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에 해당되는 글 29건

  1. 2009.01.13 I ♡ U 약식 21
  2. 2008.02.04 헤이리와 공동묘지 8
  3. 2007.12.13 9
  4. 2007.12.03 식객 7
  5. 2007.04.04 문상 3
  6. 2007.03.15 청소 8
  7. 2007.02.01 내력 2
  8. 2006.12.01 눈, 귤, 홍시 5
  9. 2006.10.16 할머니의 마음은 바다처럼 넓어라 5

I ♡ U 약식

식탐보고서 2009. 1. 13. 14:34

시원찮은 내 기억으로는 중학교에 들어가서 첫 가사실습 시간에 만든 음식이 약식이었다.
그 전까지는 문방구에서 반제품으로 파는 앞치마 재료를 사서 바이어스를 손으로 꿰매고 주머니와 앞부분에 자수를 놓는 실습을 했고, 조리실 실습에 들어가는 날까지 앞치마를 완성해 각자 입고 패션쇼를 하듯 줄지어 서서는 선생님의 채점을 받았다.
국민학교 실과 시간에도 이미 단추달기, 홈질, 똑딱단추 달기의 실습에서 뛰어난 솜씨를 보여 탁월한 점수를 받았던 터라, 앞치마 꿰매기 정도는 중학생이 된 나에게 그야말로 식은죽 먹기였다. 요새 학생들은 엄마들이 대신 꿰매주거나 수선집 또는 세탁소에 맡겨 드르륵 박아온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그땐 그런 걸 상상도 못할 만큼 아이들이 순진할 때라 손재주 여부에 따라 아이들이 입은 앞치마의 몰골은 매우 다양했다.
바이어스가 우글쭈글 찌그러졌거나 자수 실밥이 너덜거리는 앞치마를 입은 아이들 틈에서 매끈하고 촘촘한 바느질과 깔끔한 자수가 돋보이는 앞치마를 입은 나는 조리실에서도 조장으로서 꽤나 쓸모가 있었다.
지금이야 나도 오랜 밥순이 경력을 믿고 이것저것 재량을 부려 대충요리를 감행하지만
요리초보가 지켜야할 첫번째 원칙은 건방지게 융통성을 부리지 말고 레시피 대로 하라는 것이므로
모범생 답게 나는 칠판에 적힌 대로 재료의 계량과 조리시간, 불조절을 칼같이 지켰고  결과물은 당연히 훌륭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때의 조리실습은 불려놓은 찹쌀과 온갖 재료를 잘라 들통에 넣고 찌기만 하면 되었던 비교적 간단한 요리였으나 놀랍게도 몇몇 조는 약식이 아니라 거무스름한 찹쌀죽을 만들어놓기도 했는데, 내가 보기엔 어떻게 그런 짓을 벌일 수 있었는지 그게 더 신기했다.

당시에 조별로 예쁘게 만들어진 약식은 교무실 선생님한테까지 일일이 나눠드려 맛보게 했었는데, 그때 양을 얼마나 많이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내게 할당된 약식을 남겨 집에 가져가 엄마한테 자랑을 했던 것 같다. 그러고는 며칠 뒤 집에서도 학교에서 배운대로 들통에 쪄서 약식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그러나 그 뒤로 수십년간 집에서 다시 약식을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오랜 세월 외할머니의 단골 떡집에서 워낙 맛있는 떡과 약식을 수시로 공수해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돌아보니 3년전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선 정말로 맛있는 약식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가끔 사먹게 되는 약식엔 밤과 잣 따위의 내용물이 터무니없게 부실했고 찰진 맛도 덜했다. 그렇다고 약식을 미친듯이 좋아하지도 않는 내가 왜 집에서 손수 약식을 만들어보겠다는 생각을 했는지 정확한 동기는 지금도 모르겠다. 조카들이 약식을 좋아하기 때문이었던가?
어쨌거나 설날을 앞두고 일벌이기 병이 도졌는지, 대충요리의 달인답게 나는 지난주에 드디어 전기 압력밥솥으로 약식만들기에 도전을 했고 역시나 단번에 성공을 거두었다. 중학교 때 했던 가사실습을 떠올리긴 했지만, 레시피까지 생각날 리야 없는 일이고 손쉬운 인터넷 검색을 이용해 대강 분량을 예측했는데 살짝 질기는 했어도 맛은 정말로 훌륭했다. 이번에 성공을 하면 설날 차례상에 올릴 약식도 만들어보겠다는 것이 나의 야심만만한 목표였는데, 그도 별 어려움은 없을 듯하다. 문제는 대충 대충 재료를 집어넣은 바람에 과연 설날에도 같은 맛을 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지만 까짓 것 덜 달 거나 더 달거나 둘 중 하나일 테니 실패한다고 해도 두려울 건 없겠다. 
중고등학교 시절 가사실습 점수를 잘 받긴 했어도 그땐 내가 이렇게 요리솜씨가 훌륭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고, 가사노동이 싫어서 (매일 밥하고 청소하기 싫어서 결혼 따위 안 할 거야! 라고 늘 부르짖었음) 결혼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던 내가 싱글로서도 만날 밥순이로 살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던 것 같다. 청소는 여전히 내가 넘지 못할 숙제지만 요리마저 잘한다는 점은 내가 무수리 인생으로 살 수밖에 없다는 운명 같아서 속이 좀 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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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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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를 따라 문산쪽으로 얼마간 달리다 보면 통일전망대가 나타나는데, 그 근방은 언제부턴가
'통일동산'이라는 이름으로 개발이 이루어져 지금은 헤이리 예술마을이니, 영어마을 파주캠프니 해서
꽤나 복잡한 곳이 되고 말았다.
사진이 예쁘게 나오고 볼 거리가 있다면 전국 어디든 달려가는 열성을 보이는 사람들은
예쁜 카페와 갤러리가 있고 책 전시장이며 멋진 건축물이 있다는 헤이리에 꾸역꾸역 참 많이도 찾아가는 듯하다.
나 역시 일년에 서너 번 이상 그들과 같은 길을 따라 달려가긴 하지만
언제나 내 목적지는 헤이리가 아니라 그 번듯한 '예술마을'에서 길 하나만 건너면 펼쳐져 있는
동화경모공원, 쉽게 말해 '공동묘지'다.
어찌된 경유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동화경모공원은 이북5도 출신의 실향민을 위해
그나마 고향인 이북땅을 바라보는 듯한 자리의 강가 언덕배기에 조성된 공원묘지였고
평안북도가 고향이신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도 나란히 그곳에 누워계신지 13년째다.
그러니까 헤이리니 영어마을이니 해서 그 동네가 북적이기 이전부터 우리 가족은 간단한 먹을거리와
술을 싸들고 소풍삼아 공원묘지를 찾았다는 뜻이다.

