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덜일기'에 해당되는 글 503건

  1. 2016.05.23 실로 간만에 느루 12
  2. 2016.05.19 몰랐다 7
  3. 2016.05.18 덥다 1
  4. 2016.05.11 청바지 찢기 2
  5. 2016.05.04 콜록콜록 6
  6. 2016.04.18 그냥 그렇다고 7
  7. 2016.03.30 이 동네.. 2
  8. 2016.03.13 모르는 일 9
  9. 2016.02.29 어제 눈 풍경 6
  10. 2016.02.12 어떤 시어머니 10


한동안 거실에 놓아뒀던 자전거를 옮겨 뒷베란다로 내놓고는 통 자전거를 안 탔다. 한 3년 됐으려나... 등산을 시작한 탓이었을까? 암튼 조카가 지 자전거까지 우리 집에 놓아두고 둘이 같이 몇번 한강까지 타러다니다가는... 둘 다 까맣게 자전거를 잊었다.

그런데 이번 토요일 가족모임 때 왕비마마가 휴대폰 사진들을 자랑하다말고 홍제천에서 자전거 타던 ㅈㅎ이 사진(몇년 전에 내가 찍었던;)을 녀석에게 들이밀었다. 우리 ㅈㅎ이 이 때보다 엄청 많이 자랐네...  근데 왜 요새 자전거 타러 안 오니?

마침 평창동 살던 ㅈㅎ이네는 이달초 한강 가까운 마포구로 이사를 했는데, 할머니가 보여준 사진에 난데없는 자전거 욕망이 되살아났는지 ㅈㅎ이가 외쳤다. 고모! 우리 내일 자전거 타자! 으어... 해서 하필 폭염이 예고된 일요일... 전격 한강 자전거 회동이 이루어졌다.

준비과정은 일단 고통이었다!! ㅠㅠ  난 가뿐하게 <느루>를 타고 한강에서 애들과 만나면 되겠거니 생각했으나, 다같이 자전거 타려면 내가 차에 2대를 싣고 날라다줘야 한다는 의미였다. 나중에 힘빠지면 자전거 타고 집에 돌아가기 힘들다나 뭐라나. 흥! 

좀 덥긴 하겠지만 간만에 한강변에서 바람 맞으며 자전거 탈 생각에 설레서 오냐 그래주마 대답해놓고는 막상 삐질삐질 땀 흘리며 자전거를 준비하려니 후회막급이었다. 자전거 두 개에 꼬박 3년 쌓인 먼지 닦아내야지... 바퀴에 일일이 바람 넣어야지... 체인에 기름칠은 안해도 괜찮을까 걱정은 앞서고... 하여간에 또 낑낑대며 차례차례 자전거를 아래층으로 들고 내려가 차에 실는 것도 큰일이었다. 하나가 접이식이면 뭐하나! 엄청 무거운걸... 흑흑. 지들이 와서 가져가라고 할 걸!! 

본격적으로 자전거를 타기도 전에 온몸은 이미 땀범벅, 녹초가 되었다. 젠장... 조카 체중관리 해보겠다고 늙은 고모 잡겠다며 왕바마마가 걱정하실 만도 했다. 어휴... 째뜬 한번은 해야할 일이라고 위로하며 집을 나섰다.

33도까지 치솟은 5월 폭염에도 한강변엔 또 웬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지! 얼음물도 금방 녹아버리는 무시무시한 햇볕... 투덜투덜 자전거가 나쁘네 마네 아무데서나 끽 서서 사고유발 행동을 해대는 조카놈한테 소리지르랴, 뒤떨어진 일행 챙기랴... 간만에 타는 거라 몹시 아픈 엉덩이 달래랴 ㅠ.ㅠ  어휴... 1시간이 3시간쯤으로 늘어난 느낌이었다. 자전거타기는 절대 잊히지 않는 기술이라는데 난 간만에 타면 왜 늘 페달밟기부터 타고 내릴 때 서툴어서 넘어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걸까. 흑...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아주 뿌듯한 라이딩이었다. 바퀴 고무가 딱딱해져 금방 펑크라도 나면 어쩌나 걱정했던 느루는 멀쩡히 버텨주었고 페달을 밟는 대로 가볍게 씽씽 잘도 달렸다. 조카가 자꾸만 자전거 바꿔타자고 할 정도. ^^v

햇빛 찬란한 곳에 세워놓고 찍었어야 하는데 너무 더워서 그늘에 놓고 찍어서 느루의 자태는 그닥 빼어나게 못 담았지만 언제 봐도 잘빠졌다, 우베공! ㅎㅎㅎㅎ


묵은 먼지도 털어줬겠다 이젠 자주 좀 타러나가야겠다고 다짐했음. 그래서... 낑낑거리며 들고 올라와서 다시 거실 한 복판에 세워두었다. 근데... 바퀴며 브레이크며 점검은 안받고 그냥 타도 되는걸까...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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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랐다

투덜일기 2016. 5. 19. 00:27

어렸을 때부터, 아니 나중에 한참 커서도 내가 잘 몰랐거나 오해했던 말들이 생각났다. 나만 그랬는지, 다른 분들도 그랬는지 궁금해서 언젠가 한번 포스팅해야지 맘 먹었었는데 계속 까먹었다가 새삼 일하기 싫은 순간에 하나하나 떠오르는군.


