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비와 공주

투덜일기 2008. 12. 5. 16:28

왕비와 무수리가 사는 누추한 집엔 일주일에 한번씩 공주가 왕림한다.
각별한 보필과 우러름을 받는 것이 본능인 왕비와 공주.
그러나 서대문궁(?)엔 두분을 보필할 무수리가 하나 뿐이니, 다른 공간에서와 달리 그곳에선 각별한 관심과 보살핌을 선점하려는 할마마마와 공주마마의 세력다툼이 매번 불꽃을 튀긴다.
왕비와 무수리의 촌수는 1촌. 왕비와 공주 사이는 2촌, 공주와 고모 무수리의 촌수는 무려 3촌이다.
왕비는 그 점을 극구 강조하며 (가령, "할머니한테는 너보다 딸인 고모가 더 중요해! 그러니까 고모 고생시키지 마라!"라고 공격하심) 매번 공주 보필에 온몸을 다 바치는 고모 무수리의 행태를 못마땅해 하신다.
할마마마의 판에 박힌 잔소리를 들으면 어린 공주 또한 큰 눈을 더욱 크게 부라리며 "할머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참견하지 마!"라고 반박한다.
무수리는 즉각 버릇없는 공주의 태도를 나무라며, 누가 뭐래도 할머니는 '우리 엄마'이니 까불지 말라고 쏘아주지만 어려서부터 할마마마와 라이벌 관계였던 공주는 무수리의 핀잔 쯤은 별로 아랑곳하지 않는다.

왕비의 존재도 중요하지만 사실 고모무수리에게 공주는 11년째 기쁨과 행복의 원천이기에 주변에서 아무리 손가락질을 해도 넘치는 애정을 주체할 수가 없다. 오죽하면 자기 자식보다 첫 조카가 더 예쁘다는 속설이 있겠나.
아무튼 공주가 왕림하는 날이면 무수리는 일찌감치 장을 봐다가 공주가 원하는 반찬을 정성스레 만들곤 하는데 공주는 생긴 것과 달리 입맛은 소박하여 요구하는 반찬이라는 것이 빨간고기(깻잎을 넣은 제육볶음을 의미), 명란젓, 날치알 넣은 달걀말이 정도다. '안심 스테이크'라든지 '생 바질을 넣은 토마토 모짜렐라 치즈 샐러드' 같은 건 정릉궁에 상주하는 왕실 요리사에게나 청해야함을 익히 알기 때문일 것이다. ^^

우스운 건 왕비에게 늘 특별히 드시고 싶은 게 있냐고 물으면 그런 거 없다고 대답하시면서 공주가 왕림하는 날 부산을 떨며 뭔가 특별요리를 만들면, 콩알 만한 조카딸 하나 먹이려고 뭘 그리 애쓰냐고 타박을 한다는 점이다. 물론 딸 무수리의 고생이 안타까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 만날 밥순이 노릇 하느라 손에 물 마를 날 없는 걸 뻔히 알면서 왜 하필 공주 오는 날만 신경을 쓰시는지!
어젠 빨간고기 이외에도 공주가 좋아하는 고사리 나물을 볶으려고 왕비마마에게 손질을 부탁하였더니, 제사 때 나물 먹은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고사리는 뭣하러 사왔느냐고 구시렁거리셨다. 나물 중에서도 공주는 고사리나물을 제일 좋아하는데!
혹시라도 공주 위주의 상차림에 왕비마마가 삐치실까봐 일부러 생태찌개도 끓여바쳤건만
어제 밥상에서도 왕비와 공주는 배추쌈을 놓고 또 한판 힘겨루기를 했다.
"할머니는 애기 배추 먹지마! 작은 건 다 내 거야!"
"다 같이 먹는 거지, 네 것, 내 것이 어디 있어!"
"아니야, 애기 배추는 원래 나만 먹는 거야! 할머니는 큰 배추만 먹어!"
"너도 반씩 잘라 먹으면 되잖아!"

어차피 손바닥만한 크기의 쌈배추라 크고 작은 걸 다툴 일도 없었는데... 나 원 참. -_-;;
공주 안 보는 사이 얼른 앙증맞은 노란 배추를 집어드는 왕비의 손길을 보며 무수리는 속으로 킥킥킥 홀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누가 뭐래도 무수리에겐 첫번째 관심의 대상이어야 직성이 풀리는 왕비와 공주의 사소한 알력다툼은 과연 언제까지 이어질지 귀추가 주목된다. 왕비마마는 자꾸만 아이처럼 어려지지만, 공주는 나날이 생각이 깊어지고 어른스러워지고 있으니 언젠가는 공주도 무수리와 함께 할마마마를 깍듯이 보필할 날도 오지 않을까.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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