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에 해당되는 글 29건

  1. 2010.02.04 부적 20
  2. 2010.01.21 방학 14
  3. 2009.12.22 동짓날 19
  4. 2009.12.19 투덜투덜 12
  5. 2009.09.15 늙음에 대하여 4
  6. 2009.08.26 칠석에 내리는 비 6
  7. 2009.08.10 국수 18
  8. 2009.05.10 진지 17
  9. 2009.01.24 사진 7
  10. 2009.01.15 할머니의 추억 14

부적

삶꾸러미 2010. 2. 4. 21:31

나에게 동짓날이 팥죽먹는 날이라면 입춘은 부적의 날이다. 예전 마당 있는 집에 살 땐 골목길을 지나치며 더러 대문에 <입춘대길>이라고 쓰인 입춘첩을 붙여놓은 집도 더러 볼 수 있었지만 요샌 통 구경할 수가 없으니, 그저 조용히 엄마가 절에서 얻어다준 새로운 부적을 지갑에 넣고 오래된 부적을 내놓고는, 집안화평을 비는 기다란 부적을 현관 문설주에 붙이는 것으로 간단한 입춘날 행사가 끝난다.

사실 모든 종교가 이승과 내생의 행복을 바라는 기복종교이긴 하지만 불교는 전래되면서 토속신앙과 특히 많이 접목된 탓에 원래 불교의식과는 상관없는 오묘한 미신이 참 많이도 스며들었다. 그래서 더욱 돈을 노리는 사이비 신앙행위가 판을 치기도 하며, 일부 탐욕스런 절에서는 다량으로 인쇄된 기복 부적을 사다가 신도들에게 돈을 받고 팔기도 하는 상황이니 혀를 찰 노릇이다. 면죄부를 팔아 치부했던 중세 기독교인의 환생도 아니고 뭐하자는 짓인지 원.

어쨌든 지니고 다니면 화를 면하고 복을 부른다는 부적에 대한 불교신자들의 믿음이 워낙 확고한 탓에 입춘날엔 대부분의 절에서 공짜로 부적을 나눠주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법회에 참석하는 신도들의 수가 많단다. 태어나서부터 줄곧 외할머니와 엄마 영향으로 불교와 친숙했던 내가 지켜봐온 바에 따르면, 입춘 부적에도 변화가 있었다. 처음엔 삼재인가 아닌가에 따라서 그냥 부적과 삼재 부적만 식구들 수대로 나눠주더니, 운전하는 가족들이 있는 신도들의 특별 부탁 때문인지 어느해 부턴가 나는 입춘마다 일반 부적 말고도 자동차에 두고 다니라는 <운전용> 부적을 따로 받았다. 그나마 자동차 부적은 해마다 안바꿔도 되는지 몇해 전부터는 그냥 같은 부적을 햇빛 가리개 안쪽 주머니에 찔러넣어둔 채 잊고 지내는 중이다.

난생 처음 차가 생겨 운전을 하게 되던 날은 더 재미있는 일도 있었다. 사촌형부가 몰던 차를 물려받은 그날, 엄마는 미리 절에서 특별히 주지스님이 챙겨주었다는 자동차 사고를 막아준다는 부적을 받아와서는 후드를 열고 떡하니 엔진 위에 견고하게 붙여주었고, 막걸리를 사다가 차 바퀴 네 군데에 나눠 부으며 무사고를 빌었다. ^^; 우리 동네 카센터 아저씨는 기독교인이었는데, 처음 엔진오일을 갈러 갔던 날 그 부적을 보더니 빙그레 웃으면서도 부적이 떨어지지 않게 더 꽉 붙여주었다. 불교신자들 뿐만 아니라 천주교신자 가운데서도 차안에 걸고 다니는 염주나 묵주 외에 그렇게 자동차 엔진에까지 뭔가를 붙이고 다니며 무사고를 비는 어머니들이 꽤 있다나.  

사실 내 자동차에는 엄마가 넣어주신 부적뿐만 아니라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무사고를 기원하며 사다주신 예쁜 조각 염주도 있고, 역시나 외할머니가 주동하신 부처님 금불사(절에 모신 부처님한테 새로이 순금을 다시 입히는 행사를 <금불사>라고 한다) 때 쓰인 오색실과 팥알이 들어 있는 작은 향낭도 걸려 있다. 물론 나는 그런 물건들의 <영험한> 효험을 전혀 믿지 않는다. 바퀴에 막걸리 뿌리고 엔진에 부적까지 붙였던 나의 첫차로 두어달 만에 나는 그렌저 문짝 두개를 보란듯이 우그러뜨려 거금을 물어줘야 했고, 운전연습을 시작한 큰동생은 주차장에서 남의 차를 찌그러뜨린 뒤 몰래 도망치는 사고를 저질렀으며, 수동이라 엔진 꺼뜨리지 않고 언덕길 운전연습 한답시고 동네 약수터의 벤치를 들이받질 않나 골목길에 주차한 자동차들의 사이드미러에 죄다 흠짐을 내놓지를 않나, 큰 사고만 없었다뿐 자질구레한 사고는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런데도 부적에 대한 울 엄니와 외할머니의 믿음은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거봐라! 큰 사고 아니라서 사람도 안다치고 그 정도니 얼마나 다행이니!" 

자동차에 주렁주렁 매달린 염주와 향낭, 햇빛 가리개 주머니 안에 들어 있는 부적을 내가 굳이 치우지 않는 이유는 그 물건의 효험을 믿어서가 아니라 외할머니와 울 엄마의 마음 때문이다. 더욱이 외할머니는 돌아가신지 5년이 다 돼가는데도, 룸미러에 매달아둔 염주만 보면 성지순례 다녀오신 할머니가 한복 저고리 주머니에서 <옴>자가 양각으로 새겨진 그 염주를 꺼내 주시며 꼭 차에 매달고 다니라고 했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나에겐 기복용 부적이 아니라 소중한 추억회상용 유품이 된 셈이다. 팔순 노모가 육순 자식에게 길조심을 당부하는 게 인지상정인 것처럼, 공식적으로 무사고 10년이 넘은 베테랑인데도 울 엄마가 여전히 내 운전을 염려하는 걸 알기에 날 못 믿겠으면 부적이라도 믿으시라고 군말없이 오늘도 엄마가 가져다준 부적을 지갑에 소중히 간직했다. 어쩌면 이제껏 큰 사고 없이 잘 지내온 건 나를 염려하는 어르신들의 걱정을 덜어드리려는 조심 노력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부적에 효험이 있다는 말인가 아닌가. ㅋㅋㅋ 하기야 전우치 같은 도사님 부적을 백장이나 붙인들 본인이 조심하지 않으면 말짱 꽝일 터, 결국 부적의 힘은 자중의 힘인가 보다.

아무려나 입춘대길. 얼마 안남은 진짜 새해엔 정말 크게 좋은 일만 빵빵 터져주길 무신론자인 내가 아무데나 빌어도 이루어지려나?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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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

추억주머니 2010. 1. 21. 22:12

방학(放學): 학교에서 학기나 학년이 끝난 뒤 또는 더위, 추위가 심한 일정 기간 동안 수업을 쉬는 일. 또는 그 기간. 놓을 방, 배움 학이니, 방학은 배움을 놓고 놀라는 뜻이 틀림없다.

초중고대, 나의 학창시절을 돌아보아도 방학땐 거의 놀기만 했던 것 같다. 요샌 방학이 되어도 누구 하나 정신없이 놀기만 하는 학생을 찾아볼 수 없으니, 마냥 놀아도 되었던 시절을 타고난 복도 작용했을 것이다. 고3을 앞둔 겨울방학엔 자율학습을 하느라 매일 학교에 가야했지만, 등교는 했으되 공부대신 우린 여전히 수다가 본업이었고 고체 연료와 냄비, 양푼 따위를 집에서 날라와 친구가 끓여준 수제비를 먹거나 도시락을 모두 모아 비빈 양푼 비빔밥에 달려들어 숟가락 다툼을 하며 히히덕거렸다. 