1. 쌀 한톨 기르는데 1년 걸린다. 

할아버지나 엄마가 주로 밥상에서 잔소리 차원에서 하던 말이었다. 빈 밥그릇에 밥풀 붙여놓거나 상에 흘리면 저런 핀잔을 들었는데 어린 나는 정말 의아했다. 쌀 한 톨 기르는데 1년 걸리면 대체 이 밥 한 그릇에 담긴 쌀을 다 기르려면 얼마나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거지?  거짓말 아냐? +_+

ㅎㅎㅎㅎ 쌀과 벼의 차이도 모르던 때의 의문이었던 듯. 쌀을 한톨씩 따로 키우는 게 아니라 한꺼번에 벼농사를 짓는다는 건 정말로 한참 뒤에야 깨달은 것 같다. 이거 나만 몰랐음?


2. 시님

요새도 탁발승인지 땡중인지 집집마다 돌아다니거나 전철역 같은데서 목탁을 두들기는 승복착용자들을 볼 수 있지만, 내가 어렸을 땐 정말로 사극에서 보듯 가끔씩 탁발승이 대문으로 들어와 마당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시주를 독려했었다. 그러면 할아버지나 할머니, 울 엄마가 내게 쌀 한 그릇이나 지폐 몇장 쥐어주며 말했다. "얼른 저 시님한테 시주하고 와라."

그래서 난 당연히 머리 빡빡 깎은 사람들에 대한 호칭이 '시님'인 줄 알았음. '시주'하고 운율도 맞잖아!

외할머니, 엄마 따라 간 절에서도 다 '주지시님', '부전시님', '원주시님'이라고 부르더만... 그래서 초파일날 관련 일기에도 '시님'이 등장했었다.  근데 어느날 사촌 언니 일기장을 훔쳐보는데, 똑같이 초파일에 절에 간 이야기 편에 '시님'이 아니고 '스님'이라고 쓰여있는 것이 아닌가! ㅠ.ㅠ 내가 너무 오래 잘못 사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꽤나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그냥 말이나 생각으로 흘려보낸 게 아니라 '일기'에 문자로, 증거로 나의 오해와 실수가 기록되어 있었으니 그랬겠지... ㅋ


3. 산 오징어

주로 빨간색 동그라미 안에 '산'자를 넣어 글씨를 새긴 물탱크 같은 걸 싣고 다니는 트럭을 볼 때마다 어린 나는 생각했다. 아니, 오징어가 어떻게 '산'에서 살지? 오징어는 바다에 사는 거 아닌가? 바닷물을 길어다 산에 양식장을 만드나? ㅠ.ㅠ  

'산'이 山이 아니고 生이라는 사실은 중학교에 들어가서 한자를 배운 다음에도 잘 깨닫지 못했다. 남들 다 아는데 나만 모르는 것 같은 바보 같은 질문은 절대 입밖에 내지 않는 신중한 아이였기 때문이다.  ㅎㅎㅎ


4. 참여 연대

9시 뉴스에서 걸핏하면 나오는 '참여 연대' 관련 소식에 어린 나는, 아니 어른이 된 뒤에도 대체 '연대 애들' 맨날 뭘 그렇게 데모를 하나그래... 서울대, 고대애들은 상대적으로 잠잠하네... 그랬었다. ㅠ.ㅠ '연대 보증'이라는 말은 제대로 이해했던 것 같은데 왜 '참여 연대'만 연세대의 준말이라고 생각했는지 원... 



음... 일단 요 정도다. 뭐가 더 있었던 것 같은데 나중에 생각나면 추가해야지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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덥다

투덜일기 2016. 5. 18. 23:31

몇년 전엔 봄과 여름 사이 처음 아이스커피 만들어 마신 날을 기록해두기도 했는데, 꼭 날씨탓만이 아니고 내 체질? 혹은 나이가 점점 더 더운 걸 못견디는 상황으로 달려가다보니 아마도 4월 되자마자? 어쩌면 3월 말쯤부터 날잡고 냉동실에 얼음을 잔뜩 얼려두고는 수시로 냉커피를 만들어 마시고 있다. 


웃기는 건... 우리 식구가 죄다 옛날부터 한 겨울에도 꼭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물을 마시던 사람들이었고 당연히 정수기 물도 냉수만 마셨는데, 지난 겨울 내내 내가 냉수를 못먹고 그냥 실온 정수물만 마셨다는 사실이다. 이가 시린 건 아니고, 찬물 마시면 금방 몸이 으스스해지면서 괜히 싫었다. 아마도 이 역시 '갱년기'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닐까 씁쓸했으나 하여간에, 얼마 전까지도 찬물이 싫어서 정수물도 아니면 아예 따뜻한 물을 마시곤 했는데 어느틈엔가 얼음을 으드으득 깨물어먹고 앉았다. 카페마다 빙수도 팔기 시작했길래 얼른 커피빙수도 얼려놓고 야금야금 먹고 있으니 뭐...


