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탕 주인

투덜일기 2008. 9. 24. 00:51

신경숙의 작품이었는지, 강석경의 작품이었는지 모르겠는데 아주 오래 전 읽은 소설에서 <목욕탕 주인> 같은 존재라는 표현이 퍽 인상적이어서 아직도 뇌리에 남아 있다. 얼마 안되는 돈에 열쇠를 내주고는 사람들이 입던 남루하고 허름한 옷을 보관해주는 동네 목욕탕 주인 같은 존재로 주인공이 자신을 묘사했던 것 같은데, 요즘이야 목욕탕도 찜질방을 끼고 거대한 기업처럼 운영하는 추세이니 그때의 그 느낌을 지금 독자들은 아마 과거의 나처럼 공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려나 나는 요즘도 가끔 그 구절을 떠올리며 나도 주변 사람들에게 그렇게, 편하다못해 아무렇게나 대해도 되는 <목욕탕 주인> 같은 존재가 아닌가 슬며시 화가 치밀 때가 있다.
오래도록 변하지 않은 나의 신변, 그러니까 아직도 속박에서 자유로운(?) 상태라는 점과 밤에도 늘 깨어있기 십상인 직업 특성이 더해져 나는 지인들이 한밤중 찾아온 난데없는 불면을 가눌 길 없어 괴로워한다거나 취중 귀가길에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술주정이 발현했을 때 종종 통화상대로 낙점되고 만다.

따지고 보면 다 내탓이다.
옛날부터 나는 쓸데없이 친구들의 고민들어주기 및 상담에 뛰어난 척 행동했고, 연애도 잘 못하는 주제에 지인들의 연애사엔 언제나 처음부터 억지 조언자가 되어야 했다.
사실 모든 문제는 본인이 풀어나가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냥 귀담아 들어주다 간간이 맞장구를 쳐 용기를 북돋아주면 내 역할은 끝이 나는 셈이다. 물론 과거에는 강력하게 나의 주장과 충고를 해결책이랍시고 들이민 적도 있었지만, 파란 많은 연애로 고민하는 지인에게 <그딴 놈/년이랑 당장 헤어져!>라고 조언했는데 며칠 뒤에 도저히 못 잊겠다며 재결합하는 커플들을 몇번 겪은 뒤로는 특히 남녀문제의 경우 섣불리 내 의견은 섞지 않게 되었고 몇년 전부터 연애 상담은 골치아파서 아예 거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와 더불어 나이 지긋해진 주변 지인들이 차라리 결혼의 위기를 겪을망정 연애질을 하는 건 드문 상황이 한편으론 서글프면서도 어쩔 땐 오히려 반갑달까. -_-;;

물론 측근들에게 가장 속 깊은 이야기까지 털어놓는 상대가 된다는 건 친구로서 의미있는 일이고, 나 역시 앞뒤 잴 것 없이 고민거리를 주절거림으로써 그것만으로 속이 후련해지는 지인들이 곁에 있음을 다행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친척에도 촌수가 있듯 관계에도 급수가 있으니, 모든 지인들에게 똑같은 관심과 부담의 정도를 할애할 순 없는 일 아닌가.

취중이든 맨정신이든, 뜬금없이 몇달만에 전화를 걸어선 다짜고짜 자기 삶의 하찮음과 짜증을 나에게 같이 짊어져주기를 바라거나, 무조건 그 때가 좋았지, 옛날이 그리워 따위의 하소연을 늘어놓는 <급수 먼> 지인들의 투정은 이제 정말이지 버겁고 짜증스럽다. 그렇다고 확 관계를 끊어버릴 만큼 하찮은 급수의 사람들은 아니니, 앞으로도  나는 고요한 한밤중에 갑작스레 울려대는 전화벨을 무시하지 못하고 휴대폰이 뜨끈뜨끈해질 때까지 반복되는 푸념을 들어주어야 하는 목욕탕 주인 같은 운명이란 말인가. 젠장.

간만에 면벽하여 도닦듯 분위기 잡고 일 좀 해보려고 앉았다가 완전 기분 잡쳤다.
한밤중에 울려도 반가운 전화도 있으니 아예 전원을 꺼놓을 수도 없고 이거 원...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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