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세미술관 전

놀잇감 2011. 6. 22. 16:47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 전시작품에 포함됐다는 소식에 가야겠구나 벼르고는 있었다. 오르세미술관 전시회는 잊을 만 하면 몇년에 한번씩 기획되는데다가 몇해 전엔 <고흐의 방>과 밀레의 <만종>이 왔다고는 해도 작품수가 하도 알량해 보이코트했던 것과는 상황이 달랐다. 오르세 미술관 내부수리 때문에 작품을 '대거' 빌려올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들렸기 때문이다. 134점이면 소품이 포함됐다 해도 예술의 전당까지 흔쾌히 가줄 수 있는 작품량이었다. 6월 4일에 시작해 9월 25일까지 하는 전시라 '언제' 갈 것인가 그것만이 의문이었는데, 마침 어제 저녁약속이 예술의 전당 안에 있는 벨리니에서 잡혔다. 여름밤 산책도 하자면서. 이런 걸 하늘의 뜻이라고 하는 거야, 라며 설렘을 안고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별이 빛나는 밤> 말고는 또 무슨 그림이 왔는지 일부러 알아보지 않고 갔는데 그러길 잘했던 것 같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고, 꽤 유명한 그림은 10분의 1도 되지 않는듯했다. 오르세에서 빌려주는 작품만 가져오다보니 일관되는 주제나 사조로 전시실을 꾸미기에도 역부족이었던 것 같고...
고흐, 세잔, 르누아르, 밀레, 드가, 모네, 고갱, 피사로, 보나르, 로트렉, 쇠라, 루소 등등 그림책에서 봤다 싶은 화가들의 작품이 한두 개씩은 전부 포함되긴 했으나 이른바 오르세가 자랑하는 대표작은 많이 빌려주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도 난 뿌듯했고 만이천원이 아깝지 않았다. 실물 알현을 못했던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을 실컷 보고 왔기 때문이다. ^^; 데생과 스케치류의 소품도 꽤 많고, 대중화되기 시작한 20세기초의 사진 작품들도 더러 포함되어 있으므로, 134점 모두 대작일거라는 오해는 하지 않는게 좋겠다. 나는 최근 한국과 일본 근대문학을 좀 읽었더니 20세기초 사진과 작품들이 남다르게 다가왔고, 거리의 신문팔이 소년들이나 공장장에서 일하는 소녀들의 노동현장 포착 모습이 짠했다.  


게다가 뜻밖의 그림들도 몇점 만나는 바람에 마음에 드는 작품만 집중적으로 몇번씩 감상하며 눈호강을 할 수 있었다. 방마다 주제를 정해놓기는 했던데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서 모르겠고, 암튼 인물화를 모아놓은 전시실에서 맞닥뜨린 르누아르의 <소년과 고양이>, 모네의 <고디베르 부인의 초상>, 로트렉의 <여자 어릿광대 샤 위 카오> 세 작품은 거의 나란히 걸려 시선을 끌었다.

르누아르, [소년과 고양이]

포스터에 담긴 오른쪽 그림이 바로 르누아르의 초기작이라는 <소년과 고양이> 일부인데 정말 예쁘지않은가! @.@ 
르누아르는 항상 예쁘고 아름다운 대상을 화폭에 담아 눈을 푸근하게 해주는 그림을 그렸지만, 척 보면 르누아르 그림이라고 알 수 있을 듯한 특징이 작품마다 두드러진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초기작이라도 이게 르누아르 그림이라니 의외였다. 평소 보던 르누아르 작품과는 색감도 뭔가 다르고 분위기도 한층 어두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도슨트의 말을 들으니 누드화 가운데서도 남자 누드는 이 작품이 유일하단다. 고양이 표정까지 어쩜 저리도 사실적일고. 꽃소년에 열광하는 본성을 못속이고 이 그림 앞에서 한참이나 헤벌쭉 미소를 지으며 서 있다가 돌아섰다. ㅎㅎㅎ