대학생 때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과 달리 괜한 시국 탓하며 학기중에도 학업을 멀리했던 우리가 방학 동안 공부를 했을리 만무했다. 친구들 따라 토익, 토플 특강을 신청하긴 했어도 출석일수가 열흘을 넘긴 적은 없었다. 그나마도 3학년 때부터는 특강 등록증을 검사하는 학생회 친구가 거저 들여보내 줄 터이니, 다들 특강비로 술 사마시자고 꼬드겨 단체로 부모님을 속인 뒤 꽤 오래 술과 밥을 사먹으며 놀았다. 내 인생의 황금기는 대학시절 4년이라고 아직도 아련하게 추억하는 이유도, 학기중이든 방학이든 따지지 않고 참 원없이도 놀았기 때문이다. 막연히 미래가 두렵긴 했지만 특별히 인생을 계획하고 앞길을 따져 본 적 없이, 그저 빈둥빈둥 놀았다. 뭐가 그리 재미 있었으냐고 꼬치꼬치 따지면 딱히 손꼽을 것도 없이, 멍하니 무심하게 놀 수 있었던 건 정말 그 때 뿐이었던 것 같다.

아 물론, 노는 게 본업이었던 유년시절은 빼고서 그렇다는 말이다. 학원이나 과외는 생각도 못하고 요즘 학습지에 해당하는 <일일공부>가 유일한 사교육 경험이었던 나는 학기중이든 방학때든 만날 시험지가 밀려도 별 걱정하지 않고 놀았다. 까짓것 일주일치가 밀려도 하룻저녁 끙끙대며 앉아 다 풀면 되는 일이었다. <방학생활>과 일기가 문제이긴 했지만, 지금이나 그때나 한참 밀어 두었다가 한꺼번에 해치우는 버릇은 여전했으므로 개학을 일주일 쯤 앞두고서 숙제검사를 실시한 부모님에게 손바닥을 몇대 맞은 뒤 시작해도 결과는 똑같았다. 개학 후 글짓기든 독후감이든, 만들기든 뭔가 하나쯤은 상을 타왔으니까. 어린 마음에도 치밀한 구석이 있어서, 똑같은 굵기와 진하기의 연필로 밀린 일기를 한꺼번에 다 쓰면 티가 날까봐 나는 연필도 굵은 것, 흐린 것, 뾰족한 것, 뭉툭한 것 번갈아서 일기를 썼던 기억이 난다. 그땐 그렇게 강요받은 일기 쓰기가 싫더니, 요샌 누가 쓰라지도 않는데 이렇게 열심히 블로그질을 하는 걸 보면 우습다. 한두 달치 밀린 일기를 며칠 만에 다 해치우던 어린 시절의 <필력> 덕을 지금 보고 있는 건가? 흐흐흐.

어쨌든 어린 시절 방학 중 내가 가장 크게 기대했던 이벤트는 친척집 순례였다. 친할머니댁에서 며칠, 외할머니댁에서 며칠, 고모네집에서 며칠, 원두막이 있는 시골집이 아니라 다들 서울 하늘 아래라 특별한 것도 없건만 나는 방학동안의 홀로 외박을 학수고대했다. 싸가지고 간 방학숙제와 일기는 언제나 손도 대지 않은 채 며칠 뒤 다시 집에 가져갔다. 아침잠이 많은 내가 부시시 눈을 떠보면, 안방 한가운데 덩그라니 내 이불만 놓여있고 같이 잤던 할머니와 할아버지 이불은 어느틈에 치워졌을 뿐만 아니라, 방 구석에 상보가 덮인 소반 하나가 놓여있기 일쑤였다. 두분 아침 드시는 동안에도 아무것도 모른 채 쿨쿨 자고 있었다는 얘기다. 완고하고 무섭기로 소문난 우리 할아버지가 늦잠 자는 손녀딸을 그냥 내버려두고 그 옆에서 아침상을 받아 진지를 드셨을 걸 생각하면 지금도 놀랍다. 할머니가 깨우지 말고 그냥 자게 내버려두라고 말리셨을 게 분명하지만, 밥상 예절을 중시하셨던 할아버지 성격상 보아 넘기시기 힘드셨을 텐데. 딱히 할머니댁에서 뭘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할머니 옛날 이야기 듣고, 갓 성년이 된 고모들 수다 떠는 데 눈을 빛내며 끼어 앉아 있고, 낮잠자고 누룽지나 찐고구마 같은 간식 먹고 TV 드라마 보고... 나중에 작은아버지댁이랑 합치셨을 땐 사촌동생들이랑 놀아주고... 근데 그게 왜 그렇게 좋았는지.

방학때 할머니댁에서 며칠 놀다 돌아오면 집에서 한 일주일쯤 보내다가 다시 외할머니댁엘 갔다. 거긴 사촌언니가 있는데다 만화책을 수십권씩 빌려다 쌓아놓고 보는 외삼촌들도 있었으니 더욱 즐거웠다. 물론 할머니댁보다는 늦잠자기가 수월하지 않았지만 새벽같이 안방에서 쫓겨나 잠이 모자라면 건넌방이나 사랑방으로 베개를 들고 옮겨 이어잘 수도 있었다. 온갖 과일과 한과, 견과류가 그득했던 외할머니댁 광이나 다락에서 끊임없이 가져다먹는 간식의 묘미는 또 어떻고!  두 할머니댁 말고도 고모네 집에서도 거의 방학마다 나를 불렀던 건 좀 의아하다. 살림이 여유로웠던 셋째 고모는 딸이 없어 그러려니 한다지만, 꽤나 먼 동네 단칸방에 살았던 넷째 고모네는 딸도 있는데 거길 가서 며칠 씩 지내다 온 건 무슨 이유였을까. 아무리 아이라지만 군 식구 하나 더 챙기는 게 꽤나 귀찮았을 텐데, 고모들이 나를 심히 예뻐했다는 것말고는 딱히 나를 오라고 했던 정황을 설명하기가 어렵다. 편하기만 했던 두 할머니댁과는 달리 고모네 집에서 지내는 며칠은 나도 대단히 조심스럽고 어려웠는데도, 다니러 오라는 고모들의 청이 싫지 않았다. 어린마음에도 오히려 내쪽에서 큰 아량을 베푸는 기분이었던 것 같다. 끼니 때마다 고모들을 도와 수저를 놓거나 물잔을 옮기며 듣는 칭찬도 퍽이나 뿌듯했고.

물론 요즘 아이들은 방학에도 과거의 나처럼 마냥 놀지 못한다. 놀기는커녕 다음 학년 수업을 땡겨서 선행학습을 하느라 학교 다닐 때보다도 더 오래 학원에서 지내는 아이들도 많다고 들었다. 좀 더 여유가 있는 집안에선 아예 방학 내내 외국으로 연수를 보내거나... 달리 노는 인생을 아예 알지 못하는 요즘 아이들은 그 속에서도 나름 행복과 즐거움을 찾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가장 여유롭고 신나야 할 때조차 공부에 치여 보낸 아이들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더더욱 숨막히는 삶에 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몹시 안타깝다. 유년을 돌아보며 "나 어렸을 땐 방학 내내 빈둥빈둥 놀기만 했어!"라고 즐거이 고백하는 나와 달리, 그 아이들은 "나 어렸을 땐 방학 내내 학원을 다섯개나 뺑뺑이하느라 정신없었어!"라고 토로하며 그마저도 행복하다 여기는 건 아닌지.

아무려나 일 하기가 싫으니 만날 꿈꾸는 게 진정한 의미의 안식년, 방학, 휴가, 이 따위 것들이다. 이 맘때쯤 아직은 밀린 방학숙제와 일기 걱정 없이 태평하게 빈둥빈둥 놀고 있었을 내 유년의 방학이 그리워 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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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짓날

투덜일기 2009. 12. 22. 15:03

대부분 음력인 전통 절기 가운데 이상하게도 입춘과 동지는 유독 양력이다. 이유를 찾아볼 생각은 않고 그저 의아하게 여기고만 있던 그 동짓날이 바로 오늘. 나에게 동지는 일년중 밤이 가장 긴날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그저 <팥죽 먹는 날>일 뿐이다. 친할머니댁에서 살 땐 할머니가 전날부터 팥을 삶아 놓고 찹쌀 새알심을 만들어 다음날 아침 일찍 큰 솥으로 하나 가득 팥죽을 끓여주셨다. 끼니로 먹고 간식으로 또 먹고 마지막엔 솥 아래 눌어붙은 팥죽 누룽지까지 알뜰하게 긁어먹으며 종일 몹시 흐뭇했던 것 같다.
부모님이 분가한 뒤로는 엄마가 가끔 동지 팥죽을 쑤어 마당 여기저기 뿌리고는 시루떡과 함께 고사를 지내기도 했지만 주로 외할머니댁에서 팥죽을 얻어다먹었다. 원래 동지 팥죽에 든 새알심은 자기 나이수대로 먹는 거라는데, 나는 새알심을 좋아하지 않아서 늘 세 개만 달라고 하곤 그걸 내 나이수대로 잘게 잘라 팥죽에 섞어 먹곤 했다. 물론 언제부턴가는 새알심 세 개를 내 나이수 만큼 자르는 것이 불가능해졌지만...

