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처럼 잘난 척이 심하거나 자의식이 강한 사람의 경우 남들이 베푸는 쓸데없는 호의는 주제넘은 간섭이나 참견으로 여겨져 오히려 불쾌함을 느끼기 쉽다. 하지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호의는 확실히 전염효과가 있다. 여러 상황이 있겠지만 일단 떠오르는 건 경미한 접촉사고.
운전을 하다보면 정말 별의별 사람들을 다 만나게 되고 접촉사고가 나지 않더라도 양보나 운전예의 문제로 서로 빵빵거리거나 삿대질을 하거나 심지어 차를 세우고 길바닥에서 큰소리로 말다툼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모든 사고는 피하는 것이 최선이지만, 본의 아니게 사고를 겪는 경우에도 대처법은 참 여러가지다.
차가 크게 파손됐을 경우엔 별 도리가 없다. 현장증빙 사진을 찍어두거나 도로바닥에 표시를 해두고 직접이든 보험사를 통하든 잘잘못을 가려 물어주거나 수리해 받으면 된다. 물론 처음 사고를 당하면 경황이 없고 손발이 벌벌 떨려 필요한 조처를 하지 못하는 수가 많은데, 무조건 버럭버럭 소리부터 지르며 저는 잘못없다고 욕부터 해대는 성급한 진상을 만났더라도 최대한 침착하게 증거확보를 한 후 보험사에 전화하는 게 현명하다. 그냥 서 있는 차를 엉뚱하게 들이받은 경우를 제외하고 요샌 어차피 웬만하면 그냥 쌍방과실이니까.
그런데 정말로 살짝, 범퍼나 사이드미러에 살짝 흠집만 나는 정도의 사고일 경우엔 어떨까?

유난히 차를 아끼는 사람들도 있긴 하다. 성격상 범퍼에 흠집하나 나도 절대 못 견디고 깨끗이 고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또 본성이 고약하고 사악하여 사소한 접촉사고에도 옳다구나 하며 원래부터 부실했던 차를 이곳저곳 고치고 상대에게 수리비를 물리는 물귀신형 악당도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간 그리 사고를 많이 겪은 건 아니어도 내가 십수년 간 지켜본 바에 의하면 악당들 보다는 선량한 사람들이 더 많았고 그런 이들이 베푼 호의는 나까지 금세 전염시켰다. 공주가 꽤나 어렸을 때였는데, 왕비와 어린 공주를 뒤에 태우고 어디론가 가던 날 조카가 고모 옆 앞좌석에 앉겠다고 울고불며 난리를 피우는 바람에 운전하며 달래느라 정신이 쑥 빠진 나는 빨간 신호등을 미처 못보고 쿵, 앞에 서 있던 어떤 자동차를 받았었다. 다행히 도로가 막혀 천천히 가고 있기는 했지만 검정색의 꽤 좋은 차를 받았음을 깨달은 순간 나는 앞이 캄캄해졌다. 아무리 경미한 접촉사고라도 행여 못된 인간을 만나면 범퍼를 몽땅 갈아주어야 함은 물론 최악의 경우 병원 검사비(건강보험 적용이 안돼서 무지 비싸다)와 물리치료비까지 다 물어주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내 주변엔 크지 않은 접촉사고를 냈는데도 악덕 운전자나 못된 택시기사를 만나는 바람에 감정적으로나 재정적으로 뒷처리에 심히 골치를 썪은 지인들이 꽤 됐던 터라 더럭 겁이 났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얼른 차에서 내려 다가가자 50대쯤의 운전자 아저씨는 자기 차를 살피더니 내 차의 페인트가 옮겨묻은 뒷범퍼 부분을 손으로 쓱 문질러보고는 나에게 "아이가 타고 있던데 다친 데는 없죠?"라고 물었다. 옆에 서서 들릴듯 말듯 "죄송합니다..."라고 중얼거리고 있던 나는 뜻밖의 질문에 "네."라고만 대답했는데, 아저씨는 그럼 됐다고, 운전 조심해서 가라고 하고는 얼른 차에 올라타고 사라졌다. 