상당히 작품 크기가 큰 모네의 <고디베르 부인의 초상>도 워낙 아름다워 한참을 감상했는데, 좀 더 인상적이었던 건 그 바로 옆에 걸린 로트렉의 작은 인물화였다. 어딘가 퇴폐미와 서글픔이 철철 넘치는 것 같은 로트렉의 그림도 꽤나 좋아하는데 공단 드레스를 떨쳐 입은 단아한 귀족 여인의 전신상 옆에서 더욱 초라하게 대조되는 어릿광대의 뒷모습이라니...
로트렉의 그 그림 사진 찾아올리려고 나름 검색해보았으나 못 구했다. 하기야 구한다고 해도 전시실에서 그 순간 느꼈던 기분을 전달할 순 없을 테니 그냥 통과.

그 방에 같이 걸려 있던, 처음 들어보는 아르망 스갱이라는 화가의 인물화 <가브리엘 비앵>도 눈빛이 오래 잊히질 않을 만큼 좋았고, <빨래하는 여인>의 뒷모습을 그린 폴 기구의 그림도 마음에 들었다. 미술 교과서에 실렸던 것으로 생각되는 세잔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도 볼 수 있었다. 생각보다 그림이 작군, 했다. 드가의 발레리나 그림도 한 점 왔다. 나로선 처음 보는 <계단을 오르는 발레리나들>이긴 하지만. 가장자리 인물을 가차없이 잘라 표현한 드가의 기법이 당시로선 대단히 선구적인 시도였으며, 그게 일본 판화의 영향이라는 도슨트의 설명에 조금 놀랐다. 화투의 새 그림까지 예로 들어 설명하던데 그 부분에선 시끄럽고 듣기 싫어서 딴그림에 정신을 팔았다. 그림을 볼 때 설명을 들으면 더 많이 세세한 부분까지 보여서 좋을 때도 있지만, 때로 그냥 아무 설명 없이 나 혼자만의 느낌에 사로잡히고 싶을 때도 있어 변덕이 부글부글 끓는다. 일부러 도슨트 시간에 맞춘 것도 아닌데 그림 설명을 만나 약간 반가운 느낌과 구름처럼 몰려다니는 사람들 때문에 짜증나는 기분 사이에서 어제도 오락가락했다. 

풍경화 가운데선 뭐니뭐니해도 고흐 그림이 인기 폭발이었지만, 밀레의 <봄> 앞에도 사람들이 계속 몰려들었다. 저 유명한 <만종>이나 <이삭줍기>보다(이번에 이런 작품이 왔다는 얘기가 아님;;) 나도 밀레의 <봄>이 훨씬 좋았다. 먹구름 잔뜩 낀 왼쪽 하늘에 드리워진 무지개도 예쁘고 농촌의 오솔길과 꽃을 피운 과일나무, 멀찌감치 나무 아래 서 있는 아주 작은 농부의 모습까지 정겹지 않은 구석이 없을만큼 최고의 완성도를 자랑하는 작품이 아닐는지. 하트만이라는 고객을 위해 그린 4계절 연작이라는데 겨울은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데고, <봄>이 연작중 가장 마지막 작품이란다. 계절 중엔 뭐니뭐니해도 봄이 최고지...

그밖

펠릭스 발로통, [공]

에 오호라 쾌재를 부르며 기쁘게 만난 그림은 펠릭스 발로통의 <공>. 작품 크기가 큰 것도 아니고 색감이 화려하지도 않은데 마음을 훅 후비고 들어오는 느낌이라 한참을 감상했다.
그림자까지도 행복해 보이는 것 같다가 또 좀 외로움이 풍기기도 하고... 저 멀리 서 있는 두 여인 가운데 이 아이의 엄마가 있을까 아닐까 혼자 한참 시나리오를 쓰다가 말았다.




