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듯함의 이면

삶꾸러미 2009. 2. 22. 00:45


반듯하다01 : 「1」작은 물체, 또는 생각이나 행동 따위가 비뚤어지거나 기울거나 굽지 아니하고 바르다.
                  「2」
생김새가 아담하고 말끔하다.

번듯하다:   「1」큰 물체가 비뚤어지거나 기울거나 굽지 않고 바르다.
                「2」생김새가 훤하고 멀끔하다.
                「3」형편이나 위세 따위가 버젓하고 당당하다.


얼마 전 작업을 끝낸 책이 이런 식으로 사전의 낱말뜻을 적어놓고 단상을 풀어나가는 형식이었는데 재미 있어서 따라해보고 싶었다. :)

돌아보면 반듯함은 어려서부터 나를 규정하는 틀인 동시에 채찍이었던 것 같다. 친동생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촌동생들한테도 <반듯한> 언니누나로서 모범이 되어야한다는 건 분명 알게모르게 동기를 부여했을 터이고 어느 정도 스트레스로 작용하긴 했겠지만 본인의 성격상으로도 심하게 흐트러지고 비뚤어지는 건 용납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애써 <반듯함>을 추구하느라 특별히 삶이 고달플 것은 없었다. 
약간의 문제는 본인이 인정하는 반듯함과 남들이 자신의 바람까지 담아 투사하는 나의 반듯함 사이에 생겨난 틈이랄까 공백 같은 것이었다. 예를 들어, 독서를 좋아하긴 하지만 집에 있던 동화책과 문학전집류가 따분해지고 난 뒤, 내가 만화방에서 빌려보는 만화책에 재미 들렸을 때 같은 동네 모여 살던 친척 어르신들이 만화책을 쌓아놓고 낄낄대거나 심각하게 책에 고개를 파묻은 나를 보고는 깜짝 놀라 우리 엄마에게 한 소리를 해댔다.
"어머머! 라니는 좋은 책만 보는 줄 알았더니, 만화책도 보네? 저러다 만화책에 빠져 공부는 뒷전으로 밀려나면 어쩌누. 우리 애들한테 만날 라니 언니 좀 보고 배우라고 잔소리하는데 저런 것까지 따라할까봐 걱정이야. 언니가 좀 말려봐요."
당시 만화방과 만화책의 위상이 워낙 나쁘기는 했지만, 좋은 만화 나쁜 만화 작품성 따져서 가려볼 줄 아는 안목 정도는 갖추고 있다고 생각했던 조숙한 나로서는 친척 어른들의 간섭과 그에 따른 엄마의 개입이 참 못마땅했다.

