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여자

삶꾸러미 2008. 11. 25. 16:37

20대 한창 시절 두 여자는 모두 미인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60년대였던 그 시절엔 물론 미의 기준이 지금처럼 천편일률적이지 않았으므로, 똑같이 미인이란 말을 들었어도 둘의 아름다움은 서로 크게 달랐다.

S는 혈색이 좋고 피부가 매끄러운 데다 늘 미용실에서 손질한 최신 머리 모양에 곱게 화장을 하지 않고선 절대 외출을 하지 않는 멋쟁이였다. 더욱이 성형수술이라는 개념이 생겨난지 얼마 안 되어 쌍꺼풀 수술이라도 할라치면 눈병이 난 것처럼 한쪽씩 차례로 손을 댄 뒤 안대로 가리고 다니던 그 시절, S는 회사에 휴가를 낸 뒤 양쪽 눈을 한꺼번에 화끈하게 수술하고 영화배우 최윤희가 끼던 큼지막한 선글라스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나타나 모두의 놀라움을 살 정도였다.
Y는 유독 새하얀 피부와 시원한 미소 때문에 쉽게 눈에 띄긴 했지만 원체 가꿀 줄을 모르는 데다 치장에도 관심이 없어 늘 맨얼굴이었고 유일한 화장은 주홍빛 립스틱을 바르는 것뿐이었다.

화려한 미모를 자랑하던 S는 아는 사람의 소개로 부잣집의 훤칠한 미남을 만나 적당한 연애기간을 거쳐 결혼을 했고, 결혼과 동시에 집에 들어앉아 가정부를 거느리고 편히 살았다. 시부모를 모시지도 않았고 집안일을 할 사람도 있었으니 S는 전업주부가 된 뒤에도 꾸준히 몸단장을 했고 늘 또래보다 젊고 예뻐보인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Y는 같은 동네에 살던 착한 청년과 오랜 연애 끝에 결혼했고, 짐작보다 턱도 없이 가난한 시댁에 들어가 올망졸망한 시동생들을 건사하고 온 가족을 부양하느라 아이들을 낳으면서도 계속 직장생활을 했으므로 더더욱 몸단장엔 무관심해졌다. Y에게 화장이란 여전히 주홍빛 립스틱을 바르는 것이 전부였고, 신기하게도 립스틱만 바르면 창백해 보이던 얼굴에 생기가 돈다고 주변 사람들도 인정했다.

S와 Y 모두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았지만 중년이 되기까지 두 여자의 삶의 질은 퍽이나 차이가 났다. 맞벌이를 오래 했으면서도 돈을 모으지 못했던 Y는 집세를 올려달라거나 아이들이 떠든다는 이유로 셋집에서 쫓겨나 새집을 구해야 할 때 늘 부족한 돈을 변통하러 자존심을 눌러가며 친척이나 이웃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했다. 결혼과 동시에 이미 마당 넓은 집을 소유하게 된 S는 Y가 돈을 꾸러 오면 그렇게 가난하면서 애들 옷은 뭣하러 철철이 사입히냐면서 쓸데없는 데 낭비하지 말라고 꼭 가시돋친 말을 던졌다. 집안에 잔치가 있거나 김장을 해야할 때, S는 어김없이 착하고 음식 솜씨가 좋은 Y를 불러 일을 시켰고 차비 정도의 수고비를 쥐어주며 생색을 냈다.

중년 이후 드디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Y의 삶은 그럭저럭 평온했다. 가끔 아이들 문제, 건강 문제로 사소한 높낮이는 있었지만 돌아보면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으며 보람있고 행복한 삶이었다고, 본인도 주변 사람들도 인정했다. 남편과 아이들도 젊은 시절 고생한 Y를 깊이 이해하고 위했다. 어느덧 몸매 흐트러지고 얼굴도 시커먼 할머니가 된 Y를 빤히 눈앞에 두고도, 오래 전에 알던 어르신은 젊은 시절 백옥 미인 소리를 듣던 Y는 어떻게 사느냐고 안부를 물을 정도로 외모는 몰라보게 변했지만, 여전히 Y의 화장법은 맨얼굴에 주홍색 립스틱을 바르는 것이 전부다.
S는 중년에 오히려 정신없이 바쁘고 고된 사업가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자신도 몰랐던 사업감각으로 이미 넉넉했던 재산은 더욱 풍요로워졌고 대인관계의 폭도 넓어져 끊임없는 외모와 자기 관리는 필수적인 삶의 요소가 되었다. 갱년기를 즈음하여 사업에서 손을 떼고 은퇴를 한 뒤에도 S는 여전히 바쁘게 지냈다. S역시 할머니가 되었지만 집안팎에서 여왕처럼 군림하는 자신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요새 백화점 문화센터에 사교댄스를 비롯해 활동적인 수업을 여러 개나 듣고 있고 꾸준히 헬스장에서 운동으로 몸매를 가꾼다. 별로 티나지 않게 주름살을 제거하고 가끔 보톡스를 맞거나 수십만원짜리 화장품으로 젊고 팽팽한 얼굴을 유지하는데 돈과 수고를 들이기도 했지만, S의 젊음은 근본적으로 절대로 나태하게 살지 않으려는 피나는 노력의 결과였다.

