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에 해당되는 글 45건

  1. 2011.01.04 인지상정 14
  2. 2010.12.09 막내 프리미엄 18
  3. 2010.11.25 소셜 네트워크의 끝은 어디일까 23
  4. 2010.11.09 어떤 친구 4
  5. 2010.07.04 4
  6. 2010.03.18 몇 가지 2
  7. 2010.02.26 관계. 실망. 단계별 증상
  8. 2010.02.10 기억 7
  9. 2010.01.15 어처구니 없는 요구 18
  10. 2009.11.09 어루만짐 15

인지상정

삶꾸러미 2011. 1. 4. 22:16

늦깎이로 다시 공부하던 시절 '인지상정'이 별명이었던 황당한 인물이 하나 있었던 터라, 미안하게도 한동안 '인지상정'이라는 말은 내게 본래의 의미('사람이면 누구나 가지는 보통의 마음';;)와는 상관없는 비아냥거림의 뉘앙스를 담고 있었다. 탈식민 담론이 오가던 이론수업에서 발표를 하며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인종차별이 인지상정이라고 했던가, 암튼 앞뒤가 맞지 않는 짜깁기 발제문을 설명하며 터무니 없이 사용한 '인지상정'이란 말이 던진 파문과 충격이 어찌나 컸던지 다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이없는 시선을 주고받았던 기억이 있다.

벌써 그 시절도 까마득한 추억이 돼가고 있다보니, 나는 또 내 나름대로 그 의미를 변용해서 쓰고 있는 듯하다. 누구나 가지는 건 아니겠지만 나로선 이러저러한 마음을 품는 것이 '인지상정'이라는 식으로. 택시 기사분에게 오히려 커피값을 받았다는 파피의 포스팅을 읽고 생각난 건데, 여전히 우유부단함과는 별도로 '불의'라고 여기는 점에 대해서는 까칠한 쌈닭의 면모를 갖추고 있는 반면에 나와 어떻게든 관련이 있는 직업군의 사람들에게는 질끈 눈을 감아주는 너그러움이 생겨났음을 실감한다.

예를 들어 이런 거다.
오늘 오후에도 겪은 일인데 아주 경미한 접촉사고의 경우, 범퍼에 살짝 흠집만 난 정도는 그냥 너그러이 보내준다. 아까 병원 갔다가 갈림길에서 막무가내로 후진하던 BMW에게 앞범퍼를 받혔다. 자기가 받은 줄도 모르고 그냥 가려던 어리바리 운전자를 빵 소리로 일단 잡아 세운 다음 "우쒸..."하면서 기세 좋게 차에서 내렸다. 마침 주차안내요원 코앞이라 확실한 목격자도 있었다. 콩 하고 받힌 거라 페인트가 살짝 묻어나긴 했던데, 상대 운전자가 따라 내리자마자 "죄송합니다"하는 순간, 그냥 보내주자 싶었다. 전에도 그렇게 보내준 적 많지만 평소 외제차 모는 인간들의 고압적인 태도에 열받을 때가 많았던 터라 얼굴부터 찌푸리고 내렸다가, 범퍼가 망가진 건 아님을 확인하기도 했으니 금세 마음이 풀렸다. 나의 선의(물론 나도 비슷한 선의를 받은 적 있다)가 내 주변의 모든 운전자들에게 퍼져나가 혜택을 비는 마음이랄까.

음식점도 그렇다. 작은아버지들을 비롯해 친구, 후배들 중에서도 '요식업계'에 종사하는 주변인들이 점점 많아지다보니 위생에 심히 문제가 있다거나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은 한 음식점에서 웬만해선 까탈을 부리며 불평을 터뜨리지 못한다. 내가 쓸데없이 음식점에서 진상을 떠는 유형은 아니지만, 그리고 그분들은 물론 친절이든 위생이든 맛이든 어느 면에서나 훌륭히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겠지만, 일부 음식점에서 몇몇 종업원의 무개념 행동에 벌컥 화가 났다가도 예전처럼 전투적인 태세로 항의하질 못하겠다. 내 아무리 소심하고 우유부단해도 불의는 참지 못했거늘! 요번 통큰 치킨 사태 때도, @@치킨에 입사한 사촌동생을 떠올리며 통큰 치킨 판매 중단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프랜차이즈 치킨이 다 비싼 건 아니다>라고 애써 주장했다. ^^; 

비행기를 타도 승무원을 수시로 불러대 괴롭히지 않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항공승무원이 얼마나 고된 직업인지 지인들에게 익히 듣기도 했지만, 사무장으로 승진했다던 선배가 상당한 거구로 좁은 통로를 왔다갔다 오가며 양손에 적, 백포도주를 나눠들고 따라주는 모습을 직접 보면서 어이쿠 찔렸다. 장거리 여행땐 초반에 술 팍 마시고 잠드는 게 최고라면서 한때 꽤나 성가시게 땅콩 달라, 치즈 있냐며 호출버튼을 눌러대거나 치솔 내놔라 베개 달라 슬리퍼 없냐 진상떨던 내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_- 물론 이젠 승무원들 쉬는 시간엔 절대 귀찮게 하지 않는, 아주 착하고 얌전한 승객이 되었다. (설마 승무원 안 괴롭히려고 최근 몇년 간 장거리 여행을 못떠나는 건 아니겠지;; ㅠㅠ)

버스 운전하는 친구 생각해서 버스 운전기사 아저씨들한테 꾸벅 인사도 잘하고, 택시 운전하시는 지인 떠올리며 우수리는 미리 동전으로 챙겨 거슬러받기 좋게 돈을 내거나 3백원 미만은 거스름돈 안받는 원칙을 세웠으며, 은행다니는 지인 생각해서 창구업무는 웬만해선 회피하고 현금지급기만 상대하며, 스님된 친구 목사된 친구 생각해서 땡중이란 말도 사기꾼 목사라는 말도 삼가는 중이다(워낙 타락한 종교인이 많아서 그쪽 욕은 '아예 중단'할 수가 없다;;). 까먹어서 그렇지 내가 각별히 신경쓰게 된 직업군이 또 있을텐데.... 물론 한두번의 나쁜 경험으로 무작정 싫은 눈으로 짜증스레 바라보는 편견의 직업군도 어마어마하겠지만서도.

