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에 해당되는 글 27건

  1. 2012.09.18 환절기 10
  2. 2012.01.06 2011년 한해 정리 13
  3. 2011.07.11 엄마가 달라졌어요 18
  4. 2010.05.12 구김살 7
  5. 2010.01.09 섬망증
  6. 2008.10.22 또 우울증 얘기 8
  7. 2008.10.17 우울증 12

환절기

투덜일기 2012. 9. 18. 18:09

무서운 고양이 사진이 너무 많기도 하고 가끔 고양이 물품과 관련하여 어쩐지 마음에 안드는 구석이 있어서 즐겨찾기에서 지워버렸던 스노** 사이트. 지금도 즐겨찾기에 들어있지는 않지만 이따금 궁금해져 찾아가본다. 어차피 주소도 어렵지 않고... 아마도 이유는 그곳 주인장이 스스로 우울증, 조울증 심증을 고백하며 블로그는 아예 닫아버렸기 때문인 듯하다. 그냥 남들이 지나가는 말로 증상이 그렇다고 하니까 겉으로만 인정하는 건지, 진짜로 상담이나 약물치료라도 받는 건지 염려스러운 마음이 드는 건 역시나 내가 환자의 가족이라는 점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심리적,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사람은 계절이 바뀌는 시기를 남들보다 조금 민감하게 넘기는 편이라는 것이 나의 오랜 관찰 결과인데, 일년에 네번이나 되는 환절기가 다 문제는 아니고 가장 불안함이 두드러지는 시기는 역시나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점과 가을에서 다시 겨울로 넘어가는 시점이다. 아마도 줄어든 일조량과 호르몬의 관계라지. 사실 나도 이거 우울증 아닌가 싶게 가을은 좀 힘들다.

 

암튼 낮이 하염없이 길었던 여름이 지나고 저녁이 좀 일찍 찾아온다 싶은 가을이 되면 어김없이 불안이 감지되는데, 그 시작은 지나친 씩씩함과 활동성이다. 외출할 일이 있으면 거기에 덧붙여 더 많은 '건수'를 만들어 온종일 돌아다니고 안하던 쇼핑도 막 하러 다니고, 양손 가득 무거운 찬거리를 들고 들어오기도 한다. 갑자기 집안일에 열의를 보이며 새벽부터 구석구석 먼지를 파내기도 하고 오래된 물건 정리도 하며, 그 어떤 잔소리를 해도 하하호호 기분이 좋다. 어떤 날은 집에 있으면서 종일 사방에 전화를 걸어 호호깔깔 목청 높여 대화를 한다. 잘 모르는 사람은 활기차고 건강해졌다며 반기는데, 절대 그게 아니다. 이른바 조증 상태이기 때문. 무기력한 울증 상태보다 더 나쁜 상황이고 곧이어 수렁같은 울증이 찾아올 것이라는 암울한 예고편이다.

 

오늘 문득 생각이 나 홈피에 가보았는데, 짧지만 비슷한 사연을 올려놓았다. 그래도 발전적이라며 자신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상황으로 보여 다행이다 싶긴 하다. 하지만 붕 떠 있는 듯한 기분을 인정하면서도 아무것도 안하고 무기력하게 늘어져 쓸모없는 인간으로 사는 것보다 훨씬 낫다며 계속 의욕을 보이는 것은 조증 상태의 전형적인 반응. 그런 상황이 되면 나는 붕붕 떠 있는 마음을 끌어잡아내리는데 안간힘을 쓰면서도 대수롭지 않은 태도를 보인다. 늘 겪는 일인데 뭐, 좀 있으면 지나갈 거야, 걱정하지 마슈. 약 조절도 받았고, 일단 잠의 질만 더 나빠지지 않으면 최근 몇년 그래왔듯이 또 다시 수월하게 잘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여름 끝자락부터 내가 버럭버럭 성깔을 부리며 독 오른 짐승처럼 굴었던 건 어쩌면 환절기를 무사히 넘어갔으면 하는 바람에서 비롯된 지레 겁먹기였을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계절은 바뀌었고 해는 확 짧아졌고 노친네는 부쩍 부지런해져 노상 바쁘다. 슬슬 체력 떨어질 때도 됐으니 고비도 머지 않았다. 약간 엄살을 부리는 것이면 좋겠으나 스노**도 노친네도 어서 바닥으로 내려왔다 다시 중간즈음의 평온을 되찾기를. 스산한 가을도 싫고 추운 겨울도 싫지만 내가 제일 싫어하는 계절은 역시나 환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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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한해 정리

놀잇감 2012. 1. 6. 10:19

 


게으름 뒷설거지 하느라 연말연시는 늘 쫓기듯 바쁘지만 그래도 노상 컴퓨터 앞에 앉아 있으니 한해 정리 포스팅을 하려면 못할 것도 없었는데 차일피일 미룬 이유는 우유부단한 속성 탓에 좀체 항목별로 셋을 뽑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_-; 마음에 꼭 드는 이미지를 찾아내는 것도, 베스트 사유를 쓰는 것도 은근히 시간 많이 걸리는 일이라 스스로 찔리기도 했다. 하지만 또 그런 모든 난관을 무릅쓰고 또 이렇게 얼렁뚱땅 하고만다. 2011 베스트 포스팅. ㅋㅋ