동지 팥죽을 좋아하지만 들척지근한 단팥죽은 싫고, 팥시루떡은 좋아해도 단팥빵과 팥빙수는 싫어하는 나의 이상한 취향은 아무래도 어려서부터 담백한 동지팥죽에 입맛을 들인 때문이라고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다. 붕어빵은 예외라고 쳐도 많이는 못먹는 걸 보면 모름지기 팥은 단 것보다 담백하게 조리할 때 더 맛있다고 느끼는 모양이다. 게다가 친할머니도 그렇고 외할머니도 그렇고 울 왕비마마까지 손맛은 또 얼마나 좋으신가 말이다. 제 아무리 유명하다는 집에 가서 팥죽을 먹어봐도, 수십년간 내가 즐겨왔던 소금간과 절제된 단맛이 조화로운 담백한 팥죽은 만날 수가 없었다.

3년 전 외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외할머니댁 동지 팥죽을 매년 빠짐없이 날라다 먹었고, 왕비마마는 이미 10년째 살림살이에서 손을 뗀 터라 이젠 동지에 맛있는 팥죽 얻어먹을 일은 없겠구나 아쉬워하고 있었는데, 뜻밖에 작년부터 다시 동지팥죽이 생겼다. 엄마가 다니시는 절에서 동짓날이 되면 팥죽을 넉넉하게 쑤어 신도들을 먹이고 난 뒤에도 집에 있는 가족들한테 맛보이라고 싸주었기 때문이다. 작년 오늘, 나는 난데없이 생긴 팥죽에 기뻐 얼른 한 입 퍼먹고는 희미하게 느껴지는 탄맛에 실망할 수밖에 없었지만 팥죽 구경도 못하는 동짓날보다야 낫지 싶어 흐뭇했다. 

오늘도 엄마는 아픈 다리를 이끌고서라도 굳이 절엘 가야한다고 우기더니, 조금 전 도저히 혼자선 집앞 언덕을 못오르겠다며 데리러 내려오라고 전화를 걸었다. 작년에 이어 이번에도 딸 주려고 얻어온 팥죽 통 무게를 못이긴 탓이다. 통이 그리 그지도 않은데 꽤 묵직한 엄마 가방을 대신 메고 비틀거리는 엄마를 부축해 집으로 올라오며 마음이 참담했다. 절에 갈지말지 망설이던 엄마가 힘겨운 외출을 시도한 건 팥죽 얻어오라는 딸의 은근한 압력 때문이었을까. 그깟 팥죽이 뭐라고! 올해는 팥죽이 맛있게 쑤어졌더라며 어서 먹어보라고 엄마는 자꾸 권했지만, 나는 속이 상해서 배부르다고 거절했다. 아마 올해 동지 팥죽은 평생 최악의 맛으로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년부턴 동지 팥죽 따위 안먹고 말테다. 반평생 동짓날=팥죽으로 알고 살았으니 이제부터 팥죽은 잊고 남은 반평생은 동지를 밤이 제일 길었다가 드디어 점점 짧아지기 시작하는 날로 세뇌할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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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덜투덜

투덜일기 2009. 12. 19. 18:15

옛날에 고모들이 할머니한테 옷을 선물하면 늘 마음에 안들어하셨다. 색깔이 어떻고 소매 길이가 어떻고 <갑삭해야>하는데 너무 무거워서 틀렸다는 둥, 요란해서 이런 걸 어떻게 입냐는 둥... 교환이 가능한 경우면 몇번이나 바꿔오기 일쑤였고, 그게 아니면 할머니가 손수 리폼을 하시거나 그냥 옷장에 처박히기 십상이었다. 고모들은 할머니가 너무 까다롭게 군다면서 웬만해선 옷 선물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나마 울 엄마가 사드리는 옷은 할머니의 취향을 최대한 고려해 골랐으므로 고모들의 안목보다는 성공률이 높았지만, 할머니가 나한테만은 못마땅한 부분을 털어놓을 때가 더러 있었다. "니네 엄마한테는 비밀로 하라"면서...
외할머니도 마찬가지였다. 평생 남자 한복을 맞춰입고 사셨던 외할머니의 외투 선택은 더더욱 까다로울 수밖에 없어 엄마나 이모가 심혈을 기울여 코트를 사거나 심지어 제일 좋은 양모 털실을 수십만원어치 사다가 뜨개질로 떠드려도 결국 그옷은 다른 사람 차지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해서 친할머니, 외할머니 공히 최고의 선물은 <현금>으로 굳어지고 말았던 것 같다.
나 역시 십수년간 두분 할머니께 선물할 스카프나 목도리, 장갑 따위의 선물을 애써 고르기도 했지만, 정말 마음에 들어하셔서 애용했던 선물은 손에 꼽힐 정도다. 무난하게 가자고 산 내복마저도 색이나 레이스가 요란하다 (내 눈엔 정말 수수한 건데도!)는 이유로 슬쩍 다른 사람에게 양도되었음을 안 뒤론, 나 역시 철저하게 <현금> 선물을 추구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할머니들의 까다로움을 겪어보았으면서 난 또 새삼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사실 나는 작년부터 왕비마마에게 <털신>을 사드리려고 계속 살피는 중이었다. 왕비마마가 최근 1년 넘게 애용하는 신발은 딱 하나. 바닥이 푹신해 다리 당김이 덜 느껴지는 마사이슈즈다. 그것 말고 다른 신발을 신고 외출했다간 금세 발바닥과 다리가 아파져 고생을 하는 걸 알고 있으므로, 최대한 발이 편하면서 가볍고 신기벗기도 편리한 (끈을 조여야 하는 마사이슈즈는 신고 벗기가 불편한 게 탈이다)  따뜻한 신발을 찾고 있었다. 그러다 작년에 온라인에서 발견한 복슬복슬 부츠형 털신 하나는 방수가 안된다는 이유로 겨울 내내, 그리고 올해 다시 왕비마마의 실내화로 이용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ABC마트 같은 데 가서도 이런저런 신발을 만져보고 신어보다 마음의 결정을 못하고 있던 차에, ㅌㄹ마을에 새로운 유행 신발이라는 <사눅> 사진을 보고 옳다구나 싶었다. 나 또한 매장에서 유념해 보았던 그 신발이 아니던가! 주
민들이 신어보고 그렇게도 편하다니, 왕비마마의 겨울용 <털신>으로 딱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게다가 엠티에서 실물을 두 켤레나 보고나선 마음을 굳혔다. 그 정도면 바닥도 푹신하고 털 때문에 포근해 올 겨울을 따뜻하게 나는 데 적합해 보여 이왕이면 왕비마마도 한 켤레 사드리고 나도 사 신자고.
해서 얼른 40%나 세일을 하고 있는 마을 추천 사이트에 두 켤레를 주문하고 흐뭇하게 사눅 신발을 기다렸다.
헌데 드디어 오늘 신발이 도착해 엄마에게 보여주니 표정이 좋지 않다. 방수도 안되는 신발을 겨울에 어떻게 신고 다니느냐.. 쭈글쭈글해서 신고벗기 불편하다.. 왼쪽은 크고 오른쪽은 꽉 낀다(좌우 발 크기는 누구나 다르지 않나??)... -_-;;
결국 나는 신기 싫으면 관두시라고, 왕비마마 껀 반품시키면 된다고 버럭 화를 내고 말았다. 어휴... 나는 맨발로 신어도 감촉이 좋아서 마음에 들던데 웬 타박이신지 원...
그제서야 옛날 우리 할머니들의 까탈스러움이 떠올랐다. 할머니가 되면 원래 저렇게 까다로워지는 것인지... 나가서 같이 고르자고 하면 또 싫다고 할 거면서! 죽을 날 머지 않았으니 새옷 새신발 사들이는 거 관두겠다고 하는 것까지 그 옛날 할머니들의 레퍼토리랑 아주 똑같다. 으휴... 
그나저나 비회원으로 구입한 신발인데 한켤레만 반품이 되나 어쩌나 그것도 모르겠고 골치아파 죽겠다. 젠장.. 투덜투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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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에 대하여