어떻게 보면 그간 줄곧 살아오며 남들이 생각했던 나의 <반듯함>은 순전히 그들의 오해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정말로 자타공인 <반듯한> 사람이라면,  "어머나, 너한테 그런 면이 있었니, 의외다" 라는 반응을 그리 자주 들을 일이 없어야 정상 아니겠나. 하지만 나는 어린 시절의 만화책 사건을 비롯해, 몇몇 나의 행동에 뜻밖이라는 평가를 퍽이나 자주 들었던 것 같다.
가령,  놀기 좋아하는 사촌언니 따라서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이른바 '나이트클럽'이라는 데를 꽤나 자주 드나들며 그런 데서 술이 아닌 콜라(콜라텍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를 마시고도 신나게 춤추며 놀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당시 유행하는 춤을 얼추 따라출 수 있는 경지에 올랐는데, 대학 1학년때 과에서 단체로 나이트클럽에 갔던 날 내가 고등학생처럼 보이기도 했고 실제로도 미성년자라 입구에서 나를 데리고 들어가느라 퍽이나 애를 써야했던 동기들은 물만난 고기처럼 플로어에서 노는 나를 보며 다들 거의 경악하는 수준이었다. "세상에나, 너 나이트 죽순이였니!"라고 외치면서... -_-; 다들 내가 나이트클럽이라곤 가본 적도 없을 거라 예상했다나. 하지만 4살 많은 사촌언니랑 다니면서 친구라고 얼렁뚱땅 넘기면(사촌언니가 늙어보이게 미리 화장도 해주곤 했다) 주민증 보자는 얘기도 없이 그냥 들여보냈음을 그들이 알 리가 없긴 했다.
운전을 시작하고 난 뒤에도 그랬다. 처음 수동 자동차를 몰고 다니던 초보시절의 우여곡절이야 그렇다 치고, 어느정도 겁이 없어지고 나선 하필 회사가 본사 공장으로 몽땅 들어가는 바람에 경기도 안산으로 1년여 출퇴근을 해야 했는데, 수인산업도로를 오가는 난폭한 트럭들 사이에서 출퇴근을 하다보니 나 역시 입과 운전이 거칠어질 수밖에 없었고 어쩔 땐 괜히 작은 차를 무시하는 트럭 운전수에게 화가 나 소모적인 싸움(쫓아가 추월해서 코앞에서 브레이크 밟아 식겁하게 만들기 따위;;)에 마구 응수했다. 욕도 당연히 거침없이 늘어났고, 사실 아직도 운전할 땐 나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오는 경우가 많다.
어쨌든, 그 시절 출근 시간에 나와 어느 덤프트럭의 위험한 실갱이를 하필 나와 별로 사이가 좋지 않은 회사 직원이 목격한 바람에 난 또 내 의도와 상관없이 구설에 올라야 했다. "안 그렇게 생겨갖고 운전 엄청 난폭하게 하더라. 여자애가 죽으려고 겁도 없이..." 
난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소리쳐 주고 싶었지만,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입방아를 찧어대든 상관이 없었기 때문에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진 않았었다. 회사생활 막바지라서 무서울 게 전혀 없기도 했지만, 더는 남들이 보는 <반듯함>의 허울에 나를 얽매고 싶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서 그 오해를 깨주고 싶은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내가 의외적인 모습을 보인다 해도, 주변 사람들에겐 내가 대부분 <반듯해> 보이는 모양었고 때로는 그 <반듯한 이미지>를 억지로 강요받기도 했다. 이십대 후반 즈음에 가장 싫었던 건, (겉모습 뿐이든 아니든) <반듯한 친구>로 <이용> 당할 때였다. 특히 연애사가 복잡하거나 <날나리> 이미지를 갖고 있는 친구들의 경우, 진지하게 사귀는 사람이 생겼거나 결혼을 앞두고 있을 때 나는 친구들이 자기도 <착하고 반듯한> 친구가 있다는 생색이 필요할 때 꼭 데리고 나가는 선택품목 같은 존재였다. 물론 당시엔 어리숙한 내가 그 사실을 알 리 없었고, 연애질 열심히 할 때는 코빼기도 안비치다가 뜬금없이 불러내는 친구들이 그저 사랑과 연애에 충실해 그러는 것일 뿐이라고 애써 이해하려 노력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런 친구들 가운데는 나중에도 지속적으로 나를 지들의 양다리를 감추려는 <알리바이 증명용>으로 이용한다거나, 거짓말의 도구로 사용하는 이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기가 막혔다. 문제는 놀랍게도 나를 팔면 그들의 거짓말이 통한다는 사실이었다. 
아, 내가 그렇게 꽉 막히고 얌전하고 바른생활을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는 말인가!

다행스럽게도 나이가 많아짐과 함께 보편적인 사회적 잣대로 가늠되는 <정상적인> 삶의 궤적과는 멀어지는 비혼의 세계로 접어들면서 더는 남들의 강요로 포장된 <반듯함>에선 벗어날 수 있게 된 듯 하다. 어디까지나 때가 되면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아파트 평수 넓혀가며 살아가는 게 요즘의 <반듯함>이고 곧 <번듯함>으로 확대되기 때문이다. 그나마 <번듯함>까지 강요받는 삶은 아니었으니 천만다행이라고 여기고는 있는데, 아직도 가끔 나의 <반듯함>을 칭찬하거나 과대포장하려 드는 사람들을 만나면 난감하다. 나는 그저 인간으로서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파렴치함을 멀리하려는 양심의 범주에서 살아가려고 애쓸 뿐, 정말로 모범생같은 인물은 절대로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늘 불만 많고 투덜거리고 뒤에서 구시렁거리고 벌컥벌컥 현실에 짜증을 내는 평범 이하의 비뚤어진 인간이라, 어떻게 해야 쓸데없이 제 맘대로 높여 부르는 타인들의 기대치를 낮출 수 있을지 그게 고민이거늘.

아주 오랜 만에 "나한테 반듯한 친구가 너 밖에 더 있니. 니가 한 번 봐줘."라고 하는 청을 듣고나서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졌다. 만나서 확 "나 그런 사람 아니거든!"이라고 외쳐줄까 어쩔까. 내가 뭐하러 만나느냐고 처음부터 거절 못한 내가 모자란 것도 확실하고, 실제로 그렇게 외쳐줄 위인도 못되고, 결론은 내가 바보란 얘기다. 이런 인간이 뭐가 반듯하다고.. 나 원 참.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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