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보고싶다고 생각한 영화는 아니었다.
그런데 주말 2시 결혼식과 6시 약속 사이의 공백을 홀로 메워야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불편한 구두를 신고 최대한 시간을 잘 보낼 방법은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제일 먼저 생각 난 것이 영화였고 상영표를 보며 <맘마미아>를 한번 더 볼까 하는 마음과 그래도 새 영화를 보자는 마음이 교차하던 끝에 선택된 것이 바로 하정우, 전도연의 <멋진 하루>.
헤어진 애인에게 1년뒤 다짜고짜 찾아가 "돈갚아!"라고 외치며 시작된다는 정도만 알고서(예고편을 어디서 봤더라;;) 보기 시작한 영화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제목에서 짐작되듯 두 사람의 하루 일정을 따라가는 내용이기에 템포가 느리고 흐름이 잔잔할 것임은 당연할 터.
등장인물도, 사건도 퍽 단출한데 두 배우의 내공이 워낙 대단하기 때문인지 따지고 보면 별것도 없는 이야기에 퍽이나 힘이 실린다.
도대체 믿을 구석이 하나도 없는 날건달이 되어버린 옛애인 조병운(하정우)은 영화에 나오는 모든 여자들처럼 나또한 미워할 수가 없을 듯했다. ^^
객관적으로 하는 짓이 정말로 한심한데도 계속 눈감아주고 이해해주게 되는 친구나 지인이 누구에게나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아니 이해도 안되고 돌아서면 짜증나는 상황임에도 그 인간의 근본적인 선함이나 악의없음 때문에 자꾸 마음이 쓰이는 사람이라고 해야하나.
어쨌든 하정우가 연기하는 조병운을 바라보며 다양한 유형의 지인들이 떠올라 킬킬거림이 더욱 은근해졌다.
겸연쩍으면 물개 우는 소리를 내며 웃던 K군.
본인은 절대로 바람둥이가 아니며 다만 모든 인간에게 친절할 뿐이라고 주장하던 공인된 플레이보이 J선배. (실제로 바람둥이는 모든 여자들에게 욕을 먹지만 놀랍게도 그 선배는 헤어진 모든 여자들이 그리움을 담아 칭찬을 했었다. *_*)
인생역전을 노리며 여전히 대박의 꿈을 찾고 있어, 측근들에게 나잇값 못하는 한심한 몽상가라고 손가락질을 받기는 하지만 이상스레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아 당장 밥 사주러 나올 여자가 백명(물론 나는 아니다;)이라고 자랑하는 H.
그들에게도 이 영화를 보라고 하면 단편적인 자기 모습이 캐릭터에 담긴걸 알아차리기는 할까? ㅋㅋ
어쩌면 주변에 한둘쯤 있는 다양한 캐릭터의 경험들이 영화에 녹아들어간 건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는데, 주인공 조병운처럼 그렇게 어김없이 현재와 과거의 여자들에게 노상 좋은남자일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현실감에 괜히 딴죽을 걸어보기는 했지만, 하여간 느물느물한 하정우와 스모키메이크업으로 까칠함을 강화한 전도연의 연기 덕분에 영화는 괜찮았다.
서울의 구석구석을 쏘다니는 배경 가운데 내가 알아볼 만한 곳들이 더러 있어서(아 글쎄, 내가 가끔 밥먹으러 가는 동네인 연희동 사러가 쇼핑 건물이 나오질 않겠나!) 마치 아는 사람이라도 본 양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고, 과연 저 동네는 어딜까 궁금해지기도 했다.
진한 감동도, 극적인 반전도, 흥미진진한 줄거리도 없이 그냥 조근조근, 누군가 우연히 헤어진 옛애인을 만나 인사만 나누고 헤어졌다거나, 어색하게 차 한잔 마셨다는 이야기를 조금 자세하게 듣는 느낌의 영화다.
그런 이야기를 싫어하는 사람에겐 따분하겠고, 모든 인간관계의 이야기를 흥미로워하는 사람(약간 늘어지는 부분도 있었지만 나는 대부분 눈을 빛내거나 킬킬거렸다)에겐 재미있을지도 모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