어린시절엔 '공동묘지'라는 말이 참으로 무서운 말이었다.
TV에서 <전설의 고향>을 할 시간이 되면 겁이 나서 채널도 잘 못 돌리는 겁쟁이였던 나는
무서운 이야기에 꼭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공동묘지'의 실체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면서
하얀 유골이 굴러다니고 파란 도깨비불이 날아다니며 어디선가 불쑥 머리를 길게 풀어헤진 소복입은
여자가 입가에 피를 흘린 채 나타나는 공포의 장소로만 인식했다.
그래서 가끔 '망우리 공동묘지' 앞을 지나가는 차라도 타고 있으려면 화들짝 놀라 시선을 돌렸고
전국 어느 곳을 가나 만날 수 있는, 야트막한 산이나 언덕배기에 동그랗게 봉분을 올린 가족묘를 보고서도
무서움에 떨었던 것 같다.

이북 출신이신 할아버지, 할머니가 장수하셨기 때문에 서른이 다 되도록 제대로 성묘란 걸 하러
공원묘지를 찾은 경험이 전혀 없었기에 더욱 그런 편견이 자라잡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가족에게도 한식때, 추석때, 설날에 찾아갈 묘소가 생긴 뒤로는
죽음이 삶의 연장이듯 공동묘지도 그저 삶의 한 공간임을 깨닫게 되었다.
동그란 봉분이 모여있는 것만 보고도 무서움에 떨던 어린시절의 나와 달리
어린 조카들은 공원묘지에 줄지어 있는 봉분 사이를 뛰어다니며 신나게 놀고 메뚜기를 잡고
고모에게 술래잡기를 하자고 청한다.
처음 몇년은 성묘하러 갈 때마다 슬픔에 겨워 눈물을 흘리느라 다들 분위기가 무거웠지만
이제는 어른들도 소풍나온 사람들처럼 두 분 묘소 앞에 깔아놓은 자리에 앉아
왁자지껄 이야기를 나누다, "엄마, 아버지, 또는 할머니, 할아버지, 몇달 있다 또 올게요!"라고 큰소리로 인사하고는 돌아설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우리 식구들에게 헤이리 예술마을은 난데없이 공원묘지 앞에 생겨난 '이상한 동네'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전국이 묘지화되는 추세라고는 하지만 돈많은 예술인들이 돈자랑을 하듯 세운 공동체 마을이
드넓은 공원묘지 코앞이라는 사실에 아무렇지도 않을까 의문이 들기도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그리고 최근엔 아버지를 그곳 납골당에 모셨으니
우리 가족 같은 사람들이야 '묘지'보다 '공원' 느낌으로 친근해졌음에도
헤이리에 놀러간다는 건 어쩐지 배신 같기도 하고
어차피 돈이 많아 끼리끼리 모여든 그곳 예술인들에게 비싼 입장료까지 내며 그들을 배불려주고 싶은
생각 또한 없기에 지금껏 나는 한번도 헤이리에 들어가본 적이 없다.

물론 헤이리를 마뜩찮게 여기는 건 나 뿐인듯
어제도 설날 성묘를 미리 당겨 공원묘지를 찾았더니, 헤이리 마당엔 사방에서 몰려든 차들이 빼곡했고
주변에 마련된 식당 마을에도 사람들로 버글거렸다.
그들은 모두 일찍이 삶과 죽음이 바로 이어지는 연장선 위에 있음을,
그래서 공원묘지 바로 옆의 아트갤러리에서 우아하게 차를 마시고 멋진 사진을 찍는 것은
마치 시신을 떠내려보내는 갠지스강에서 바로 그 물로 태어난 아기의 몸을 닦으며 신의 축복을 비는 것과
같은 행위임을 깨닫고 있기에 아무렇지도 않은 것인지,
아니면 예술인 마을 바로 옆에 거대한 공원묘지가 있다는 건 전혀 알지 못했고 신경쓸 겨를도 없었기에
마냥 즐겁기만 한 것인지 문득 몹시 궁금했다.
어쩌면 공원묘지에 큰 의미를 두는 건 <전설의 고향> 세대인 나 같은 노땅에게나 해당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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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덜일기 2007. 12. 13. 17:42
드라마를 보면 아줌마나 할머니들이 골머리를 앓고 누워있다거나
아프다고 시위를 할 때 반드시 머리에 흰 끈을 매고 나온다.
대체 그게 두통에 무슨 소용이랴 싶은 생각보다도 우선은 그런 모습을 설정한 드라마 작가들의
상투적인 태도에 화가 치민다.
꽤 오래(내가 초등학생 때까지) 쪽진 머리에 은비녀를 고수했던 우리 친할머니도
돌아가실 때까지 한복을 생활복으로 고수하셨던(물론 여성용이 아니라 남성용 한복이긴 했지만) 외할머니도
편찮으실 때 머리에 흰 띠를 매는 습관은 절대로 없으셨으며
두루두루 집안 어른들을 살펴봐도 마찬가지였다.

