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이 좋다

놀잇감 2008. 11. 20. 18:08

문방구를 사모으는 것은 꽤 오래된 나의 취미다.
오래 전엔 눈가가 달착지근 아련해지는 파스텔 톤의 편지지를 모으던 때도 있었고,
수첩류와 무지공책, 예쁜 볼펜, 스티커, 메모지 따위를 주섬주섬 사모으던 시기를 거쳐
요샌 뭐든 주제를 정해 온갖 문방구류를 모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첫 주제를 자전거로 정하긴 했지만 아직 '모았다'고 할 만큼의 아이템을 마련하진 못한 상태.
자전거를 장만해놓고도 게으름 탓에 제대로 타지 못하는 죄책감을 은근히 다른 소비 욕망으로 떠넘기려는 한심한 작태가 아닐 수 없으나, 어쨌든 자전거 그림이 들어간 문방구를 유심히 찾아보겠다고 결심한 뒤 처음 눈에 띈 물건은 바로 이것이었다. 

출처: 텐바이텐 all rights reserved by gongjang

자전거 그림이 들어갔대서 무조건 사야겠다고 마음을 먹기는 했지만, 자전거의 환경 지향적인 메시지를 담아 재생신문지로 흑연을 말아 연필을 만들었대고, 연필이 담긴 종이 케이스도 접착제 대신 실로 박았다는데 그 만듦새가 퍽이나 정성스러웠다.
사실 자전거 그림은 약간 성의가 없게 느껴져 내 취향에 딱 맞아 떨어지는 풍은 아니지만 슬슬 휘갈겨도 잘 써지는 연필심의 부드러움과 연필깎이로 깎아놓은 돌돌말린 연필밥이 내 마음에 꼭 들어서 요샌 뭐든 메모할 일이 있으면 언제나 이 연필을 사용한다.

모름지기 연필은 연필깎이로 둘둘 돌려 갈아놓는 것보다는 일일이 칼로 약간 기름하게 깎아 세로 결을 살려놓아야 내 마음에 꼭 드는데, 이 연필은 나무가 아니라 칼날이 잘 먹히지 않을 것 같아 앙증맞은 연필깎이도 하나 장만하고야 말았다.
하지만 연필깎이는 어디까지나 이 연필 전용이고, 나머지 연필들은 죄다 칼로 깎아쓰고 있는데 전동이든 수동이든 연필깎이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옛날과 똑같다.

내가 처음으로 손수 연필을 칼로 깎아 쓴 게 언제인지는 돌이켜봐도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국민학교 고학년 때는 미제인지 독일제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주물(혹은 무쇠?)로 된 투박한 수동연필깎이가 있었다. 원래 책상에 못으로 고정시키는 형태여서 아빠는 둥근 쇳덩어리 같이 생긴 그 연필깎이를 두툼한 나무토막에 못으로 고정시켜주셨는데, 우리 삼남매는 연필을 깎을 때면 양발로 그 나무토막의 양 귀퉁이를 누른 뒤 구멍에 연필을 꽂고 한손으로 누르며 다른 손으로 손잡이를 돌렸다. 그 다음엔 플라스틱으로 된 집 모양의 연필깎이도 생겨났던 것 같다. 연필을 꽂는 구멍에 집게 같은 것이 달려 그걸 젖히고 연필을 꽂으면 고정이 되기 때문에 이제 양발을 사용할 필요는 없어졌고 한손으로 연필깎이 꼭대기를 지그시 누르며 손잡이를 돌리면 됐다.
물론 몇십원짜리 휴대용 연필깎이를 늘 필통에 넣고 다니는 아이들도 많았다. 요즘도 아이라이너 전용으로 사용되는 손가락마디 만한 소형 연필깎이 말이다. 

