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

삶꾸러미 2007. 3. 15. 15:23
설날 전에 대청소를 하고 나서 처음이니까
딱 한달만에 청소를 했나보다.

한달만에 하는 청소인데도 지난번처럼 진공청소기를 요란하게 돌리고 먼지 털고 걸레로 후벼 파 구석구석 닦아대는 대청소 개념은 절대로 아니고...
고양이 세수하듯 알량하게 소형 청소기로 머리카락만 없앤 다음 걸레 빨기도 싫어서 '빨아쓰는 키친타올'을 물에 적셔 방방마다 마루마다 닦아준 것이 끝이다.

물론 한달간 구석구석 쌓인 먼지는 대단했다.
설날 전후로 엄마가 편찮으셔서 살림은 완전히 내가 도맡았는데
거기다 3주 가까이 병원생활도 하다보니 집안 꼬라지 돌아볼 여유는 거의 없었다고 핑계를 댈 수도 있겠지만, 청소에 관한 한 나보다 인내심이 더 없으신 아버지까지 그간 청소를 등한시한 건 좀 이상했다.
암튼 청소랍시고 해놓고 나서도 전혀 개운하지 않을 만큼 엉터리지만
그래도 안한 것보다는 낫겠지.. 위로하기로 했다.

나는 정말로 청소하는 게 싫다.
그럼 더럽게 사는 걸 좋아하거나 최소한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해야 하는데, 또 어지럽고 더럽혀진 공간에서 지내면서는 짜증을 내는 못된 버릇이 있다.
청소는 안 하면서 투덜대기만 하는, 그야말로 '짜증 지대로'의 인간인 것이다.

그나마 오늘 청소도 조카들이 온다고 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한 보름쯤 또 눈 딱감고 투덜거리며 눈에 띄는 머리카락과 방구석에 모인 먼지 뭉치만 집어 버리며 겅중겅중 더러움을 피해 건너다니면서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청개구리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조카들이 온 집안을 뛰어다니며 놀려면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라도 청소를 해놓아야 한다.
오늘은 제발 숨바꼭질하자고 장롱 옆구석 같은 데로는 들어가지 말기를...
귀찮아서 거긴 청소 안했다. -_-;;

핑계 같지만 청소를 싫어하고 또 잘 못하는 건 아무래도 부모님을 닮은 것 같다. ^^;;
늘 반질반질 윤이 나고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이모네 집엘 가보면
이모랑 이모부가 늘 걸레를 옆에 두고 사시는데,
사촌동생 녀석들도 청소며 정리하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반면에 울 부모님은 옛날부터 청소하는 게 늘 큰일 치르듯 가끔 해주는 행사였다. ㅋㅋ
그리고 대청소라고 다 해놓고 나서도 집안에 널브러진 물건들은 늘 그자리에 있었던 기억이 있다. 진공청소기 없던 시절, 비로 쓸고 걸레질할 때 물건을 들었다가 다시 고대로 내려놓은 거다.
장가간 두 동생놈들의 와이프가 그래서 남편들한테 청소 시켜놓고선 만날 나한테 흉을 본다. 어쩜 청소를 그리 못하는지 모르겠다고... ㅋㅋ 그러면 나도 똑같은 족속이라고 고백하며 몹시 계면쩍다.

청소 잘하는 사람들을 보면 역시 확 다르다.
하다 못해 2, 3살 때부터 정리정돈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이던 우리 정민공주는
한심스러울 정도로 지저분한 고모의 화장대를 가끔 정리해주겠다고 나서는데...
공주가 정리해놓은 화장대를 보면 기가 막히다.
우선 걸레로 화장품 통마다 쌓인 먼지를 하나하나 닦고 (나는 그냥 대강 후루룩 위만 닦고 마는데!) 키순서대로 가지런히 늘어놓은 뒤, 나중에 자기가 놀러올 때까지 정리된 모양을 흐트러뜨리지 말라고 나에게 핀잔을 한다. ^^;;
다 제 엄마의 청소 솜씨를 익히 봐온 까닭일 게다.
고모나 할머니는 절대로 그런 청소 솜씨를 갖고 있지 않으니까.