나 역시 안도의 한숨을 쉬며 얼른 내 차로 돌아와 가던 길을 갈 수 있었다. 그래놓고 그 아저씨가 나중에 나를 뺑소니로 신고했더라는 반전 같은 건 없다. ^^ 어찌보면 당연한 듯한 상황에서 크게 호의를 입었다는 느낌만 남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 누군가 운전 미숙이나 잠깐의 한눈으로 슬쩍 들이받히는 사고를 당했을 때, 나 역시 그 아저씨처럼 범퍼에 난 흠집이 그리 크지 않은 경우엔 괜찮다고 흔쾌히 호의를 베풀 수 있었다. 선례가 없었다면 아마도 나는 범퍼를 통째로 갈 거나 도색을 다시할 만큼 돈을 받아야 할 것인가, 그 절반만 받아야 할 것인가, 보험사에 연락을 해야할 것인가, 흠집에 속 쓰리지만 그냥 보내야 할 것인가 우유부단하게 심히 고민을 했을 게 틀림없다. 물론 그 즈음엔 멀쩡히 세워놓는데 어느 틈에 누군가 긁고 지나간(양심없이 바퀴 위쪽을 찌그러뜨려놓고 도망친 인간들도 있어 그건 내가 생돈 들여 고쳐야 했다! ㅠ.ㅠ) 생채기들이 범퍼에 몇 군데 생겨났기에 더 너그러워질 수 있었다. 하지만 경미한 접촉사고로 옴팡 뒤집어쓴 전적이 있는 사람이 똑같은 사고를 당했을 경우엔 복수심에 불타, 다른 사람한테 받은 억울함을 대신 푸는 마음으로 굳이 갈 필요도 없는 범퍼를 새것으로 갈아달라는 요구를 하기도 한단다. 복수는 복수를 낳고 호의는 호의를 낳는 순환고리가 되풀이된다는 얘기다.

동생들도 올케들도 다 운전을 하기 때문에 이런 얘기를 해보면 그들도 나와 비슷하다. 큰동생은 꽤 비싼 차를 몰기 때문에 범퍼가 살짝 닿는 사고에도 상대방이 식겁해서 당황한다는데, 범퍼나 거울에 난 사소한 흠집 정도는 괜찮으니 그냥 가라고 하면 오히려 사고 낸 쪽에서 엄청 놀라고 고마워한다나. 센서까지 들어있는 외제차 범퍼 잘못 흠집내면 국산 중고차를 몽땅 팔아도 안될만큼 어마어마한 돈을(과장인지 아닌지 몰라도 고급형 외체차는 범퍼 하나에 천만원이라고 하더군!) 물어줘야 한다는 비정한 도시의 속설을 모두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동생들 역시 비슷한 호의를 경험했기 때문일수도 있지만, 아마도 운전하는 가족과 지인들을 생각해서 무리한 욕심을 부리는 대신 사소한 호의가 사방에 전염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품고 사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어제도 나는 집앞에서 자동차 궁둥이를 찰싹 때리는 듯한 미묘한 접촉사고를 겪었지만, 그냥 보내주고 돌아왔다. 불법 유턴까지 했던 마당이라 그 자리에서 오래 승강이를 벌여 경찰이라도 개입했으면 범칙금까지 물어야 했을 그랜저 아저씨는 내가 까탈스럽게 굴지 않더라도 까진 범퍼랑 차체  도색하려면 생돈들여야 할 테니까. 그 차는 도색이 벗겨졌는데, 먼지가 많이 쌓였기 때문인지 내 차 범퍼는 검은 페인트만 옮겨 묻었을 뿐 멀쩡한 걸 보며 내심 궁금해졌다. 내가 운전하면서 호의를 베풀기 시작하니깐 차도 알아보는 건가, 하고. ^^
더불어 그 아저씨도 혹시 나중에 비슷한 사고를 당했을 때 범퍼에 살짝 흠집 난 정도는 흔쾌히 감수하고 보내줄 수 있는 호의를 베풀 수 있으면 좋겠다. 무서운 돼지독감 바이러스보다야 전염성이 약하겠지만, 세상엔 나쁜 사람보다 좋은 사람이 더 많으며 선량하게 베푸는 호의는 전염된다는 걸 더 많은 사람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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