그런데 나는 소형이든 대형이든 연필깎이로 연필을 깎는 게 그렇게 아까울 수가 없었다. 적당히 연필이 깎였을 때 빼지 않으면 연필 한 자루를 금방 몽당연필로 만들 수 있는 막강한 기계식 칼날이 싫기도 했지만, 나는 잘 드는 칼로 사각사각 연필을 돌려가며 나무를 벗겨내고 마지막에 심을 너무 가늘지 않게, 적당한 길이와 두께로 깎아놓아야 성에 찼다. 그래서 이틀에 한번은 연필 다섯자루를 가지런히 깎아 필통에 키 순서대로 넣어놓으며 몹시 뿌듯해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땐 연필의 질이 형편없었다. 심이 골아서(자꾸 떨어뜨린 탓이다) 연필을 깎고 또 깎아도 툭툭 부러져 나가는 연필이 흔했고, 재질과 색깔이 다른 나무를 붙여놓은 연필을 깎다보면 결이 이상해 깎이는 게 아니라 나뭇결을 따라 쪼개져 흑연심이 뭉텅 드러나는 연필도 있었다. 겉으로는 HB라고 적혀 있어도 심이 너무 단단해 색도 흐리고 걸핏하면 공책을 찢어먹는 연필도 종종 만났다. 그러다 겉모습도 매끈한 독일제나 잠자리가 그려진 일제, 하얀 지우개가 끝에 달린 노란 미제 연필이라도 손에 넣게 되면 부드럽게 써지는 필기감도 좋았지만 칼날 끝에서 부드럽게 밀려나가듯 깎이는 삼나무 재질(국산연필보다 심히 부드러운 나뭇결이 신기해 나중에 알아보니 삼나무라고 했던 듯)의 연필밥이 얼마나 큰 행복을 주었는지 모른다.
신문지를 떡하니 펼쳐놓고 바닥에 앉아 칼로 연필을 사각사각 깎는 묘미는 나만이 즐겼던 것일까?
고모부가 출장에서 사다주신 독일제 색연필 세트엔 작은 연필깎이도 함께 들어 있었지만, 나는 예쁜 색심까지 날카롭게 깎이는 게 아깝고 싫어서 언제나 칼로 색연필을 깎았는데, 특히 색연필을 깎고 나서 모인 연필밥은 너무 예뻐서 단숨에 버리지 못하고 작은 통에 모아두기도 했었다. +_+

하지만 연필 깎는 칼을 능수능란하게 쓸 수 있게 된 건 분명 국민학교 고학년 때나 가능했을 것이고, 그 전엔 연필깎이나 어른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연필깎는 칼의 형태가 대단히 위험한 반쪽짜리 '도루코 면도날'이었기 때문이다. 휘청휘청 얇고 너무도 예리해서 나에겐 손을 대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그 '도루코 면도날'을 반쪽으로 잘라(쓰다가 반쪽으로 잘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 연필을 솜씨 좋게 깎아주던 최초의 손은 우리 할아버지의 것이었다.
돈벌이와는 상관없는 모든 재주에 능하셨던 한량 출신의 할아버지는 서예도 일품이고 한시도 읊으시고 심심풀이로 조각도 하셨으니, 그까짓 연필 정도 깎는 것이야 우스우셨을 게다. 그리고 짐작컨대 연필깎이에서 나오는 방정맞고 짤뚱한 연필 모양에 비해 약간 길쭉하고 늘씬한 느낌의 연필을 깎아내는 나의 취향은 할아버지한테서 비롯된 듯하다. 나와는 겨우 아홉살 차이가 나고 할아버지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던 우리 막내고모가 깎아놓은 연필 모양도 내 솜씨와 비슷한 걸 어른이 된 후에 깨달었는데, 그땐 그게 고모를 우러러보던 어린 조카의 무의식적인 모방이라 여겼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우리 막내고모와 내가 둘 다 연필깎기를 제대로 배운 인물이 할아버지였을 가능성이 크다.

아무튼 너무 작아서 할아버지가 놓치면 어쩌나 걱정스러울 정도였던 반쪽짜리 도루코 면도날은 언제나 요술을 부리듯 일정한 길이로 깎인 늘씬한 연필을 탄생시켰다. 도루코 면도날 다음으로 쓰인 칼은 역시 도루코에서 나온 문방구용 칼이었는데 칼날이 좀 더 단단하고 윗부분엔 알루미늄으로 덧씌워 손으로 잡고 쓰기에 편하게 생겨먹은 그 칼도 역시나 작아서,  할아버지댁에서 분가해 나온 부모님과 살던 저학년 때엔 엄마나 아빠가 내 대신 연필을 깎아주었던 것 같다. 삼남매의 연필을 깎아주기가 번거로워져서 부모님이 연필깎이를 장만했을 수도 있겠고.

중고등학교에 다닐 땐 일본에서 대거 수입된 앙증맞고 예쁜 샤프펜슬에 혹해 연필을 멀리했고 수학이 아닌 한 공책에 쓰는 필기도구도 볼펜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연필에 대한 추억이 덜하긴 하지만, 특활로 미술반 활동을 했으므로 누가 뭐래도 데생 연필은 질 좋은 나무와 흑연이 들어있는 걸 골라 정성스레 칼로 깎아 갖고 다녔고 심이 물러 잘 부러지는 4B, 2B 연필 하나를 제대로 사겠다고 큰 문방구를 뒤지고 다녔던 기억이 있다. 대학생때는 연필과의 완전 절교 시기였고, 나의 연필 사랑이 다시 불붙은 건 직장생활을 하면서부터였다.