삶꾸러미 2009. 9. 15. 18:27
예전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주말에 놀러가 함께 저녁을 먹다 보면 늘 되풀이되는 광경이 하나 있었다. 밥상 아래로 자꾸만 밥풀이나 반찬을 흘리는 할아버지를 타박하시는 할머니의 목소리.
양반은 모름지기 매끄러운 놋쇠 젓가락으로 청포묵 하나를 집어 고개를 숙이지 않고 입까지 가져갈 수 있을 만큼 젓가락질에 능해야한다며 코흘리개 시절부터 우리 손주들에게 엄하게 젓가락질을 가르치셨던 바로 그 할아버지가 진지를 잡수시면서 뭔가를 흘린다는 건 나에게도 충격이었다. 물론 할머니도 가끔 입가에 밥풀 같은 게 묻었는데 느끼지 못하실 때도 있지만, 그런 사실을 잘 아는 할머니는 수시로 입가를 닦거나 스스로 밥상 아래를 살피셨기 때문에 마지막에 밥상을 치우고 나서도 매번 지저분한 할아버지 자리와 달리 할머니 자리는 늘 깨끗했다.
게다가 골초였던 할아버지한테선 늘 심한 담배냄새와 함께 할아버지 특유의 냄새가 났는데, 할머니는 그게 늙은이 냄새라면서 질색을 하셨다. 그러면서 당신은 늙은이 냄새 나면 애들이 싫어한다며 언제나 바지런하게 씻고 로션(할머니 용어로는 여전히 '구루무')을 바르셨는데, 정말로 우리 할머니한테선 노인 특유의 냄새를 느낄 수 없었다.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6개월쯤 다시 할머니와 한집에서 동침하며 살던 시절, 내가 새벽녘에 컴퓨터를 끄고 옆방으로 들어가 부시시 할머니 옆자리로 파고들면 할머니는 나를 꼭 안아주셨는데 팔순이 넘어서도 아기피부처럼 매끄럽고 반들반들한 할머니의 팔다리를 어루만지면 금세 잠이 들었다. 마지막까지도 우리 할머니한테선 흔한 노인냄새 대신 우리 할머니만의 달콤한 체취가 났던 것 같다. 역시나 팔순 넘어서까지 전국 방방곡곡 사찰로 성지순례를 다니실 만큼 정정했던 우리 외할머니한테서도 노인 냄새를 맡은 기억이 없다. 친할머니처럼 잘 때 껴안고 자는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자주 뵙고 팔다리 주물러드리고 했으므로 충분히 체취를 맡을 기회는 있었을 텐데.

내가 늙음에 대해서 새삼 생각하게 된 건 엄마 때문이다. 올해 나이 예순 아홉. 아직도 나에겐 아줌마 영자씨가 익숙하지만,  어느 누가 봐도 할머니라고 인정할 나이다. 요즘엔 특히 젊게 사는 노인들이 많아 칠순 넘어서도 펄펄 날아다니며 건강을 자랑하는 분들도 많지만, 지병도 많고 마음도 약하고 의존적이기까지 한 울 엄마는 그들과는 확실히 다른 그냥 할머니로 늙어가고 계신다. 그간의 여러 병력을 따져본다면 이 정도 회복도 고마워 해야 하는 수준이고, 노인으로선 그게 당연한 건데도 내 마음 속 어린아이는 젊은 엄마를 포기할 수가 없는 모양인지 자연스레 노인의 특징을 보이는 엄마가 매번 놀랍고 속상하고 서글프다가 버럭 짜증이 치민다. 
노인들이 밥풀이나 반찬 양념이 입가에 묻어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건 입주변의 근육과 신경이 노화해 정말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란다. 입술과 혀의 놀림도 자연히 전보다 날렵하지 못해 음식을 입에 넣거나 씹을 때도 흘릴 확률이 높아진다. 특히 울 엄마는 당뇨 합병증으로 말초신경이 상해 손가락 소근육의 움직임이 원할하지 못해 젓가락을 떨어뜨리기 일쑤이니 오죽하랴. 엄마 티셔츠를 보면 하나같이 앞섶에 보일락말락한 얼룩이 묻어 있다. 음식물을 흘린 자국이다. 미리 알아차렸을 때는 얼른 애벌빨레를 하거나 문질러 지우기나 하지, 몰랐다가 그냥 세탁기에 돌리고 나면 나중엔 잘 지워지지도 않는다. 식탁 밑 엄마 자리도 흘린 음식물로 매 끼니마다 어지럽다. 어린 조카 밥먹고 난 자리랑 똑같다고 농담을 하면서도 치우자면 버럭 화가 난다.
진짜 화가 나는 대상은 인간의 노화와 그걸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의 편협함인데, 짜증과 분노는 늘 엄마에게 날아가고 만다. 숟가락질에 서툰 아이가 밥을 흘리는 게 당연한데도, 그걸 치우는 게 짜증나서 애한테 화풀이는 하는 몹쓸 엄마처럼.
며칠 전엔 심지어 울 엄마한테서도 드디어 노인 냄새가 난다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에 사로잡혔다. 노인 특유의 냄새는 피부 노화로 떨어진 죽은 세포와 각질 때문이라 완전히 피할 순 없으니 잘 씻고 향수를 사용하는 수밖엔 없다고 들은 듯하다. 빨간 립스틱 하나 바르는 게 화장의 전부인 울 엄마가 향수를 쓸 리는 없고, 벌써부터 춥다고 매일 샤워는 안할 태세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새삼 느껴진 모양이다. 쓸데없이 민감한 나만 가끔 감지할 정도이긴 하지만, 끈적거린다고 바디로션 바르는 것도 싫어하는 왕비마마의 노인 냄새를 앞으로 어떻게 대처할지 나도 잘 모르겠다.
청력도 나빠져 TV도 거실을 왕왕 울릴만큼 틀어놓아야 하고, 돋보기가 없으면 작은 글씨는 전혀 볼 수가 없으며 기억력도 현저히 나빠져 했던 얘기를 자꾸 되풀이해 당부하는 엄마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그저 자연스러운 노화의 과정인데도 딸로서 선뜻 수긍하게 되질 않는다. 그건 본인도 마찬가지라 나보다 더 속상할 텐데 화를 내는 건 언제나 못된 딸이다.
조금 전에도 늙은 딸 먹으라고 복숭아를 주고 가면서 끈적끈적한 과일물을 사방에 뚝뚝 흘리며 먹고 다니는 엄마에게 와락 신경질을 부렸다. 식탐에도 여러종류가 있지만 울 엄마의 식탐 특징은 입 한가득 넣고 씹는 쾌감을 유독 즐기신다는 점이다. 예쁘고 정갈하게 자른 과일을 포크로 얌전하게 찍어먹는 건 절대 울 엄마 스타일이 아니다. 무조건 통째로 들고 우적우적 크게 베어먹어야 먹는 것 같은 느낌이 드나보다. 아오리나 홍옥사과는 나도 당연히 그렇게 먹어야 제맛이라고 인정하지만, 단물 뚝뚝 흐르는 복숭아 같은 건 좀!!!
당연히 눈도 어두워졌으니 늙은 엄마가 닦는다고 해봤자 끈적임을 말끔히 닦아낼 리 만무해 두어군데는 빼먹기 일쑤인데 걸레질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종목. 결국엔 내몸 편하자고 내는 화풀이였던 거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안계셨던 것도 아니고 팔순 넘어 시들어가시는 그분들을 익히 지켜봤으면서도 늙어가는 엄마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게 잘 안되는 걸 보면 나란 인간은 늙음에 대한 지극한 공포를 품고 있나 보다. 늙기 싫어서 발악하는 사람들의 흉한 모습을 손가락질하면서 말로는 자연스럽게 늙어가는 게 멋진 거라고 주장하지만, 나 또한 다른 방향으로 흉하게 발악하며 억지 용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닌가. 확실히 반짝반짝 빛나는 나이는 지나버렸으니 아쉽고 중년도 노년의 미래도 선뜻 받아들이는 건 싫으니 천상 이게 철 안든 사십대의 청승이 아니고 무언가. 스무살 무렵의 유치한 나는 예순살까지만 열심히 살다가 죽으면 좋겠다고 공언하고 다닌 적이 있다. 아마 그때도 죽음보다 늙음이 더 무서웠던 건 아닐까. 자연스러운 변화이자 이치라고 고개 끄덕이기엔 늙음이 가져오는 심신의 흐트러짐이 너무 못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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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력 날짜보다 음력이 더 편한 할머니 두분이랑 오래도록 가까이 산 데다 이젠 울 엄마도 할머니가 되어 매일 양력과 음력이 나란히 적혀 있는 달력을 들춰가며 날짜계산을 하는 터라 며칠 전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오늘이 칠석이라고. 절에선 칠석(음력 7월 7일이다)부터 백중(음력 7월 보름)까지 계속 특별기도가 있는 터라 왕비마마는 원래 절에 가셨어야 하는데 마침 안과 정기검진일이라 못 가게 된 게 엄청 아쉬운 모양이었다.
왕비마마의 아쉬움이야 내 알 바 아니고, 나는 오늘도 과연 비가 내릴 것인가 그것만 궁금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시방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다.

