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죽음

삶꾸러미 2009. 7. 21. 17:10

최근에 목도한 어떤 죽음, 아니 죽음 이후 산자들에게 남겨진 의식의 절차와 과정을 지켜보며 마음이 참 착잡했다. 확실히 장례는 망자보다, 남겨진 산자들을 위해 그것도 남들에게 뵈주기 위해 치르는 의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름답게, 최소한 흉하지 않게 죽음을 치러내려면 참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 코미디 소재로 사용될 만큼 흔해진 상조회사들의 존재는 바로 그런 필요 때문일 것이다.
문제는 단순히 상조회사들의 도움과 비용, 제례 준비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의식이 장례라는 점이다.
혼례는 하객을 많이 부르지 않고 간소하고 조용히 치러도 의식 있는 이들에게 칭송받을 수 있으며 단 둘이서도 얼마든지 치를 수 있지만, 장례는 절대 그렇질 않다. 버젓이 배우자와 자식도 있고 친지들도 있는데, 문상객이 거의 없고 살뜰하게 곁을 지키는 사람들이 드물어 운구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지경이라면, 망자와 가족들이 살아온 방식에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어쩌면 그들은 의례적인 품앗이가 싫어 안주고 안받겠다 여기며 살았을 지도 모르고, 단순히 반사회적인 성향 때문에 은둔하며 살아왔을지도 모르겠다. 딱히 그들의 태도가 누구에게든 해악이 되는 것은 아니므로 말릴 도리도 없고 잘못이라고 여길 이유는 없다. 특히 그들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런데 죽음을 앞두고선 그런 삶의 방식이 주변인들에게 민폐일 수 있음을 이번에 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지인들의 좋은 일은 모른 체 해도 나쁜 일엔 모른체 하면 안된다는 옛말이 철저하게 옳다는 것도 비로소 새삼 깨달은 것 같다. 과거 조부모님, 외할머니, 그리고 아버지까지 상을 치르며 나는 오히려 너무 많이 몰려드는 손님을 버거워했고 슬퍼할 겨를 없이 문상객 접대에 힘써야 하는 장례문화를 개탄했을 뿐, 그렇게 찾아주고 상주들의 곁을 지키는 문상객들의 존재에 깊은 고마움을 느끼진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기막힐 정도로 한산하고 썰렁한 장례를 지켜보니 확실히 죽음도 사람의 일이기에 사람이 필요하며, 사람은 돈만으론 살 수 없는 복이고 재산이란 게 실감된다. 가끔 사람들과의 부대낌이 짜증스럽고 관계의 유지가 힘들어도 계속해서 <잘하고> 살아야할 이유가 생긴 셈이다. 단순히 물질과 노동의 품앗이를 위해 잘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사람의 도리라는 것, 사람들에게 마음의 곁을 내주는 역사를 쌓아간다는 것, 그래서 죽음의 순간까지 <선뜻> 지인을 지켜줄 진심을 얻는 것의 중요성을 무시해선 안되겠다는 말이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은둔이 자타에게 모두 편리함이겠지만, 죽음 이후엔 민폐일 수 있다는 점은 사실 이번에 내게 아득한 충격이었다. 사후세계를 부정하든 않든,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든 알든, 죽음이 남겨진 이들에게 민폐인 삶이라면 너무 비참하지 않겠나. 앞으로 현대인들 대부분은 더욱이 독거노인으로 살다 죽음을 맞이하게 될 거라는데 과연 내가 <잘하고>살려고 노력하더라도 마지막은 민폐를 면할 수 있는 삶일까. 그건 장담할 수 없겠지.
삶은 살수록 참 어렵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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