제발이 저려서 책을 읽으며 남의 번역에 대해서 함부로 왈가왈부하지 못하는 것도 같은 범주에 드는 느낌인데 그건 나만의 인지상정이 아니라 동병상련에 더 가까운건가, 아님 혹시 제 밥그릇 감싸기? 암튼 세월이 흐르면서 몇가지 면에서는 유해진 것인지 통이 커진것인지 확실히 너그러워졌다. 다만 이런 태도가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의 어물쩡 타협이나 비리 옹호로 변질되지 않도록 경계도 게을리해선 안될 것이다. 나이 드는 것도 서러운데, 어려서 내가 혐오했던 '중장년'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건 절대 안될 일이다. 그러려면 계속 까탈스러움을 잃지 말아야하는 건가... -_-a 
흐이구 왜 이렇게 어려운 얘기를 쓰기 시작했는지 마무리가 안 되누만. 뭐 그렇다는 얘기다. 이러다 내 별명도 조롱의 뜻을 지닌 인지상정이 되면 안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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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 프리미엄

투덜일기 2010. 12. 9. 21:37

어제 할아버지 제사를 마치고 모두들 헤어져 돌아가는 순간, 주차장에서 내가 조카들을 한번씩 더 껴안고 뽀뽀를 주고받자, 막내고모가 외쳤다. "나두, 나두!" 나는 씩 웃으며 나보다 아홉살 많지만 항상 내가 뭘 더 챙겨줘야 한다고 느끼는 막내고모를 껴안고 뺨에 입을 맞춰주었다. 등을 토닥토닥 두들겨주면서. 생각해보니,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도 명절이나 제삿날 밤에 헤어질 때, 아버지가 열여덟살이나 터울이 나는 막내동생에게는 각별히 꼭 포옹과 입맞춤으로 작별인사를 했던 것 같다. "우리 막둥이, 잘 가라"고 하시면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살아계셨을 때 특별히 막내딸을 더 챙긴 것이야 말할 것도 없다.

겨우 9살 차이나는 고모와 조카 사이가 어렸을 땐 꽤나 경쟁적이었다는 것도 같은데, 내가 기억하는 한 막내고모는 거의 내 우상이었고 스무살 무렵부터는 어쩐지 맏이인 내가 막내인 고모를 돌봐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말투부터 상냥함과 애교가 뚝뚝 떨어지며 하늘 끝까지 여성스럽고 연약하고 다소곳해서 내가 봐도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막내고모를 씩씩한 내가 지켜줘야 한다고 느꼈달까. 물론 고모쪽에선 그래봤자 땅꼬마 조카라고 생각했겠지만 말이다. 

요즘에야 형제들 수가 적어서 막내란 존재의 개성이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 모양이지만, 맏이인 내가 보기엔 확실히 막내가 달라도 많이 다르다. 우리 막내고모로 말할 것 같으면, 무려 8남매의 막내딸이고 (할머니가 마흔 다섯살에 낳으셨다) 제일 큰 언니와는 스무 살도 넘게 차이가 나는 완전 늦둥이라, 지금까지도 온 가족이 애틋하고 안쓰러이 여기는 애교쟁이 막내의 개성이 극대화된 경우다. 천사표이신 나의 작은 엄마들은 다섯이나 되는 시누이 가운데 유일하게 막내고모를 위해선 지금도 번갈아가며 김치를 담가다주신다. 14년 전에 할머니 돌아가시고 나서 지금까지 주욱. (막내고모 요리솜씨가 엉망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예술 하는 사람들은 요리도 잘하나? 의아할 정도다;;)  울 엄마도 건강하실 땐 밑반찬 만들어가지고 아버지랑 같이 수시로 막내고모네를 살폈다. 뭘 좀 제대로 먹고 살기나 하는지 모르겠다면서. 우리 집안에서 막내란 그런 존재인 것이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어쩐지 보살펴주어야 할 것 같고 이유없이 애틋한. 

막내라서 본능적으로 애교와 귀염성이 많기 때문에 부모와 형제들의 사랑을 더 받는 것인지, 아니면 풍부한 애정 덕분에 막내들이 맏이와는 다르게 애교와 붙임성 같은 것들이 개발되는 것인지 나로선 통 모를일이다. 하지만 나의 막내동생을 보아도 어려서부터 무뚝뚝한 두 맏이와는 달랐다. 큰동생은 둘째이긴 해도 맏아들이네, 장손이네 하는 말을 듣고 자라서 그런지 맏이로서의 성격이 강한 편이고, 나와 마찬가지로 애교 따윈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저 자존심과 똥고집만 내세울 뿐. 삼남매가 뭐든 잘못을 하거나 싸웠다는 이유로 회초리 맞을 일이 생기면, 나와 큰동생은 '잘못했어요' 소리를 안하고 꿋꿋하게 정해진 매를 다 맞는 편이라면, 막내는 딱 한대 만 맞고도, 아니 심지어는 자기 맞을 차례가 되면 벌써부터 울음바람에 엄마를 와락 끌어안으며 잘못했다고 싹싹 빌어서 매를 피했다. 우리들 눈에 그게 얼마나 얄미워 보였던지!! 엄마 목을 끌어안고 돌아서서 막내녀석이 우리에게 혀를 쏙 내밀어 보였던 것도 같고...  -_-;  하지만 어려서도 나는 대체로 막내가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매일 저녁 좁은 단칸방에서 노래와 춤으로 재롱을 부리며 온 가족을 즐겁게 해주었던 것도 항상 막내였다. 나와 큰동생은 엄마 아빠 밖에 없는데도 앞에 나가서 노래 한 마디 하는 게 어찌나 어려웠는지 원. 심지어 막내동생은 요즘도 두 아들을 데리고 우리 앞에서 가끔 최신 유행하는 아이돌 춤을 시범 보이며 귀여움을 떤다. ㅋㅋㅋㅋ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역시나 막내인 그의 배우자까지도 춤연습을 하며 논다는 것 같다.)

나의 조카들을 봐도 그렇다. 겨우 둘씩이라 맏이와 막내로 구분하기도 좀 뭣하지만, 집집마다 첫째와 둘째는 판이하게 성격이 다르다. 둘째들은 하나같이 애교가 많고 붙임성이 뛰어나고 눈치가 빨라서 엄마의 사랑을 독차지한다. 첫째들은 뻣뻣하고 자존심만 강한 데다 융통성이 없어서 만날 엄마랑 싸운단다. 심지어 나의 올케들은 둘다 '막내'라서 맏이 특유의 애교 부족과 무뚝뚝함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맏이인 내 눈엔 위기를 모면하는 약삭빠른 둘째들의 아양떨기가 귀여우면서도 가끔 얄미운데 말이다!

