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

삶꾸러미 2007. 10. 14. 17:30
친구, 지인, 또는 그저 '아는 사람'의 범주로 분류되는 사람들과 나의 취향이
꼭 맞아 떨어질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성격이 정 반대인 사람들끼리 만나야 잘 산대"라는 말은 걸핏하면 툭탁거리는 커플들을 위해
확실히 조작된 위로이며, 실제로 잘 지내려면 친구든 가족이든 공통점도 많고 취향도 엇비슷해야 한다고
나는 굳게 믿는다.
때로는 비슷한 취향과 공통점 때문에 뜻밖의 상황에서 친구가 되기도 하지 않는가 말이다.
친구라 해도 당연히 취향이 같아야 우정의 깊이도 더 깊어지는 듯하다.
다만 친구의 경우엔 가족이나 파트너와 달라서, 이해심과 봐주기의 여유가 한껏 늘어나기 때문에
비록 취향이나 성격이 다르더라도 참아주고 넘겨주고 눈감아주게 되는 것 같다.

오늘 만난 지인들과 오랜 수다를 나누던 중에 친구와 떠나는 여행 이야기가 나왔다.
한국사람은 제대로 친해지려면(또는 그 사람을 잘 알아보려면) 밥(때론 술) 같이 먹고, 여행 같이 가고, 고스톱 한 판 쳐봐야 한다는 말이 있듯, 여행은 친구에 대한 새삼스러운 발견의 경험일 때가 많다.
절친한 친구가 아니면 쉽사리 동행을 결정하지 않겠지만, 어쨌든 '잘 안다고 생각했던' 친구가 여행길에서
의외의 골칫거리나 '웬수'로 돌변하는 경우도 있고, 우정과 이해의 폭이 더욱 돈독해지는 때도 있다.

나는 두 부류의 친구를 모두 경험해 보았는데,
솔직히 고백하건대 여행길에서 *웬수* 같은 존재임을 깨달았던 친구는 나와의 역사가 가장 오래된 친구임에도
그뒤로 많이 멀어졌다. 최소한 내쪽에선 그렇다는 뜻이다. ^^;;

여행뿐만 아니라 그저 사소한 만남의 자리에도 취향과 배려는 중요하다.
어떤 만남에서도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약속을 선도하는 주축이 있기 마련인데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내가 그런 역할을 도맡는 건 꽤나 드문 일이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그런 역할을
담당했을 경우 상대방의 취향에 맞을지 장소와 먹거리를 고민하는 일은 쉽지가 않다.

가령, 중년 아저씨가 되어버린 친구들은 주문하기도 복잡한 커피전문점이나 파스타집을 죽도록 싫어한다.
심지어 나이 40 넘도록 스파게티를 단 한번도 안 먹어본 이도 있을 정도다. ^^
그들이 선호하는 곳은 뻔하다. 편안하게 방바닥에 앉을 수 있는 고깃집이나 찜, 탕 같은 음식을 취급하는 곳이면 어디나 합격점이니, 이렇게 좋고 싫음이 분명한 친구는 차라리 별 문제가 없다.
골칫거리는 "네 마음대로 해. 난 아무데나 좋아."라고 *말*은 해놓고 가타부타 트집을 잡는 친구다.

지인들 중에선 그나마 활동범위가 많은 내가 아는 곳도 많을 것 같다며
가끔은 만나자마자 괜찮은 맛집이나 분위기 좋은 찻집, 커피집을 데려가라는 요구를 받는 경우가
드문드문 있다.
취향을 빠삭하게 아는 절친한 지인이라면 어딜 데려가든 걱정할 것도 없지만
어중간한 관계에선 은근히 고민스럽다.
나름대로 신경써서 데려간 곳인데도 취향에 따라 반응은 천차만별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사방에서 주워온 듯 똑같은 의자가 드물고, 테이블이라야 몇개 되지도 않아 긴 탁자에 남들과 나눠 앉아야 하지만 커피와 코코아 맛은 일품인 찻집엘 가서도
어떤 이는 분위기 독특하다, 탁자의 나뭇결이 마음에 든다, 코코아랑 와플 맛있다, 소품이 아기자기해서 재미있다...라고 내 선택을 칭찬해주는 반면에
어떤 이는 인테리어가 거칠어서 분위기가 을씨년스럽다, 이러고도 장사가 되는 게 신기하다, 와플와플 난리라서 어떤 맛인가 궁금했더니 별 맛도 없는 게 가격만 비싸다, 자기 같으면 20년 전에 갖다 버렸을 물건들을 빈티지라면서 생색내는 게 웃기다... 따위의 타박만 하기도 한다.

아 그럼 독특한 분위기의 찻집을 데려가라고 하질 말든가!!! -_-;;

농담삼아 늘 반어법을 쓰는 친구라든가, 매사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며 씹어대는 걸 사심없는 취미로 삼은 친구라면 또 나 역시 아무렇지도 않다. 취향이 촌스럽고 감각이 없다고 웃으면서 된통 빈정거려주면 그뿐이다. 상대 역시 내 반응을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을 테니까.
그러나, 내 취향과 노력을 감안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최소한 상대방에 대한 배려마저 잊은 채 시종일관 구시렁구시렁 타박을 일삼는 지인에겐 정이 똑 떨어질 수밖에 없다.
물론 나와는 맞지 않는 본인의 취향을 강요하는 이 또한 경계 대상이다.

책이든 영화든 먹거리든, 사람마다 취향은 가지각색임을 잘 안다.
그리고 나란 인간은 특별히 고급스럽거나 까다로운 취향을 지니지도 못했고, 최신 유행을 좇아서 차를 마시러 다니고 맛집을 찾아다닐 만큼 부지런하고 엽렵하지 못하다. 다만 뭔가 맛있고 멋스러운 곳을 '발견'하면 그 기쁨을 가족이나 지인들과 나누고 싶을 뿐이다.
그들도 나에게 그래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고.

말로는 모든 측면에서 사회구성원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부르짖으면서
뒷구멍에서는 은근히 주변 이들에게 취향의 공유까지 바라는 내 마음이 모순이란 것도 인정한다.
그렇기에 취향의 다름이 인간에 대한 실망이나 감탄으로까지 이어지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자꾸만 마음이 좁아지고 너그러움마저 줄어드니 안타깝다.
살면서 점점 더 편협한 인간으로 변해가진 말아야 할 터인데,
아무리 돌아봐도 가는 방향이 딱 그쪽이다. 허허.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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