칠월칠석은 견우랑 직녀가 일년에 딱 하루 오작교를 타고 만나는 날이고, 그래서 기쁨의 눈물이 비로 내린다는 전설을 나는 전래동화책을 보기 이전에 까마득히 어렸을 때부터 들어온 것 같다. 한 여름 낮잠을 자려고 할머니방에 누우면 친할머니는 잠이 쉬이 오도록 머리칼을 살살 쓸어넘겨 주시거나 부채질을 해주면서 이런저런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평안북도 고향에 사실 적에 학교에 가서 글을 배우고 싶었는데 계집애라 학교에 못가게 하는 바람에 오라버니들 책 읽는 걸 귀동냥으로 들으며 독학으로 대강 한글을 익혔다는 이야기며, 몸종 거느리고 꽃가마를 타고서 시집 오던 날 이야기, 한량 남편의 기생질 사건 같은  할머니의 실제 경험담도 있었지만, 견우 직녀 얘기랑 햇님달님 이야기 같은 옛날 이야기도 주요 레퍼토리였다.

어린 나에게 할머니의 옛날 이야기는 곧 진리이기도 했지만, 칠월칠석엔 정말로 해마다 비가 내려 신빙성을 더해주었다. 비가 조금 내리면 기쁨의 눈물이라 살짝 울고 마는구나, 오늘처럼 장대비가 내리면 이번엔 그동안 서로 헤어져 지내는 게 힘들어서 서러움의 통곡을 하나보다, 하는 할머니의 부연설명까지 곁들여지면 어찌나 더 실감이 나던지. 여름마다 옥수수를 사다가 쪄먹을 때 옥수수 끄트머리에 달린 수염을 뜯어내면서도, 햇님달님 호랑이가 마지막에 썩은 동아줄이 끊어져 옥수수밭에 떨어지는 바람에 옥수수 수염이 빨갛게 됐다는 이야기가 생각나서 나는 호랑이 피가 묻어 색이 변했다는 옥수수 수염을 단 한오라기도 남겨놓을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왈칵 울음을 쏟아내던 견우와 직녀가 진정했는지 이 글을 쓰는 사이 어느새 비가 그쳤다. 언젠가는 칠석날 아침에 비가 내렸다가 해가 쨍 났다가 저녁무렵 다시 비가 내린 적도 있었는데, 할머니는 그날 직녀랑 견우가 만나서 기뻐 울다가 행복해져서 해가 났었는데 저녁때 다시 헤어져야 하는 게 슬퍼 또 눈물을 흘리는 거라고 하셨고, 종일 비가 안 내려 이상하다 싶었다가 오후 늦게 비가 내린 어느해 칠석엔 아마 까마귀랑 까치가 게으름을 부려서 오작교를 늦게 만들어줬나 보다라고 말씀하셨다.

어렸을 때는 물론이고 10여년전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나에겐 참 늘 위대한 분이었던 우리 할머니, 이제 돌이켜보아도 정말 참 대단하시다. 할머니가 소싯적에 전해 들었던 이야기였든, 당신이 직접 꾸며내신 이야기였든 칠석날 하나에도 손녀딸에게 이토록 소중한 추억과 다양한 이야기를 남겨주셨다니.
오늘따라 눈물나게 할머니가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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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

삶꾸러미 2009. 8. 10. 16:21

어느 책에선가 국수가 혁명가들의 음식이란 얘기를 봤다. 후루룩 먹고 또 일을 해야하기도 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이 기다란 국수발을 끊지 않고 목으로 넘기며 죽음을 경험하는 거라나 뭐라나. 비약이 심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최소한 국수가 노동자의 음식일 순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입맛 없어도 면발 몇 줄기 삼키는 건 누구나 가능하고, 노동의 중간에 후다닥 끼니를 해치우기엔 국수만한 것이 없는데다 값도 싼편이니까. 물론 전통의 맛을 아직도 이어오고 있다는 우래옥이나 을지면옥의 냉면은 사먹으려면 7, 8천원이나 하는 고가(?)의 음식이 되었지만 몇만원짜리 만찬에 비하면야 뭐. 

국수 애호가였던 이북 출신의 조부모님과 오래 살면서 나 역시 국수를 어려서부터 먹고 자랐고 지금도 퍽이나 좋아한다. 내가 파스타류를 특히 좋아하는 것도 국수와 워낙 친근하기 때문이 아닐까. 암튼 할머니댁에서 살 때나 나중에 분가후 주말에 다니러 다닐 때도 그 옛날 여름이면 점심끼니는 으레 국수였다. 평안도 출신 답게 물냉면 아니면 비빔국수. 멸치다시를 내서 뜨거운 육수에 말아먹는 잔치국수는 아무래도 서울이나 남도쪽 음식인듯 집에서 해먹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그저 매일 냉면냉면... 맛있는 동치미 국물을 늘 마련해놓은 것도 아니어서 인스턴트로 파는 마른 냉면을 사다가 삶고 거기 딸려오는 봉지스프로 육수를 대강 만들어 먹는 건데도 삶은 달걀 하나만 얹어 있으면 어찌나 맛있게 여겨졌던지. 할머니가 신김치 송송 썰어 참기름과 설탕을 약간 넣고 맨손으로 고추장과 함께 조물조물 국수에 비벼 주시던 비빔국수의 맛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어린 시절엔 동네마다 국수가게가 있어서 빨래를 널듯 긴 젖은 국수를 기다란 가로대에 걸쳐 높은 건조대에 척척 올려놓았다가 다 마르면 걷어서 잘라 팔았다. 그땐 쌀이 부족할 때라 혼분식을 장려하기도 했고 안 그래도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집집마다 국수를 참 많이도 먹고 살았던 모양이다. 국수 심부름을 가는 것도 늘 내 차례였는데, 신문지에 크게 한움큼 싸준 국수를 사들고 오며 나는 한줄기씩 그 밀가루 국수를 뽑아 과자처럼 오독오독 끊어 씹어먹으며 즐거워했다. 엄마는 배탈난다고 질색을 했지만, 국수 삶는 걸 기다리는 동안 동생들과 나는 엄마 몰래 얼른 마른 국수 한두 줄기를 뽑아 씹으며 좋아했었다. 여름이면 우리 식구들은 냉면도 좋아했지만 콩국수를 좋아하는 아버지 때문에 유난히 콩국수를 더 많이 해먹었던 것 같다. 학교 급식제도가 막 시작되고 있던 시절이라 그 땐 일주일에 한번씩 우유 대신 유리병에 든 두유가 빵과 함께 나오곤 했는데, 나는 지금이나 그 때나 단맛을 가미한 콩국물을 절대로 못먹는 반면(편식은 안된다며 담임선생이 억지로 먹였다가 다 토해버린 기억이 있다) 소금을 쳐 고소한맛이 더욱 강조된 콩국물은 몹시 좋아했다. 콩을 덜 삶으면 콩비린내가 나고 너무 삶으면 메주냄새가 나기 때문에 콩국수를 맛있게 만드는 건 참 어려운 일이라고 엄마는 늘 푸념을 하면서도 매번 맛있는 콩국수를 만들어주셨던 것 같다. 몇해 전 나도 큰 마음 먹고 흰콩을 사다 삶아 손수 콩국수를 만들어보았지만, 콩이 옛날 콩이 아닌 때문인지 그 옛날처럼 고소하고 뿌듯한 맛은 결코 나지 않았다.