7. 2011년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멍하니 살았다.
적고 보니 두 마디로군.
아무리 돌이켜봐도 베스트나 워스트로 뽑을 만한 기억도 없고, 뭘 딱히 지른 것도 없는 것 같고(기껏해야 연말에 산 거위털 이불 정도?), 인상 깊은 사건도 없이 그저 소소한 아쉬움 뿐이다.
그래서 베스트 항목을 더 뽑으려야 뽑을 수도 없었다. 참 재미없게도 살았구나 싶은 느낌. 그래서 2011년을 보내는 게 하나도 아쉽지 않았다. 차라리 빨리 가버려서 속 시원.


8. 2011년 번역작업
달랑 3권이 출간됐다. 그중 하나는 두권짜리라며 위안을 해보지만, 8월 이후 하반기 출간된 책이 전무하다는 것은 아마도 출판 불황과 나의 게으름이 만들어낸 합작품일 듯.
작업한 책은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벌려놓은 수만 잔뜩이다. 스스로 채찍질이 필요. 그래서 일부러 적어놓았다. 정신 차리라고 쫌!


9. 2012년의 계획이라면
1. 일과 관련해서 좀 더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 될 것
2. 조금 긴 여행 (홀로 두고갈 엄마 걱정도 덜었겠다, 여행비 모을 욕심에 더욱 열심히 일하던 과거의 나로 돌아가고 싶다!)
3. 기타든 그림이든 뭘 좀 배우러 다니고 싶단 소망을 실천에 옮기는 추진력을 발휘할 것
4. 큰 마음 먹고 이사 (과연;; ㅎ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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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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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 좋은 칭찬도 계속 되풀이하면 짜증나게 마련인 것을 나는 병든 엄마에게 듣기 싫은 잔소리만 수년째 해대는 무서운 딸이었다. 아무리 반복해도 소용없는 엄마의 망각과 무심함을 간간이 대놓고 지긋지긋해하면서. 내가 하는 잔소리는 대략 이런 거다.

매일 매일 몸을 움직여 운동을 해야 한다.
과식은 금물, 식사는 천천히, 많이 씹어야 한다.
식후 곧장 드러눕는 건 역류성식도염으로 가는 지름길.
노상 못한다 못한다 생각하지 말고 할 수 있다고 여기며 시도해봐라.
쓸모없는 인간이라 죽고 싶다고 생각하지 말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되면 되지 않느냐. (집안일 좀 도와달라는 뜻;;)
멍하니 TV 많이 보면 바보 되니까 책 좀 읽으셔라.
제발 TV 볼륨 좀 작게 틀어라...

하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엄마가 내게 하는, 밤에 일하지 말고 일찍일찍 자라, 살 좀 찌게 많이 먹어라, 병원 가라, 따위의 잔소리를 귓등으로 흘리듯 엄마도 내 잔소리를 귓등으로 흘려듣고 무시하는 듯했다. 그렇다고 해서 엄마가 내게 화를 내는 법은 없는데, 나는 엄마가 내 말 안듣는다고 버럭버럭 화를 내거나, 실망스러워 아예 입을 꼭 다물고 대화를 거부하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엄마가 칠순을 넘긴 노인이며 각종 성인병 더하기 우울증까지 갖춘 환자이므로 내가 더 많이 이해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자각은 혼자 반성하는 밤에만 찾아올 뿐, 막상 얼굴을 마주 대하면 짜증이 치밀었다. 지쳤다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딸이 책으로 밥을 빌어먹는 사람이든 아니든 울엄마는 원래부터 책을 가까이 하는 사람이 아니다. 젊은시절엔 드문드문 아버지가 들고오는 책을 함께 읽었고, 여성중앙 같은 월간지를 정기구독하기는 했어도, 라디오와 TV 드라마에 열광하는 것만큼 열심히 독서하는 모습은 기억이 없었다. 내가 번역하는 책마다 증정본이 수북이 날아들면 자기도 읽어보겠다면서 괜히 한권씩 가져다가 화장대에 쌓아놓기는 열심히 하셨지만 읽는 기미는 전혀 없었다. 나도 전혀 섭섭하지 않았다. 어차피 엄마가 흥미를 갖고 읽으실만 한 책도 별로 없었고. -_-;;

구구단 외기보다, 화투치기보다 독서가 치매예방에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사실은 그만큼 책읽기가 복합적인 사고와 감각 활용을 요하는 고도의 두뇌활동이라는 의미다. 그러니 가뜩이나 정신 시끄러운 우울증 환자가 가만히 집중해 책을 들여다보는 게 쉬울 리 없다. 나 또한 예민함이 극에 달하면 활자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 지경에 이르는 데, 왜 그걸 모르겠나. 그러니 더더욱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식사시간 이외의 거의 모든 시간을 TV와 함께 하는 엄마를 도무지 말릴 수가 없었다. 거의 모든 노친네들의 유일한 취미생활이 TV라지 않은가.