아직 난 선풍기가 필요할 정도는 아닌데, 다한증이 있는 왕비마마는 벌써부터 선풍기 타령을 하셔서 일찌감치 꺼내놓았고, 오늘 낮엔 내내 선풍기가 윙윙 돌아가며 엄마를 따라다녔다. 아예 에어컨 필터 청소도 해놓아야 하는 건가. +_+


아침 일기예보에 29도까지 올라간다고 경고했는데도 굳이 두툼한 티셔츠를 입고 나간 아이는 얼마나 더웠을까. 좀 전에 나가보니 밤이 되어도 기온은 좀처럼 떨어지지가 않았던데. 더워서 고생 안했나 물어보려도 애가 들어와야 말이지. 보일러도 안돌렸는데 온종일 복사열에 덥혀진 콘크리트는 아직까지 열을 뿜고 있는 듯 집안 공기가 텁텁하다. 미세먼지고 뭐고 에라 모르겠다. 창문 활짝 열어놓아도 답답한 건 여전하네.


감기는 갑자기 춥거나 더워서 걸리는 게 아니고 몸의 면역력이 바이러스란 놈한테 져버려서 걸리는 거라는데 이놈의 면역력은 대체 왜 안돌아오나그래. 괴롭던 기침은 그럭저럭 소강상태로 접어들면서 쉰 목소리는 나았으나 대신 코맹맹이소리가 난다. 목으로 넘어가 기침을 일으키던 콧물과 가래가 이제 코주변에 머문다는 뜻인가? 으으.. 이래저래 드럽긴 마찬가지다. 


이렇든 저렇든 날도 더운데 감기는 좀 떨어져주지. 오뉴월 감기는 개도 안걸린다는 말은 이제 시대에 맞지 않는 표현이 되어 차츰 사라질 것 같다. 내 주변에만도 감기환자가 좀 많아야지. 오뉴월 감기는 아마도 해마다 이제... 트렌드?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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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바지 찢기

투덜일기 2016. 5. 11. 21:47


<청바지 찢기>라고 제목을 딱 적자마자 <청바지 돌려입기>라는 책이 생각났다. ㅋ 친한 친구들끼리 청바지 한벌을 돌려입으며 각자 사연을 털어놓던 청소년소설이었던 듯. 물론 포스팅은 그 책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예전에 높은 신발에 맞춰 길이를 수선해놓았던지라, 낮은 운동화 아니면 단화만 신고다니는 요즘엔 통 입을 일이 없었던, '나름 고가의 브랜드 청바지'를 며칠 전 과감하게 자르고 찢었다. ^^; 머리 복잡해지면 괜한 생산성 폭발하는 건 이 업계 종사자의 돌림병이 아닐지.


외래어 남발병에 걸린 패션계에선 <디스트로이드 진>혹은 <데미지 진>이라는 이름으로 여기저기 구멍이 숭숭 뚤려있는 청바지를 홍보하고 팔아먹던데... 어쩐지 얄딱구리하게 느껴지는 허벅지 부분에 팍팍 구멍이 난 바지를 사입겠다는 생각은 차마 한 적이 없고, 무릎 부분을 죽 시원하게 찢어서 걸을 때나 앉을 때 편해보이는 청바지에 대한 괜한 로망은 내심 갖고 있었다.  


게다가 마침 요샌 밑단을 싸박지 않고 그냥 올 풀리게 내버려둔 바지들도 막 입고 다니니 나처럼 DIY 바느질병에 걸린 사람들이 갖고 있는 청바지로 뭔가 저지르기 딱 좋다.


소심하게 1, 2센티미터씩 여러번에 걸쳐 길이를 자르며 입어보고 다시 자르기를 반복, 발목이 좀 드러나는 길이 그나마 젤 낫다고 여겨 대충 올을 푼 뒤엔 좀 더 과감해져서 앞쪽 무릎부분을 가위로 확~ 오렸다. 스판기가 있는 원단인데도 역시 무릎이 훌렁 드러나니 편하다 편해!


색깔이 진한 청바지라서 그러고도 좀 심심해보여 이번엔 '사포'를 집어들었다. 군데군데 뭔가 더 손을 봐주겠어! ㅋㅋㅋㅋ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사포질>은 안하는게 나을 뻔했다. 몹시 어설프게 상처가 나버린 청바지 어쩔;;


그래도 잠깐 집앞에 나가야한다든지 장보러 나갈 때 입어보니 묘한 해방감 같은 게 든다. 설마 이것이 혹시 파괴본능? 으음.. 그건 아닌 거 같고 알게 모르게 '단정해보이는 게 싫은' 반발심의 일종이 아닐까. 


며칠 전엔 시내에서 나보다 꽤 나이들어보이는 어떤 늘씬한 아줌마가 물 많이 빠진 흐린 색깔 청바지에 시원시원 여기저기 구멍이 많이 뚫린 청바지를 다 큰 딸과 딸과 나란히 입고 가는 걸 보았다. 나도 모르게 속으로 '멋지다'라고 중얼거렸음. 누가 날 보고도 '멋지다'고 생각할 리는 없겠지만 암튼 나 혼자 흐뭇하다. 새 청바지 안 사고도 새 청바지 사입은 이 느낌은 괜히 돈을 번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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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록콜록

투덜일기 2016. 5. 4. 16:52

심한 목감기에 걸렸다. 늑골이 아프고 뱃가죽이 땡기도록 발작적인 기침을 해본지가 언제였던가 싶다. 