해외 미술관에서 두서없이 주워담듯 빌려온 전시회는 통일감이 없어서 문제라고 속으로 구시렁거리다가 군데군데 마음에 드는 그림들이 눈에 띄어 불평이 쏙 들어갔다. 메인요리로 고흐의 별밤만 기대하고 갔는데 서비스로 주는 각종 디저트에 감동하고 온 기분이랄까. ㅋㅋ


벽 하나를 온전히 차지하고 있던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을 전시실에서 본 느낌을 그대로 간직해보려고 일부러 그런 사진을 구했다. 별빛을 심히 도드라지게 강조한 복제 그림들과 달린 원래 그림 느낌이 거의 고스란히 담겼다.  

사진 출처: http://moonsoyoung.com/90114994256


고흐가 이 밤풍경을 그리려고 밀짚모자에 촛불을 얹어놓고 작업을 하느라 뜨거운 촛농이 뚝뚝 떨어져도 아랑곳하지 않았다는 도슨트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암튼 하늘의 북두칠성도, 해안도로를 따라 켜진 진노랑색 가스등도, 밤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가는 부부의 미소띤 표정도 다 정겹고 아름답다. 코앞까지 가까이 가서 확인했는데 두 사람 다 웃고 있었다. ^^;


어제 만난 친구에게도 이야기했지만 인생은 참 공교롭다. 97년이었던가, 도서전 때문에 프랑크푸르트에 간 김에 파리와 런던 여행을 계획했다. 파리에서 2박 3일이었나 3박 4일쯤 보내는 동안 마침 파리에 와 있던 친구와 점심무렵 오르세 미술관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세 시간이면 그림 구경 실컷 하겠지 싶어 시간을 안배했으나, 오르세미술관의 작품수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했고 나는 인상파 전시관을 절반도 다 못돈 채 눈물을 머금고 약속시간에 맞춰 밖으로 나가야 했다. 그때 못봐서 제일 아쉬웠던 그림이 바로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이었다. 그날 친구는 오후에도 미팅이 잡혀있었다. 그래서 아마도 차를 마셨던가 간단히 점심을 떼우고 헤어져야 했으므로, 같이 지하철을 타다가 나는 뻬르라세즈로 친구는 미팅 장소로 향했다. 아쉬운 마음에 나는 파리일정을 하루 더 늘려 오르세 미술관을 마저 보겠다고 마음 먹었으나 런던행 비행기표 변경이 불가능했다. 하는 수 없이 다음날 파리를 떠나며 몇년 안에 다시 오리라, 파리 뿐만 아니라 유럽여행을 제대로 하리라 결심했다. 다시 가기는 개뿔. 그 결심은 지금껏 이루어지지 못했다.

어제 저녁에 만난 친구가 바로 그 때 오르세 미술관 앞에서 만났다가 파리 지하철에서 헤어진 장본인이다. 이 정도면 인생이 공교로운 거 아닌가? 물론 내가 예술의 전당 가는 김에 혼자 전시회를 볼 계획을 세웠지만, 먼저 벨리니로 장소를 정한 건 그 친구였다. 오래 전 그 친구를 만나려고 오르세에서 미처 못본 고흐의 그림을 십수년이 지난 어제 결국 보고 나서 또 그 친구를 만나니 뭔가 하나 빠졌던 퍼즐 조각을 마침내 끼웠거나 어그러졌던 아귀를 딱 맞춘 느낌이 들었다. 그날 파리 지하철에서 헤어지며 내가 친구에게 초콜릿을 주었다는데(나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요번엔 친구가 내게 쿠키를 싸주었다. 부른 배를 꺼뜨리겠다고 예술의 전당 주변을 거닐다 올려다본 밤하늘 색깔은 유난히 푸른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하늘 색깔이 '프러시안 블루'라고 친구가 말했고 나는 오후에 보고 나온 고흐 그림의 밤하늘 색깔을 떠올렸다. 확실히 인생은 오묘하다. 혹은 인간이 같다붙이기 선수이거나.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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