같은 나이임에도 여전히 문화센터를 다니며 뭔가를 배우고, 김치를 담가 자식들에게 퍼돌리고 한다는 엄마의 동창들 얘기에 그저 부러움만 품을 뿐이었다. 물론 손자손녀 육아에 허리가 휠 지경인 엄마의 친구분들은 왕비마마처럼 손가락 까딱 안하시는 울 엄마를 일견 부러워한다고 했다. ("얘, 너는 복 많은 줄 알아!") 하기야 나로선 엄마가 한달에 한번 동창모임에 홀로 외출을 하는 것만도 감지덕지였다. 일년에 못 나가시는 달이 절반 가까이니 원.

그러던 엄마가 최근 좀 달라지셨다. 지난 3월에 입원했을 때만 해도 100에서 7빼는 셈을 나보다도 더 잘하더니 갑자기 컨디션이 나빠지면서 7빼기 셈은커녕 구구단도 엉뚱하게 대답할 정도라, 나의 애를 태운 게 불과 한달 전이다. 단축번호로 잘 걸던 휴대폰 사용도 낯설어 했다. 덜컥 겁이 난 나는 일단 TV를 꺼버렸다.(엄마 스스로도 '정신통일'이 되지 않는다며 드라마 따라가기도 어려워했다.) 그러고는 예전처럼 불경 베껴쓰기를 '숙제'로 내주었다. 가뜩이나 악필인 엄마 글씨는 도저히 알아보지 못할 수준으로 흔들렸다. 손이 아프다며 오래 쓰지도 못했다. 차선책으로 나는 다시 책을 내밀었다. 질병이든 노화든 극복은 마음먹기 달렸다는, 어찌보면 아주 빤한 이야기를 담은 심리실용서였다. 내가 작년부터 입이 아프게 했던 잔소리도 거의 다 그 책에서 주워들은 내용을 써먹은 거였다. 노인용으로 활자가 크게 찍힌 책도 아니라, 별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놀랍게도 엄마는 그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조금씩 달라졌다. @.@

백문이 불여일독!? 어려운 용어도 많고 활자도 작아서 진도는 지지부진 형편없고, 자꾸 내용을 까먹어 읽은 데 또 읽고 또 읽고 한다지만, 엄마는 자기 이야기를 쓴 것 같다며 하루에 몇 시간씩 꼬박꼬박 돋보기를 쓰고 책을 읽더니 그 내용을 급기야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우선 내가 달력에 표기해가며 하던 화분에 물주기를 엄마가 하고 있다. (책에도 요양원 노인들에게 화분 가꾸기 책임을 맡게 하였더니 자존감과 삶에 대한 주도의식이 높아져 수명도 길어졌다는 사례가 나온다;;)
허리가 아파서 통 못하겠다던 설거지도 거의 하루에 한번은 엄마가 해주신다. (야호!)
약의 종류가 하도 복잡해서 어떻게 분류하는지 모르겠다던 아침약, 저녁약 통에 담기도 지난주부터는 엄마가 '혼자' 한다. (그간 약의 종류가 꽤 줄긴 했어도 여섯 칸으로 나뉜 플라스틱 통에 아침과 저녁 약을 종류별로 나눠 담는 건 정말 나도 귀찮은 작업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담아놓고 먹어야 매일 약을 먹었는지 안먹었는지 확실히 알 수 있다)
몇년째 세탁기 돌리는 법도 까먹어서 못하겠다고, 그러니 죽어야 한다고 울상이시더니만 한번 해보겠다고 나선 게 벌써 몇번째다. (비록 헹굼 추가 버튼은 내가 눌러야하지만 이게 어딘가!)
내가 절반도 먹기 전에 밥그릇을 비우던 엄마가 요샌 나보다 더 느리게 드시는 때가 많다. (결과적으로 체중도 꽤 줄었다!)

지금도 집안이 고요하다. 엄마가 책을 읽고 있다는 뜻이다. (고맙게도 아래층 똥개마저 오늘은 조용한 편이다) 집안의 소음 여부가 빈부의 환경 차이에도 기준이 된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우리는 물론 부자가 아니지만, 고요함이 주는 평화에 마음이 다 푸근해져서 부자가 된 것 같다. 가장 감사하고 기쁜 일은 물론 엄마의 변화다. 당연히 냉랭하던 모녀관계도 엄청 호전되었다. 나는 남편이 아니니까 애기처럼 기대지 말라고, 온몸으로 밀어내는 제스처를 취하던 딸이 원하는 건 결국 늙은 엄마의 엄마노릇이었던 거다. 뜻밖에 책 한권으로 촉발된 모처럼만의 변화에 고무된 나는 엄마가 흥미를 가질만한 책이 또 뭐가 있을까 벌써부터 고민중이다. 노인용으로 활자 크게 나온 책이 뭐가 있는지 서점엘 나가볼까. 못된 딸년은 기회는 이 때다 싶어 계속 엄마를 부려먹을 생각만 키우고 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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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김살