일단은 약국에서 사온 종합감기약으로 버터보려 했으나.. 딴 때 같으면 약 두알 삼키고 푹 자면 거뜬하더니 요번엔 나흘을 꼬박 종합감기약을 먹어도 차도가 없었다.


나보다도 옆에서 보는 사람들이 하도 성화를 해대서 내발로 병원에도 갔었다. 나름 호흡기 치료도 받고 한뭉치쯤 되는 약을 처방받아 닷새나 먹었는데도 기침은 그대로! 생각해보니 왕비마마는 감기로 1달 내내 병원엘 다녔으나 기침은 기침대로 하면서 결국 앓을 만큼 앓고나서야 감기가 떨어졌었다. 인류의 의술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처방해주는 약은 죄다 증상완화제일뿐 감기를 박멸하는 약은 없으렸다. 해서 하루치 남은 약은 내던져버리고 다시 민간요법으로 선회했다.  ㅋㅋ  푹푹 끓인 대추생강차 자꾸 마셔주기.


정말로 차를 마시는 동안엔 약 먹었을 때보다 기침이 덜 나왔다. 문제는 화장실 다니기 귀찮고 끓이기 귀찮아서 이틀 마셔대고는 그냥 또 내버려두게 된다는 점.


감기는 약을 먹으면 2주, 안먹으면 보름 걸려야 낫는다는 속설이 맞다면... 이제 나을 때가 되었다. ^^; 두통으로 시작해서 근육통으로 넘어갔다가 기침이 심해졌고, 딱 2주만인 어젠 다시 머리가 깨지게 아파 토할 것 같을 지경이어서 비도 오고 캄캄하겠다 에라 모르겠다 종일 누워 빌빌거렸다. 


바람은 여전히 불지만 볕이 화창해진 오늘은 다시 좀 살만해진듯... 기침 횟수가 꽤 적어진 듯도 하다. 빌어먹을 감기, 좀 떨어져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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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그렇다고

투덜일기 2016. 4. 18. 16:35

얼마전부터 식칼이 잘 들지 않았다. 설날 음식 준비하면서 갈았으니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하며 불편해도 계속 그냥 썼다. 우리 집엔 식칼을 가는 오래 된 '숫돌'이 있고, 칼갈이의 임무는 늘 엄마 몫이다. 손에 힘이 없어 젓가락도 노상 떨어뜨리는 양반이 칼을 갈면 얼마나 잘 갈겠나 싶지만, 전문가가 아닌데도 관록의 힘이란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어서 내가 비슷하게 흉내를 내서 숫돌에 문지른 칼은 일주일도 못 돼 다시 무뎌지는 반면 엄마가 슥삭슥삭 한참 숫돌에 문질러준 칼은 몇달씩 칼날이 쓸만하다.


그러니깐 결국 내가 할 일도 아니면서 칼 가는 걸 게을리 했던 이유는 딱 하나 귀찮아서였다. 엄마, 칼 좀 갈아주세요, 그러면서 쟁반에 숫돌과 식칼을 담아 가져다주면 그뿐인데, 늘 콩닥콩닥 부엌일을 하던 중간이라 에라 바쁜데 이번엔 그냥 넘어가지... 그러는 식.


요샌 오드리 헵번이 집에서 자주 해먹었다는 레시피들을 아무래도 종종 응용하게 되는데, 특히 카프레제 샐러드는 왕비마마, 공주마마, 무수리 모두 좋아하는고로 어제 저녁엔 급히 토마토를 자르던 중이었다. 아우쒸... 칼이 안드네 또 다시 불평을 하면서 무뎌진 칼날을 이리저리 움직여 미끄러운 토마토 껍질을 공략하던 순간, 슥~ 칼날이 왼손 검지를 때렸다. 아야...


칼이 잘 들땐 당연히 더 조심조심 칼질을 하기 때문인지 손을 베더라도 살짝 스치듯이 손톱을 자르거나 살갗만 베이는 반면, 칼날이 무뎌졌을 땐 미끄러지는 힘이 더해져서 그런지 상처가 더 깊다. ㅠ.ㅠ 아무리 꾹 누르고 있어도 피는 잘 멈추질 않고... 손가락을 감싼 휴지가 금방 피로 젖는 걸 보며, 젠장 설마 병원 가서 꿰맬 정도는 아니겠지, 아쒸 저녁준비 늦어지겠네... 아줌마스러운 걱정이 뇌리를 스쳐갔다.


손가락을 머리 위로 들어올리고 꽉 눌러 한참 지혈을 한 뒤, 약을 바르고 방수 반창고를 둘렀다. 놀란 엄마가 얼른 손수 숫돌을 꺼내 갈아준 식칼로 다시 남은 토마토와 모짜렐라 치즈를 삐뚤빼뚤 잘라(오른 손이 아니고 왼손인데도 검지를 다치니 손놀림이 영 서툴다) 샐러드를 완성해 대충 저녁을 먹었다.


