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력 날짜보다 음력이 더 편한 할머니 두분이랑 오래도록 가까이 산 데다 이젠 울 엄마도 할머니가 되어 매일 양력과 음력이 나란히 적혀 있는 달력을 들춰가며 날짜계산을 하는 터라 며칠 전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오늘이 칠석이라고. 절에선 칠석(음력 7월 7일이다)부터 백중(음력 7월 보름)까지 계속 특별기도가 있는 터라 왕비마마는 원래 절에 가셨어야 하는데 마침 안과 정기검진일이라 못 가게 된 게 엄청 아쉬운 모양이었다.
왕비마마의 아쉬움이야 내 알 바 아니고, 나는 오늘도 과연 비가 내릴 것인가 그것만 궁금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시방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다.

칠월칠석은 견우랑 직녀가 일년에 딱 하루 오작교를 타고 만나는 날이고, 그래서 기쁨의 눈물이 비로 내린다는 전설을 나는 전래동화책을 보기 이전에 까마득히 어렸을 때부터 들어온 것 같다. 한 여름 낮잠을 자려고 할머니방에 누우면 친할머니는 잠이 쉬이 오도록 머리칼을 살살 쓸어넘겨 주시거나 부채질을 해주면서 이런저런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평안북도 고향에 사실 적에 학교에 가서 글을 배우고 싶었는데 계집애라 학교에 못가게 하는 바람에 오라버니들 책 읽는 걸 귀동냥으로 들으며 독학으로 대강 한글을 익혔다는 이야기며, 몸종 거느리고 꽃가마를 타고서 시집 오던 날 이야기, 한량 남편의 기생질 사건 같은  할머니의 실제 경험담도 있었지만, 견우 직녀 얘기랑 햇님달님 이야기 같은 옛날 이야기도 주요 레퍼토리였다.

어린 나에게 할머니의 옛날 이야기는 곧 진리이기도 했지만, 칠월칠석엔 정말로 해마다 비가 내려 신빙성을 더해주었다. 비가 조금 내리면 기쁨의 눈물이라 살짝 울고 마는구나, 오늘처럼 장대비가 내리면 이번엔 그동안 서로 헤어져 지내는 게 힘들어서 서러움의 통곡을 하나보다, 하는 할머니의 부연설명까지 곁들여지면 어찌나 더 실감이 나던지. 여름마다 옥수수를 사다가 쪄먹을 때 옥수수 끄트머리에 달린 수염을 뜯어내면서도, 햇님달님 호랑이가 마지막에 썩은 동아줄이 끊어져 옥수수밭에 떨어지는 바람에 옥수수 수염이 빨갛게 됐다는 이야기가 생각나서 나는 호랑이 피가 묻어 색이 변했다는 옥수수 수염을 단 한오라기도 남겨놓을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왈칵 울음을 쏟아내던 견우와 직녀가 진정했는지 이 글을 쓰는 사이 어느새 비가 그쳤다. 언젠가는 칠석날 아침에 비가 내렸다가 해가 쨍 났다가 저녁무렵 다시 비가 내린 적도 있었는데, 할머니는 그날 직녀랑 견우가 만나서 기뻐 울다가 행복해져서 해가 났었는데 저녁때 다시 헤어져야 하는 게 슬퍼 또 눈물을 흘리는 거라고 하셨고, 종일 비가 안 내려 이상하다 싶었다가 오후 늦게 비가 내린 어느해 칠석엔 아마 까마귀랑 까치가 게으름을 부려서 오작교를 늦게 만들어줬나 보다라고 말씀하셨다.

어렸을 때는 물론이고 10여년전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나에겐 참 늘 위대한 분이었던 우리 할머니, 이제 돌이켜보아도 정말 참 대단하시다. 할머니가 소싯적에 전해 들었던 이야기였든, 당신이 직접 꾸며내신 이야기였든 칠석날 하나에도 손녀딸에게 이토록 소중한 추억과 다양한 이야기를 남겨주셨다니.
오늘따라 눈물나게 할머니가 보고싶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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