어쨌거나 푹푹찌는 날씨가 이어지고 있는 요즘도 점심끼니는 거의 언제나 국수다. 더욱이 마트에 나가보면 다양한 국수 종류는 물론이고 평양냉면 육수며 콩국물까지 1인분씩 봉지에 담아 팔고 있으니 금상첨화. 이런저런 브랜드 냉면을 죄다 사먹어 보니 굳이 완제품으로 비싸게 호화포장된 냉면을 세트로 살 필요가 없었다. 그냥 저렴하게 포장된 생냉면을 사고 제일 싼 봉지육수를 골라도 완성후의 맛은 거의 똑같다. 반면에 콩국물은 브랜드별로 가격과 맛의 차이가 심한 편인데, 딱히 내 입맛에 맛는 정말 고소한 콩국물은 발견하지 못했으나 그래도 *무원이가 만든 콩국물이 *정원이네서 만든 것보다 낫더라. ^^

그저께 점심은 물냉면, 어제는 콩국수, 오늘은 크림스파게티. 그끄저께는 열무비빔국수를 해먹었을 텐데, 지난주에 사온 육수와 콩국물을 다 먹었으니 내일은 또 다시 비빔국수 차례. 연일 너무 더워서 입맛이 없으니 자꾸만 차가운 것만 찾아서 그러는지 계속 배탈기가 있어서 오늘은 일부러 스파게티를 해먹었는데도 속이 편하질 않다. 이어지는 밀가루 세례를 감히 내 뱃속이 거부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냥 더위와 스트레스에 심신이 지쳐버린 것일까. 그래도 확실히 국수는 식욕이 없는 와중에도 일단 입안에 넣으면 술술 잘도 넘어가니 신기하다. 말년에 이가 부실해 단단한 음식은 거의 못드셨던 우리 할머니가 유독 소면을 좋아하셨던 눈물겨운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밥먹기 귀찮은 심정으론 저녁끼니도 국수로 대충 때우면 좋겠구만 그럴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내일 점심때 비빔국수는 특히 맵게 비벼먹고 나면 늘어진 정신줄이 좀 팽팽해지려나. 국수 한 그릇 먹자마자 얼른 또 컴퓨터 앞으로 돌아와야 하는 요즘의 나를 보면 국수가 노동자의 음식인 건 맞는 듯도 한데, 왕비마마는 무슨 죄람. 고종황제도 냉면을 즐겨먹었다는 이야기로 위로를 해드려야 할까보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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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

삶꾸러미 2009. 5. 10. 16:23

이 제목을 보고 사람들은 제일 먼저 어떤 뜻을 생각할까?
대부분은 <진지하다>의 어간인 진지를 떠올릴 것 같고, 군대와 관련된 직업인이나 갓 제대한 이는 부대에 꾸려놓은 진지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지금 하려는 얘기는 <밥>의 높임말인 순우리말 <진지>다.
숫기가 없던 나는 어렸을 때 <진지 잡수세요>, <진지 잡수시래요>라는 말이 그렇게 하기 어려울 수가 없었다.
끼니 때가 되었는데 마침 할아버지가 마당에서 나무를 손보시거나 집 한켠에 비닐로 덮어 마련한 새장에서 새들을 거두고 계시면 할머니나 작은엄마, 우리 엄마는 꼭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우리 아이들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가서 할아버지 진지 잡수시라고 해라."
그러면 당연히 큰딸인 내가 할아버지를 불러와야하는 것처럼 동생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는데, 퍽 자주 있는 일임에도 나는 저 말이 좀체 입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하지만 웅얼웅얼 쭈뼛거렸다간 할아버지한테 혼쭐이 날 수도 있기 때문에 여러번 심호흡을 한 다음 눈을 질끈감고 어렵사리 말하곤 했다.
"할아버지, 진지 잡수시래요."
그러고는 그 어려운 말을 혹시라도 잘못 발음한 건 아닐까 민망하고 부끄러워 얼른 후다닥 집안으로 도망치듯 들어오기 일쑤였다. 나중에 좀 머리가 굵어지고 나서는 나름대로 머리를 써서 <진지 드시래요>로 좀 바꾸기도 했다. <진지>도 어렵지만 <잡수시다>라는 존칭어가 더 어려웠던 모양이다. 그러다 대학생쯤 되고 나선 더 영악해져 <진지>라는 말을 아예 빼버리고 <할아버지, 점심 드세요> <저녁 드세요> 그렇게 내 마음대로 바꾸어 썼다. 어른 공경에 관해서는 몹시 엄하셨던 터라 어른에겐 뭐든 먹을 것을 권할 때 <잡수세요>라고 해야한다고 어려서부터 귀에 못이박히게 잔소리를 하셨던 할아버지도 그 즈음엔 기력이 쇠하셨던지 별 타박없이 "알았다"고만 대답하셨다.

늘 지나고 나서 후회하는 인간이긴 하지만, 나조차 쓰기 어렵다고 바꿔쓰고 외면했던 <진지 잡수시다>라는 말을 요즘은 더욱 듣기 어렵다는 생각에 자꾸 안타깝다. 마흔이 넘어서까지도 아버지에 대한 호칭을 유아어인 <아빠>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집안에선 거의 반말을 썼던 내가 아버지 생전에 직접 진지 잡수시라고 제대로 된 높임말을 썼을 리 없다. 그나마 나도 끼니때 조카들에게 심부름을 시킬 때 <할아버지 진지 드시라고 해라>고 했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은 해보지만 영 자신이 없다. 늘 하던대로 <저녁 드시라고 해라>고 말했을 가능성이 너무 높으니까.
요샌 너도나도 <식사하다>라는 말을 아무때나 쓰고 있긴 한데, 난 또 그 말이 왜 그리 싫은지 모르겠다.
호감이 갔던 사람이라도 그 입에서 "식사했어요?" "식사하셨어요?" "식사하셔야죠?"라는 말이 흘러나오면 난 순간적으로 오만정이 다 떨어짐을 느낀다. 더불어 <식사시간>이란 말도 싫다. 그냥 점심시간, 저녁시간, 이라고 하면 좀 좋은가. 서류로 만든 일정표 따위엔 어쩔 수 없이 <식사시간>이라는 말을 쓴다고 하더라도 흔히 쓰는 말로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게 나의 편견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나의 생각이 저렇다는 것이고, 현실에서 나의 언어생활은 여전히 상스럽다. 엄마에게 툭툭 던지는 반말은 친근함의 표현이라 극구 주장하며, 화난 거 티 낼때만 엄마에게 존댓말을 쓴다. 평소엔 아무 생각없이 "엄마 밥 먹어!"와 "엄마 저녁 드셔!"를 거의 반반씩 쓰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이럴진대 조카들이 <진지 잡수시다>라는 말을 연습할 가능성은 더욱 낮아질 수밖에 없다. 그 옛날 거의 매일 그 어려운 말을 입에올려야했던 나도 좀체 입이 떨어지지 않았거늘 우리 조카들은 오죽할까. 그래서 얼마 전부터 의도적으로 우리 집에서나마 <진지>와 <잡수시다>라는 말이 사장되지 않도록 써보리라 마음은 먹었는데, 열두살이 된 큰조카는 단 1초도 고민없이 이미 내가 예전에 했던 말바꾸기를 실천한다. 가령 내가 "할머니 과일 잡수시라고 해라"고 하면 공주는 "할머니 과일 먹어!"라고 외친다는 얘기다. -_-;;
나 역시 애써 생각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예전처럼 지금도 그 말들이 좀체 입에서 나오질 않으니, 무작정 조카를 나무랄 수도 잔소리를 할 수도 없다. 이제부터라도 내가 먼저 상스러운 반말을 줄여나가는 수밖에. 이따 저녁때는 기필코 엄마에게 이렇게 말해볼 작정이다. "엄마 저녁 진지 잡수셔." 반말과 높임말의 어중간한 형태라 요상해도 어쩔 수 없다. 갑작스레 극존칭 어미를 쓰면 왕비마마는 늙은 딸이 또 화난 줄 오해할지도 모르니까. 흐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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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꾸러미 2009. 1. 24. 22:52

나이든 어르신들이 죽음을 대하는 방식은 크게 두가지가 있는 것 같다.
(나이들어 죽음을 반기는 사람이야 극단적인 고통에 시달리는 말기환자 이외는 아무도 없으리라 믿지만)
적극적으로 죽음을 대비하고 언급하며 자연스러운 수긍의 태도를 보이는 분들과
철저한 금기사항이나 불경스러운 일처럼 입에 올리기조차 꺼려하는 분들.
"오래살면 뭐하누. 내가 빨리 죽어야지 니들이 편할 텐데."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는 분들이 오히려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는 말도 있으나 실제로 그런지 어쩐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몸소 늙고 병들어 경험해보지 않고는 말이다.

