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상

삶꾸러미 2007. 4. 4. 03:14

아닌 척 잊고 살지만, 죽음은 의외로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매번 호되게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 든다.

배고파 죽겠네, 신경질 나 죽겠네, 짜증 나 죽겠네,
심지어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네... 따위의 엄살스러운 죽음과 다른 진짜 죽음.
말로는 오늘 내일 당장 사고로 죽을 지 모르는 게 현대인의 삶이라고 늘 떠들어대지만
내심으론 당분간 나와 상관 없는 일이라고 떠밀어내며 살다가
덜컥 부음을 듣고 나면 가슴 한 구석이 서늘해지면서 아득한 느낌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죽음에 익숙해진다는 것의 동의어이기도 한 것 같다.
어려선 장의차만 보아도, 상복을 입은 유가족들만 보아도 섬뜩하고 무서운 기분이 들었고
'월하의 공동묘지', '망우리 공동묘지' 같은 괴담 시리즈가 연상되었다.

제법 어른이 되고 나서도 문상을 갈 일이 생기면
장례식장에서 밥을 먹는 건 도저히 못할 일이었던 것 같다.
간신히 음료수 정도나 마시거나 그것도 그냥 들고 있다가 가방에 넣어오거나
그냥 살며시 테이블 아래 놓고 나올 정도로, 나는 죽음과 관련된 그 어떤 것과도
단절되고 싶었나보다.

하지만 할아버지, 할머니 때 본격적으로 초상이라는 것을 치르면서
비로소 죽음도, 죽음의 의식도 그저 삶의 한 부분임을 깨달았다.
온종일 꺼이꺼이 목놓아 울다가 눈이 퉁퉁 부어 떠지지 않을 정도가 되어도 어느 순간이 되면 허기가 느껴져 육개장에 밥을 말아 입에 퍼넣다 그런 내가 또 혐오스러워져서 또 눈물이 나고, 넋나간 듯 주저 앉아 있다가도 또 아는 얼굴이 눈에 비치면 가서 인사도 하고
상복 옷고름에 김치국물 묻혀 가며 음식과 술도 나르고,
문상객들 뜸해진 새벽이면 고인의 영정 앞에서 스르르 옆으로 쓰러져 잠깐 눈을 붙이기도 하고...
그런 일들을 내가 직접 겪어보지 않았다면 어떻게 알았을까.

어려선 공동묘지는 무조건 으스스한 곳이라 여기고, 혹시나 국도변을 지나다 봉분들이 한꺼번에 모여 있는 곳을 보면 언짢은 듯 시선을 피했건만
할아버지, 할머니를 합장해 모시고 10여년 째 성묘 다니는 공원묘지는 이제 우리 가족에게
단체로 찾아가는 나들이 장소처럼 친근하기만 하다.
두분이 생전에 다시는 못 가보신 이북 땅 대신에, 임진강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배기에 돗자리를 넓게 펴고 절부터 올린 뒤, 소풍객들처럼 우르르 둘러 앉아 음복하고 가져간 과일과 음식 나눠 먹고 담소를 나누면, 조카들은 신나게 봉분 사이를 뛰어다닌다. 

이처럼 개인적인 경험으로 죽음과 친근해진 것은 확실하지만
아무래도 현재에 맞이하는 죽음은 단번에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차츰 문상 갈 일이 많아지는 걸 보면, 내 나이가 실감되기도 하는데
이번엔 친구 동생의 부음이라 더욱 허망했다.
장례식장엘 다녀오고 나면 며칠은 신변 정리에 신경을 쓰는 것이 나의 습관이고 보니
요 며칠은 또 유언장 쓰듯 내 삶을 정리하느라 청승을 떨게다.
그 호들갑이 다만 며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하여튼 그 며칠이 지나고 나면 슬며시 다시 죽음을 떠밀어 내고
모르는 척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겠거니 하련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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