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

투덜일기 2011. 5. 27. 16:41

우편으로 청첩장을 하나 받았다. 봉투에 적힌 혼주 이름이 영 낯설었으나, 내 이름으로 온 청첩장이니 잘못 왔을 리는 없었다. 대개 봉투엔 신랑신부의 부모님 성함을 인쇄하므로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내용물을 보았으나 혼주 이름 아래 적힌 신랑 역시 모르는 이름이었다. 혹시 엄마 친구분이 병 잦은 친구에게 참석 스트레스를 주지 않을 요량으로 내게 보낸 건가,  엄마에게 물으니 역시나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단 하나.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아버지의 지인이라는 의미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절친한 친구분들의 경조사에 나는 계속 부모님 대신 참석하는 걸 의무로 여겼다. 부부동반으로도 모임이 잦았던 친구분들의 경우는 홀로된 엄마라도 불러내어 자꾸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권하는 친절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엄마도 나도 알기에 처음 몇번은 모녀가 동반참석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해보니 못할 짓이었다. 즐겁자고 모인 자리에서 자꾸 고인을 추억하게 하거나 질질 짜는 것도 볼썽사나운 일이고, 동정적인 시선을 감당하기도 싫었다. 가끔 걸려오는 안부전화를 받는 정도가 그나마 딱 좋은 선인 것 같았다.

그래서 그 뒤론 아버지 친구분들께 연락이 오면 계속 엄마의 건강을 핑계로 웬만한 자리는 다 마다하고, 어쩔 수 없는 경조사의 경우에만 싫든 좋든 내가 홀로 다녔다. 엉겁결에 아버지 친구분들에게 끌려가 내키지 않는 밥을 먹은 적도 딱 한번 있기는 했지만, 대개는 얼른 요식행위만 하고 달아났다. 어려서부터 다 아는 면면이라 해도, 굳이 어르신들에게 인사를 하고 축의금이나 부의금을 전달하는 일은 숫기없는 내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귀찮은 마음이 들어 불쑥 짜증이 치밀어도 그게 의무이고 도리라고 굳게 믿었다. 그렇다고 돌아가신 아버지 이름으로 떡하니 날아온 청첩장까지 찾아다닌 것은 아니었다. 고인인지 아닌지 모른채, 혹은 고인인 건 알지만 어쨌든 그간 뿌린 축의금은 거둬들이겠다는 욕심에 보냈을 것으로 의심되는 청첩장이 아버지 앞으로 날아든 적이 두어 번 있었으나 그런 건 무시했다. 하지만 이번 청첩장은 내쪽에서 낯설 뿐, 내 이름까지 알고 있고 내가 아버지 대신 경조사에 참석하고 다닌다는 걸 알고 있는 학교 쪽 지인(그야말로 이름만 아는 지인;;)이 틀림없었다. 내가 몰라서 그렇지 그쪽에선 나를 잘 아는 아버지의 친구분이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단언한다. 친구분들 성함은 물론이고, 아버지가 소속된 각종 등산회 모임 연락처를 해마다 다시 뽑아드려 웬만큼 절친한 지인의 이름은 나도 다 아는데 대체 누구일까.  

버럭 짜증이 났다. 이 사회에서 결혼식이란 많은 경우 일종의 흥행을 노린 비즈니스라는 걸 모르는 바 아니다. 결혼식 참석이 대부분 마뜩찮은데도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빚을 갚는 마음으로, 또는 미래의 수확을 기약하며 품앗이 다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고. 하지만 이 경우는 뭔가. 하는 수 없이 아버지의 장례 후 보낸 인사장 명단 파일을 찾아보았다. 거기 들어 있으니 아버지의 '지인'임은 확실하지만, 이름을 확인하고도 찜찜한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

딸인 나는 그렇다 쳐도 엄마도 이름이 낯선(생전에 아버지는 그날 하루 어디에 가서 누굴 만나 무얼 했는지 시시콜콜 아내에게 다 털어놓는 분이었고, 건강이 나빠지기 전까지는 울 엄마도 아버지의 온갖 등산모임, 동반모임에 다 같이 참석하셨다. 엄마가 모르면 정말 '모르는' 사람이다) 사람의 아들 결혼식까지 참석하는 것이 의무일까? 엄마는 아버지 장례 때 부의금 기록을 확인하여 그 사람이 낸 금액과 동일한 축의금을 보내야 한다고 말했다. 보나마나 3만원짜리일 거라면서. +_+ (원래 대학교쪽 인원이 워낙 방대하여 부서별로 부의금을 모아 보낸 경우는 1, 2만원도 흔하다.) 그러나 부의금 기록 따위는 없다. 경조사 때 받은 만큼 갚겠다는 사람들의 계산속이 늘 못마땅했던 나는 아버지 장례 때, 문상객 접수를 맡은 이에게 조문객 명단만 남겨달라고 부탁했다. 나 역시 품앗이를 해야 한다면 그때그때 마음과 형편이 닿는 대로 하면 될 일이라 여겼다. 그런데 이를 어쩐다.

1. 어쩔 수 없다. 묵묵히 청첩일에 결혼식에 참석하여 통상적인 액수의 축의금을 직접 내고 온다. (누군지 서로 얼굴도 모르니 인사는 생략하고 봉투만 불쑥 내밀면 끝이겠다)
2. 시간도 아까운데 직접 갈 필요까진 없다. 참석 못해 죄송하다는 메모를 넣어, 전신환 축의금이나 현금 봉투를 등기로 부친다.
3. 아버지 친구분들에게 참석자를 수소문하여 축의금을 대신 내달라고 부탁하고 송금해드린다. (전화 기피증 환자에겐 가능성 거의 제로;;)
4. 무시한다.

현재로선 1, 2번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 그런데 계속 부아가 치민다. 본인이 세상을 떠나는 경우 금전적인 채무가 배우자와 자식에게 남는다는 건 알지만, 경조사의 품앗이 빚도 똑같은 의무라는 건 좀 서글프다. 내게 청첩장을 보낸 저 어르신은 대체 어떤 마음이었을까.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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