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미

투덜일기 2010. 12. 17. 01:19

어렸을 때는 제법 차멀미를 하는 편이라 가까운 친할머니댁에 갈 땐 아무렇지 않아도 한강을 건너가야 하는 외할머니댁에 갈땐 엄마가 꼭 비닐봉투를 가방에 챙겨넣고 다녔다. 그렇다고 매번 멀미를 하는 건 아니었고, 운이 좋아 자리에 앉아 버스 창문을 열수 있다든지 기분이 좋은 날은 멀쩡했던 반면, 기분이 별로인 날엔 속이 비었든 찼든 멀미로 괴로워하던 아이였던 듯하다.

자라면서 괜한 차멀미는 거의 사라졌지만, 지금도 혹시라도 차안에서 글씨를 보면 거의 10초 안에 멀미 기운을 느낀다. 나의 조카들은 워낙 어려서부터 제 아빠가 모는 자동차를 차고 다녀서 그런지, 달리는 차안에서 아무런 어려움 없이 책을 읽기도 하지만 나는 문자 메시지만 좀 오래 들여다보고 있어도 멀미를 하는 식이다. 글씨만 안 읽으면 아무리 차가 흔들려도 길이 막혀도 이젠 멀쩡한데! (반면에 지하철은 너무 오래 타면 멀미 증상이 나타난다. 특히 지하구간이 30분 이상 지속되면 못견디는 듯;; 그게 지하철 멀미인지 아니면 폐소공포증의 일환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_-;)

대학 수학여행 때는 경비절약을 하느라 목포로 기차를 타고 가서 다시 배로 제주도에 들어갔다가 올 때만 비행기를 타는 코스가 정석처럼 여겨졌다. 해서 우리는 목포항(여수항이었던가 -_-a)에서 저마다 귀밑에 동그란 멀미 패치 키미테를 붙였고, 일부 여학생들은 그러고도 마시는 멀미약까지 삼켰는데, 인솔자로 따라간 할머니 교수가 우리를 비웃었다. 당신은 운전을 하기 때문에 멀미를 안하신다나. 원래 운동신경이 뛰어난 사람들은 멀미를 안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미 차멀미와는 작별한지 오래였던 나도 혹시나 걱정스러워 키미테를 붙이기는 했었지만, 그 말에 자극을 받아 나중에 제주도에서 유람선을 탈 때 그냥 타봤더니 아무렇지도 않았고 차멀미 뿐만 아니라 배멀미도 극복해냈다고 속으로 뿌듯했다.

헌데 요즘 다시 버스를 타고 다닐 때 멀미하는 날이 많아졌다. 다 아이폰 때문이다! 예전 휴대폰 있을 때도 버스에서 문자를 재빨리 확인하고, 또 버스가 정류장에 서는 시간을 활용해서 재빨리 답문자를 보내는 일은 수시로 있었다. 음주운전 만큼이나 위험하다는 건 알지만 운전 중에도 문자를 확인하고 보내는 걸 자랑스레 여기기도 했고. 물론 눈치없이 길게 컬러메일을 보내오는 경우엔 두어줄 읽고 얼른 창밖을 응시해 멀미를 방지하는 기술을 적용하면 그만이었다. 워낙 휴대폰 자판이 손에 익어 운전중이든 버스를 타고 가는 중이든 답문자를 찍는 건 그리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않았었고...

하지만 아이폰의 터치 자판은 가로로 돌려도 짧은 문자메시지 하나 찍어 보내기가 여전히 수월하지가 않은 데다, 문자와 상관 없이 버스만 타면 습관적으로 이것저것 어플을 눌러 확인하는 버릇이 문제다. 뭘 그리 중요한 메일 확인할 게 많다고 노상 메일함 열어보고, 트위터다 페이스북이다 열어보고 앉았는지 원... 가뜩이나 올해 부쩍 노안이 심해져서 눈이 금방 피로해지는 편인데 흔들리는 버스에서 휴대폰을 갖고 놀려니 왜 멀미가 안 나겠나.

아까  요가학원 나가면서 버스에서 또 습관적으로 아이폰질 하다가 문자 몇개 주고받았더니 곧장 멀미가 쏠려 반성하고 집어 넣었지만, 메슥거리는 속이 밤중인 지금까지도 가라앉지를 않고 있다. 저녁까지 소화 잘 안되는 걸 먹어서 그런가... 버스에서 글씨 오래 보면 반드시 멀미한다는 걸 알면서도 대체 나는 매번 아이폰을 꺼내드는지 새삼 화가 나면서, 공개적으로 자아비판을 해야할 사안이라고 느꼈다. -_-; 인터넷 중독에 이어 이젠 아이폰 중독까지 되면 정말 곤란하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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