억지로 우기자면, 지끈지끈 두통이 느껴질 때 머리를 꽉 조여매면
관자놀이 마사지를 하듯 혈행에 도움이 되어 증상이 완화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머리에 매는 띠는 거리로 쏟아져 나온 노동자들이나 노점상, 과거 활동가 학생들이
머리에 질끈 동여매는 시위용 뻘건 띠와 목적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똑같이 '시위용'이라지만 드라마 속 아줌마들의 흰 띠는 그래서 더욱 유치하고 진부하다.
앞으로는 제발이지 드라마에서 그런 소품 좀 안 썼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
(혹 드라마작가 주변의 노친네들은 다들 그런 흰 띠를 생활화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_-;;)

감기몸살이나 신체적인 통증 따위를 드라마에서 표현할 때 또 한 가지 빠지지 않는 상투적인 표현은
바로 "끙... 끙.." 앓는 소리를 내는 것.
엄밀히 말하면 "끙"이 아니라 "으..."나 "어.." 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오묘한 소리가
저절로 입에서 새어나오는 것인데
그 모습은 제 아무리 상투적이라 해도 크게 바뀔 순 없을 것 같다.
실제로도 근육통과 고열을 수반하는 몸살감기에 걸렸다거나
수술 따위로 생살을 째는 아픔을 겪은 뒤 진통제가 떨어지는 순간이 돌아오면
자기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새어나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_-''

누워서 낑낑대다 저도모르게 그런 신음소리가 새어나오면 진짜로 웃기긴 한다.
끙...끙.. 거리다 그 소리가 다시 우스워서 킥킥거리다 어느새 다시 으...으... 앓는 모습이란
완전 코미디가 따로없다.

그젯밤, 어젯밤, 이틀 내리 그런 홀로  코미디를 찍었다.
아 물론 생살을 쨌다는 건 아니고 그저 감기 ^^;;
그나마 두통약에 기대어 어렵사리 잡들고 나면 낮동안엔 좀 살만한데
어둠이 내리면 희안하게도 콧물과 기침, 근육통이 딱 낮의 두배로 늘어난다.

아마도 저녁먹고 나면 또 이부자리에 드러누워 코미디를 찍게 될 것 같다.
끙... 끙...
아직은 그래도 킥킥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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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객

놀잇감 2007. 12. 3. 01:57
사실 나는 식객보다 똑같은 글잣수에 발음도 비슷한 <색, 계>를 보고싶었지만
주지스님 추천작이라며 <식객>이라는 영화가 있느냐고 보름 남짓 은근슬쩍 압력을 넣고 있었던
왕비마마 덕분에 왕비와 무수리 모녀는 날씨 우중충한 일요일 오후 극장을 찾았다.
개봉한지 한참 된 터라 영화관이 한가할 줄 알았더니 날궂은 일요일 한낮에 자리가 절반 이상 차는 걸 보면
아직도 인기는 꽤 괜찮은 모양.
타짜 때도 그랬듯 허영만의 원작 만화를 보지 않았던 터라 잘은 모르겠지만
순진한 희망에 가깝게 그려진 한일관계와 신파스러운 애국심이라는 고명이 역시나 약간 거북하긴 했어도,
입맛에 안맞는 고명은 걷어내고 먹으면 되듯
나에겐 꽤나 맛깔스러운 영화였다.

식탐녀답게 음식을 소재로 한 영화는 무조건 좋아하는 편이라 점수는 대체로 후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남들의 감상 포인트와 상관없이 나는 뜻하지 않은 복병 같은 몇 장면에서 흑흑 흐느끼고 말았는데
그래서 감상에 방해가 되기도 했고 동시에 어쩐지 더 의미가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난데 없이 나를 울게 만든 것들은
접시 무늬가 보일 만큼 얇게 깔린 복어회 접시, 몇 개의 영정 사진, 하얀 보자기에 쌓인 유골함. 국화꽃으로 장식한 제단, 그리고 육개장.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에 영화 시작 후 거의 5분 뒤부터 줄곧 울다 퉁퉁 부은 눈으로 영화관을 나섰던
<집으로...>에 비할 정도는 아니지만
<식객> 또한 나에겐 눈물로 기억될 영화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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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상

삶꾸러미 2007. 4. 4. 03:14

아닌 척 잊고 살지만, 죽음은 의외로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매번 호되게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 든다.

배고파 죽겠네, 신경질 나 죽겠네, 짜증 나 죽겠네,
심지어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네... 따위의 엄살스러운 죽음과 다른 진짜 죽음.
말로는 오늘 내일 당장 사고로 죽을 지 모르는 게 현대인의 삶이라고 늘 떠들어대지만
내심으론 당분간 나와 상관 없는 일이라고 떠밀어내며 살다가
덜컥 부음을 듣고 나면 가슴 한 구석이 서늘해지면서 아득한 느낌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죽음에 익숙해진다는 것의 동의어이기도 한 것 같다.
어려선 장의차만 보아도, 상복을 입은 유가족들만 보아도 섬뜩하고 무서운 기분이 들었고
'월하의 공동묘지', '망우리 공동묘지' 같은 괴담 시리즈가 연상되었다.

제법 어른이 되고 나서도 문상을 갈 일이 생기면
장례식장에서 밥을 먹는 건 도저히 못할 일이었던 것 같다.
간신히 음료수 정도나 마시거나 그것도 그냥 들고 있다가 가방에 넣어오거나
그냥 살며시 테이블 아래 놓고 나올 정도로, 나는 죽음과 관련된 그 어떤 것과도
단절되고 싶었나보다.

하지만 할아버지, 할머니 때 본격적으로 초상이라는 것을 치르면서
비로소 죽음도, 죽음의 의식도 그저 삶의 한 부분임을 깨달았다.
온종일 꺼이꺼이 목놓아 울다가 눈이 퉁퉁 부어 떠지지 않을 정도가 되어도 어느 순간이 되면 허기가 느껴져 육개장에 밥을 말아 입에 퍼넣다 그런 내가 또 혐오스러워져서 또 눈물이 나고, 넋나간 듯 주저 앉아 있다가도 또 아는 얼굴이 눈에 비치면 가서 인사도 하고
상복 옷고름에 김치국물 묻혀 가며 음식과 술도 나르고,
문상객들 뜸해진 새벽이면 고인의 영정 앞에서 스르르 옆으로 쓰러져 잠깐 눈을 붙이기도 하고...
그런 일들을 내가 직접 겪어보지 않았다면 어떻게 알았을까.

어려선 공동묘지는 무조건 으스스한 곳이라 여기고, 혹시나 국도변을 지나다 봉분들이 한꺼번에 모여 있는 곳을 보면 언짢은 듯 시선을 피했건만
할아버지, 할머니를 합장해 모시고 10여년 째 성묘 다니는 공원묘지는 이제 우리 가족에게
단체로 찾아가는 나들이 장소처럼 친근하기만 하다.
두분이 생전에 다시는 못 가보신 이북 땅 대신에, 임진강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배기에 돗자리를 넓게 펴고 절부터 올린 뒤, 소풍객들처럼 우르르 둘러 앉아 음복하고 가져간 과일과 음식 나눠 먹고 담소를 나누면, 조카들은 신나게 봉분 사이를 뛰어다닌다. 