삶꾸러미 2010. 5. 12. 16:53

천진난만한 아이들에겐 정말로 구김살 없는 표정과 태도를 온전히 실감할 수 있지만, 어른이 되고 난 뒤에도 구김살이 없기란 참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다들 훌륭한 가면을 쓰고 살기 때문에 언뜻 보아서는 물론이고 꽤 가까이서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구김살 여부는 잘 알 수 없다. 성격에 따라서는 과거의 구김살도 다리미로 완벽하게 펴 산뜻하고 매끄럽게 살아가는 이도 있으니, 구김살 없는 어른이 드물다는 나의 전제부터 틀렸다고 누가 반박한다면 싸울 생각은 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생각은 변함없다. 이 팍팍한 세상에서 구김살 없이 성장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누구나 갖고 있는 구김살을 어떻게 스스로 잘 파악하고 관리하고 펴는 노력을 펼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구김살의 사전적인 뜻, "(주로 '없다'는 부정의 표현과 함께 쓰여) 표정이나 성격에 서려 있는 그늘지고 뒤틀린 모습"을 살펴보노라면 더욱 의미심장해진다. 심리학엔 완전 문외한이지만 어쩐지 심리학적으로 접근해야할 문제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심리학을 공부한 친구에게 주워들은 풍월로는 확실히 그렇다. 심리치료를 공부한 뒤 개인병원에서 마음을 다친 아이들과 자폐아동 치료를 돕던 친구는 성당 봉사활동으로 기도모임에서 어른들의 다친 마음 치유를 이끌다가 결국엔 그 일을 본업으로 삼게 되었다.

독실한 신앙과 기도로도 어쩌지 못하는 마음의 구김살, 영혼의 상처가 얼마나 지독한지 친구의 얘기를 들어보면 덩달아 가슴이 아프다. 그 친구만 해도 그렇다. 친구는 어려서부터 소금과 짠맛을 즐겼다. 고1때였던가, 가정 시간에 자기는 토마토는 물론이고 수박도 소금에 찍어먹는다는 사실을 밝혀 모두를 놀라게 했을 정도였다. 얼마 전까지도 고깃집에 가면 소금을 미리 두어접시는 더 달라고 해 옆에 끼고서 찍어먹었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소금에 길들여진 체질이라 건강에 이상이 없다고 자신했다. 우린 평생 그렇게 먹어왔으니 그럴법도 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리투아니아였던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곳으로 얼마 전 성지순례를  다녀온 친구는 거기서 만난 신부님에게 뜬금없이 엄마를 용서하라는 말을 들었단다. 엄마를 용서하는 마음을 갖지 않으면 아무리 소금을 집어삼켜도 마음의 구멍을 채울 수가 없다고. (통역까지 필요했던 외국 신부님이 첫눈에 친구의 소금 취향을 어찌 알았을지 그건 미스터리다. -_-;;)

심리학적인 분석의 결과라고 해야할지 영성의 힘으로 파악한 문제의 핵심이라고 해야할지 나로선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친구의 문제는 엄마 뱃속에 있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친구의 어머니는 둘째를 낳고 싶지 않아했던 터라 차마 직접적인 행동엔 옮기지 못했지만 임신 기간 내내 후회를 하며 아이가 어떻게든 잘못되기를 바랐다. 결국 친구는 칠삭동이로 태어나 인큐베이터에서 생사의 고비를 넘기며 남은 기간을 채워야 했는데, 늦둥이 막내딸임에도 넘치는 사랑보다는 터울이 많은 오빠에 비해 늘 차별을 받으며 자랐다. 어려서부터 "안 낳으려다가 어쩔 수 없이 낳은 자식이라 그런지 애가 이래저래 좀 처진다"는 말을 친구는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야 했다. 그런데도 친구는 나이 들어서 낳은 딸을 키우기 힘들었을 엄마를 이해하려 노력하며 약간 불만을 품었을 뿐 내면 깊이 엄마에 대한 미움과 한이 자리잡고 있을 줄은 몰랐단다. 그리고 그 증오심이 엉뚱하게 소금을 탐닉하는 것으로 표현됐을 줄은 더더욱 몰랐을 테고. 건강검진 결과로도 친구는 '전혀' 소금 체질이 아니었음이 드러났고, 지나친 나트륨 섭취 때문에 몸에 이상이 생길 정도였다. 그토록 오랜 세월 남들의 다친 마음을 들여다보면서도 본인의 마음을 파악하는 데는 소홀했던 친구는 자기 문제가 뭔지 알고 난 뒤 정말로 엄마에 대한 해묵은 감정을 다스려 용서하려고 노력했고, 여전히 남들보다는 짜게 먹는 편이지만 예전만큼 소금에 탐닉하진 않게 되었다.

친구의 도움으로 꽁꽁 감추어져 있던 오래된 내면의 문제를 찾아내 마음의 구김살을 펴려고 노력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하나같이 놀랍다. 그들에게 상처를 남긴 장본인이 대부분 가족이나 최측근이기 때문이다. 부러울 것 하나 없어 보이는 부와 행복을 누리며 자식농사마저 성공해 화목한 가정을 꾸려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였던 어느 아주머니는 자신에게 아무런 문제도 없으며 다만 무뚝뚝한 남편이 좀 불만이라고 생각했지만, 심리치료의 단계를 거슬러 올라가보니 모성과 애착의 결핍이 원인이었고 사춘기 이후 50대가 되도록 "엄마!"라고 불러본 적이 없을 정도로 모녀간의 골이 깊었단다. 치료과정에서도 '엄마'라는 말을 차마 입밖에 내지 못할 만큼.