칭칭 너무 심하게 손가락을 동여맸는지 왼팔이 전체적으로 저릿할 정도인데, 어쩐지 그래야 빨랑 상처가 아물 것도 같아서 참고 있다. 그러면서 든 생각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 경우, 잘 드는 칼보다 무딘 칼에 더 상처가 깊이 나듯이 어떤 사람들의 말이나 행동도 작정하고 달려들 때보다 무심하게 툭 던지는 말에 더 상처를 깊이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작정하고 나쁜 말을 쏟아내는 사람들에겐 나도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미리 단단히 실드를 쳐놓았으니 어디 한번 해보셔~ 라며 나름 과감해진다. 하지만 뜻밖의 순간에 상대가 무딘 신경으로 아무 생각없이 툭 던지는 비난이나 공격엔 속수무책이다. 순간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고 당한 뒤 피를 철철 흘리고 나서야 제때 방어하지 못한 느린 순발력을 탓한다. 그런 상처일수록 오래가는 것도 같고.


실수를 그냥 실수로 넘기지 않고 거기서 뭔가를 배우면 된다는데, 무수리 생활 10년을 넘기고도 부엌에서 아직 수시로 베이고 데이고 여기저기 생겨나는 흉터가 많아지는 걸 보면 나란 인간은 통 실수에서 배우는 게 없는 사람인가 싶다. 가사일에서나 사람을 대하는 일에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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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네..

투덜일기 2016. 3. 30. 16:58

언덕배기에 주로 엄청 오래된 집들과 새로 지은 빌라들이 혼재되어 있는 이 동네의 특징은 '노인들'이 많이 산다는 점이다. 유치원이나 어린이집 이름을 새긴 노란색 봉고차들이 더러 다니긴 하는데, 오래 전 ㅈㅁ이가 그랬듯이 아이들을  배웅하고 맞이하러 나오는 사람들은 젊은 부모가 아니라 할머니들인 경우가 대부분. 그래서 명절 때가 되면 아주 골목마다 본가에 다니러온 자식들 차들로 더더욱 미어터진다. 어떤 동네는 젊은이들이 주로 살아서 명절 때 골목이며 주차장이 텅텅 빈다던데...


얼마전부터 회춘하다시피 이것저것 열심히 활동하며 지내고 계신 우리 엄마를 비롯해 이 동네 노친네들도 상당히 바쁘게 살아가시는 것 같지만, 병마는 피할 수 없는 법. 동네 산책을 가려고 비슷한 시간에 나서면 아마도 뇌졸중으로 몸이 불편해진 노인들을 한두분 꼭 만난다. 보행 보조기나 네발 달린 지팡이를 짚고서 어렵사리 한발 한 발 걸음을 옮기며 운동에 열심이신 할아버지, 할머니들.


내가 동네 산꼭대기에 갔다가 돌아오는 동안 한두시간 넘게 땀을 뻘뻘 흘리며 계속 집앞 골목을 오가고 있는 어르신들을 보면 놀랍기도 하고 짠하기도 하고 복잡한 감정에 휩싸인다. 반신불수가 되어 한쪽 몸이 대단히 불편해보였던 할아버지 한 분이 얼마나 재활을 열심히 했던지 몇달 뒤 훨씬 수월해진 걸음걸이로 걸어다니는 걸 본 적도 있고, 매일 지팡이를 짚고 집앞 벤치에 나와 있던 꼬부랑 할머니가(지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을 거셨더랬다. 내가 간단하게 장을 봐가지고 걸어올라치면 뭐뭐 샀느냐고, 오늘 반찬 뭐 해 먹을 거냐고... 묻는다든지) 겨울 지나고 나서 통 보이질 않아 궁금해했더니 그예 요양원으로 들어가셨다는 소식이 들리기도 했다. (오지랖 넓은 울 엄마가 빨간 조끼 할머니 왜 안 보이시느냐고 언덕너머 빌라 사람들한테 물어봤단다.) 


하여간에 작년 가을부턴 깡마른 체구에 늘 새카만 파카를 입고서 처음엔 며느리인지 딸인지 누군가의 부축을 받다가, 나중엔 홀로 지팡이에 의지해 열심히 걷는 운동을 하던 할아버지를 산책길에 자주 만났었다. 그 할아버진 아마도 매일 그 시간에 운동을 했을 테지만 나는 산책을 나가는 날도 있고 안 나가는 날도 있었으니까. 안면인식장애가 있어서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하면서 유독 그 할아버지를 잘 기억하는 건, 아 글쎄 중풍에서 회복도 덜 된 그 할아버지가 비틀비틀 지팡이에 의지해서 걷다 말고 비스듬히 서서 꼭 담배를 피웠기 때문이었다. 아오 보기 불안해서 원! 벤치에나 앉아서 피우시던지! 그게 아니지, 뇌졸중으로 쓰러지기까지 했으면 담배를 끊으셔야지 말이야!


