 시도에 11살 때의 추억이 떠올랐고 부디 그때처럼 순전히 반발심으로 원래 관계가 흐트러지진 않기를 바라고 있다.

하기야, H와는 5학년에 올라가서 그녀의 진심어린 사과를 받아들이고 S와 함께 셋이 다시 친구가 되긴 했었다. 국민학교 졸업 후 그 둘다와 연락이 끊긴지 오래지만.
지금 그들은 또 어떤 관계를 맺고 살고 있을지 문득 궁금하다.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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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투덜일기 2009. 3. 13. 00:18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어도 교정지에 집중해야 했기 때문에 비교적 딴짓을 할 수가 없어 블로그질도 멀리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건만, 봄비오는 밤 누군가의 춘심에 뒤통수를 맞았다.
넌 왜 만날 그렇게 씩씩하느냐고 걸핏하면 딴죽을 거는 사람이었다.
오늘도 역시나 나의 변함없는 씩씩함에 트집을 잡다가 뜬금없이 말했다.
외로워서 술 한잔을 하고도 계속 외로워서 자기보다 외로운 사람이 또 누가 있나 생각해봤더니 누군가 떠올랐다나. 그게 누군지 아느냐고 나에게 묻기에, 나는 다른 사람을 떠올리곤 대답을 해야하나 말아야하나 망설이고 있었는데, 내 대답도 듣기 전에 하는 말이 세상에서 제일 외로운 사람은 바로 나란다.
의지력이 강해서 외로움을 드러내지 않고 씩씩하게 보이지만 속은 안그렇다고. 그래서 내가 안쓰럽다고.

나보다 나를 더 잘 안다고 생각하며 섣불리 나를 재단하고 판단하는 사람의 코멘트 쯤은 시큰둥하게 넘길 줄 아는 나이가 되었다고 여기고는 있는데, 세상에 안 외로운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웃어 넘기며 취기어린 목소리를 차단하는데 성공을 거두긴 했는데, 좀체 다시 교정지에 집중이 안된다.

그런가?

흥.
아니다.
외로운 걸 모를 정도로 심장이 무심하게 단련된 것인지 그냥 무신경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절대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인간은 없다는 말을 굳이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내가 세상에서 제일 외로운 사람이 아니란 건 확실하다.
어떻게 아느냐고?
그냥 나니까 안다.
쳇.
그저 비와 술이 웬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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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듯함의 이면

삶꾸러미 2009. 2. 22. 00:45


반듯하다01 : 「1」작은 물체, 또는 생각이나 행동 따위가 비뚤어지거나 기울거나 굽지 아니하고 바르다.
                  「2」
생김새가 아담하고 말끔하다.

번듯하다:   「1」큰 물체가 비뚤어지거나 기울거나 굽지 않고 바르다.
                「2」생김새가 훤하고 멀끔하다.
                「3」형편이나 위세 따위가 버젓하고 당당하다.


얼마 전 작업을 끝낸 책이 이런 식으로 사전의 낱말뜻을 적어놓고 단상을 풀어나가는 형식이었는데 재미 있어서 따라해보고 싶었다. :)