모성이나 부성의 부재 자체가 문제인 경우도 있고, 너무 잘난 형제에 치여 마음을 다쳤거나 둘도 없는 친구에게 배신을 당한 상처로 알게 모르게 마음앓이를 한 이들의 사연을 가끔 친구에게 전해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주변 사람들을 새삼스러운 이해(또는 편견)의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다. 나의 짐작이 전적으로 맞다고 주장할 순 없겠으나, 이러저러한 상처 때문에 이런저런 성격이 생겨났을 수도 있겠구나 하고 빈약한 이론과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식이다. 구김살이 까칠함으로 발현된 것이 분명한 나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찾아보게 됨은 물론이다. 심지어 엄마 없이 자란 아이들이 모두 문제아가 되는 건 아니지만, 살인 같은 극단적인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의 개인사를 추적해보면 반드시 모성의 결핍이 두드러진다든가 하는 이론에 귀가 솔깃해지도 한다.

친구가 전하는 치료 사례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어린 시절에 겪은 마음의 상처로 평생 고통을 겪는 사람들은 사실 주변에 널렸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엄마가 재혼하는 바람에 할머니 손에 자란 남매는 사춘기 때부터 성 다른 형제들과 다시 엄마 슬하에서 살았지만, 엄마에게 한번 버림 받았던 충격으로 한 사람은 우울증, 한 사람은 알코올의존증에 시달린다. 인생의 멘토라고 여길 만큼 각별하게 따랐던 여교사에게 고교시절 내내 성추행을 당했던 여학생은 커서 정신병을 얻었다. 여러 형제 가운데 가장 사랑받는 막내딸이면서도 잘난 형제들과 비교되어 늘 위축되었던 아이는 서른살을 넘기면서 조울증에 걸리고 말았다. 낳아준 엄마의 얼굴도 모른 채 할머니 손에서 자라며 친부의 결혼과 이혼, 재혼을 지켜본 어떤 딸은 가족들에게도 거짓말을 일삼다 사기꾼처럼 엄청난 금전사고를 일으켜 친적들에게조차 의절당하고 말았다. 너무 극단적인 예를 나열하긴 했지만, 아무리 사소한 상처도 본인에게는 저도모르게 큰 충격과 후유증을 남길 수 있음을 생각할 때 겉모습만으로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누가 어떤 일을 얼만큼 심한 강도로 겪었는지 속속들이 알 수도 없는 일이고.

너무 끔찍해서 잘 안보는 프로그램이긴 하지만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같은 방송만 봐도 문제 있는 아이의 원인 제공자는 늘 부모와 환경이다. 그래서 그런 환경과 부모의 태도를 한두 달만 바꿔 놓아도 아이는 확연히 달라진다. 과연 그 아이들의 마음에 새겨진 구김살도 깨끗하게 펴지거나 사라질지 아직도 의문이 들지만, 중년 이후라도 자기 문제를 파악하고 애써 노력을 기울이면 다친 마음을 어느 정도 치유하는 게 가능하더라는 사례를 보면 희망을 품고 싶어진다. 요즘 열심히 챙겨보는 드라마 <신데렐라 언니>를 보아도 하나같이 구김살 많은 인간들의 각축장인데, 최소한 그들은 자기 상처가 무엇인지 알고 그걸 인정하기도 하고 회피하는 모습을 보여 허구의 캐릭터인데도 안쓰럽고 정이 간다. 물론 내 주변엔 내면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고 인정해도 상처가 너무 깊어 도저히 펴지 못해 허덕이는 이들이 존재하지만, 드라마 속 세상에서만은 좀 덜 현실적으로 그려지더라도 그들이 주름살을 차츰 펼쳐가길 비는 중이다. 아마 나도 열심히 구김살을 다림질하는 중이기 때문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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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망증