간혹 바람이 불어 내쪽으로 날아오는 담배연기가 싫기도 했지만 남일에 괜히 부아가 났다. 일주일에 등산 3번 다니는 걸로 건강관리 한답시고 술담배를 절대 포기하지 않았던 고집불통 우리 아버지도 떠오르면서... 으휴, 할아버지들이란! 


오늘은 산책이 아니고 약국에 갈 일이 있어서 잠깐 밖에 나갔는데 한쪽 옆으로 자동차들이 드문드문 서 있을 뿐 지나는 사람은 하나도 없던 길에서 어디선가 담배냄새가 날아왔다. 엥? 빌라나 자동차에서 누가 창문 열고 담배를 피우나? 두리번두리번거려도 잘 모르겠더니만 길 맨 끝에 와서야 담배냄새의 연유를 알게 되었다. 


늘 새카만 파카 입고서 지팡이 짚고 다니셨던 그 왜소한 할아버지가 봉고차 바로 옆에 세워둔 전동휠체어에 앉아 언덕 아래쪽 내부순환로를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으음... 내가 지나가는 소리에 흘긋 돌아보시는데, 나는 얼른 시선을 피했다. (빨간 조끼 할머니와 달리 원래도 인사하고 그러는 사이는 아니었다) 자세히 보진 못했지만 더 마르고 얼굴도 새까맣고 더 쪼그라들은 것 같은 체구.... 아 담배를 끊으셔야 한다니깐요! 아니다, 그게 소소한 삶의 낙이라면 그냥 담배라도 즐기다 가시는 게 옳은 건가? 짧은 순간 혼자 괜한 생각에 속을 끓이다가 머리를 흔들었다.


약국에 들렀다가 10여분만에 다시 그 길로 돌아오는데... 할아버지의 전동 휠체어는 벌써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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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일

투덜일기 2016. 3. 13. 17:20


며칠 전에 만난 친구 S(라고 쓰고 '지인'이라 읽는다)에게 최근들어 가장 충격적인 조언을 들었다. 대학 동창인 S는 오래전에도 내게 눈두덩 지방질 제거+쌍꺼풀 수술을 '꼭' 하라고 (그것도 지 남편네 병원에서) 자꾸만 닥달을 해서 짜증나게 만든 인물인데 ㅋㅋ 잊을만 하면 한번씩 아주 심상한 얼굴로 이것저것 조언을 하며 나를 놀래킨다. 


물론 <제발 쌍꺼풀 수술 좀 해라> 드립은 내가 들은 척도 안하니깐 (내 미모가 어때서!?로 맞섰더니 기가 막혔는지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나보다 ㅠ.ㅠ 물론 S는 30년전에도 지금도 자타가 인정하는 아주 빼어난 미인이다)포기한 거 같더니 몇년 전부터는 또 <라섹수술>을 하라며 들들 볶는다. 나는 1) 일단 무서워서 못한다. 2) 갖고 있는 안경들 아까워서 못한다. 게다가 안경이 내 얼굴에 햇살이다. 3) 돈 아깝다. 이 세 가지 이유로 반박중인데 S는 1) 자기가 해봐서 아는데 하나도 안 아프고 안 무섭다. 요즘 기계와 기술 좋아졌다. 2) 안경을 아예 쓰지 말라는 게 아니고, 돗수 없는 알로 바꿔 끼면 된다. 3) 수술비 싸졌다. 밤에 자다가 눈떠도 다 보이면 얼마나 편한지 아니... 라며 나를 설득하려 애쓴다. 어휴...


요번에 친구들이랑 다 같이 만난 자리에서도 또 노안수술 겸 라섹 하라고 잔소리를 해주시길래 그냥 씩 웃고 말았다. 속으로만 싫어! 그러면서. 물론 나를 진심 염려하고 생각해서 (몇년 더 있다 맘 바뀌어서 수술하려고 들면 이미 늦는다나;;) 하는 조언이라는 건 알겠는데 사람 취향도 있는 거지, 제멋에 살다 말게 냅두지 왜 저렇게 열심인가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마침 최근에 라섹/라식 수술을 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난 듯하다는 친구가 한 명 더 있어서 일순간 나는 완전 촌스러운 겁쟁이로 공격을 당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ㅠ.ㅠ 그래도 다들 내 똥고집을 모르는 것도 아니어서, 다시 잘 생각해봐라 정도로 마무리가 지어졌는데...


그 다음 화제는 하필 폐경(완경?)과 갱년기였다. 아직 멀쩡하다는 친구도 있고 몇년 전부터 여러 증상을 느끼는 친구도 있고 벌써 아예 페경이 된 친구도 있고 아직은 폐경 전이지만 가족력 때문에 걱정을 하는 이도 있어서 동병상련을 한참 토로했는데, 이미 폐경이 됐으나 아무런 어려움 없이 갱년기를 넘긴 것 같아 행복한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는 S가 다시 내게 화살을 돌렸다. 사람 일은 '모르는 일'이니깐 나더러 폐경 되기 전에 난자를 냉동시켜두는 게 어떻겠느냐고. @.,@ 


헉. 처음엔 말문이 막혔다. 무슨 근거로 내가 다 늙어서라도 꼭 아이를 낳고 싶어할 거라는 생각을 했을까. 헛웃음도 나왔고, S의 상상 속 내 아이가 엄청 불쌍했다. S는 남편 필요없는 건 알겠는데 너 자식은 하나 있어야한다, 50살에 늦둥이 낳는 사람들 흔하다, 허수경은 정말 지혜로운 사람인 것 같다... 앞일은 모르는 거다, 너 나중에 마음 바뀌면 후회스러워서 어쩔래... 아주 진지한 얼굴로 설득에 나섰다. 또 한 번 어휴...