이제는 진공청소기 한번 돌리면 걸레질도 훨씬 수월해지긴 했지만
게으름뱅이는 진공청소기 꺼내서 모터소리 요란하게 돌려대는 것도 귀찮아죽겠다.
기어다니는 어린 조카가 올 때는 또 큰맘먹고 스팀청소기로 바닥도 닦아주는데, 아...
청소 하고 나서 걸레빠는 일은 청소하는 일보다 백배 더 싫다! ㅜ.ㅜ;;

진공청소기와 스팀청소기가 같이 달려 한 쾌에 청소가 가능하다는 청소기 선전을
홈쇼핑으로 보면서 하나 장만해둘까 하는 생각이 한 5초쯤 들었던 적이 있는데
결국 관뒀다. 청소 싫어하고 게으름이 하늘을 찌르는 내가 1년에 그걸 몇 번이나 써먹겠나 싶어서.
게다가 청소는 바닥만 하는 게 아니잖아?
구석구석 선반이며 책장이며 책상에 쌓인 먼지 청소... 또 그게 얼마나 귀찮은 일인가!
으이구...

그런데 생각해보면, 청소에 관한 한 유전인자는 우리 부모님 대에서 돌연변이를 일으켰나 보다. 친할머니, 외할머니 모두 대단히 깔끔한 분이셔서, 놀러가면 늘 먼지 한 톨 없었으니 말이다.
친할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할머니 모셔와 함께 살았던 6개월간...
할머니는 아침 저녁으로 우리가 자는 방과 마루를 걸레로 닦으셨다.
우리집 구조가 좀 야릇해서 다가구 주택 2층 2칸을 터서 쓰는 형태라
엄마네 집쪽에도 따로 방들과 마루가 있고
내가 사는 집쪽에도 작게 별도의 마루와 방이 있는데 ㅋㅋㅋ
아침 저녁으로 할머니가 걸레질을 해서 말끔하고 반들반들 윤이 나는 우리집(?)을 보면서
ㅎㅎ 당시 엄마네집(?)도 무던히 걸레질에 힘썼던 것 같다.

그러다 할머니가 갑자기 뇌졸중으로 돌아가시고
거의 반쯤 넋이 나가서 만날 할머니 사진 보며 울던 나는 할머니의 유업을 잇는다며
한동안 아침저녁 걸레질을 계속했었다. 물론 두어 달쯤 하다가 게으름의 본능이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아침저녁 걸레질을 하면서 느낀 건, 반나절 만에 문틈으로 들어오는 먼지가 참 대단하구나.. 하는 것과 하루 두 번씩 걸레질을 하니, 따로 청소랍시고 힘들여 할 일도 없었다는 거였는데
10년도 넘게 훌쩍 지난 지금은
겨우 한달에 한 번 걸레질 하는 것도 귀찮아 하고 있다.
책장 위에 놓인 사진 속에서 할머니가 나를 곱게 흘겨 보시는 것 같다. ㅎㅎㅎ

그치만, 할머니 난 정말 청소하는 게 싫단 말이에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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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려나
청소가 싫고 청소에 소질도 없는 게으름뱅이인 나는
미세먼지까지 모조리 빨아들일 수 있고, 오래된 집의 문턱도 척척 넘어다니며 소리없이 혼자서 청소를 해주는 로봇청소기가 어서 개발되어 나오기를 눈빠지게 기다릴란다.
얼마 전부터 저혼자 돌아다니며 방방마다 청소를 해준다는 무선 로봇 청소기가 혼수감 필수품이라는 얘길 후배한테 듣고 전격 장만해놓으려고 유심히 봤더니만, 방문턱을 없앤 개조 아파트 같은 데나 유용할 뿐이란 얘기에 좌절했었다.
걸레질까지 도맡을 수 있는 보급형 청소 로봇이 나와준다면야 금상첨화겠지만, 그건 도무지 내 생전에 이뤄질 것 같지 않으니 하는 수 없지.

머리 좋은 인간들이여, 어서 개발에 박차를 가해주시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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