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일이 되는 걸 두려워했던, 아니 두려움까지는 아니더라도 괴로워했던 이들이 주변에 꽤 된다. 배우는 쪽이든 가르치는 쪽이든 학교와 새학기는 기피의 대상이 아닐까. 봄 방학을 끝으로 좋은 시절 다 지나갔다는 아쉬움과 함께. 나야 그런 삶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오늘 뿌듯한 축배를 들어야할 것 같다.

이른바 보따리 장수를 하고 있는 지인 하나는 지난 방학동안 생병을 앓다가 개강을 앞둔 며칠 전까지 감기몸살이 낫지 않아 큰 걱정이었다. 사단은 새학기 교양영어 강의에서 이유 없이 떨려났던 일이었다. 연말까지만 해도 강의일정 조정안에 대한 연락을 주고받았던 대학에서 1월이 다 지나도록 강의 계획서 내라는 통보가 없더란다. 15년째 그 대학에서 교양영어를 맡아온 지인은 순진하게 학사일정이 늦어지는 줄로만 알았단다. 헌데 그게 아니라, '코디네이터' 역할을 맡은 영어과 교수가 아무런 이유 없이 강사들 여덟 명을 그야말로 단칼에 잘라버렸더란다. 나의 지인은 자기가 나이도 많고 박사학위 미소지자라서 짤렸나보다 했더니, 박사학위도 소지한 젊은 여자 강사도, 박사학위 소지한 적당한 경력의 남자 강사도 포함되어 있다고 했다. 납득할 만한 이유나 원칙도 없는 독단적인 인사행정이었던 셈이다.

일언반구 언질도 없이 그런 만행을 저지른 교수는 그렇게 지시해놓고 방학동안 가족이 있는 호주로 날아가버렸다나. 분노한 나의 지인은 결국 구구절절 설득하는 메일에 이어(읽지도 않더란다) 강경한 메일을 계속해서 그 담당교수에게 보냈고, 메일이 계속 씹히자 담당 조교를 통해 대신 연락을 취해 거의 협박에 가까운--인권위원회와 교과부에 청원함은 물론 학교앞 일인시위도  불사하겠다고--내용을 통보하는 '단독투쟁' 끝에 교무과장의 개입으로 잘렸던 강사들 모두 늦게나마 한 과목씩 강의를 재배당 받을 수 있었단다. 그 일을 겪고 나서 마무리가 되자 덜컥 병이 났던 것인데, 심성 약하고 소녀같기만 하던 그 지인이 그런 싸움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내가 못믿어하자 재미삼아 보라며 증거 메일까지 보내주었다. 

이번 학기야 그럭저럭 다시 강의를 맡기는 했지만, 담당 교수와 정면대결을 했던 자신은 15년 역사를 뒤로 하고 다음학기엔 그 대학을 떠나야할 것 같다고 말하는 지인의 어깨는 축 늘어져 있었다. 잊을만 하면 한번씩 대학 강사의 자살소식이 들려오는 이유가 딴 게 아니라고. 그리고 하루이틀 겪은 건 아니지만 잘난 전임교수라는 사람들이 더러 부리는 포악이 상상 이상이라고. 그 인간과 학교에서 마주칠 생각을 하면 오금이 저리다고.

제자를 폭행하고 온갖 권력형 교내 비리를 저지른 유명 국립대 교수가 최근 파면되는 사건도 있었지만, 대단히 존경받는 직업으로 생각되는 교수는 사실 내가 보기에 그리 멋진 인간상과 거리가 멀다. 내가 좋아해마지않는 선생님이 자조적으로 원래 교수란 '사회성 부족하고 어딘가 좀 이상하고 외골수인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라고 한 적이 있는데, 그 말이 딱 맞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좀 이상한' 성품 부분이 종종 이기심이나 독단으로 발현되는 교수들을 꽤 많이 봤기 때문이다. 그 유형에서 벗어나는 교수들은 또 지나치게 정치적이라 그 조직내에서도 최고자리로의 승진을 꿈꾸거나 최대한 약자들에게 권력을 휘두르거나, 아예 폴리페서가 되어 정계로 진출하는 식이다.

