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속의 가장 오래된 선풍기는 지금처럼 온통 몸체가 플라스틱이 아니라 튼튼한 철제 구조에 드르르륵 로터리식 손잡이를 돌려 20단계쯤 풍량을 조절할 수 있고, 회전조절 장치는 둥그런 날개판 뒤쪽의 목덜미에 배꼽처럼 달려 있는 것으로 아마도 상표가 <도시바>였던 것 같다. 그 선풍기는 어찌나 튼튼한지 30년쯤을 쓰고도 멀쩡했고 풍량을 미세하게 조절할 수 있어 제일 느린 바람으로 틀어놓으면 밤새도록 바람을 쐬어도 문제가 없어 해마다 5월부터는 무조건 선풍기를 끼고 사셔야 하는 열혈남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았었다. 당연히 110볼트 제품이라 트랜스로 감압을 해야 쓸 수 있다는 단점이 있긴 했으나 몇년 전까지도 멀쩡히 사용했는데, 그 선풍기가 어쩌다 우리집에서 사라졌는지 그 부분이 기억에 없다. 결국 망가지고 말았었나??
여름이면 방방마다 TV와 선풍기를 각자 돌려대는 건 우리집 식구들의 고질병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에어컨을 설치하고 난 뒤에도 우리집엔 선풍기가 늘 석 대는 완비되어 있었다. 에어컨은 두세 배로 뛸 전기요금을 감당해도 좋겠다는 마음이 들 만큼 못견디게 덥거나 동생네 식구들까지 모두 와 좁은 집에서 득시글거릴 때나 트는 물건이니까.
사라진 <도시바> 선풍기만큼 오래되진 않았어도 아직 멀쩡한 우리집 선풍기 가운데는 이제 LG로 이름을 바꾼지 오래인 <골드스타> 선풍기가 있다. 금성, 골드스타에서 LG로 이름을 바꾼 게 최소한 10년은 넘은 듯하니, 그 녀석의 수명은 그 이상이란 얘기다. 작년 여름 끝무렵에 멀쩡히 돌아가던 날개가 깨져버리는 바람에 그만 버려야 하나 고민하던 나는 모델 번호로 LG 전자제품 AS센터 사이트를 찾아보았는데, 고맙게도 모델명이 아직 남아 있었다. 작년엔 그냥 날개 없는 선풍기를 잘 닦아 넣어두었고 올 여름이 시작되면서 나는 굳이 AS센터엘 가서 날개를 사다 끼웠다. 원래 여름마다 아버지는 제일 신제품이고 디자인이며 색깔도 화사한 LG 선풍기를 내방에 놓아 주셨는데, 이제 그건 왕비마마가 쓰셔야 할 것 같아 곧 골동품 반열에 들게 될 골드스타 선풍기를 내가 차지한 거다. 
그런데 이 선풍기가 요즘 들어 어째 좀 시원치를 않다. 큰 이상은 없는데 회전할 땐 멀쩡하다 고정만 시켜두면 뭔가 틱틱 걸리는 소리가 들리는 거다. 마감모드랍시고 몹시 예민해져 있는 상태에서 그런 미묘한 소리는 이상스레 내 신경을 긁기 때문에 참을 수가 없는데, 모니터와 컴퓨터 본체에서 뿜는 열기를 하루 열몇시간씩 견디려면 선풍기는 필수고 그렇다고 종일 에어컨을 틀자니 아침저녁으론 꽤 선선한 날씨에 나만 뭐하자는 짓인가 싶다. 
마감 스트레스 때문에라도 갑자기 확 열이 오르면 대낮엔 간간이 에어컨을 틀기도 하지만 컴퓨터 열기를 날려보내는 방향으로 고정시켜두는 선풍기의 존재는 밤낮으로 나에겐 필수적. 틱틱거리는 소음이 싫어 휘휘 회전시킨 선풍기로는 성에 안찬다는 얘기다.
하는 수 없이 어젠 또 하나의 선풍기를 꺼냈다. 망가진 <도시바> 선풍기의 대체품으로 사들였거나 어디선가 포인트 사은품으로 받은 듯한 선풍기엔 <더위사냥>이라는 제품명과 **해상 1억 배상책임보험을 자랑하는 문구가 적혀 있지만 처음 들어보는 브랜드다. 산지 몇년 된 듯하지만 여전히 새것처럼 말끔해 보여 반색을 하며 선풍기를 작동시켰더니...
ㅋㅋㅋ 미풍 버튼을 누르면 날개가 용을 쓰듯 천천히 돌아가며 시동을 걸다가 한참이 지나야 제 속도를 내며 돌아간다. 거의 종일 틀어놓고 있으니 상관없을지도 모르지만, 어딘가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는 이 선풍기 갑자기 서버리면 어쩐다 걱정이 들 수밖에 없다. 예전엔 모든 전자제품을 수리해주는 <전파상>이 동네마다 있었지만 요샌 웬만한 전자제품 AS는 모두 자체 회사가 운영하는 곳에서 담당하니 <전파상>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럼 이렇게 이름 없는 회사에서 만든 전자제품은 어디에서 수리를 하라고? 싼맛에 사서 쓰다 고장나면 버리는 1회용이란 뜻인가?
틱틱 소리를 내는 <골드스타> 선풍기는 아마도 LG AS센터에 가면 수리를 받을 수 있을 것도 같다. 대형 가전과 달리 선풍기는 들고 가서 수리를 받아야한다는 난점이 있어 과연 내가 그런 수고로움을 극복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집안내력상 아마도 쉬이 내다버리진 못할 거다. 최소한 회전으로 틀어놓으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볼 수도 있고, 오래된 물건엔 어쩐지 이런저런 역사가 담겨 있는 것 같아 선뜻 내다버리지 못하는 성향은 나의 우유부단함과 함께 혈통에 잠재된 DNA의 결과인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식구가 30년 가까이 이 좁은 집에서 오래된 짐을 그대로 껴안은 채 살고 있지 않았겠지.
생각해보니 오래된 추억의 <도시바> 선풍기가 30년 넘게 여름을 지켰던 데는 솜씨 좋은 아버지와 전파상 아저씨의 거듭되는 손질이 주효했던 것 같다. 누렇게 변한 전선과 플러그 연결부분에 검은 테이프가 감겨 있던 게 생각나는 걸 보면 말이다. 드르르륵 둥근 손잡이를 오래 돌려야하는 그 <도시바> 선풍기가 여름마다 마루를 차지하고 있는 걸 창피하게 여기던 때도 있었는데, 지금의 나는 그나마 제일 오래된 <골드스타>가 완전히 고장나면 어쩌나 걱정을 하고 있다. 겉보기엔 아직 멀쩡한데... 아직 10년은 더 쓸 수 있겠는데... 그러면서. 
노인들이 오래된 물건을 차마 버리지 못하는 건 자신의 처지를 물건에 투사하기 때문이란 얘기를 어디선가 들었다. 망가지고 생채기 나 쓸모 없어지게 되어 외면받는 물건에서 늙고 병들어 가는 자신들의 종말을 바라보기 때문에 어떻게든 고쳐 쓰고 싶어 하거나, 그냥 끌어안고 산다는 의미다. 
나는 옛날부터 오래된 물건을 못 버리는 사람이었고 아직도 낡은 물건의 처지에 스스로를 투사할 만큼 늙은 건 아닌데도 어쩐지 이렇게 나이들어가는구나 하는 실감이 든다. 오래 된 선풍기 하나 때문에 이렇게 구질구질 시시콜콜 넋두리를 늘어놓는 것만 봐도 역시...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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