돌아보면 반듯함은 어려서부터 나를 규정하는 틀인 동시에 채찍이었던 것 같다. 친동생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촌동생들한테도 <반듯한> 언니누나로서 모범이 되어야한다는 건 분명 알게모르게 동기를 부여했을 터이고 어느 정도 스트레스로 작용하긴 했겠지만 본인의 성격상으로도 심하게 흐트러지고 비뚤어지는 건 용납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애써 <반듯함>을 추구하느라 특별히 삶이 고달플 것은 없었다. 
약간의 문제는 본인이 인정하는 반듯함과 남들이 자신의 바람까지 담아 투사하는 나의 반듯함 사이에 생겨난 틈이랄까 공백 같은 것이었다. 예를 들어, 독서를 좋아하긴 하지만 집에 있던 동화책과 문학전집류가 따분해지고 난 뒤, 내가 만화방에서 빌려보는 만화책에 재미 들렸을 때 같은 동네 모여 살던 친척 어르신들이 만화책을 쌓아놓고 낄낄대거나 심각하게 책에 고개를 파묻은 나를 보고는 깜짝 놀라 우리 엄마에게 한 소리를 해댔다.
"어머머! 라니는 좋은 책만 보는 줄 알았더니, 만화책도 보네? 저러다 만화책에 빠져 공부는 뒷전으로 밀려나면 어쩌누. 우리 애들한테 만날 라니 언니 좀 보고 배우라고 잔소리하는데 저런 것까지 따라할까봐 걱정이야. 언니가 좀 말려봐요."
당시 만화방과 만화책의 위상이 워낙 나쁘기는 했지만, 좋은 만화 나쁜 만화 작품성 따져서 가려볼 줄 아는 안목 정도는 갖추고 있다고 생각했던 조숙한 나로서는 친척 어른들의 간섭과 그에 따른 엄마의 개입이 참 못마땅했다.

어떻게 보면 그간 줄곧 살아오며 남들이 생각했던 나의 <반듯함>은 순전히 그들의 오해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정말로 자타공인 <반듯한> 사람이라면,  "어머나, 너한테 그런 면이 있었니, 의외다" 라는 반응을 그리 자주 들을 일이 없어야 정상 아니겠나. 하지만 나는 어린 시절의 만화책 사건을 비롯해, 몇몇 나의 행동에 뜻밖이라는 평가를 퍽이나 자주 들었던 것 같다.
가령,  놀기 좋아하는 사촌언니 따라서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이른바 '나이트클럽'이라는 데를 꽤나 자주 드나들며 그런 데서 술이 아닌 콜라(콜라텍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를 마시고도 신나게 춤추며 놀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당시 유행하는 춤을 얼추 따라출 수 있는 경지에 올랐는데, 대학 1학년때 과에서 단체로 나이트클럽에 갔던 날 내가 고등학생처럼 보이기도 했고 실제로도 미성년자라 입구에서 나를 데리고 들어가느라 퍽이나 애를 써야했던 동기들은 물만난 고기처럼 플로어에서 노는 나를 보며 다들 거의 경악하는 수준이었다. "세상에나, 너 나이트 죽순이였니!"라고 외치면서... -_-; 다들 내가 나이트클럽이라곤 가본 적도 없을 거라 예상했다나. 하지만 4살 많은 사촌언니랑 다니면서 친구라고 얼렁뚱땅 넘기면(사촌언니가 늙어보이게 미리 화장도 해주곤 했다) 주민증 보자는 얘기도 없이 그냥 들여보냈음을 그들이 알 리가 없긴 했다.
운전을 시작하고 난 뒤에도 그랬다. 처음 수동 자동차를 몰고 다니던 초보시절의 우여곡절이야 그렇다 치고, 어느정도 겁이 없어지고 나선 하필 회사가 본사 공장으로 몽땅 들어가는 바람에 경기도 안산으로 1년여 출퇴근을 해야 했는데, 수인산업도로를 오가는 난폭한 트럭들 사이에서 출퇴근을 하다보니 나 역시 입과 운전이 거칠어질 수밖에 없었고 어쩔 땐 괜히 작은 차를 무시하는 트럭 운전수에게 화가 나 소모적인 싸움(쫓아가 추월해서 코앞에서 브레이크 밟아 식겁하게 만들기 따위;;)에 마구 응수했다. 욕도 당연히 거침없이 늘어났고, 사실 아직도 운전할 땐 나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오는 경우가 많다.
어쨌든, 그 시절 출근 시간에 나와 어느 덤프트럭의 위험한 실갱이를 하필 나와 별로 사이가 좋지 않은 회사 직원이 목격한 바람에 난 또 내 의도와 상관없이 구설에 올라야 했다. "안 그렇게 생겨갖고 운전 엄청 난폭하게 하더라. 여자애가 죽으려고 겁도 없이..." 
난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소리쳐 주고 싶었지만,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입방아를 찧어대든 상관이 없었기 때문에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진 않았었다. 회사생활 막바지라서 무서울 게 전혀 없기도 했지만, 더는 남들이 보는 <반듯함>의 허울에 나를 얽매고 싶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서 그 오해를 깨주고 싶은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내가 의외적인 모습을 보인다 해도, 주변 사람들에겐 내가 대부분 <반듯해> 보이는 모양었고 때로는 그 <반듯한 이미지>를 억지로 강요받기도 했다. 이십대 후반 즈음에 가장 싫었던 건, (겉모습 뿐이든 아니든) <반듯한 친구>로 <이용> 당할 때였다. 특히 연애사가 복잡하거나 <날나리> 이미지를 갖고 있는 친구들의 경우, 진지하게 사귀는 사람이 생겼거나 결혼을 앞두고 있을 때 나는 친구들이 자기도 <착하고 반듯한> 친구가 있다는 생색이 필요할 때 꼭 데리고 나가는 선택품목 같은 존재였다. 물론 당시엔 어리숙한 내가 그 사실을 알 리 없었고, 연애질 열심히 할 때는 코빼기도 안비치다가 뜬금없이 불러내는 친구들이 그저 사랑과 연애에 충실해 그러는 것일 뿐이라고 애써 이해하려 노력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런 친구들 가운데는 나중에도 지속적으로 나를 지들의 양다리를 감추려는 <알리바이 증명용>으로 이용한다거나, 거짓말의 도구로 사용하는 이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기가 막혔다. 문제는 놀랍게도 나를 팔면 그들의 거짓말이 통한다는 사실이었다. 
아, 내가 그렇게 꽉 막히고 얌전하고 바른생활을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는 말인가!