실제로 겪어본 은사님들 가운데 유능하고 존경스러운 교수 유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려서부터 익히 소문으로 듣고 눈으로 보아온 교수들은 절반 이상 부패하고 무능하고 이기적인 군상이었다. 교수 임용때부터 실력보다는 인맥 학맥 동원해 '룸살롱 접대'로 점수를 따는 인간이 없나, 각종 연구비는 그냥 일종의 공짜 보너스로 여기며 논문 한편 가지고 이리저리 제목만 바꿔 돌려 싣기를 하질 않나, 산학협동이라도 해서 대형 프로젝트라도 진행할라치면 제자들 종 부리듯 주무르며 사리사욕을 채우질 않나. 도제식 수업이 이루어지는 예술대학 뿐만 아니라 막대한 연구비가 오가는 공대나 이과대 쪽에서도 교수 비리는 늘 있어왔고, 진로나 눈앞의 이익(매달 학생들에게 지급되는 연구비나 공연, 수상 기회 따위) 때문에 제자들은 함부로 교수에게 대들 입장이 아니었다.

소문으로 듣자니 어느 교수는 자신의 부친상에 대학원생들을 '조'별로 짜서 장례식장 도우미로 보내달라고 당당하게 과사무실에 요구했단다. 지도교수의 부친상에 문상을 가는 건 당연한 일이다. 제자 입장에서 막상 문상을 가고보니 일손이 모자라는 것 같아 자진해서 도울 마음이 생길 수는 있을 것이다. (물론 나는 절대 그런 생각 안하겠지만!) 그러나 노동 분담제도 아니고, 몇시간씩 육개장 쟁반을 나르며 학생들이 노동을 제공하는 걸 당연시하는 교수의 구태가 놀랍다. 하기야 그러니까 문제의 그 음대교수도 팔순 노모의 산수연에 아무 거리낌 없이 제자들을 대거 동원해 합동 공연을 했겠지. 아니, 본인이 굳이 학생들을 동원하지 않았더라도 학생들이 먼저 눈치로 알아차리고 축하공연을 하겠다고 자청했을지도 모르겠다. 안 그랬다간 나중에 무슨 화를 당할지 모르니까.

아직도 진심으로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을 훌륭한 교사/교수가 많다고 믿고 싶지만, 공교육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지면서 이 사회에서 제대로 된 교권은 존재하지 않는 것도 같다. 학교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평가해서 분류하는 행정기관으로 점점 자리잡고 있고, 대학마저도 하는 짓거리를 보면 그냥 고수익사업이지 '배움의 전당' 느낌은 사라졌다. 그러다 보니 교사도 교수도 '스승'이 아니라 그저 한낱 조직원으로서 학생들에게 또는 상대적 약자인 강사들에게 군림하고 권력을 휘두르는 것이 아닐까. 

수년간 보따리 장수를 전전하다 어렵사리 전임자리를 꿰차고 드디어 '교수님' 칭호를 듣게 된 친구 하나는 암암리에 학연지연으로 나뉜 교수패거리들 속에서 현명하게 운신하는 것이 너무도 어렵고, 강의평가제로 학생들 눈치도 봐야하니 교수직이 철밥그릇이라는 얘기는 다 옛말이라고 불평한다. 열심히 수업준비해서 깊이 있는 강의를 이어가면 대번에 어렵다고, 취직해야하는데 학점 짜게 준다고 싫어한다나. 이곳저곳의 이야기를 들어봐도 머리 나쁜 나로서는 어디부터 어떻게 손을 대서 개선해야할지 도무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저 그런 부패한 조직에 연루되어 개강을 두려워하는 상황이 아니란 것만을 기뻐하기엔 찜찜하다. 그래도 길은 그것밖에 없다며 교수를 꿈꾸는 수많은 친구들, 후배들의 앞날을 위해서라도 뭔가 크게 바뀌긴 바뀌어야 할 텐데 말이다.

하여튼 날씨도 쌀쌀한데 개학과 개강을 맞은 가엾은 모든 이들 씩씩하게 하루를 마치고 돌아오기를 빈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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