이처럼 개인적인 경험으로 죽음과 친근해진 것은 확실하지만
아무래도 현재에 맞이하는 죽음은 단번에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차츰 문상 갈 일이 많아지는 걸 보면, 내 나이가 실감되기도 하는데
이번엔 친구 동생의 부음이라 더욱 허망했다.
장례식장엘 다녀오고 나면 며칠은 신변 정리에 신경을 쓰는 것이 나의 습관이고 보니
요 며칠은 또 유언장 쓰듯 내 삶을 정리하느라 청승을 떨게다.
그 호들갑이 다만 며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하여튼 그 며칠이 지나고 나면 슬며시 다시 죽음을 떠밀어 내고
모르는 척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겠거니 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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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

삶꾸러미 2007. 3. 15. 15:23
설날 전에 대청소를 하고 나서 처음이니까
딱 한달만에 청소를 했나보다.

한달만에 하는 청소인데도 지난번처럼 진공청소기를 요란하게 돌리고 먼지 털고 걸레로 후벼 파 구석구석 닦아대는 대청소 개념은 절대로 아니고...
고양이 세수하듯 알량하게 소형 청소기로 머리카락만 없앤 다음 걸레 빨기도 싫어서 '빨아쓰는 키친타올'을 물에 적셔 방방마다 마루마다 닦아준 것이 끝이다.

물론 한달간 구석구석 쌓인 먼지는 대단했다.
설날 전후로 엄마가 편찮으셔서 살림은 완전히 내가 도맡았는데
거기다 3주 가까이 병원생활도 하다보니 집안 꼬라지 돌아볼 여유는 거의 없었다고 핑계를 댈 수도 있겠지만, 청소에 관한 한 나보다 인내심이 더 없으신 아버지까지 그간 청소를 등한시한 건 좀 이상했다.
암튼 청소랍시고 해놓고 나서도 전혀 개운하지 않을 만큼 엉터리지만
그래도 안한 것보다는 낫겠지.. 위로하기로 했다.

나는 정말로 청소하는 게 싫다.
그럼 더럽게 사는 걸 좋아하거나 최소한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해야 하는데, 또 어지럽고 더럽혀진 공간에서 지내면서는 짜증을 내는 못된 버릇이 있다.
청소는 안 하면서 투덜대기만 하는, 그야말로 '짜증 지대로'의 인간인 것이다.

그나마 오늘 청소도 조카들이 온다고 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한 보름쯤 또 눈 딱감고 투덜거리며 눈에 띄는 머리카락과 방구석에 모인 먼지 뭉치만 집어 버리며 겅중겅중 더러움을 피해 건너다니면서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청개구리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조카들이 온 집안을 뛰어다니며 놀려면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라도 청소를 해놓아야 한다.
오늘은 제발 숨바꼭질하자고 장롱 옆구석 같은 데로는 들어가지 말기를...
귀찮아서 거긴 청소 안했다. -_-;;

핑계 같지만 청소를 싫어하고 또 잘 못하는 건 아무래도 부모님을 닮은 것 같다. ^^;;
늘 반질반질 윤이 나고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이모네 집엘 가보면
이모랑 이모부가 늘 걸레를 옆에 두고 사시는데,
사촌동생 녀석들도 청소며 정리하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반면에 울 부모님은 옛날부터 청소하는 게 늘 큰일 치르듯 가끔 해주는 행사였다. ㅋㅋ
그리고 대청소라고 다 해놓고 나서도 집안에 널브러진 물건들은 늘 그자리에 있었던 기억이 있다. 진공청소기 없던 시절, 비로 쓸고 걸레질할 때 물건을 들었다가 다시 고대로 내려놓은 거다.
장가간 두 동생놈들의 와이프가 그래서 남편들한테 청소 시켜놓고선 만날 나한테 흉을 본다. 어쩜 청소를 그리 못하는지 모르겠다고... ㅋㅋ 그러면 나도 똑같은 족속이라고 고백하며 몹시 계면쩍다.

청소 잘하는 사람들을 보면 역시 확 다르다.
하다 못해 2, 3살 때부터 정리정돈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이던 우리 정민공주는
한심스러울 정도로 지저분한 고모의 화장대를 가끔 정리해주겠다고 나서는데...
공주가 정리해놓은 화장대를 보면 기가 막히다.
우선 걸레로 화장품 통마다 쌓인 먼지를 하나하나 닦고 (나는 그냥 대강 후루룩 위만 닦고 마는데!) 키순서대로 가지런히 늘어놓은 뒤, 나중에 자기가 놀러올 때까지 정리된 모양을 흐트러뜨리지 말라고 나에게 핀잔을 한다. ^^;;
다 제 엄마의 청소 솜씨를 익히 봐온 까닭일 게다.
고모나 할머니는 절대로 그런 청소 솜씨를 갖고 있지 않으니까.

이제는 진공청소기 한번 돌리면 걸레질도 훨씬 수월해지긴 했지만
게으름뱅이는 진공청소기 꺼내서 모터소리 요란하게 돌려대는 것도 귀찮아죽겠다.
기어다니는 어린 조카가 올 때는 또 큰맘먹고 스팀청소기로 바닥도 닦아주는데, 아...
청소 하고 나서 걸레빠는 일은 청소하는 일보다 백배 더 싫다! ㅜ.ㅜ;;

진공청소기와 스팀청소기가 같이 달려 한 쾌에 청소가 가능하다는 청소기 선전을
홈쇼핑으로 보면서 하나 장만해둘까 하는 생각이 한 5초쯤 들었던 적이 있는데
결국 관뒀다. 청소 싫어하고 게으름이 하늘을 찌르는 내가 1년에 그걸 몇 번이나 써먹겠나 싶어서.
게다가 청소는 바닥만 하는 게 아니잖아?
구석구석 선반이며 책장이며 책상에 쌓인 먼지 청소... 또 그게 얼마나 귀찮은 일인가!
으이구...