어쨌든 막내는 막내고 맏이는 맏이라서, 각자의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긴 하다. 열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은 없지만, 확실히 아픔에도 차이가 있다는데 어쩌란 말인가. 어젯밤 왕비마마도 실토하셨다. 깨물면 새끼손가락이 제일 아프고, 엄지손가락은 별로 안아프다고. (시범까지 보이며;;) 그래서 맏이인 나와 큰동생의 경우엔 뭘 하든 믿게 되고, 약간씩 못미더운 부분이 있더라도 크게 걱정이 안되는 반면에, 막내의 경우엔 그저 안쓰럽고 염려스럽고 어떻게든 좀 더 챙겨줘야 할 것 같다고 말이다. 딸인 나와 달리, 두 형제 사이엔 은근한 경쟁심리가 있는 걸 알기 때문에 내가 왕비마마께 그렇게 티나게 굴지 좀 마시라고 했더니,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나랑 큰동생은 울 할머니가 키우셨는데, 막내는 당신이 직접 키워서 좀 남다른가보다고. -_-; (왕비마마는 막내를 낳고 비로소 직장을 관두고 전업주부의 길로 들어섰다.)

물론 막내라도 맏이같은 성품을 개발한 이도 있을 테고, 가족 내의 위치를 티내지 않고 사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우리집 맏이와 막내들을 보면 막내 프리미엄이란 게 존재하는 것이 확실하다. 맏이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신비로운 힘과 재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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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친구가 있다. 19살부터 알고지냈으니 이 친구와도 모르고 지낸 인생보다 알고 지낸 인생이 더 길다. 고등학생 때 지루한 수업시간에 쪽지를 보내던 버릇이 대학 때도 이어져 이 친구랑도 어쩌다 보니 강의실에서 시답잖은 쪽지를 주고받았다. 친구는 악필로 유명하면서도 연습장이나 공책 한 가득 적은 기묘한 일기나 만화 같은 것을 보여주기도 했고 (정말 싫었다 -_-;;), 당시 유행대로 시집을 끼고 다니다가 마음에 드는 시를 골라 보고서 용지에 적어 주기도 했다. 친구가 군에 간 뒤엔 당연히 위문편지를 써주었다. 카투사라 용산에 배치돼 수시로 휴가를 나오기는 했지만. 

학교 졸업후 각자 회사에 들어가선 전화가 유일한 연락방법이었다. 몇달에 한번씩은 만나서 맛있는 걸 먹고 수다를 떨었었는데, 친구가 덜컥 영국 지사로 발령이 났다. 다시 편지 왕래가 시작되었다. 크리스마스 같은 때는 서로 선물도 보냈다. 내쪽에선 주로 영국에서 몹시 비싼 '담배' 같은 걸 보내는 게 고작이었지만. 내가 회사를 관두고 번역일을 시작하며 팩스 기계를 장만한 뒤로는 편지를 우편으로 보내는 대신 감열지가 삐직삐직 기어나오는 팩스가 이용되었다. 친구를 지사로 보내며 주재원들의 품위유지를 위해 좋은 집과 BMW 5시리즈를 내주었던 한국 대기업이 망해 그 무렵엔 영국 회사로 옮겼기 때문에 친구 이름만 영어로 쓰면 편지 내용을 아무도 몰랐으니 상관 없었다.

(중간에 '새롬 데이터맨'을 사용하던 pc 통신 시절이 있기는 했는데, 한때 주말이면 그 불안한 전화모뎀으로 밤샘 채팅에 열을 올리기도 했으나 이 친구와는 거리 때문에 사용하지 못한 것 같다.)

어느덧 세월이 바뀌어 이메일이 일상화되었으므로, 친구와의 소통은 팩스에서 이메일로 발전했다. 영국에서 귀국한 뒤로는 휴대폰도 이용됐으나, 친구도 나도 전화를 그리 자주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집이든 회사든 노상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이들을 위한 MSN 메신저라는 유용한 물건이 나타났다. 친구와도 메신저 채팅이 주요 창구가 되었다. 그 즈음이었던가 그보다 먼저였던가 잘 기억은 안나지만 싸이월드에도 대학동기들 클럽이 생겨났다. 내가 수없이 도토리를 사들여가며 미니홈피도 열심히 꾸밀 때였다. 대학시절 연습장이나 보고서 용지에 서너장씩 빼곡하게 채워 편지를 써보내던 친구는 여전한 '글빨'로 클럽 게시판에 주옥같은 글을 올리기 시작했고 나는 열심히 댓글을 달았다. 

한때는 MSN와 네이트온을 동시에 로그인해놓고 사방에서 말을 걸어오는 지인들과 수다떠는 것이 낙이었지만, 쓸데없이 방만한 인간관계로 나는 금세 피곤해졌다. 급기야 나는 메신저 세상을 등지기로 했다. '오프라인 표시'라는 훌륭한 기능이 있기는 했지만, 싸이월드 '일촌' 사이에도 등급이 필요하다고 느꼈듯이 어설프게 알려준 메신저 아이디로 아무 때나 뜬금없이 "올만요! 안녕하삼. 방가방가!"라며 말을 걸어오는 아이들이 슬그머니 두려웠다.

내가 메신저질을 '끊은' 이후, 전화 통화보다는 글로 쓰는 수다가 더 편했던 친구와 나는 확실히 소통이 뜸해졌고, 이젠 가끔 안부 문자를 주고 받거나 클럽 게시판의 댓글로, 드문 통화로 지금껏 우정을 이어가고 있다. 블로그다 트위터다 페이스북이다 뱁새 주제에 따라가느라 가랑이가 찢어질 지경인 나와 달리 친구는 스마트폰을 장만했으니 발을 들여보겠다던 소셜네트워크 세상을 거부하겠다고 했다. 신상이 위험해진다나 뭐라나. -_-;

'집요하고 무섭다는' 페이스북까지는 손대고 싶지 않았지만 바다 건너 있는 지인들의 권유로 얼마전 시작하고 보니 신상이 위험해질 거라는 친구의 말이 차츰 실감난다. 트위터도 노상 추천 친구들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팔로우' 하고 있는 사람들의 네트워크를 보여주는 데 반해, 페이스북은 '너 얘랑 아는 사이 아니냐'고 의외의 인물까지 수시로 사진까지 보여주며 옆구리를 찔러댄다. 일부러 입학이나 졸업 년도 같은 정보는 올리지도 않았는데! 지금까지는 무서워라 싶어서 계속 무시하고 있었으나, '미아니'의 헐벗은 사진을 계속 보여주면서 '너 얘랑 아는 사이일걸!'이라며 부추기는데는 나도 모르게 '넵!' 하며 친구 추가를 클릭하고 말았다.