아픈 손가락 2010. 1. 9. 02:43
윙윙거리는 정적 속에 가끔 컴퓨터 자판 두들기는 소리만 툭탁거리는 새벽, 안방에서 자고 있던 엄마가 난데없이 작업실 방문을 열고 말했다. 자다가 생각하니 암만해도 이상해서 일어났다. 니네 아빠 참 이상하다. 어딜 가서 며칠 째 집에 안 들어오는 거니? 밤마다 신경안정제 기운으로 간신히 잠드는 엄마는 가끔 벌떡 일어나 엉뚱한 잠꼬대를 현실처럼 하는 바람에 사람을 놀래키지만, 그날은 나도 당황해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멍하니 바라보다 드디어 내가 입을 열었다. 잘 생각해 봐, 엄마. 아빠 어디 갔는지 기억 안나? 몹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던 엄마는 그제야 망연자실한 얼굴을 했다. 맞다, 니네 아빠 돌아갔구나. 그걸 어떻게 까먹었을까. 엄마 어쩌면 좋으니...  잠깐동안 더럭 겁이 났던 딸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며 엄마를 데리고 안방에 가 이불을 덮어드리고 나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새벽녘 잠결에 벌어진 그 같은 해프닝을 다음날에 엄마가 전혀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한 사람과 쌓은 50년의 추억과 습관이 단 2년만에 지워질 리 없다고 애써 놀란 가슴을 진정시켜보지만, 우울증이 심해져 가끔 섬망증까지 보이면 더럭 겁이 난다. 이건 분명 약 탓일 거야. 암. 그렇고 말고.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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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로그는 사적인 배설 공간이라는 의미가 더 크다고 여기고는 있지만 그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내가 아는 한도 안에서 좀 더 우울증 이야기를 해두기로 했다.
최근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온 지인은 파리 체류중에 최진실의 자살 소식을 접하고 놀랐었는데, 돌아오기 이틀 전 갓 서른 밖에 안된 사촌올케의 부음을 듣고 도착하자마자 빈소를 찾아야 했다며 자살이 실로 먼 이야기가 아니라고 안타까워 했다.
물론 자살로 세상을 마감한 그 젊은 엄마가 우울증을 앓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가슴이 아파서 물을 수도 없으며 앞으로도 물어보지도 않을 것이지만, 아이와 남편을 두고 먼저 스스로 세상을 등진 젊은 여인이 겪은 괴로움의 무게가 퍽이나 무거웠으리라고 짐작할 뿐이다. 

그렇지만 자살의 약 45%가 우울증과 관련이 있으며, 우울증 환자의 15%가 자살을 기도한다는 사실은 쉽게 지나쳐선 안될 수치다. 우울증은 성인에게 가장 흔한 정신적 장애이며, 성인 6명 중 한명은 일생동안 우울증을 한번 이상 앓는다고 하니 사실 우리들 가운데 그 누가 우울증을 피해갈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엄마가 다니시는 병원에서 집어온 우울증 안내문에 따르면, 우울증의 위험인자들 가운데 첫번째가 <여성>이다.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우울증에 걸릴 확률은 2배나 된단다. 여성호르몬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고 들은 것 같지만, 역시나 전문가가 아닌 내 어설픈 짐작으로는 전세계적으로 여성의 삶이 훨씬 더 지난하고 척박하다는 뜻이라고 -_-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있다.

우울증의 위험인자들
1) 여성
2) 20-40대 또는 노인
3) 우울증의 가족력
4) 별거, 이혼, 가족과의 사별
5) 최근 6개월 이내에 출산한 경우
6) 신체질환 
                 (출처: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과학 교실 - 정신건강을 위한 안내 시리즈 [우울증])

단순히 기분이 울적한 정도와 달리, 병적인 우울증으로 진단되려면 우울한 기분의 지속기간(보통 2주 이상)과 불면/식욕저하/체중감소/두통 등 신체증상의 수반 여부, 그리고 우울증 때문에 일상생활에 지장이 있는지의 여부를 따져봐야한다. 정신건강 관련 사이트를 찾아보면 우울증 자가진단을 위한 여러가지 문항들(해밀턴 자가진단법벡 자가진단법이 많이 쓰이는듯;;)이 있는데, 개인적으로 테스트해봤을 때 나 역시 중간정도거나 가벼운 우울증 환자에 해당될 때가 더러 있음을 고백해야겠다.
최근에 테스트를 해본 건 작년 이맘때쯤이었는데, 위에 적은 우울증 위험인자 가운데 무려 4개나 해당되는 상황이니 중간정도의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나온 건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다. 