절에서 흔히 여신도들을 <보살님>이라고 부르는데, 여든여섯에 돌아가신 우리 외할머니는 부처에 대한 믿음이 삶의 중심이었고 실제 삶에서도 보살처럼 자식들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늘 베푸는 분이셨다. 불교든 기독교든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은 극락과 천국엘 간다고 믿으니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데는 신앙의 힘이 크게 작용하는 것도 같다. 암튼 내가 지켜본 바에 의하면 우리 외할머니만큼 죽음을 자연스레 대한 분도 없었던 느낌이다.
"나 죽으면 꼭 화장해서 산에다 휘휘 뿌려라."는 외할머니의 말씀은 어려서부터 익히 들었고
환갑 즈음에는 손수 수의를 장만해두었다가 볕좋은 가을날엔 가끔 샛노란 삼베 수의를 툇마루에 내놓고 거풍과 일광욕을 시키셨다.
처음엔 그게 수의인 줄도 눈치채지 못했다가 하필 내가 놀러간 날 툇마루에 놓여 있는 삼베옷을 만나게 되면 공연히 화가 났다. 인간이 나이들면 언젠가는 세상을 떠나야 하겠지만 굳이 그렇게 자손들 코앞에 죽음을 들이밀어 환기시키는 할머니의 태도가 야속했던 것 같다. 묘자리와 수의를 미리 장만해 놓으면 오히려 노인들이 더 장수한다는 속설도 있으나, 우리 외할머니는 장수를 바라며 수의를 장만해놓으신 건 확실히 아니었다. 그냥 그 날을 당신이 손수 준비해두고 싶으신 듯했다.
중한 병환 때문에 이십여년이나 간수해온 수의를 정말로 입게 될 날이 머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을 때, 외할머니는 또 자진해서 영정사진을 찍으라 하셨다. 마당에 흐드러지게 핀 진분홍색 철쭉을 배경으로 의자를 놓고 앉아 나의 사촌동생에게 찍으라고 하셨다는 할머니의 영정사진은 액자에 담겨 1년 넘게 대형TV 위에 놓여 있었고, 나는 입퇴원을 반복하시는 할머니를 뵈러 집에 갈 때마다 그 사진을 보며 꽃속에서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외할머니의 모습에서 정겨움과 함께 얼마 남지 않은 날의 안타까움을 동시에 느끼며 차마 오래 바라볼 수가 없었다.

손수 죽음을 꼼꼼히 준비하셨던 외할머니와 달리, 그보다 10년이나 먼저 돌아가신 우리 친할아버지의 경우엔 남은 가족들이 참 많이 허둥댔던 것 같다. 워낙 정정하셨다가 갑자기 쓰러지시기도 했지만 할아버지는 당신의 죽음을 예상하는 말 따위를 입에 올린 적이 거의 없었다. 여든 중반에 접어드셔선 예전보다 기력이 떨어지시긴 했지만, 그래도 나는 식사량이나 거동의 정도로 볼 때 우리 할아버지가 백살까지 거뜬히 사실지 모른다는 생각을 무작정했다.
이북5도청에서 실향민들을 위한 묘지를 분양한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는 작은아버지들과 논의해 조부모님의 묘자리를 장만했지만 할아버지께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살아계신 노인들의 수의나 묘자리를 미리 장만하는 건 곧이곧대로 빨리 돌아가시기를 바라는 자식들의 불효가 담긴 행동이라고 생각하셨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때 우리는 여든을 넘기고 장수하시는 두분의 존재에 그저 감사할 뿐 머지않은 사별에 대해서는 각별히 신경을 쓰지 않았거나 일부러 생각을 거부했던 듯하다. 그저 오래오래 사시기를 빌며...
그러다 황망히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우린 당장 할아버지의 영정사진부터 고민을 해야 했다.
동네 사진관에서 찍으신 듯한 주민증 사진은 너무 마음에 안들고, 가족사진을 오릴 순 없는 상황이라 결국엔 칠순때 찍으신 기념사진으로 영정사진을 만들어야 했다. 앓지도 않으시고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져 하루만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초상을 치르는 일은 온 가족에게 충격이었고 기막힌 슬픔도 슬픔이지만 장례절차도 낯설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친할머니때도 마찬가지였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우리집으로 거처를 옮기신 할머니와 수십년 만에 다시 동침 파트너가 된 나는 할머니의 매끈매끈한 살결을 어루만지며 잠드는 행복을 최소한 몇년은 더 누릴 수 있을 줄 알았었다. 하지만 겨우 여섯달 만에 또 그렇게 갑자기 쓰러져 의식을 잃으신 할머니는 야속하게도 끝내 할아버지 곁으로 떠나시고 말았다. 멍청하게도 우린 그때도 영정사진을 마련해두지 않은 상태였다. 마음에 드는 사진을 골라보려는 노력을 기울일 여유도 없었고, 우린 또 15년도 넘은 너무 젊은 할머니의 낯선 사진을 장례식장에 모셔놓고 속앓이를 했다. 왜 예쁜 할머니의 모습을 미리 담아놓을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자책하면서...

죽음을 대비하지 않는 성품도 유전인지 우리 아버지 역시 우리 앞에선 당신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시는 일이 거의 드물었고, 우리들 또한 아직 젊고 건강하시다고 굳건히 믿은 터라 언젠가 다가올 일을 대비해야한다는 걸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다만 늘 병치레를 하는 우리 엄마보다 하루만 더 살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시긴 했다. 그래야 자식들한테 부담을 덜 주면서 병든아내를 보필할 수 있으리라는 의미였다.
어쨌든 갑자기 쓰러진 아버지가 대단히 위중한 상태임에도 우린 도저히 희망을 버릴 수가 없었다. 혼수상태가 한달 가까이 이어지며 의사들이 포기를 선언하기에 이르자 집안 어르신들은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우리 삼남매에게 넌지시 이르셨지만 그래도 우리는 아버지의 죽음을 준비하기보다 아버지의 의식이 돌아와 오래도록 병원생활을 하는 경우를 상상하며 고집스레 그에 대한 대비를 의논했다.
결국 아버지의 임종 후 우리는 또 허둥댈 수밖에 없었다.
식구마다 디지털카메라를 사들여 그렇게도 사진을 많이 찍어댔는데, 막상 아버지의 멋진 모습을 담은 독사진은  드물었다. 간혹 퍽 멋진 사진 속에서 아버지는 선글라스를 쓰고 계셨기 때문에 영정사진으론 사용하기 곤란했다. 집안 어르신들은 양복을 입은 모습의 여권사진을 쓰라고 조언하셨지만, 나와 동생들은 아버지가 그렇게도 좋아하시던 등산 나들이 차림의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모든 이들에게 선보이고 싶었다. 숱적은 머리는 반드시 등산모자로 가린 채로.

장례식장에서 다급히 집에 돌아와 내가 골라간 등산복 차림의 사진은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인화지만 있었던 사진이라 확대하는 과정에서 많이 흐려졌고, 아주 최근의 모습은 아니라 나는 또한번 속앓이를 했다. 조카들 사진은 그렇게도 많이 찍었으면서 왜 아버지 사진은 제대로 찍은 적이 없었을까 마음이 아팠다.
물론 가장 멋진 모습의 아버지는 우리들 마음과 머릿속에 들어있지만 그래도 마지막 가시는 고인의 모습이 얼마나 중요한지 나는 친할아버지, 친할머니, 외할머니, 아버지, 그렇게 네번째 장례를 치르며 비로소 깨달은 듯하다.
이번에 아버지를 모신 납골당에 세라믹으로 사진을 붙여달게 되면서 또 다시 사진고민에 빠졌던 우리는(그나마도 영정사진으로 썼던 인화지 사진은 돌려받지도 못했다) 아버지의 옛날 디카파일부터 모든 사진파일들과 앨범을 다시 뒤져야 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렇게도 드물었던, 산에서 찍은 아버지의 독사진을 이번에 찾아냈다는 사실이었다. 새로 저장해둔 폴더의 날짜를 보면 2007년 7월 1일,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이니 그건 분명 내가 컴퓨터 파일들을 뒤져 노트북으로 옮겨 장례식장으로 들고갔던 사진들이었다. 그런데 왜 그 땐 그 사진을 고르지 않았을까 영문을 알 수가 없다. 아니, 그 당시 그 사진을 본 기억도 남아있지 않았다.
슬퍼하느라 다들 경황이 없기는 했지만 노트북에 든 사진들을 나만 본 것도 아니고 동생들과 같이 뒤졌던 것도 같은데;;;