문제는 또 있었다. 아이폰에 페이스북 어플리케이션을 깔고 난 이후로는 딩동딩동 친구들이 뭔가를 끼적일 때마다 친절하게 또 내 옆구리를 찌르기 시작한 것이다. 남들과 다른 시간에 자는 나에게 아무 때나 날아오는 문자와 전화는 미움의 대상이거늘, 이젠 페이스북까지! 카카오톡 어플은 또 어떻고! 암튼 휴대폰 알림이야 설정을 모두 바꾸면 되는 것 같기는 하다만, 1억명 이상이 하고 있다는 페이스북의 절묘한 관계찾기는 좀 으스스하다. 아직은 그다지 부지런하지 않은 친구들 열명 뿐이라 '관리 가능' 수준이지만 멍하니 있다가 또 메신저 꼴 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조심해야지. 블로그를 시작하면서도 암흑 세계에 발을 들이는 느낌이었고, 염려대로 중독 수준으로 열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에 부끄럽단 말이닷.

돌아보면 정말 세상은 놀랍도록 변하고 있다. 누가 우스개 소리로 십년 뒤면 스마트폰이 작아져 머릿속에 마이크로칩으로 심어지게 될 거라던데, 앞으로 소셜 네트워크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변해갈지 두려우면서 약간 궁금하긴 하다. 아무려나 현재로선 두려움이 더 크다는 의미로 티스토리의 '소셜네트워크 플러그인 3종세트'는 설정 보류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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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친구

투덜일기 2010. 11. 9. 12:58
고1때 짝이었다. 학교졸업후 이민을 가버린 또 한 명의 친구와 셋이 3년내 단짝이라 계속 반이 달라졌는데도 하교는 꼭 같이 하는 충성을 서로에게 보였고, 각자 삶이 달라진 대학시절에도 줄곧 자주 만났다. 고3때도 내내 수시로 학교 등나무 벤치로 불려나가, 교회 오빠와의 연애상담을 도맡았던 터라 이후에도 친구의 연애고민을 들어주는 것이 내 주된 임무였다. 주변에선 둘의 키가 작다는 것 말고는 공통점이 하나도 없는데 같이 어울리는 게 신기하다고 했다. 남자친구가 늘 우선순위라 약속을 하고도 걸핏하면 바람을 맞히는(그땐 삐삐도 휴대폰도 없던 시절이라, 약속장소에서 기다리며 공중전화로 친구 집에 계속 전화를 걸어 가족에게 메시지를 남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 친구를 내가 왜 늘 참아주는지 나도 신기했다. 그래도 고등학교 때 친구는 평생 가는 거니까, 라고 믿었던 것 같다. 며칠 뒤 눈물과 애교로 참회하며 사과하는 친구의 변명에 넘어가기도 했다. 남자친구가 채워줄 수 있는 부분이 있고, 동성친구가 채워줄 수 있는 부분이 있는데 그날은 남자친구가 필요한 날이었다나. (아 그럼 미리 전화해서 약속을 취소하거나 자기는 못나온다고 하던지!)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것을 즐겼던 친구는 대학시절부터 대학로 카페에서 피아노를 치는 아르바이트를 했고, 몇 번의 편입과 전과를 거치느라 학교를 세군데나 옮긴 뒤에도 결국 최종 직업은 피아니스트였다. 피아노를 치는 공간도 대학로나 미사리 카페에서 강남에 있는 별 다섯개짜리 호텔로 격상되었다. 그럴 거면서 굳이 수학과는 왜 졸업했는지 원. 내가 피아노 치는 남자에 대한 선망이 있듯, 공주 드레스를 입고 피아노 치는 여자에 대한 선망을 품은 대다수의 남자들 덕분에 친구는 주변에 남자가 끊이질 않았다. 집이 갑자기 기울어 빚쟁이들에 쫓기느라 친구의 가족들이 야반도주로 뿔뿔이 흩어져야 했을 때 친구는 동생을 하나 데리고 우리 집에 들어와 코딱지 만한 내 방에서 함께 몇달 지내야 했는데, 심지어 그 기간에도 심야에 울리는 전화는 모두 그 친구의 남자친구에게 걸려온 것이었다. 9시 이후엔 남의 집에 전화를 걸지 않는 것이 예의라고 가르쳤던 우리 아버지가 주무시다 말고 일어나, 딸 남자친구도 아니고 딸 친구의 남자친구 전화를 받아 바꿔주시는 상황이(당시 전화기는 안방과 거실에만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얼굴 뜨겁지만, 친구는 예의 애교 넘치는 말투로 생글생글 웃으며 죄송해요, 아버님, 한 마디로 아무렇지 않게 넘겼다.

스물여덟살 때였던가. '니가 한번 봐 달라'며 수없이 내게 소개했던 애인들 가운데서 친구는 드디어 한 남자와 결혼을 결심했다. 이상하게 나쁜남자가 매력적이라면서 늘 날나리 같은 남자를 선호하던 친구는 대기업에 다니는 검소하고 성실한 남자를 선택했고, 나는 드디어 친구의 방황이 끝나나 보다며 진심으로 기뻤다. 결혼식날 토요일 12시 예식에 맞춰 아침 7시까지 신랑신부를 픽업하는 역할이 내게 주어졌을 때도 기쁘게 승락했다. 그 남자는 친구도 없나, 하는 의문도 그땐 들지 않았다. 다만 전날 눈이 내리는 바람에 안산까지 출퇴근길에 흙탕물을 홀라당 뒤집어쓴 차에 신랑신부를 태울 수가 없어서, 깜깜한 새벽에 일어나 양동이에 뜨거운 물을 퍼담아 들고 나가서 골목 가로등 불빛 아래 손수 세차를 하면서 약간 서글프긴 했다. 친구 결혼식 때문에 세차하랴 꽃단장 하랴 새벽부터 부산을 떠는 나를 보며 부모님은 혀를 끌끌 찼다. ㅁㅅ이가 너 이 고생 하는 거 알아주기는 하냐고.