다행스럽게도 나이가 많아짐과 함께 보편적인 사회적 잣대로 가늠되는 <정상적인> 삶의 궤적과는 멀어지는 비혼의 세계로 접어들면서 더는 남들의 강요로 포장된 <반듯함>에선 벗어날 수 있게 된 듯 하다. 어디까지나 때가 되면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아파트 평수 넓혀가며 살아가는 게 요즘의 <반듯함>이고 곧 <번듯함>으로 확대되기 때문이다. 그나마 <번듯함>까지 강요받는 삶은 아니었으니 천만다행이라고 여기고는 있는데, 아직도 가끔 나의 <반듯함>을 칭찬하거나 과대포장하려 드는 사람들을 만나면 난감하다. 나는 그저 인간으로서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파렴치함을 멀리하려는 양심의 범주에서 살아가려고 애쓸 뿐, 정말로 모범생같은 인물은 절대로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늘 불만 많고 투덜거리고 뒤에서 구시렁거리고 벌컥벌컥 현실에 짜증을 내는 평범 이하의 비뚤어진 인간이라, 어떻게 해야 쓸데없이 제 맘대로 높여 부르는 타인들의 기대치를 낮출 수 있을지 그게 고민이거늘.

아주 오랜 만에 "나한테 반듯한 친구가 너 밖에 더 있니. 니가 한 번 봐줘."라고 하는 청을 듣고나서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졌다. 만나서 확 "나 그런 사람 아니거든!"이라고 외쳐줄까 어쩔까. 내가 뭐하러 만나느냐고 처음부터 거절 못한 내가 모자란 것도 확실하고, 실제로 그렇게 외쳐줄 위인도 못되고, 결론은 내가 바보란 얘기다. 이런 인간이 뭐가 반듯하다고.. 나 원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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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증

투덜일기 2008. 12. 24. 20:17
크리스마스 이브라서 무조건 기분좋게 보낼 수야 없는 일이고 사실 나와는 별 무관한 날이니깐
그냥 평소 까칠한 성격대로 혼자 구시렁거리며 털어버려야겠다.