그런데 생각해보면, 청소에 관한 한 유전인자는 우리 부모님 대에서 돌연변이를 일으켰나 보다. 친할머니, 외할머니 모두 대단히 깔끔한 분이셔서, 놀러가면 늘 먼지 한 톨 없었으니 말이다.
친할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할머니 모셔와 함께 살았던 6개월간...
할머니는 아침 저녁으로 우리가 자는 방과 마루를 걸레로 닦으셨다.
우리집 구조가 좀 야릇해서 다가구 주택 2층 2칸을 터서 쓰는 형태라
엄마네 집쪽에도 따로 방들과 마루가 있고
내가 사는 집쪽에도 작게 별도의 마루와 방이 있는데 ㅋㅋㅋ
아침 저녁으로 할머니가 걸레질을 해서 말끔하고 반들반들 윤이 나는 우리집(?)을 보면서
ㅎㅎ 당시 엄마네집(?)도 무던히 걸레질에 힘썼던 것 같다.

그러다 할머니가 갑자기 뇌졸중으로 돌아가시고
거의 반쯤 넋이 나가서 만날 할머니 사진 보며 울던 나는 할머니의 유업을 잇는다며
한동안 아침저녁 걸레질을 계속했었다. 물론 두어 달쯤 하다가 게으름의 본능이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아침저녁 걸레질을 하면서 느낀 건, 반나절 만에 문틈으로 들어오는 먼지가 참 대단하구나.. 하는 것과 하루 두 번씩 걸레질을 하니, 따로 청소랍시고 힘들여 할 일도 없었다는 거였는데
10년도 넘게 훌쩍 지난 지금은
겨우 한달에 한 번 걸레질 하는 것도 귀찮아 하고 있다.
책장 위에 놓인 사진 속에서 할머니가 나를 곱게 흘겨 보시는 것 같다. ㅎㅎㅎ

그치만, 할머니 난 정말 청소하는 게 싫단 말이에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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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려나
청소가 싫고 청소에 소질도 없는 게으름뱅이인 나는
미세먼지까지 모조리 빨아들일 수 있고, 오래된 집의 문턱도 척척 넘어다니며 소리없이 혼자서 청소를 해주는 로봇청소기가 어서 개발되어 나오기를 눈빠지게 기다릴란다.
얼마 전부터 저혼자 돌아다니며 방방마다 청소를 해준다는 무선 로봇 청소기가 혼수감 필수품이라는 얘길 후배한테 듣고 전격 장만해놓으려고 유심히 봤더니만, 방문턱을 없앤 개조 아파트 같은 데나 유용할 뿐이란 얘기에 좌절했었다.
걸레질까지 도맡을 수 있는 보급형 청소 로봇이 나와준다면야 금상첨화겠지만, 그건 도무지 내 생전에 이뤄질 것 같지 않으니 하는 수 없지.

머리 좋은 인간들이여, 어서 개발에 박차를 가해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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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력

추억주머니 2007. 2. 1. 23:36
찍어놓은 붕어빵처럼 똑같이 닮은 모녀나 모자, 부녀, 부자를 보면
유전자의 힘은 참 무섭고도 놀라운 것이로구나 느끼게 되는데
단순히 생김새뿐만 아니라 어느 순간 가족간에 하는 행동까지 똑같다는 걸 깨닫게 될 때는,
시대와 삶의 질이 달라진 듯해도 결국 인생은 핏줄을 매개로 돌고 도는 것인가 보다는 생각까지 든다.
다른 집은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우리 집은 그렇다는 얘기다.
생김새는 별로 집안 내력 따질 만큼 닮은꼴이 아닌데(내가 키 작은 거랑 눈 나쁜 거 말고 다른 생김새도 아부질 닮았다는 말을 나는 아직도 믿을 수가 없다!) 습관이나 행동은 어느 순간 놀랍도록 세대간의 동일함이 느껴진다.
예를 들어....


사례 1)
우리 친할머니는 나른한 오후쯤 가만히 앉아서 꾸벅꾸벅 조시는 일이 많았는데
베개 꺼내드리고 좀 누워 주무시라고 하면 한사코
"나 안 졸리다"고 손사래를 치셨고, 억지로 이불이라도 덮어드리면 곧장 박차고 일어나 집안일을 하셨다.

나이 드니 정말로 잠이 준다고 투덜대시는 울 아부지,
나른한 오후가 되면 꼭 TV 앞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꾸벅꾸벅 조시는데
요즘처럼 추운 날엔 감기 걸리니 잠깐이라도 방에 들어가서 주무시라고 내가 잔소리를 하면
이상하게도 방에 들어가면 잠이 달아난단다.
꾸벅꾸벅 졸다가 정작 누우면 잠이 달아나는 것이 노인의 전형적인 특징이라고 여길 수도 없는 것이, 울 엄마는 똑같은 상황에서 방으로 자리를 옮기라고 하면 아예 코까지 드르렁드르렁 골면서 낮잠을 주무시기 때문이다.
할머니와 아버지만의 모전자전이란 말인가?

사례 2)
우리 친할아버지는 그야말로 '한량의 삶'을 사신 분이라 할머니가 고생을 무던히도 하셨고, 장남인 울 아부지는 대단한 효자였음에도 당신 아버지의 삶의 방식은 몹시 못마땅해 하셨다.
할아버지는 '돈벌이'와는 상관없는 재주가 참 많으신 분이어서
서예, 그림, 한시(쓰기 뿐만 아니라 "처엉~~~~~산~~~~~~~~~~~~~~~~~~~이 어쩌고.."하는 한시 읊는 솜씨도 참 구성지셨다), 애완 조류 키우기, 화분 가꾸기 같은 일에 탁월하셨다.
특히 이웃에서 죽어가는 화분을 버리려고 내놓거나 할아버지께 맡기면 기필코 살려내는 '신의 손'에 가까웠다. *.* (그 재능이 나에겐 이어지지 않음이 안타깝다 ㅠ.ㅠ)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작은 화분에 키우는 무화과 나무에서 해마다 토실토실한 무화과를 '수확'해 우리도 맛을 볼 수 있게 하실 정도였으니까..