아직도 해가 뜨지 않아 어두웠던 오전 7시, 이미 살림집에서 함께 살고 있던 친구의 집 초인종을 누르자 신랑이 부스스 새집을 지은 머리로 문을 열어주었다. 심지어 신부는 자고 있었고... 그제야 일어난 두 사람이 부리나케 씻는 동안 나는 신랑신부 예복과 폐백 때 입을 한복 따위를 영차영차 미리 차에 실었다. (친구가 아니라 머슴이었나?) (내 생각에) 남성편력 및 방황 끝, 행복 시작이라 여겼던 친구의 결혼생활은 3년을 채우지 못했다. 남자의 성실함과 검소함은 친구에게 따분함과 궁상으로 비치기 시작했다. 화려하게 즐기는 삶의 습관을 친구는 포기하지 못했고, 꼼꼼히 모든 수입을 관리하는 남편 몰래 딴 주머니를 차느라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나를 팔아 야밤에 놀러다니기를 거듭하던 친구는 결국, 무려 열살이나 어린 아르바이트생(수능 끝나고 호텔 주차요원으로 일하던)과 바람을 피우다 들통나 이혼했다. 결혼이라는 제도나 한 남자와의 약속 따위에 얽매일 수 없는 친구란 걸 나도 그 무렵 깨달았던 듯하다.

친구는 놀랍게도 그 문제의 남자친구와 거의 10년간 만남과 헤어짐을 거듭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은 친구에게 진리였다. 몇달씩 심지어 1년 가까이 연락이 없으면 연애든 일이든 잘 진행된다는 뜻이었다. 그러다 뜬금없이 연락이 와 만나자고 해 나가보면 어김없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헤어짐의 아픔을 토로했다. 그러고는 어김없이 일주일 쯤 뒤에 헤헤거리며 전화를 걸어 다시 만나기로 했다는 기쁜 소식을 알렸다. 드물게 곁에 애인이 없을 때만 찾는 친구로 전락한 나 역시 그 친구를 어느 정도는 포기하고 있었다. 그냥 세월의 힘과 관성으로 견뎌주는 관계랄까.

타고난 사교술과 수완으로 친구는 꾸준히 사업 규모를 늘려가는 모양이었다. 피아노 연주도 현악기 편성을 늘려서 호텔 로비에서 연주하는 것뿐만 아니라 결혼식이나 여러 행사에도 불려다녔다. 그야말로 엔터테이너의 길로 접어든 친구는 후배 연주자들을 거느리고 양성하는 사업가로 변신해, 몇년 전엔 법인을 차렸다고 했다. 행사 연주 한번에 최소한 몇백만원을 벌어들이는 그 친구의 시각으론 골머리를 써가며 컴퓨터 앞에 앉아 '푼돈'을 버는 내가 한심했는지, 몇년 전까지도 내게 '차라리' 고액과외를 하지 그러냐고 안타까워했다. -_-;

우리 집에서 가까운 호텔에 행사가 있을 때나 간간이 서로 얼굴을 볼 수 있었던 친구가 연애고민 이외의 난감한 부탁을 해오기 시작한 건 작년부터였다. 엔터테인먼트 사업이란 것이 원래 열악한 자본금으로 시작해 인적자원으로 외부의 투자를 끌어들여 운영하는 것이라는데(친구의 설명이 그렇다), 당연히 수입이 불규칙할 수밖에 없어 간혹 재정적인 어려움에 처한다는 길고 긴 푸념 끝에 친구가 화끈하게 말했다. 천만원만 빌려달라고. 보름 있다가 투자금 들어오면 갚겠다고. +_+ 누구나 통장에 그 정도 여윳돈은 늘 갖고 있어서 수시로 뺄 수 있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과거에 몇 차례 몇몇 친구에게 돈을 빌려준 경험으로 미루어, 친구에게는 그냥 주겠다는 마음이 없는 한은 돈을 빌려주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는 걸 알고 있는 나는 고민을 꽤 했다. 빌려줄까 말까의 고민이 아니라(물론 그럴 돈도 없었지만!), 어떻게 '잘' 거절해야 할까 고민이었다. 그냥 선뜻 선물로 줄 상황이 아니고서야 친구와는 돈 거래를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는 것을 납득시켜야 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나는 비겁하게 여윳돈이 없다는 변명과 사과로 친구를 돌려보내고 말았다. 그러면 할 수 없지 뭐, 라며 돌아간 친구는 그 일로 삐쳤는지, 또는 내가 필요 없어진 때문인지 몇달이 넘도록 연락이 없었다. 원래도 내 쪽에서 먼저 연락하는 법이 잘 없기 때문에 문득 생각이 나더라도 나 역시 잘됐다 싶을 정도였다. 오랜만에 만나서 돈 얘기나 하는 친구라니! 차라리 연애 고민 상담이 낫지... -_-; 그러다 올초에 또 한번 '딱 일주일만' 필요해서 그러는데 5백만원만 빌려달라는 연락이 왔다. 어휴... 급히 돈거래를 청하는 사람들은 어쩜 그렇게 변명거리가 다들 그렇게 똑같은지.

결국 나는 친구와 관계정리의 위험을 무릅쓰고 (어쩌면 그쪽을 바란 것인지도!) 미안하지만 친구와는 돈거래를 하지 않기로 했다는 말을 꺼내고야 말았다. 말로는 이해한다면서, 그래도 자기를 그렇게 못 믿는다는 게 섭섭하다는 말을 되풀이하던 친구는 알았으니 내게 다시는 돈 얘기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렇게 또 몇달이 지났건만 친구는 며칠 전 또 다시 '5백만원'의 용건으로 나를 찾았다. 그리고 이번엔 레퍼토리도 달라져 있었다. 요번 쇼케이스 진행하느라고 생각보다 비용이 많이 들어가서 그래. 오백이 안되면, 일단 삼백도 괜찮아. 너 설마 그 정도는 있지? 당장 너한테 없으면, 일주일 뒤에 드린다고 너희 엄마나 동생한테 얘기 좀 해봐라. 10일에 1억 투자 들어오기로 되어 있으니까, 딱 일주일만 쓰면 돼. 응?