소소한 짜증의 원인이야 누구에게나 늘 있으며 얼마간 마음 끓이다 잊어버리면 그만이지만
요 몇주일 증폭되는 짜증의 원인은 결국 내가 뿌린 씨앗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단기간에 끝날 것도 아니어서 더욱 속이 곯는다.

첫번째는 지난번에도 자아비판이랄까 제발등 찍기랄까 민망한 고백을 한 적이 있었던 번역건.
4권짜리 시리즈물을 두 권 번역한 뒤 세번째 책의 계약을 앞두고 있었을 때 담당자들이 바뀌면서 트집을 잡혀 이후 계약이 무산되었던 일이 있다. 그  사람들이 제 아무리 예의나 출판개념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사소하든 말든 내가 빌미를 제공하여 일이 불거졌으니 다 내 잘못이라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그들과는 두번다시 상종하지 않으면 그만이고, 앞으론 바쁜 마감에 시달리더라도 번역에 좀 더 신경쓰라는 채찍질로 받아들였으니까.
그것으로 그냥 덮어두고 잊을 수 있으면 좋겠으나 상황이 또 여의치가 않다.
처음 상하 두권으로 냈던 소설을 단권으로 재출간하고 내가 번역한 두번째 시리즈가 출간된 뒤, 그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개봉되었으며 출판사에선 영화개봉과 더불어 특별판을 제작 판매하기에 이르렀다.
작년 말에도 몇년 전 내가 우리말로 옮겨 출간된 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영화가 나오긴 했지만 워낙 흥행이 안되는 바람에 곧장 극장에서 내려와 주변에서 아무도 알은체한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 영화는 할리우드에서도 그렇고 한국에서도 꽤나 흥행에 성공한 모양이다. 비수기인 요즘 관객수 백만을 넘어섰다나 어떻다나, 뉴스에서도 다뤄지는 상황이니 뭐.
설상가상, 영화나 드라마가 뜨면 원작도 덩달아 팔리는 법이어서 책도 엄청나게 팔리고 있는 눈치다.
그걸 배 아파 할 이유는 전혀 없다. 인세계약도 아닌 책이 수십만 부(실제로 수십만 부가 팔렸을 거란 얘기는 결코 아니다!) 팔린들 나한테 더 돌아오는 금전적 이득은 없으니까.
아 그런데, 속 모르는 사람들이 자꾸만 인사랍시고 그 책과 영화에 대해서 알은체를 하며 축하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게 짜증스럽다는 얘기다!
별 문제 없었던 책이라면, 그런 연락을 받더라도 후후 낮게 웃으며 "많이 팔리고 장사 잘 되도 저랑은 상관 없는 거 아시잖아요"라고 한 마디 대꾸하면 그뿐이겠는데 이번 책은 상황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잖아!
더욱이 고약한 출판사에서는 재출간된 첫권과 나중에 출간된 2권의 증정본도 보내주지 않았다. 2권의 경우 계약철회 통보와 출간일정이 얽히면서 역자교정도 없었고 심지어 역자후기도 싣지 않은 채 출간된 상태.
당시에 기가 막히고 열이 받쳤지만, 내 의무는 다하려고 역자후기와 교정 문제를 문의했지만 저들은 내 이메일에 아무런 회신도 하지 않았다.
그런 예의없는 인간들과 더는 상종하고 싶지가 않아서 나중에 서점에 나온 책을 보고도 증정본을 요구하는 대신 나는 씁쓸하게 한권씩 주문을 해서 책꽂이에 꽂아두었으며, 완전히 마음을 비웠다는 의미로 책과 함께 받은 휴대폰 액정클리너도 달고 다녔었다.
그런데, 이번주 내내 몇번이나 영화흥행과 더불어 예약판매까지 하고 있는 세번째 시리즈(다른 사람이 번역한!) 출간 때문에 덩달아 나한테 공연히 축하전화 비슷한 것이 걸려오니 그야말로 짜증스럽다. 출판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책 잘 팔린다고 옮긴이가 떼돈 버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다는 걸 잘 알 텐데 왜들 그러는지 원!!
(제목 언급을 교묘히 회피하긴 했지만 이쯤하면 내 정체가 다 드러난 걸까? 아닐까? 에라 모르겠다.)