가만 있으면 가마니인줄 알고 앞으로도 계속 밟을 것 같아서, 아이는 예쁘지만 나 혼자도 벅찬데 양육의 책임과 의무를 떠안을 자신도 없고 늙은 엄마 밑에 태어나는 아이에게도 그건 못할 짓이고, 난자 냉동하려면 난임부부 시험관 아기 시술 때처럼 얼마나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하는지 제대로 아느냐고 따져서 말문을 막아버렸다. 제발 나좀 냅둬줄래!! 가 내가 하고픈 말이었지만 차마 그렇게는 말 못하고...


사람의 앞일은 모르는 거라고 하는 말 나도 잘 안다. 등산만 해도 내가 이렇게 열심히 산에 다니게 될 줄은 나를 포함해 아무도 몰랐다. 고양이 싫어하던 사람이 고양이 집사가 되어 몇마리씩 키우는 사람들도 있고, 개 무서워하던 내가 조카네 개 한테는 손바닥에 고기랑 사과도 놓아먹이게 되었으니 앞으로 또 내가 어떤 변덕을 부릴지는 정말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그래도 사람의 근본적인 성향과 취향이라는 게 있는데 그게 그리 쉽게 변하나? 흠... 후회를 하든 말든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고, 그 정도의 어마어마한 결정과 고민은 이미 젊을 때 다 하고 살아왔다는 걸 S는 잘 모르는 건지, 인정을 안하는 건지. 하여간에 너무 놀라워서 기록해둘 일이라고 여겨졌다. ^^ 째뜬 어디 한 번 그저 두고보는 수밖에.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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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눈 풍경

투덜일기 2016. 2. 29. 13:22

3월이 코앞인데 어젠 어쩜 그리도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지. 창밖을 내다보다... 아마도 올해 마지막으로 실컷 보는 눈일 거란 생각에 충동적으로 주섬주섬 옷을 입고 다 저녁때 집을 나섰다.
눈덮인 숲길을 자박자박 걷고 싶어!

산길은 생각보다 미끄러워서 한시간 남짓 걷다가 돌아서야했지만 뿌듯한 산책이었다. 오늘도 듬성듬성 눈발이 날리고는 있지만 맑고 쨍한 추위에, 어제 눈속을 헤집고 돌아다닌 기억이 거의 꿈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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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시어머니

투덜일기 2016. 2. 12. 01:28

가끔 궁금하다. 막장 드라마에 등장하는, 빤하고 악독한 시어머니들 에피소드는 작가가 어디선가 듣거나 경험한 실화를 바탕으로 삼은 걸까, 순전히 상상의 결과일까, 아니면 작가들 끼리끼리 눈감아주는 양심없는 베끼기(비슷한 내용이 하도 많아서;;)일까? 혹시나 아침드라마부터 시작해서 노상 그 나물에 그밥인 일일극과 주말극을 보는 시어머니들이 막장 드라마를 보고 배워서 맘에 안드는 며느리에게 드라마처럼 못된 시집살이를 따라하는 건 아닐까? 주시청자가 노년층인 드라마에서 며느리 잡는 무서운 시어머니가 반드시 나오는 이유는 거의 평생 숨죽이고 살아온 그들의 스트레스를 대리 해소해주기 때문이라는 말도 들리던데..


아무튼 현실의 인생보다 더 드라마틱한 건 없다는 말이 있는 걸 보면, 도무지 말도 안된다고 생각되는 상황도 어디선가는 벌어지고 있을 것도 같다. 부모가 어린 자식을 굶기고 심지어 때려죽이는 세상이니 뭐...


하여간에 내 주변에서 가장 놀라운 부류로 꼽을 수 있는 시어머니가 한분 계신데, 이분은 세월이 갈수록 기력이 쇠하는 게 아니라 정도가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다. 핍박받는 며느리 위로를 한답시고 노친네 욕을 한바가지 하다가도 그 노친네의 패악이 문득 두려워진다.  


벌써 10년 넘게 끊임없이 구박받는 며느리 입장을 전해듣고 위로하고 함께 시어머니를 욕하면서 괜스레 스트레스가 쌓이고 쌓여서 이젠 폭발할 지경이다. 내 막판 조언은 거의 매번 "차라리 옛날처럼 인연 끊고 맘 편히 살아!"인데... ㅠ.ㅠ 다들 알다시피 가족관계라는 게 그렇게 쉽게 끊기는 것도 아니고... 남편이라는 존재가 중간에 끼어 있으니, 사실 내 조언은 조언이 아니라 그냥 막말이다. 그런데도 그냥 답답해서 내지르는 것.