친구의 억지에 기가 막혀서 성의 없이 대꾸하다 미안하다고 전화를 끊으려니 서글픔이 밀려들었다. 친구의 상황이 정말로 어떠하든, 그간의 역사가 어찌 되었든 이 친구에겐 내게 여유가 아주 많더라도 선뜻 천만원, 오백만원을 내어줄 수 있는 '관계'가 아니란 생각 때문이었다. 전화를 끊고 잠시 씩씩대던 마음으론 번호를 스팸등록 해놓을까도 싶었지만 그러지는 않기로 했다. 정말로 절실하게 돈이 필요한 상황은 누구에게도 닥칠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젠 친구의 번호가 뜨면, ' 또 애인이랑 헤어졌나?'라는 의문 대신 '또 돈 빌려달라고 할 건가?'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오를 것이고, 그래서 이미 우리의 관계는 무너져버렸음이 안타깝다. 수십년 된 우정이 겨우 요거냐고, 친구랍시고 그럴 줄 몰랐다고 그녀가 나를 욕하든 말든, 하는 수 없다. 나는 이만한 그릇의 사람인 것을. 고등학교 친구든 아니든 평생 가는 친구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사람이고, 멀어지는 친구 또한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만만한 대부업자로 여기는 친구 따위 나도 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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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덜일기 2010. 7. 4. 13:07

특별히 상처가 잘 안아물거나 멍이 잘 드는 체질은 아닌데도 칠칠맞질 못해서 종아리나 무릎 언저리엔 언제나 멍이 한두개씩 들어 있다. 식탁에서 다리 빼다가도 괜히 기둥에 무릎을 부딪치고, 빨래 건조대와 가까이 놓인 탁자 모서리가 위험함을 익히 알고 있으면서 며칠에 한번은 꼭 정강이를 찍힌다.

어제는 외출전에 커피를 빨리 마시겠다고 콩콩대다 오른쪽 정강이에 피까지 났다. 왼쪽 장단지에 언제 생겼는지 모르게 남은 멍자국은 이제 회색으로 거의 사라질 지경인데, 그게 뭐 아쉽다고 새 멍을 만들었는지. 하기야 아직은 멍이 아니라 그저 빨갛게 부풀어 오른 상처일 뿐이다.

다치고 나서 금방 표나는 상처와 달리 한참 있다가 은근히 살갗 밑에서 피어오르는 멍은 어째 대범한 척 넘겼다가 혼자 내심 질긴 뒤끝을 보이며 씩씩거리는 내 속알딱지를 닮았다. 며칠 지나 이게 언제 생겼더라 의아해하는 것까지 전부 닮았더라면 좋았을 걸, 뒤늦게 마음에 생겨난 멍은 잘 안잊혀지니 탈이다. 검붉게 든 피멍도 결국엔 옅어져 사라지듯이 질긴 뒤끝이 후벼판 상상의 멍도 딱 그만큼의 시간 이후엔 말끔히 사라지게 만드는 비법을 배우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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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삶꾸러미 2010. 3. 18. 04:59

그동안 막연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깜박 잊고 있다가 요 며칠 새삼 깨달은 사실 몇 가지.
태어나는 데는 순서가 있어도 돌아가는 데는 정말로 순서가 없다는 것.
사십대 중반이란 자다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뜰 수도 있는 나이라는 것.
인간관계를 많이 맺는다는 것은 죽음으로 끝나는 그 관계의 종결을 목도할 가능성도 많아진다는 의미라는 것.
바로 지금이 앞으로 살아갈 나의 인생 가운데 가장 젊은 순간이라는 것.
남은 자는 또 그럭저럭 살아가기 마련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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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에서 실망하거나 실패를 느낄 때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제각각일 것이다. 주변에서 맺고 끊기를 잘 못해서 쓸데없이 방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이라는 오명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더더욱 당연하겠지만 여전히 가끔씩 인간에게 깊은 상처를 입고 전전긍긍하는 일이 있다. 잘잘못을 따지기 이전에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관계에 어떤 이유로든 금이 가는 상황은 그리 쉽게 넘길 수가 없다. 서로 안보면 그만인 관계에서도 그간의 역사와 추억이 남긴 흔적 때문에 괜한 배신감에 허덕이게 되니, 아예 안 보고 살 수는 없는 관계에서라면 그 뒷감당이 더욱 어려워진다.

살아보니 내가 최선을 다했다고 해서 그 최선이 모든 이들에게 다 좋게 받아들여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선한 의도로 한 행동이 어떤 이들에겐 부담이 될 수도 있으며 상처나 오해를 낳기도 한다는 건 깨달은지 오래다. 그런데 그걸 잘 알면서도 막상 나의 의도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반응을 뜻밖의 상대로부터 맞닥뜨렸을 때, 나는 바보처럼 충격에 사로잡힌다. 세상 누구에게나 착하게 잘 보이고 싶은 욕망 따위는 없는 까칠한 인간임에도 그렇다.

서로 꽤 오래 공을 들인 관계에서 오는 실망에 대한 나의 첫 반응은 대개 자기비하와 자책이다. 다 내 탓이다. 내가 잘못한 거지. 결국엔 내가 죽일년이지. 동기가 선했다고 모든 결과가 용서되는 건 아니잖아. 내가 변해야 해. 선선히 잘못을 인정하고 바꿔나가야 해... 이러면서 제 발등을 찍고 또 찍으며 반성한다. 며칠 해결책을 찾아보겠다고 고민하느라 불면에 시달리는 건 예사다. 그러면서 온갖 과거의 사건들을 재현하고 되짚어보고 기억을 환기한다. 

그러다 며칠이 지나면 두번째 반응기가 시작된다. 버럭 화가 나는 거다. 내가 뭘 또 그렇게 잘못했는데? 내 측근이라면서 잘해보자고 한 행동을 그렇게도 몰라주나? 소통부족으로 인한 오해는 어차피 쌍방과실 아닌가? 이렇게 상대에게 분노가 느껴지기 시작하면, 그간 우정이나 애정의 이름으로 최대한 눈감아주었거나 덮어두었던 상대의 단점과 그간 마음에 안들었던 부분들이 열 배쯤 과장되어 떠오른다. 심지어 장점으로 여겼던 부분까지 눈에 거슬리는 지경에 이른다. 자신을 비하하며 자책하던 부분들은 서서히 흐려져 생각도 나질 않는다. 이성 따위는 원래 없었던 양, 감정의 과잉 속에서 허덕댄다.