미국 의류회사의 서울 구매사무소라는 허울만 그럴듯했을 뿐 처음 사무실은 대단히 허름했는데
놀랍게도 메모지와 연필, 볼펜, 노트패드 같은 사무용품은 뉴욕 본사에서 보내준 것을 쓰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는 허영심이라 실소가 나오지만, 어쨌든 일년에 두세 번 한국에 들르는 사장이 한국에서도 미국에서 쓰던 것과 똑같은 사무용품을 써야 직성이 풀리는 까다로운 인간이라 그렇게 됐다고 했다.
특히 사장이 하얀 지우개가 달린 노란 미제 연필로 메모하는 것을 좋아하여, 비품함엔 절대로 연필을 떨어뜨리면 안된다고 했다. 엄밀히 따져보면 그 인간이 일년에 쓰게 될 연필이 한자루나 될까말까 한데, 본사에선 분기별로 연필을 비롯한 사무용품을 몇 박스씩 보내주었으니 참 웃기는 시스템이 아닐 수 없었다.
어쨌거나 나는 사무용품 사물함에 들어 있는 갖가지 문방구류가 그저 반가울 뿐이었다. 회사 로고까지 인쇄해 넣은 전화 메모용 포스트잇도 좋았고, 대학때 즐겨쓰던 빅볼펜과 노란연필을 마음껏 쓰는 것도 좋았다. 
특히 팩스 비용 최소화를 위해 발신 팩스는 한꺼번에 타이피스트에게 타이핑을 시켰는데
그 전에 이면지에 초고를 쓸 땐 무슨 법칙이라도 있는 듯 다들 연필을 사용했다.
아무래도 짧은 영어로 통신문을 작성하려니 모두들 학생 기분으로 돌아가 답안을 작성하듯 정성을 들였던 게 아닐까. ^^
암튼 볼펜과 연필, 갖가지 크기의 노란색 메모패드, 각종 포스트잇은 집에도 가져다놓고 썼는데
그 회사를 관두고도 몇년동안은 그때 집어온 메모패드와 노란 연필을 아주 요긴하게 집에서 써먹었던 기억이 있다. ^^;

직장생활을 관두고 나서 만날 컴퓨터와 씨름을 하던 내가 다시 연필깎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역시 조카들이 생기고부터다. 우리 조카들은 넷 가운데 돌잡이에서 세 녀석이나 연필을 잡았을 정도로 아기때부터 연필을 좋아했고 나는 조카들이 해놓은 의미없는 낙서라도 그저 대가의 작품인 양 호들갑을 떨며 열심히 연필을 깎아 그들에게 바쳤다.

마분지에 연필. 정민공주 5세때 작품


그런 정성을 들이면 이런 그림도 간간이 하사받게 되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언젠가 내가 기분전환 삼아 파마를 한 다음에 그려달라고 졸라서 얻은 건데, 나중에 정민공주가 유명한 화가가 되면 전시하려고 고이 간직해두고 있다. ㅋㅋ

암튼 나는 요즘 마냥 연필이 좋다.
조카들이 쓰다가 두고 간 동아니, 모나미니 하는 알록달록한 연필들이 벌써 죄다 몽당연필로 변해버렸지만 좀체 버릴 수가 없다.
이제 겨우 세살 된 조카의 손엔 몽당연필이 또 제격이기도 하고, 모나미 볼펜 몸통을 끼워 하나쯤은 꼭 들고 다니던 몽당연필의 추억 때문에라도 최대한 끝까지 써볼 작정이다.
물론 자전거 그림 뿐만 아니라 돌고래 무늬와 아무 무늬없는 나무색 연필, 단순한 느낌의 검정 연필도 기어이 사들였다.
검정 나무로 된 연필은 아마 또 칼로 연필을 깎아놓은 연필밥을 버리기 아까워할 것 같아 아직 구경만 하고 있다.

글씨체가 부끄러워 요샌 뭐든 손으로 쓰는 걸 두려워하게 되는데 사각사각 소리도 경쾌한 연필로는 연애편지라도 쓸 수 있을 것만 같다. 편지 보낼 연인이 없으니 그저 안타까울 뿐이로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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