원래부터 적잖은 나이차가 있는 S와 Y는 이제 같이 늙어가고는 있지만 언뜻 보기에 나이차가 훨씬 더 많아보인다. 누가 뭐래도 허리 36인치 이상의 마담사이즈 브랜드의 옷이 편한 Y와 달리  환갑을 넘기고도 50킬로그램 내외의 체중을 유지하는 S는 절대 마담사이즈 브랜드에서 옷을 사지 않으며 3, 40대 주부들이 입는 옷을 거뜬히 소화한다. S는 어쩌다 노래방에라도 갈라치면 두어 시간 내내 쉬지 않고 노래하며 춤을 출 수 있을 정도로 체력 또한 막강한데, 한때 노래교실도 열심히 다녔던 Y는 운동이라면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외출마저 꺼리는 뒷방 노친네 노릇을 하고 있다.

S와 Y는 요즘도 종종 한시간씩 통화를 한다.
전혀 공통점이 없을 것 같은 그들의 화제는 드라마 이야기부터 사회문제, 손녀 손자들 자랑에 이르기까지 무궁무진하지만 제일 열변을 토하는 주제는 병든 몸과 병원 이야기다.
겉보기엔 건강하기 이를 데 없을 것 같은 S는 지인들이 갑작스레 유명을 달리하는 걸 지켜본 터라, 몸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느껴지면 득달같이 검진을 받아야 마음이 놓인다. 1년에 한번 하는 건강검진으로 성에 차지 않은 S는 아예 주변에 최고권위자인 의사들을 수소문해 그들을 찾아내 대학병원에 등록을 하고는 3개월에 한번씩 정기검진을 해서 이상 없다는 대답을 들어야  마음 편히 지낼 수가 있다.
워낙 지병이 많은 Y도 대학병원에 정기검진을 다니며 약을 타다먹고 있는데, S도 그렇고 Y도 워낙 찾아다니는 진료과목이 많다보니 병원 출입은 두 여자의 흔한 일상이 되고 말았다. 
내분비 센터, 신장 센터, 심혈관 센터, 정형외과, 주치의만 다를 뿐 찾아다니는 진교과목마저 비슷한 두 여자가 병원 이야기가 나오면 말문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다만 S는 혈압약만 복용할 뿐 나머지 과에 순전히 정기검진을 받으러 다니는 건강염려증 환자에 가깝다는 것인데, 실제 성인병 환자와 건강염려증 환자는 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 오히려 손발이 더 척척 맞는다.
"언니, 퇴행성 관절염이나 척추관 협착증은 늙으면 누구나 다 걸릴 수 있는 거래. 언니만 운이 나빠서 걸린 게 아니야. 그러니까 너무 상심하지 말고 약 잘 챙겨먹어요."
"그래도 나이들어서도 운동을 꾸준히 하면 덜 걸린다는데 내가 게을러서 그렇지 뭐. 약은 잘 먹는데 좀체 팔다리 저린 게 나아야 말이지. 아무리 쑤시고 아프다고 해도 다른 사람이야 얼마나 아픈지 짐작도 못하잖아. 이렇게 살다가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더 살고 싶은 마음도 없어."
"언니, 그게 무슨 말이야! 악착같이 재미있게 오래 살다가 죽어야지. 그 예쁜 손녀 손자들 커서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도 다 봐야잖아. 998824 알지 언니? 99살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이틀만 앓고 죽는 거야. 암, 그래야지. 그런데 언니, 나 요즘 눈이 좀 이상한 것 같아. 백내장이 오나? 언니는 당뇨병 때문에 눈 검사 해봤어? 겁이 나서 나는 다다음주로 검사 예약을 했는데 말이야......"

두여자의 삶은 참으로 달랐다고 할 수 있겠지만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작게나마 상처를 주고받던 관계가 남긴 앙금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늙어감에 대한 동지의식과 서로에 대한 염려가 둘을 이어주고 있을 뿐이다. 어느 쪽의 삶이 더 훌륭한지는 누구도 판단을 내릴 수 없을 것 같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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