암튼 화질이 그리 좋지도 않고 크기도 작아 마음에 쏙 드는 건 아니지만, 살아생전 우리 아버지의 모습이 가장 잘 담긴 도봉산 오봉 사진을 새삼 발견한 날 나는 슬피 울어야 했지만 그래도 많이 기뻤다.
그러고는 생각했다. 이제부턴 엄마 사진도 내 사진도 많이많이 찍어야겠다고.
독사진은 영판 쑥스러워 거부하던 것도 이젠 좀 덜해야겠다고.
아직 죽음을 대비하기에 이르다면 이른 나이지만 이왕이면 나는 준비된 상태로  언제일지 모를 내 마지막을 맞고 싶다.
남은 이들이 최대한 덜 허둥대도록.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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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손에 자란 아이들이 대부분 그렇겠지만 특히 나는 맏이 부모의 맏딸로 태어난 데다 친할머니, 외할머니 두분이 다 장수하신 편이라 어른이 된 뒤에도 할머니들에 대한 소중한 추억이 많다.
놀라운 건 두 할머니 모두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하고 독학으로 한글만 익히셨으며 내가 국민학교에 다닐 때까지 쪽머리를 하셨을 정도로 외모로는 <구식> 할머니였고 외출할 때 말고 그냥 집에서 입는 옷은 언제나 <몸뻬> 바지였다는 점, 그럼에도 사고방식은 그 누구보다 깨어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1910년대에 태어나신 분들이니 아들과 손자를 더 귀하게 여기는 남아선호사상이야 뼛속 깊이 자리잡은 본능 같은 것일 테지만, 그렇다고 우리 집안 딸들과 손녀딸들이 크게 홀대를 받은 적은 없었다. 게다가 나는 맏손녀딸이다 보니 오히려 특혜를 받는 경우가 더 많았던 것 같다. 예컨대, 나는 7살에 국민학교에 얼떨결에 입학한 뒤 한 학기 내내 할머니의 등에 업혀 등하교를 했다. 당시 전교에서 제일 작은 아이였다는 후문이 있기는 하지만 ㅠ.ㅠ 그래도 매일 손녀딸을 업어 등하교를 시키는 우리 할머니의 정성은 온 동네에 유명했다고 한다. 확실히 두 할머니들은 장손을 각별히 챙기시는 듯해도, 손위 누이인 나에 대한 신뢰는 더욱 전폭적이었고 내 말이라면 거의 무엇이든 다 동의해주셨다.
내가 잘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번역이란 걸 시작할 때도 집안에서 큰 반대는 없었지만 부모님은 내심 걱정을 많이 하셨는데 친할머니와 외할머니는 내 결심을 듣자마자 "쟤는 무슨 일을 하든 똑 떨어지게 잘 해낼 거니까 아무 염려 하지 마라"고 말씀하시며 앞장서서 온 식구들의 우려를 잠재우셨다.
두분은 완고한 보수주의자였던 친할아버지와 달리 이런저런 사회문제를 의논해도 나와 말이 잘 통했고 애들이나 젊은 사람들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며 절대 무시하는 법이 없었다.

친할머니 손에서 8살까지 자란 나는 당연히 어린 시절 이 세상에서 할머니가 제일 좋은 사람이어서 아빠와 엄마보다 순위가 앞섰고, 외할머니와는 친할머니만큼 곰살맞은 관계는 아니어도 늘 나를 감싸주시는 커다란 산 같은 분이라고 여겼다. 두분 다 서울 하늘 아래, 멀지 않은 곳에 사셨으니 그만큼 자주 만나며 지낸 덕분도 있겠지만 나에게 할머니의 존재는 참으로 크고 공고했으며 무한한 신뢰와 존경의 대상이었다.
친할머니는 허리가 심하게 굽고 심장이 약해 말년엔 바깥출입이 거의 불편하시긴 했지만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집안에선 단 한시도 쉬지 않고 걸레질과 정리정돈을 하시던 바지런한 분이었고, 외할머니는 마지막 1, 2년을 암 때문에 괴로워하셨지만 그 전엔 여든을 넘긴 나이에 전국 방방곡곡의 사찰로 성지순례를 다니실 정도로 정정하셨다. 그랬기에 내 기억에 남은 두분 할머니는 늘 자애로운 미소에 깔끔하고 단아한 모습으로 십여명이나 되는 손자 손녀들 용돈까지 일일이 챙기시는 대단한 분들이었다.

그런데 속 상한건 할머니가 된지 오래인 우리 왕비마마 때문이다.
우리 조카들은 고모한테 열광하는 것과 달리 할머니한테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다. 워낙 울 엄마가 손녀 손자들을 각별이 예뻐하고 안아주고 사족을 못쓰는 성품이 아니다 보니, 예민한 아이들이 제일 먼저 알아차린 때문이다. 아이들을 워낙 예뻐하셨던 울 아버지는 언제나 온 몸을 던져 손녀손자들과 놀아주셨지만 오히려 엄마는 그렇게 손주들에게 헌신적인 아버지를 못마땅해했고, 내가 보기엔 당신에게 쏟아져야 할 남편의 사랑이 손녀손자들에게 나뉘어 가는 것조차 질투하시는 듯했다. 내가 조카들에게 몸바쳐 봉사할 때도 겉으로는 늙은 딸 피곤해 할까봐 염려하시지만, 사소한 일로 어린 손녀딸과 말다툼을 벌이는 걸 보면 아마도 속마음은 무수리의 온전한 보필을 당신만 받고 싶은 건 아닌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한 마디로 울 엄마는 <손주들은 오면 반갑고 가면 더 반갑다>는 쌀쌀맞은 속담의 신봉자다. 아이들이 그리워서 거의 매일 손주들에게 전화를 걸어 예의 귀찮은 질문(숙제 다 했니? 밥 먹었니? 유치원에 잘 갔다 왔니?)을 던지고는 쌀쌀맞거나 시큰둥한 반응(그거 어제도 물어봤잖아? 할머니는 왜 만날 밥먹었느냐는 거만 물어요?)에 마음 상해 하고, 손주들이 놀러오기를 학수고대하는 한편, 떼로 몰려온 조카들이 마구 뛰어다니면 정신없다고 타박을 하시니 말이다.
그런 상황이니 눈치 빤한 조카들은 심지어 얼마 전부터 헤어질 때 할머니 볼에는 뽀뽀를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_-;;

어린 조카가 장난삼아 일부러 나한테도 뽀뽀를 안해주고 까탈을 떠는 경우도 있으니 그러려니 하시라고 위로를 하긴 하지만, 어느새 머리가 굵어져 할머니한테 툴툴거려도 내심 할머니의 건강을 염려하고 배려하는 정민공주 이외엔 나머지 조카들이 가족모임이 있을 때마다 은근히 할머니를 따돌림하고 무시하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녀석들의 눈에 비친 할머니는 늘 아프고 온종일 TV나 보고 자기네랑 놀아주지도 않고 귀찮고 빤한 질문이나 해대는 사람인 모양이다. 왕비마마 본인도 그게 섭섭해서 마음 아파하시지만 정작 조카들을 대할 땐 ~~ 하지 마라, 고모 괴롭히지 마라, 뛰지 마라 따위의 잔소리만 해대니 관계가 호전될 리가 없다.
할아버지와의 추억을 너무 일찍 빼앗겨 버린 조카들에게 할머니의 추억만이라도 오래오래 감동으로 남겨주고 싶은데 나로선 어떻게 도와야하는지 알 수가 없어 안타깝다. 조카들을 업어주기엔 울 엄마의 건강이 너무 나빠지셨고 할머니들과 윷놀이, 공기놀이를 함께 하던 나와 달리 요즘 아이들은 홀로 하는 컴퓨터 게임에 너무 익숙하다. 조카들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낯선 게임용어와 컴퓨터 용어에 왕비마마는 더욱 절망하는 판국이니 원...
우리 왕비마마와 어린 조카들의 전격적인 관계 개선을 위한 묘안은 어디 없을까?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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