그나마도 다행인 것은 내가 그리 의존적인 성격도 아니고, 분노를 꾹꾹 참아내지도 않으며 인간관계에 소극적이지 않기 때문에 다방면으로 심리적 우울증의 원인을 표출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강박적인 완벽주의자이거나  타인에 의존적인 성격, 또는 분노를 잘 표현하지 않으며 인간관계에도 소극적임과 동시에 자존감마저 부족한 사람이라면, 가벼운 우울증이 병적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훨씬 커질 수밖에 없다. 물론 앞글에서도 적었듯이 개인의 심리적 원인과 크나큰 스트레스로 작용한 사회적 원인(가족과의 사별이나 실직, 이혼 등) 만으로 우울증이 발병하는 것은 아니고, 그 같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신체에 생물학적인 변화(호르몬이나 신경전달물질 이상)를 가져오거나 건강에 이상이 생기면서 내분비계 질환과 함께 우울증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울증으로 의심되면 정말로 <반드시> 전문가에게 상담을 받아야한다.
종합병원 정신과에 진료를 예약하려면 한달쯤 기다려야할지도 모르지만, 전전긍긍 홀로 불안해하는 것보다 단 5분일지언정 만오천원 남짓한 진료비를 들여 전문가와 상담을 해보는 편이 훨씬 이로울 것이다. 개인병원 초진의 경우는 아마 그보다도 더 저렴하지않을까 싶은데, 언젠가 후배를 데려갔던 개인병원의 경우 본격적인 치료를 시작한 뒤 1시간 넘게 걸리는 심층상담 및 설문(거의 수십장에 달하는 질문지를 집으로 가져가 꼼꼼이 기록해야 했다)에 15만원정도 비용이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우울증은 개인의 의지력 박약과 상관없는 뇌의 질환이다. 
우리 엄마의 경우 병세가 심해질 때 나타나는 제일 첫 증상은 불면인데, 대부분의 우울증 환자들도 수면장애를 겪는다고 한다. 식욕이 줄고 잠을 잘 못자 괴로워하는 경우가 많지만 반대로 식욕이 늘어 지나치게 먹고 잠이 오히려 전보다 늘어나는 경우도 있다. 내가 곁에서 지켜본 바로는 무기력감에 빠져 온종일 잠에 의지하려 드는 때도 있지만, 우울증과 불면은 불가분의 관계인 듯하다.
수면부족으로 기운이 없고 쉽게 피로하기 때문에 일의 능률은 당연히 떨어지고 대인관계도 어려우며, 심하면 음식을 아예 거부하기도 한다(예를 들어, <나는 밥 먹을 자격도 없어...>라고 하신다). 우울증 환자는 흔히 과거의 삶을 자책하거나 미래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 고통스러워하는데, 정말로 우리 엄마의 경우 증세가 심해지시면 수십년전에 저질렀던 사소한 잘못과 실수, 유감스러운 일에 대한 넋두리를 거의 토씨하나 안 틀리게 매번 되풀이하신다. 작년에 돌아가신 아버지만 해도 순전히 당신 잘못이었다고, 구급차를 부르는 게 아니었다고, 평생 남편 속을 썪여 건강한 분을 졸지에 먼저 보냈다고 끊임없이 자책하시는데, 나와 가족들은 물론이고 주치의도 생각을 바꾸라 아무리 말씀드려도 병세가 도지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일시적으로 이미 본인의 의지력과 논리적 사고로는 감당할 수 없는 정신상태가 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혈압이나 당뇨, 갑상선 질환 등의 지병이 있는 우울증 환자의 경우는 증세가 심해지면 평소 복용하는 약만으로 신체조절이 되지 않기 때문에 대단히 위험하다.
우리 엄마의 경우 몇년 전 극심한 우울증으로 식사를 완전히 거부하시는 바람에 혈당조절이 안돼 급성신부전증으로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까지 간 적이 있을 정도였다. 
우리 가족들도 엄마가 중환자실에서 일주일이나 사경을 헤매는 일을 당하고 난 다음에야 우울증과 제반 합병증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실감한 것이 사실이다. 

우울증이 확실한 경우 빨리 치료를 시작해야하는 이유는, 초기에 꾸준히 항우울제를 복용해야 재발을 막고 완치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역시 우울증이 본인과 타인을 위해할 만큼 심해지는 것을 처음부터 막아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산후우울증에 걸린 산모가 자기 아기를 해쳤다는 뉴스가 그리 낯설지 않을 정도이니, 우울증 환자가 충동적으로 자신과 주변 사람을 위해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은 절대 허투루 넘겨서는 안될 것이다. 우울증 환자의 15%가 시도한다는 자살은 고통과 절망에서 벗어나고 싶은 도피의 방편이기도 하지만, 죄책감에서 비롯된 자기응징일 수도 있고, 주변 사람에 대한 일종의 복수일 수도 있으며, 때로는 죽음이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처지를 주변에 알려 도움을 청하거나 주변 사람들의 태도를 변화시키려는 삶의 방편일 때도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울증 환자의 주변 사람들은 언제나 각별한 배려와 관심으로 환자의 충동적인 일탈행동을 예방해야 할 것이다.

2년 전엔가 엄마가 입원하셨을 때 만난 옆 병실의 어느 환자는 정말이지 우울증 환자로 생각되지 않을 만큼 늘 쾌활하고 씩씩해보이는 아줌마(우리 엄마처럼 60대였으니 할머니라고 해야하나?)였는데, 간병인과 둘이만 지낼 때는 그렇게 명랑하게 병동의 모든 환자들을 격려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주말에 보호자들이 면회만 왔다가면 침울해져 침대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었다. 옆 병실에 있는 우리에게 들릴 정도로, 남편과 아들, 딸이 돌아가며 <복에 겨운 호강 좀 그만 집어치우라>고 <병원비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줄 아느냐>고 고함을 치다시피 그 아줌마를 구박했기 때문이다. 그제야 우리는 어쩌면 가족들의 무관심과 홀대의 역사가 오래 쌓여 그 아줌마의 우울증 발현에 기여했을지 모르겠다는 짐작을 할 수가 있었다. 