국내외 흥행에 힘입어 이미 할리우드에선 2번째 시리즈 영화 제작을 결정했다고 하니, 돌아가는 꼬락서니로 봐서는 다음 영화개봉 때도 나 역시 덩달아 일부인들의 입에 오르내릴 가능성이 높아졌다.
문제는 또 있다. 단권으로 출간된 1, 2권 원고를 아무래도 출판사측에서 나의 동의 없이 문장에 손을 댄 모양인데, 대체 누구의 손을 거쳤는지 모르겠으나 나의 번역문장이 훼손되었을 확률이 더 높고 그에 대한 욕도 내가 먹어야한다는 사실이다.
출판사에서 애당초 문장 스타일로 꼬투리를 잡아 옮긴이를 <잘랐>으니 지들이 고쳐놓은 문장에 대한 비난 역시 내 탓으로 돌릴 거라 생각하면 심장이 벌렁벌렁 분노가 치민다. 으으으.

두번째 짜증의 원인 역시 일 때문이다.
지금은 거의 중견 출판사들과 일을 하지만 초창기엔 나도 당연히 작은 출판사에서 번역을 시작했고 경력 없는 번역자를 키워주다시피한 곳에 대한 고마운 마음은 지금도 그대로다. 오랜 출판불황을 겪으며 안타깝게도 그 출판사는 몇년 전 부도를 맞았고 사업등록은 유지하고 있지만 사장님 혼자 고군분투하며 재기를 꿈꾸고 있다. 그 회사에서 알게 된 편집자며 기획자, 번역자들은 지금까지도 친한 친구로 남아 있기 때문에 가끔 모이면 그 회사와 사장님 걱정을 잊지 않았고, 가능하다면 조금씩 일을 거들어줄 수 있기를 바랐다. 시간이 되는 대로 번역이든 편집이든 디자인이든 도와드리자는 식으로.
그러다 나는 정말로 몇년 전 운좋게 작업스케줄이 비는 틈에 그 출판사를 위해 얇은 책 한권을 번역해주었다. 언제 출간될지 기약도 없는 일이었고, 원고료는 혹시 책이 대박나면 주세요, 라고 흔쾌히 제안할 정도로 처음엔 순수하고 기꺼운 마음이었다.
그런데... 몇년이 지난 지금 새삼 그 일의 뒤치다꺼리를 짬짬이 해야하는 상황에 놓이니 왜 이리 짜증이 날까. 그때도 긴급하게 출간일정을 잡겠다 하여 몇날몇일밤을 홀딱 지새워 번역을 마치고, 힘겹게 역자후기까지 써서 보냈는데 몇년이나 소식이 없었던 전적이 있기 때문인지, 더욱 미적지근한 마음이 드는 것 같다.
몇년 새 간사하게 변해버린 내 마음도 부끄럽고 잔뜩 밀린 다른 일은 어떻게 하나 한숨이 나오면서 과연 얼마나 걸릴지 모를 <공짜 일>의 순서를 어떻게 잡아야할지 갈피가 안잡히고, 이 모든 상황이 그저 짜증스럽기만 하다. 

이달들어 걸핏하면 "나 요즘 슬럼프인가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좋아하는 일이고 재미있게 평생 할 수 있을 것 같은 일이어서 선택했는데 왜 요샌 만사가 다 시큰둥하고 열정이 일지 않을까.
결국 가장 큰 짜증은 바로 나 자신에 대한 것이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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