J는 초등학교 동창생과 결혼했다. J는 초혼인데 반해 남자는 이혼남이었다. 아이는 없었지만 그런데도 오히려 남자네 집에서 결혼을 결사반대했다. 특히 시어머니가 문제였다. J랑 남자의 궁합을 봤는데, J의 팔자가 사나워 남편과 집안을 말아먹을 재수 없는 여자라고 했다나. +_+ 생긴 것도 불여시 같이 못나게 생긴 게 멀쩡한 자기 아들 홀렸다며 J에게 온갖 욕과 험담을 퍼붓고 헤어짐을 강요했다. 


결국 남자는 부모와 의절하고 집을 나와 J와 혼인신고 후 결혼식은 생략했다. 알콩달콩 둘이 행복하게 잘 살다가 3년만에 아들을 낳았는데... 아들을 낳으면 며느리로 인정해줄 것이라 기대를 한 건지 J네 부부는 본가에 손자가 생겼음을 알렸다. 아이에게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도 알려주고 싶다면서. 그러자 손자 귀한 건 알아가지고... 시어머니는 손자와 아들만 보겠다고 했었다. 며느리 노릇은 꿈도 꾸지 말라고.


그래도 착해빠진 J는 성심성의껏 도리를 다했고(주말마다 시댁에 남편과 아들을 들여보내고, 지는 집앞 카페에서 죽치고 온종일 기다렸단다, 차라리 따라가지를 말지!) 결국엔 돌잔치 무렵 며느리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시어머니의 폭언과 간섭과 무시는 변함없었다. 내 손자의 어미이니 할 수 없이 그냥 얼굴만 봐준다는 정도였다. 명절에 J가 해간 음식들은 맛이 이상하다며 몽땅 다 쏟아버렸다고 했다. 상을 차리면, 보고 배운 게 없어서 티가 난다고 타박하는 건 부지기수. (몰상식하게 끔찍한 말만 쏟아내는 사람은 바로 그 시어머니인데!!)


암튼 매일매일 전화를 걸어서 손자 아침, 점심, 저녁 메뉴와 반찬 점검하고 영양가 없는 거 먹였다고 잔소리하고... 자기 아들 건강 안챙긴다고 혼내고, 머리를 묶고 가면 볼품없게 묶었다고 타박, 길게 풀고 가면 귀신바가지 같다고 타박... 암튼 그냥 이유없는 꼬투리 잡기가 취미인 양반이었다.


나 같으면 벌써 이혼을 하든, 시댁과 의절하든 시부모를 안보고 살것 같은데 놀랍게도 J는 온갖 핍박을 다 받아내느라 남편과도 수시로 싸우고 피가 마르면서도 계속 감내하자는 주의였다. 아 대체 왜???


암튼 두어달에 한번씩은 J가 전화로 통곡하며 내게 하소연할만한 푸닥거리를 한판씩 해주시는 J의 시어머니가 나도 정말 밉다. 그런데 작년에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자칫하면 그 막가파 시어머니와 살림을 합쳐야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왔다는 거다. J에게 너 피말라 죽는다고,  절대 안된다고 거부하라고 조언을 해주었으나, 대세는 이미 기운 듯...


그런데 여기서 더 기막힌 사실이 하나 있다. 시어머니가 같이 사는 조건으로 J에게 성형수술을 강요했다는 것! 어디 가서 며느리라고 소개하기에 볼품없고 창피한 외모라면서, 자기가 수술비용을 댈 터이니 눈과 코를 고치라고 했다나 ㅠ.ㅠ 와.. 기가 막혀서 정말.


나같으면 잘 됐다, 성형수술도 싫고 살림 합치기도 싫으니 계속 따로 살면 되겠네.. 그럴 것 같은데... 어휴.. J는 어차피 모시고 살아야할 상황이라면, 내 돈 들이는 거 아니니까 다 늙어서라도 예뻐지는 게 뭐 나쁘냐.. 수술 당장 할란다. 뭐 그러고 있다. 으허!! 


노상 매를 맞으면서도 남편을 못 떠나고 같이 살아가는 여자들의 심정과 혹시나 시어머니의 구박에 휘둘리고만 있는 J의 심리가 유사한 건 아닌가 염려스럽고, 마음에 안드는 며느리의 얼굴을 바꿔서라도 꼭 같이 살겠다는 J의 시어머니가 나는 너무 무섭다. 그런데도 나의 극단적인 의견과 조언은 도무지 들어먹히질 않으니 힘이 빠진다. 내 역할은 그저 J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뿐이고,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상황을 하소연하며 J도 내게 미안하단다. 하지만 달리 어디 속시원히 털어놓을 데도 없다고. (친정엄마한텐 자존심도 상하고 노친네 속상하실까봐 곧이곧대로 말도 못하는 인물) 아 답답해 답답해... <사랑과 전쟁>의 어느 에피소드에 며느리 외모 싫어서 성형수술 시키는 시어머니가 혹시 등장했던 건 아닐까.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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