우울증에 관한 한 국내 최고의 권위자라고 하는, 엄마의 주치의 선생님의 명패 옆에 적혀 있는 진료항목엔 언제부턴가 '화병'이라는 항목이 추가되었다. 우울증, 조울증, 강박장애, 공황장애, 화병.
한달에 한번 찾아가는 대학병원 정신과 진료실 앞 대기의자에 앉아있는 수많은 아줌마들과 할머니들을 보면서(정말로 여자와 남자의 비율이 70:30인 듯하다), 겉으론 너무도 건강해보이는 그분들의 우울증과 정신장애엔 모두 조금씩 <화병>이 섞여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전쟁난리통에 가난한 어린시절을 보내고, 어렵사리 학업과 노동에 힘쓰다 결혼과 육아, 현모양처, 슈퍼우먼의 이데올로기의 압박을 당연하다 여기며 살아왔을 그분들의 정신이 대거 병들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하지만 문제는 전쟁난리통과 뼈저린 절대빈곤을 겪지 않은 우리 세대의 여성들도 무한경쟁 사회의 냉혹함과 변함없는 가족주의의 잣대 때문에 과거와 변함없이 우울증을 일으키는 사회적 요인에 고스란히 노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현실이 서글프긴 하지만 어쩌겠나. 구조적인 모순과 고질적인 사회병폐를 고칠 길은 알 수 없으니 나로선 그저 우울증을 가벼이 보지 말자는 목소리나 높일 수밖에.
 
예로부터 병은 널리 알리라는 말이 있다.
널리 알려서 허황된 민간요법이나 근거없는 미신까지 받아들이라는 뜻은 절대로 아니겠지만, 널리 알려 주변의 배려와 도움을 받고 '용하다는 의원'이나 약을 소개받으라는 의미일 것이다.
요즘 주변엔 정말이지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이 많다.
심한 감기에 걸려도 내가 의학을 불신하며 그저 쉬면 낫는다고 여기고 약을 멀리하듯,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도 병원을 외면한 채 어떻게든 본인의 의지로 이겨보려고 백방으로 노력을 기울이려할지 모른다. 다행히 증세가 약한 감기라 푹 쉬고 나면 멀쩡해지듯, 하루 30분쯤 햇빛을 쪼이고, 가벼운 운동을 하고, 밖에 나가 사람들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마음을 붙일 수 있는 취미생활을 찾는 따위의 노력(실제로 우울증 환자에게 권유되는 방법이다)으로 가벼운 우울증을 물리칠 수 있는 사람도 아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절로 낫는 병인 감기와 달리, 우울증은 절대 혼자만의 노력으론 <저절로> 낫지 않는다.

<공인된> 우울증 환자는 아니지만 공연히 찌뿌드드한 날씨 때문에, 병든 엄마 때문에, 밀린 일감 때문에 나도 요즘 계속 수시로 우울함을 느끼는 터라 자꾸 우울증 얘기를 꺼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횡설수설 갈팡질팡 이야기의 두서가 없어지는 것도 우울함이 극에 달했다는 증거다.
이제 그만 닥쳐야지. ^^;

아무튼, 쓸쓸한 가을.
우울함을 이깁시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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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

아픈 손가락 2008. 10. 17. 23:52

가을은 우울증의 계절이기도 하다. 1년 가운데 자살율이 가장 높은 달이 11월이라는 이야기를 어느 책에선가 읽기도 했지만, 튼튼한 사람들도 계절이 바뀌고 따뜻함이 줄어드는 걸 견디기가 쉽지 않으니 마음이 불안정한 사람의 계절나기는 특히 어려운 게 당연할 것이다.

현대인의 30%가 우울증을 안고 살아간다는 통계도 본듯한데, 유명인의 자살과 함께  늘 언급되는 우울증 병력 때문에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져 이제는 이상한 <정신병>으로 취급받는 일이 드물어지긴 했어도 여전히 사람들은 우울증을 오해하거나 편견을 갖는 경우가 많다.
우울증을 오랜 지병으로 갖고 있는 가족의 존재 때문에 일찌감치 우울증에 대해서 이런저런 지식을 얻게 된 나도, 막상 현실에서 우울증 환자를 대할 땐 나도 모르게 실수를 저지른 뒤 나중에야 후회를 한다. 환자의 불안증세와 강박증이 본래 의중과는 상관없는, 순전히 병의 발현임을 알면서도 버럭 짜증을 내고 비난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게 되는 것이다. 병에 대해 제법 안다고 자부하는 나도 이럴진대 대부분의 무지한 사람들은 어떨지,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울증에 대한 가장 잘못되고 뿌리 깊은 편견은 <개인적인 나약함>에서 생긴 병이며 <본인의 의지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의지력만으로 극복될 수 있다면, 그것은 단순히 일시적으로 기분이 저조해지거나 맥이 빠진 것이지 병리학적인 우울증이라고 할 수 없다. 우울증은 여러가지 복합적인 원인이 한꺼번에 작용하여 생겨나는 <뇌의 질환>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나약함과도 상관이 없다. 우울증 환자에게 반드시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라고 권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흔히 우울증을 <마음의 감기>라고 비유하는데, 감기에 걸려도 웬만해선 약을 먹지도 병원엘 가지도 않고 <그저 쉬면 낫는다>고 생각하는 내 입장에선 그다지 유용한 표현이 아니다. 우울증은 절대로 저절로 치유되지 않으며 혼자서는 결코 감당할 수 없는 <병>이라는 점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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