세번째 반응은 미움이다. 모든 게 상대방 잘못 같고, 혹시나 운 없이 이 시기에 마주치기라도 하면 그렇게 꼴보기 싫을 수가 없다. 관계의 환멸을 느껴 두번다시 안봐도 되는 인물이라면 이 단계에서 깨끗이 정리돼 나의 인간관계망에서 삭제되므로 더 문제될 게 없다. 돌아보면 왜 그런 소모적인 관계를 이어왔나 한심할 정도라서, 금세 잊는 것도 가능하다. 쓸데없는 인간관계가 하나 더 정리 됐으므로 심지어 기뻐할 수도 있다. 문제는 계속해서 마주쳐야 하는 운명의 인물이거나, 내 생각에 여전히 회복할 가치가 있는 관계로 여겨지는 경우다. 볼 때마다 미움에 휩싸이면서 앞으로 관계를 어떻게 이어갈 것인지 생각하기란 거의 고문이다. 나처럼 성격 더러우면서 마음을 정할 땐 우유부단하고 인간관계에 휘둘리는 사람에겐 더더욱.

마지막 단계는 이성이 슬글슬금 제자리를 잡으며 두 방향으로 나뉘는 것 같다. 회복할 가치가 없는 관계임에도 계속 얼굴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면 마음의 문을 닫고 겉으로는 태연한 척 호의의 가면을 쓰되 최대한 무관심하게 (실제로는 계속 미워하고 경멸하면서) 살아가기로 결정을 하거나, 어찌되었든 다시 이어가야할 관계라면 또 다시 마음 다칠 가능성을 예비하고라도 대화를 시도하여 더 나은 관계를 추구하는 방법. 물론 후자의 시도가 모든 이들에게 통용되는 것도 아니라, 단단한 돌벽 같은 이를 만나 나만 더 만신창이가 되는 수도 있다. 그러면 다시 2단계로 돌아가 벌컥벌컥 화를 내며 증오심에 휩싸이다 나홀로 정리 단계로 맺음하는 수밖에.

맺고 끊기를 잘하는 사람들은 마음을 다치면서 왜 계속 관계를 유지하는지 의문을 품겠지만, 나에겐 어쩌다보니 그런 관계가 더러 있다. 내쪽에선 말끔히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 놀라운 이유로 내 관계망에 들어와 박힌 사람들. 따지고 보면 많은 이들에게 가족은 그런 애증의 관계가 아닌가? 어느 한 쪽이 죽거나 매몰차게 의절을 해야만 끝이 나는 관계. 하기야 다른 관계도 아닌 가족 안에서 인간적인 실망감과 환멸을 느낀다면 후유증은 가장 클것이다. 어쨌거나 내쪽에서 전적으로 취사선택할 수 없는 관계의 불안한 지속은 참 어렵다.

최근들어 극저조한 기분의 원인을 이렇게라도 배설하면 좀 시원해질까 싶었는데, 아직은 3단계에 머물러 있는 터라 머리가 터질 지경이다. 시간이 얼마나 더 지나야 마지막 단계에 접어들 수 있을까나. 이놈의 펄럭거리는 감정 좀 쉽게 다잡으며 살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흔들리니 않는 나이가 불혹이라는 건 다 개뿔, 거짓말이다. 불행히도 난 아마 평생 이렇게 파르르 화르륵 펄럭펄럭 씨근대며 살아갈 것만 같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초연함인데, 지금 내게 있는 건 조바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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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투덜일기 2010. 2. 10. 15:46
서른을 넘기고부터인가 기억이란 게 얼마나 부질없고 신빙성 떨어지는 두뇌작용인지 점점 더 뼈저리게 깨닫고는 있지만, 그래도 같은 사건을 두고 전혀 다르게 인식된 기억의 파편을 딴 사람과 맞추다 보면 힘이 쭉 빠질 때가 있다.

맞아, 기억이란 원래 자기검열을 거쳐 제 입맞에 맞게 저장되는 거야, 라고 위로해 보아도 주인공이 내가 아닌지라 나름으론 최대한 객관적으로 저장해두었다고 생각한 기억을 꺼내놓았는데 완강한 부정의 반응이 나오면 마치 사기꾼이라고 손가락질을 당한 것마냥 억울함이 느껴져 쓸모없는 짓인 줄을 알면서도 상대에게 내 기억을 강요하고 싶어진다.

심지어 꽤 오랜 세월에 걸쳐 쌓인 아련한 추억이 누군가에게는 지긋지긋하기만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는 걸 알고 났을 땐 가슴이 아프다. 어느쪽이 왜곡되었든 기억을 다른 방향으로 교정하는 게 가능하긴 할까.

방금 전에 놓아두었는데 까먹은 열쇠의 위치도 기억이고 십수년 전 인식된 충격도 기억이기에, 말랑하든 딱딱하든 내 두뇌에 새겨진 흔적이란 별로 미덥지 않은 약속 같은 거라고 자꾸 최면을 걸면서도 제딴엔 소중히 넣어두었던 기억인지라 누가 아니라고 하면 자꾸 마음을 다친다. 

머리가 나빠서 기억보다 망각의 양이 워낙 엄청나 얼마 안 남은 기억에 이리도 미련을 갖는 것인가. 원래 인간은 기억보다 망각의 동물이라던데. 그리고 이왕 남은 기억은 될수 있는 대로 곱게 포장이 된다던데, 늘 그렇듯 예외는 있나보다.