반면에 우리집은 늘 화분이 죽어나가는 집이었다.
아부지가 직장생활 하시는 동안에 받아온 값비싼 난 화분이나 분재는 몇달을 넘기지 못하고 빈 화분만 남겨지기 일쑤였고, 정년퇴직 직후 선물받은 각종 화분도 다 죽였을 거다.
그래서 역시 울 아부지는 오종종한 생김새부터 할아버지(옛날 분치고는 키도 크고 멋지게 생기셨다!)랑 닮은 부분이 없구나 생각했는데, 그건 나의 착각이었고...
아부지가 본격적으로 화분에 관심을 가지면서 하나 둘 씩 집에 초록 식물을 늘려가더니, 해마다 한식 때 성묘 다녀오는 길에 사온 화분들이 나날이 번창해 우거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간 죽어나간 화분은 전적으로 엄마와 내 "악의 포스" 때문이었음 증명하듯,
아부지는 내 작업실에서 죽어가던 산세베리아도 살려내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고는 거실 한 귀퉁이에 화분들을 "모셔놓고" 손주들이 뛰어다니다 잎이라도 다칠라치면 버럭~ 화를 내셨던 울 할아버지처럼, 아부지도 거실 한 귀퉁이에 줄지어 세워놓고 달력에 날짜 표시해가며 물주고 키우는 화분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조카들이 놀러오면 녀석들이 정신없이 뛰어다니다 혹시 애지중지하던 화분이라도 쓰러뜨릴까봐 전전긍긍하신다. -_-;;
올 한식엔 또 새 화분을 몇개나 사자고 하실까...

사례 3)
홍시 얘기를 할 때도 외할머니와 울 엄마의 유사함을 적은 적이 있는데,
참외도 마찬가지다.
외할머니는 참외를 참으로 좋아하셨고, 외출했다 돌아오셨거나 야외로 소풍 같은 걸 갔을 때 참외를 드시고 싶은데 과도가 빨리 준비되지 않거나 여의치 않을 때는
그냥 손으로 참외를 퍽~ 쳐서 깨뜨려 껍질째 드시기도 했더랬다.
일제 강점기에 쬐끄만 일본 순사들이 '6척 장신'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는 우리 외할머니가 그렇게 크고 긴 손으로 참외를 쩍 잘라 나에게도 한 쪽 주시면, 난 그게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다. *.*

과일을 깎아 대령하는 걸 차마 못 기다릴 만큼 참외에 대한 탐닉이 강한 건 우리 엄마도 마찬가지다. ^^;;
참외는 내가 별로 좋아하는 과일도 아니지만 (먹게 되면 속 다 파내고 먹는데, 울 엄만 그럼 무슨 맛이냐!고 막 퉁박이다), 내가 껍질 벗긴 참외를 작게 자르느라 뜸을 들이면, 대뜸 "난 자르지 말고 통째로 내놓으라"고 하셨더랬다. ㅋㅋ
그나마 당뇨 발병 후엔 하나를 다 통째로 내놓으란 소린 못하고, 절반만 통째로 내놓으라고 하시며 "역시 참외는 손으로 먹어야 제맛"이라고 중얼거린다.

참외 탐닉의 내력은 이상하게도 딸인 나에게 이어진 것이 아니라
큰 동생에게 흘러갔고, 그 녀석도 외할머니, 엄마 닮아서 참외를 몹시 좋아하는데
내가 예쁘게 과일 깍는답시고 참외를 조각조각 반달썰기하면 막 화를 낸다.
먹을 게 없다나 뭐라나... -_-;;
그러면서 자기도 통째로 반쪽 내놓으라고 하는 게 보통이다.
그래서 여름 참외철이 되서 큰동생네가 놀러오면 장유유서고 뭐고 없다.
얼른 참외를 깎아 울 엄마 반쪽, 큰 동생놈 반쪽 먼저 손에 쥐어주고
그 다음에 먹기 좋게 한 접시 잘라 아부지께 드리는 순이다. ㅋㅋ
 
사례 4)
무슨 일이든 코앞에 닥쳐야 하는 버릇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습관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다들 방학숙제는 어떠했는지 모르겠다.
암튼 우리 집 삼남매는 어린 시절 방학숙제마저도 개학이 코앞으로 다가와야만,
그것도 급기야 부모님께 손바닥이나 종아리를 맞고 혼이 난 다음에야 전전긍긍 밤샘작업으로 개학 전날까지 가까스로 마치는 부류였다. ㅜ.ㅡ;;
그런데 문제는 방학 내내 배짱좋게 놀다가 해가는 숙제이니 '대충대충' 시늉만 하면 좋으련만 빌어먹을 소심함과 완벽주의 탓인지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거다.
한달이나 두달치 일기를 한꺼번에 쓰는 주제에, 날씨 좀 틀리면 어떻다고 지난 신문을 죄다 뒤져 일일이 확인하는 식이니 시간이 오죽 더 많이 걸릴까.
내 경우는 그림이나 글짓기, 만들기 숙제도 심혈을 기울여야 직성이 풀렸고, 뒤늦은 후회를 하며 홀로 눈물을 흘리면서도 악착같이 숙제를 다 해갔던 것 같다. ㅎㅎㅎ

2월 1일 개학을 하루 앞둔 어젯밤, 조카 정민공주네가 집으로 쳐들어(!) 왔다는 전화가 왔다.
ㅋㅋㅋ 역시나 방학숙제 때문이었다.
방패연과 꼬리연을 만들어 가야하는데 할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했고,
동시를 지어 꾸미는 숙제엔 컬러 프린터가 필요하다는 것이 그들의 이유였다.
일기는 그나마 미리미리 다 써두었으니, 어쩌면 제 아빠나 삼촌, 고모보다 훨씬 훌륭한 조카였지만, 동시 꾸미기 숙제를 하면서 드러난 성격은 놀랍게도 판에 박은듯이 고모와 똑같았다.
이미 다 지어온 동시를 세 편이나 한글 프로그램에 앉히고
각종 그림으로 시화를 꾸미는 것이 숙제인 모양인데, 정민공주는 한글97 그리기 마당에 마음에 드는 그림이 없으면 절대로 대충 아무거나 선택하지 않았고....
인터넷 이미지를 다 뒤져서라도 결국 마음에 드는 그림을 찾아냈다.
울 올케의 짐작으론 '타이핑만 하면' 되니 금세 끝날 숙제였지만, 실제론 동시 한 편에 시간이 30분도 더 걸렸고, 결국 조카는 시간도 없는데 꾸물거린다는 제 엄마의 꾸지람과 호통에 결국 눈물을 보였으며, 공주의 방학숙제는 밤 11시가 다 되어 끝이 났다. *.*

오밤중에 숙제를 끝내놓고도 고모랑 더 놀다 가지 못해 안달하는 조카들을 내쫓다시피
집으로 보낸 뒤, 엄마가 한 말씀 하셨다.
"쯧쯧쯧.. 어떻게 방학숙제를 개학 전날까지 밤새다시피 해가는 것까지 집안 내력이라니..."

