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타령

추억주머니 2010. 1. 4. 15:50

여기다 눈 얘기를 자꾸 쓴 탓은 아닐 텐데 오늘 서울에 내린 눈은 40년만에 처음이라는 대폭설이다. 2시쯤 본 뉴스에서 서울 적설량이 현재 25.8cm라고 했음. @.@
언덕 중턱에 사는 나로선 이런 날 외출이 무서워 그냥 집에 콕 박혀 있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인데, 집앞 골목길은 여러 이웃들이 힘을 합쳐 거의 다 쓸고 길을 냈지만, 골목에서 모퉁이를 돌아 이어지는 큰 언덕길 눈밭은 이미 죄다 밟히고 다져져 비나 넉가래로는 치울 형편이 아니라 염화칼슘만 여기저기 뿌린 뒤 모두들 포기하고 돌아서야 했다. 위쪽 동네에서도 사람들이 눈을 치우며 내려와 골목 어귀에서 만났는데, 비질을 하는 부모들 옆에서 신나게 뛰노는 아이들을 보니 옛날 생각이 절로 났다.

나의 본적 주소지이자 (지금은 동네가 완전히 달라졌지만 주소에도 <산31번지>라고 되어 있다!) 내가 어린 시절 살던 할머니댁은 언덕 위에 있었다. 조부모님은 이북에서 피난 내려와 부산서 살다 다시 상경하셨으니 서울 변두리 산동네에 정착한 게 어느정도 이해가 가는데, 서울 토박이인 외할머니댁도 똑같이 한강 건너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점은 좀 신기하다.

아무튼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면 할머니댁이든 외할머니댁이든 언덕길에서 비닐포대 썰매를 타며 꽤나 즐거워했다. 물론 그 때도 겁이 많아서 다른 아이들처럼 경사가 제일 급한 곳부터 길게 타고 내려가진 못하고 완만한 부분만 즐겼는데, 우리가 그렇게 비닐포대로 반들반들하게 언덕길을 빙판으로 만드는 건 어른들에게 대단히 혼날 일이어서 조만간 동네 어른들 가운데 누군가 연탄재를 들고 나와 우리의 놀이터를 망가뜨리기 십상이었다.
어른들이 그렇게 우리의 썰매장을 망가뜨리고 나면 아이들은 어른들에 대한 복수를 감행했다. 연탄재가 덜 뿌려진 곳을 골라 일부러 더욱 매끄럽게 발로 문질러 눈을 다진 뒤에는 마치 처음 눈이 내린 상태처럼 보이도록 눈을 보슬보슬 뿌려놓는 것이었다. 혹시라도 재수없게 그곳을 밟은 사람은 영락없이 미끄러져 자빠지도록! 지금 생각해보면 아찔하지만, 그땐 그렇게 만들어놓은 빙판 언덕길에 누군가 와장창 넘어지는 걸 구경하는 게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ㅎㅎㅎ

오늘 내다본 집앞 언덕길도 그 오래 전 할머니댁 언덕처럼 꽤나 반들반들 발자국이 찍혀 있어, 비닐포대만 있다면 한번쯤 주욱 미끄럼을 타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한쪽 옆에 줄지어 서 있는 자동차에 처박히면 어쩌나 싶기도 하고, 이 동네에 이상한 여자 산다고 소문 날까봐 차마 시도는 하지 않기로 했다. 솔직히 누군가 아이들 가운데 비닐포대를 구해 썰매를 타고 논다면 슬쩍 한번 빌려타자고 나설 자신은 있는데, 요즘 아이들은 썰매를 눈썰매장에서나 타는 것으로 아는지 아쉽게도 저 아까운 언덕길에서 썰매 타고 노는 아이가 한명도 없다.

아무래도 나는 언덕과 인연이 많은 운명인지, 내가 다녔던 중고등학교 모두 산꼭대기에 자리잡고 있었다. 주소로는 무려 <종로구>인 서울 중심지에 그렇게 높은 학교가 있다는 걸 사람들은 아직도 잘 모르는 것 같다. 지금이야 염화칼슘이 흔하지만 내가 중학생 때는 염화칼슘의 존재조차 알지 못할 시기였다. 해서 겨울방학 이전에 눈이 좀 많이 내린다 싶으면 우리 학교는 무조건 단축수업을 했다. 산꼭대기라 워낙 춥기 때문에 우리 학교는 겨울 교복으로 바지를 입어도 무방했는데, 특히 추위에 약한 나는 교복 바지를 2개나 맞춰 돌려 입으며 당연히 안에 내복까지 껴입고 다녔다. 마침 근처에 화교학교가 있기도 해서, 중학교 시절 나는 교복바지 때문에 화교학교에 다니느냐는 질문을 참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어쨌거나 눈이 심상치 않게 많이 내리는 날엔 어김없이 단축수업을 알리는 방송이 흘러나왔고, 우리는 환호를 하며 하산준비를 했다. 경사가 3, 40도 이상인 언덕이라 그야말로 눈밭 하산길은 만만치가 않아, 기다란 동앗줄 같은 밧줄이 군데 군데 드리워졌고 체육 선생들이 중간에 서서 벌벌 기는 아이들의 손을 잡아주기도 했다. 그때도 멋내는 데 열중한 아이들은 제 아무리 추워도 반드시 치마 교복에 메리제인슈즈 같은 학생 구두를 신고다녔지만, 나처럼 바지교복을 갖춰입은 아이들은 눈이 많이 내리면 책가방을 썰매삼아 타고 내려오는 경우도 있었는데, 2학년때였던가 그날은 정말 순식간에 폭설이 내려 책가방 썰매가 얼마나 스릴 넘치고 재미나던지, 몽둥이를 휘두르는 (길 미끄럽게 한다고;;) 체육선생을 피해 몇번이나 오르내리며 책가방 썰매를 즐긴 적도 있었다.

하지만 같은 재단에 건물만 달라진 고등학교에 올라가자 눈오는 날 단축수업은 그야말로 전설이 되고 말았다. 그새 염화칼슘이 도입되었던 것. 아마 중고등학교만 있었다면 굳이 염화칼슘을 그렇게 미친듯이 뿌려대지 않았을 텐데 그 산꼭대기에 대학건물까지 있었으니 서서히 많아지기 시작한 교직원들의 자동차 운행 때문에라도 염화칼슘을 무더기로 살포했던 것 같다. 눈이 많이 내려도 단축수업을 하지 않는 서글픈 현실을 개탄하며, 나는 책가방 썰매 타고 가파른 학교 언덕길을 하산했던 무용담을 신이 나서 들려주었지만 다른 중학교 출신들은 좀체 믿으려하지 않았다. 중학교 동창들 가운데서도 교복바지파가 드물어 증언도 부족한 터라, 책가방 썰매 하교길은 그야말로 믿거나 말거나 한 전설로 남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스키장이든 눈썰매장이든 가본지가 까마득하다. 보드는 타본 적도 없고 두발로 타는 스키도 잘 타지 못하는 터라 리프트 탈 때마다 추위에 벌벌 떨어야 하는 스키장엔 지금도 가보고픈 생각이 전혀 없지만, 썰매 운전도 운전이랍시고 방향조절을 꽤 잘하는 편이라고 생각하므로 ^^ 에버랜드에서 타던 스키썰매는 약간 그립다. 다 미친듯이 내린 눈 때문이다! ㅎㅎ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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