서로 머리속을 뒤집어 보여줄 수도 없으니 제3자, 제4자까지 끌어들여 합동대면을 하지 않고서야 어느 게 맞는지 확인하기 힘겨운 기억의 왜곡. 그냥 각자의 기억대로 덮어두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고 여기면서도 저 너머에 있을 진실을 캐고 싶은 욕망에 자꾸 머리털을 쥐어 뜯는다. 이렇게 내가 집착하는 인간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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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전까지는 싸이질에 대단히 심취했지만 사람들이 죄다 그곳을 떠나고 블로그질을 더 많이 하면서 나 역시 싸이월드를 거의 떠나 살았다. 2002년부터니까 꽤 오랜 세월 거기 담겨 있는 삶의 흔적들이 아깝기도 하고 몇몇 친구와 가족은 아직 그곳에서 소통하고 있으니 누구처럼 확 폐쇄하거나 닫아둘 결정은 내리지 못했다. 그냥 막연한 방치상태랄까.
그러다 조카들 사진을 구경하러 간만에 로그인을 해보니 쪽지가 도착했다는 표시가 보였다. 그간 싸이 쪽지는 기분 나쁜 홍보글 아니면, 전화번호가 바뀌었다거나 결혼소식을 알리는 지인의 단체 쪽지가 대부분이었으므로, 이번엔 또 뭘까 지레 이맛살을 찡그리며 쪽지를 열어보았는데 상상을 초월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누군가 내가 번역한 문제의 시리즈물 소설을 <꼭> 읽고 싶은데 곧 유학을 가게 되었다면서 시리즈별로 다 책이 너무 두꺼워 가져갈 수가 없으니 나더러 번역원고를 보내줄 수 없느냐는 것이었다. pmp에 다운받아서라도 읽고 싶다나. 기가 막혀서... 책이 저가형 보급판으로는 출간되지 않아 사 보기 부담스럽다면서 간곡히 부탁을 한다고 적혀 있었지만, 너무 어처구니 없는 요구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유학을 안 가봐서 모르지만 짐이 얼마나 대단하다고 겨우 책 몇권 넣을 공간이 없다는 것인지 나로선 도저히 이해가 안가고, 유학을 간다는 것부터가 핑계 같다. 책 사기는 아까운데 그렇게 읽고 싶으면 서점에 가서 서서라도 읽든지! 아무래도 돈 한 푼 안 들이고 책 읽어보겠다는 꼼수일 것 같다. 순진하게 원고를 보내줬다간 온라인 공간에 원고 파일이 영원히 떠돌 것이 분명하다.

그러다보니 오도독 소름이 끼쳤다. 내 이름이야 워낙 드물어서 동명이인을 찾기 힘들다는 건 익히 알고 있는 일이지만, 사적인 사진들은 모두 일촌공개로 돌려놓은지 오래라고 해도 미디어 서평이나 책 사진 같은 건 그냥 공개해놓은 터라 그런 인간들의 검색에 속수무책으로 걸려들고 말았겠구나 싶었던 거다. 이런 공간에 조금씩 노출된 사생활만으로도 얼마든지 개인정보를 뽑아낼 수 있다는 기사를 보고 섬뜩했었는데, 실명까지 드러나는 싸이월드 같은 데선 더더욱 발가벗겨진 채로 내던져지는 꼴이란 걸 생각하지 못했으니 내 불찰이다. 얼른 모든 메뉴를 일촌공개로 바꾸어 놓고도 영 기분이 찜찜하다.

물론 어처구니 없는 요구는 단칼에 거절했다. 버럭 화가 치밀어서 답장 쪽지를 보내긴 했는데, 그냥 무시할 걸 그랬나 후회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어차피 번역 원고의 저작권은 이미 출판사에서 갖고 있으니 원고 파일을 유출하는 건 내가 민형사상 처벌을 받게 될지도 모를 엄청난 일이란 걸 그 멍청한 인간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불법 다운로드가 판을 치는 나라와 국민이다 보니 별 일을 참 다 겪는다. 몇달동안 낑낑대며 골빠지게 작업한 번역원고를 거저 달라는 인간이 다 있다니 참 두고두고 기가 찰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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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루만짐

투덜일기 2009. 11. 9. 15:23

"나이 들수록 사람은 외로움을 더 느끼게 되는 법이다. 늙음은 심신의 쇠약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아내나 남편, 정인이 살아있는 경우에도 그렇다. 그들은 대개 섹스를 포기함과 동시에 어루만짐까지 포기하고 만다. 어루만짐이 외로움을 치료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어루만짐은 더 나아가, 때로는 죽음으로 이르는, 절망이라는 이름의 병을 치료할 수 있다. 몸이 섹스를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몸이 어떤 접촉도 원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이 탓이든 다른 이유로든 외로움을 타는 사람에게 어루만짐은 최고의 약손이다." (235쪽)
                                                        -- 고종석, <어루만지다>, 마음산책, 2009

 
책을 읽을 때도 확실히 당시의 관심사나 고민거리에 따라 눈을 파고드는 구절이 다르다. 여름부터 읽다 던져두기를 반복한 책을 어제 드디어 끝냈는데, 대체로 맛깔스럽게 풀어낸 사랑의 언어와 단상들 가운데 저 부분이 유독 가슴을 울렸다.
나무토막처럼 무뚝뚝한 나의 기질에 굳이 유전인자를 따져본다면 분명 엄마한테 물려받은 것이다. 눈 나쁘고, 키작고, 팔다리 짧고, 머리숱 없는 것까지 죄다 아버지를 닮았으면서 다정다감하고 잘 <어루만지는> 성품은 왜 안 닮았나 알다가도 모르겠다. 엄마에게 소심하고 무뚝뚝한 성격을 물려받으려거든 덩달아 눈 좋고 키 크고 롱다리에다 머리숱도 많은 유전인자를 같이 타고났어야 하는 게 아닌가!
어쨌거나 무뚝뚝 모녀는 결코 먼저 손을 내밀어 부비적거리는 성품은 아니되 다정한 가장 덕분에 평생 넉넉한 어루만짐 속에 살아왔는데, 이젠 그 뚜렷한 부재 때문에 문제를 겪고 있음을 느낀다. <나는 딸이지 남편이 아니야!>라고 왕비마마에게 소리쳐보지만, 그래도 엄마가 내게 원하는 건 나란히 소파에 앉아 TV를 보면서도 조물락조물락 손을 어루만져주고 등허리를 쓰다듬어 주고 아프다고 하면 안쓰러워서 꼭 안아주던 남편처럼 다정히 굴진 못하더라도 가끔 외로움을 어루만져줄 따뜻한 <약손>이 틀림없는 것 같다.
하루하루 덩치 큰 아기가 되어가는 듯한 엄마와 어떻게든 악착같이 철부지 딸노릇을 하고 싶은 나의 갈등은 결국 내가 힘겨루기를 포기하고 제대로 어루만지는 역할을 수행할 때 풀릴 것이다. 하지만 <있을 때 잘해야 한다>는 진리 앞에서도 왜 자꾸 억울함이 고개를 드는지(가령,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아직도 팔순 가까운 노모가 차려주는 밥상을 받아먹고 집안일은 한톨도 안하며 사는 진정 캥거루족 지인을 부러워하며 -_-;), 내 마음속의 철부지를 자꾸 달래보아도 잘 모르겠다. 자식은 원래 이기적인 존재이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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