내가 <내력>이란 제목으로 포스팅을 하게 된 이유였다. ㅎㅎ
(사례 하나 추가했다. 이것들 말고도 더 많지만.. 너무 길어지면 지루할 테니까..^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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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귤, 홍시

추억주머니 2006. 12. 1. 05:11
드디어 겨울이 오고야 말았다.
영하 날씨에야 차마 가을타령을 할 수야 없는 것.
올 겨울 들어 처음으로 영하권으로 떨어진 그저께
나는 가을의 冬死(동사)를 애도하는 의미로 아예 집밖에 나가지 않고 하루 동안 冬眠(동면)했다. -.-;;
(요새는 벨로가 블로그 안하니깐 음독은 생략 ^^;;)
((생략했다가 키드님의 요청으로 급 수정했음^^;;))
그러더니 급기야 어제는 눈까지 내리더군.
나도 이젠 어쩔 수 없이
가을의 바짓가랑이를 놓아주고 찾아온 겨울을 맞아야 한다.

추워지면 좀처럼 몸을 옴쭉달싹하기 싫어하는 '여름형' 인간이지만
그래도 겨울에 내가 좋아하는 게 있긴 하다.
, 홍시, .
사실 귤과 홍시는 하우스재배와 저장법이 발달되면서 반드시 겨울에만 맛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겨울이 가장 제맛 아닌가.

중학교때였나..
이 너무 비쌀 땐 사먹을 생각도 못하다가 드디어 겨울이 되어 귤이 쏟아져 나오면
한 박스씩 집에 쟁여놓고 엄마랑 둘이 한번에 몇 개씩, 심할 때는 10개까지도 야금야금 까먹는
바람에 손바닥이 완전히 노래지는 일시황달에 걸려 병원에 간 적도 있었다.
물론 처음엔 일시황달이 귤 때문일 리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몹시 놀랐는데,
의사가 귤을 많이 좋아하나보다면서, 겨울 지나고 귤 떨어지면 괜찮아질 거라고 그냥 돌려보냈더랬다.

어찌된 영문인지 요샌 거의 일년 내내 귤을 먹을 수 있는 것도 같지만
재주소년의 노래 '귤'처럼
과일가게에 온통 노랗게 귤이 깔리면 드디어 찬바람이 불 거라는 예고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굳이 냉장고에 넣지 않아도 살얼음 깨물듯 과즙 많고 시원한 귤을 먹는 묘미는
역시 겨울이라야 제격이다.

빠알갛게 익은 홍시 역시 귤과 함께 겨울에 먹어줘야할 대표적인 과일!
말랑말랑해서 주로 할머니들이 좋아하신다는 홍시는 나에게도 할머니와 관련된 추억이 많다.
어려운 시절을 오래 보내신 탓인지, 우리 친할머니는 홍시를 드실 때 절대로 혼자서
한 개를 다 안 드셨다.
말년엔 워낙 양도 적으셨지만, 아무튼 할머닌 '우리 홍시 하나 먹을까..' 그러면서
꼭 납작한 홍시를 절반 잘라 나에게 주셨는데
과일 대장인 나는 홍시 반쪽으로 영 양이 차지 않았고,
얼른 반쪽을 다 먹고 난 뒤엔 또 홍시를 하나 반으로 갈라 일단 반쪽만 냠냠 먹어주었다.
남은 반쪽은 할머니께 권하기도 했지만, 몇분쯤 두었다간 결국 내가 낼름 먹을 때가 많았다.
그래서 난 오래도록 납작한 홍시는 '꼭' 절반씩 갈라서 먹어야하는 걸로 알았고
친구집에 갔을 땐가, 홍시를 통째로 귤까듯 껍질을 얇게 벗겨 베어 먹는 걸 보고 약간은 충격을 받았으며, 지금도 뾰족한 대봉시가 아닌 납작한 홍시는 '반드시' 반으로 갈라 먹는다.

우리 외할머니도 홍시를 참 좋아하셨는데, 워낙 통이 큰 분이시라
외할머닌 가을이 되면 어디론가 사람을 보내 아예 덜 숙성된 홍시 감을 몇박스쯤 사오게 하셨다.
주로 '대봉'이라고 불리는 뾰족한 모양의 홍시였다.
억지로 숙성시킨 것보다는
항아리에 켜켜로 앉혀 익혀 겨울 내내 먹으면 맛이 있다고 하시면서 말이다.
그리곤 내가 놀러가면 사랑방에 있는 항아리에서 잘 익은 놈으로 골라주시거나
나중에 거동이 불편하실 땐 이모나 나에게 맛있게 생긴 놈으로 골라오라 하셨다.
사먹는 홍시도 맛있지만.. 그렇게 외할머니가 항아리에 담아 익혀주신 홍시는 완전히 꿀맛이었고, 워낙 커서 하나만 먹어도 배가 불렀다.
요샌 대봉시를 얼렸다가 여름에 무슨 대단한 별미나 되는 것처럼 백화점에서 비싼 값에
팔기도 하지만, 겨울 사랑방에서 살짝 얼듯말듯 차가워진 우리 외할머니표 대봉시만큼 맛있는 감은 두번 다시 맛볼 수 없을 것 같다.

할머니 닮아서 홍시를 몹시 좋아하는 울 엄마 역시
얼마 전부터 큼지막한 대봉시를 잔뜩 사놓고는 뒷베란다에 내놓고 이리저리 매만지다
잘 익은 놈으로 하나씩 골라 드시면서 몹시 뿌듯해하고 있다.
당뇨 때문에 달디단 홍시는 좀 걱정이 돼 내가 만날 눈을 흘기는데도, 전혀 소용이 없다.
ㅎㅎㅎ
그래도 홍시 안 먹고 운동 안하는 것보다는, 홍시 먹고 내 등쌀에 못 이겨 엄마가 운동 나가시는 쪽이 더 낫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

그리고 마지막으로 .
물론 어젠 첫눈 온다고 사방에서 날아온 문자 메시지 때문에 나도 밖을 내다보긴 했지만
그리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모름지기 눈이란 더러운 세상을 뽀얗게 뒤덮어주어야 제맛이 아니겠나.
함박눈으로 펑펑 쏟아지긴 했어도, 땅에 닿자마자 녹아내리는 걸 보니 아쉽기만 하더군.
게다가 예전처럼 용감하게 맞고 돌아다닐 수도 없을 만큼 눈도 공해에 찌들어
우산으로 막아야하는 눈... 확실히 예전과는 느낌이 다르다.

그럼에도 눈이 내리면 조금이나마 마음이 설레고 푸근해지는 게 사실이다.
물론 그런 마음보다는 녹은 눈 때문에 질척거리는 길에 대한 짜증과
눈이 얼어 빙판길이라도 되면 우리 동네 언덕 내려갈 걱정이 더 커지기도 하지만
아직도 눈이 펑펑 내려 많이 쌓이면 뛰쳐나가 작은 눈사람이라도 만들고픈 충동을 버리지 못할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2년전 때아니게 3월에 내린 폭설로 내가 만든 눈사람 사진이나
퍼와야겠다. (정민이가 인어공주 눈사람이라고 불렀던 사진 ^^;;)

그러면서 이왕 와버린 겨울, 까짓것.. 하면서 보낼 수 있기를 빌어야지.
까짓것.. 석달만 참으면 봄이 오겠지 뭐.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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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루시드 폴의 '오 사랑' 앨범을 사서 들은지 좀 됐는데
두번째 수록곡인 "할머니의 마음은 바다처럼 넓어라"를 들을 때마다
10년 전에 돌아가신 우리 친할머니 생각이 많이 나서 이런저런 상념에 젖곤 한다.
정말로 할머니들의 마음은 어쩜 그리도 넓으신지...

영화 <집으로...>를 보면서 허리가 반으로 접힌 깡마른 그 할머니의 체구가 화면에 등장하는 순간부터 통곡하듯 눈물을 흘렸던 이유도 신파스러운 영화에 대한 절절한 감동보다는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의 모습이 이야기 속에 이리저리 겹쳐졌던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루시드 폴이 그리워하는 할머니한테서도 나는 우리 할머니의 체취가 느껴지는 것 같다.


초겨울 추위도 무시 못할 만큼 매섭던
나의 어린 바닷가.
여름엔 바지락 겨울엔 굴을 따다 채운
가난한 호주머니,

시골의 장터,
오늘은 일요일,
해뜨기 한참도 전 대야를 이고 향하는
할머니의 꿈, 우리 건강한 꿈,
빌고 또 비는 할머니의 꿈.

채 익지도 않은 삼백원짜리 수박에도
우린 기뻐했었지.
몹시 아프던 날, 나를 들쳐 업고 달리던
땀에 젖은 등자락.

이제 난 알지. 돌아가셨어도
나에게, 누나에게 살아 있음을.
어머니, 아버지에게서 숨쉬는
할머니의 마음은 바다처럼 넓어라.

마음은 바다처럼 넓어라.

(파피루스 덕분에 익히 루시드 폴이 부른 노랫말의 아름다움을 알고는 있었지만
어쩜 이렇게도 간결하고 절절하게 느낌을 담아냈는지!)

이 노래를 들으면 또 조건반사처럼 덩달아 떠오르는 기형도의 시가 있다.
바로 '엄마 걱정'


시에선 할머니가 아니라 엄마지만,
열무 삼십단 대신 생선 광주리를 이고 행상을 나간 우리 할머니가 해저물고도 돌아오지 않으시면, 열두어 살이었던 우리 아버지가 어두운 골목을 지나 장터로 이어지는 길로 마중을 나갔다는 이야기를 어려서 듣고 마음에 새겨둔 때문인지
기형도의 시를 처음 읽은 순간에도 나는 작은 체구에 커다란 생선 광주리를 이고 다니셨을
할머니의 모습이 떠올라 눈물이 핑 돌았었다.

몸종을 데리고 시집올 만큼 한동안은 어려움 모르고 사셨다는 우리 할머니.
평안북도 정주에서 남편따라 만주로 피난 올라갔다가 다시 부산으로 내려와,
한 몫 단단히 챙겨 온 재산은 대가족이 1년 가까이 여관에서 생활하느라 다 날리고
평생 시나 읊고 기생놀음만 하는 한량이셨던 할아버지 대신 생계를  할머니가 책임지셔야 했던 이야기를 두고두고 손녀딸에게 가만가만 들려주시며,
'내 허리가 이렇게 형편없이 반으로 굽은 건 전부 다 니 할아버지가 고생시킨 탓'이라고...
돌아앉아 담배 피우시던 할아버지를 곱게 흘겨보셨더랬다.

생일이 늦어 취학통지서도 나오지 않은 첫손녀를 굳이 동네 통장에게 막걸리 한 되 뇌물까지 써가며 한 해 일찍 국민학교에 들여보내 놓고선 못내 마음이 안 놓여 한 학기 내내 등하교 때마다 나를 업어 나른 우리 할머니의 정성을 익히 잘 알고 있는 나는
겉으론 흥흥흥 같이 웃어드리면서도
할머니의 굽은 허리에 나도 한 몫 단단히 한 것 같아 늘 마음이 짠 했다.

우리 할머니도 이제는 돌아가셨지만
부산 피난 시절 할머니의 꿈과 한과 희망이 담겼을 생선 광주리의 추억도 나는 알 것 같고
우리 아버지를 거쳐 나와 내 동생들에게까지 이어진
드넓은 할머니의 마음을 지금도 분명 느낄 수가 있다.

루시드 폴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그래서 참 고맙고 또 슬프다.
우리 할머니가 많이 보고 싶어서.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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