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우울증의 계절이기도 하다. 1년 가운데 자살율이 가장 높은 달이 11월이라는 이야기를 어느 책에선가 읽기도 했지만, 튼튼한 사람들도 계절이 바뀌고 따뜻함이 줄어드는 걸 견디기가 쉽지 않으니 마음이 불안정한 사람의 계절나기는 특히 어려운 게 당연할 것이다.
현대인의 30%가 우울증을 안고 살아간다는 통계도 본듯한데, 유명인의 자살과 함께 늘 언급되는 우울증 병력 때문에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져 이제는 이상한 <정신병>으로 취급받는 일이 드물어지긴 했어도 여전히 사람들은 우울증을 오해하거나 편견을 갖는 경우가 많다.
우울증을 오랜 지병으로 갖고 있는 가족의 존재 때문에 일찌감치 우울증에 대해서 이런저런 지식을 얻게 된 나도, 막상 현실에서 우울증 환자를 대할 땐 나도 모르게 실수를 저지른 뒤 나중에야 후회를 한다. 환자의 불안증세와 강박증이 본래 의중과는 상관없는, 순전히 병의 발현임을 알면서도 버럭 짜증을 내고 비난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게 되는 것이다. 병에 대해 제법 안다고 자부하는 나도 이럴진대 대부분의 무지한 사람들은 어떨지,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울증에 대한 가장 잘못되고 뿌리 깊은 편견은 <개인적인 나약함>에서 생긴 병이며 <본인의 의지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의지력만으로 극복될 수 있다면, 그것은 단순히 일시적으로 기분이 저조해지거나 맥이 빠진 것이지 병리학적인 우울증이라고 할 수 없다. 우울증은 여러가지 복합적인 원인이 한꺼번에 작용하여 생겨나는 <뇌의 질환>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나약함과도 상관이 없다. 우울증 환자에게 반드시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라고 권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흔히 우울증을 <마음의 감기>라고 비유하는데, 감기에 걸려도 웬만해선 약을 먹지도 병원엘 가지도 않고 <그저 쉬면 낫는다>고 생각하는 내 입장에선 그다지 유용한 표현이 아니다. 우울증은 절대로 저절로 치유되지 않으며 혼자서는 결코 감당할 수 없는 <병>이라는 점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병리학적인 발병의 원인과 인체 시스템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크나큰 스트레스를 받거나 상실을 경험한 경우, 신체의 변화에서 비롯된 호르몬 이상, 또는 완벽주의자로서의 성격적인 요인 등 다양한 요소들이 한꺼번에 작용하면 복잡한 인간의 뇌에 드나드는 신경전달물질이나 호르몬에 이상이 생기게 되고 그렇게 생겨난 <뇌의 이상>은 약물치료를 병행하지 않으면 결코 건강하게 회복될 수 없다.
물론 우울증의 원인을 제공한 내외적 갈등이나 대인관계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심리치료만으로도 효과를 보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요인을 완벽하게 차단하는 것이 불가능한 경우가 대부분인 현대인의 우울증엔 약물치료와 심리치료가 병행되어야 예후가 좋으며, 그렇기 때문에 우울증 환자에겐 주변 사람들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다.
모든 병원이 다 마찬가지지만, 심리상담이 특성화된 일부 개인병원이 아닌 한 대형병원에서 정신과 진료를 받아보면 의사와 대면하는 시간은 길어야 10분이 고작이다. 예약환자로 버글거리는 대학병원 진료대기실에서 마냥 기다리다 주치의를 만나면 제일 먼저 엄마가 듣는 질문은 <어떻게 지내셨어요?>다.
30년 가까이 담당의사였던 주치의 선생님은 아마 우리 엄마와 몇 마디만 주고 받아도 어떤 상태인지 대강은 알아차릴 것이다. 똑같이 <잘 지냈어요>라는 대답에도 건강한 미소가 뒤따르는지, 억지웃음과 불안한 눈빛이 동반하는지 전문가로서 척 보면 간파되지 않을까. 어쨌든 내 믿음은 그렇다. 그리고 미심쩍은 부분은 보호자로 따라들어간 내가 부가적으로 질문하고 상담하면 되는 것이니까.
외국처럼 시간당 십만원 이상이나 하는 집중적이고도 개인적인 정신과 상담이나 심리치료가 활성화되지 않는 한, 내가 보기엔 우리나라에선 우울증환자의 치료에 주변 사람들이 맡아야할 몫이 상당히 클 수밖에 없다. 뇌의 활성물질 이상에 대한 치료약과 전반적인 심리분석의 결정은 당연히 전문의가 내려야하지만, 환자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과 따뜻한 배려, 치료를 포기하지 않도록 용기를 북돋아주는 일은 어디까지나 가족이나 지인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약물치료를 계속해서 받고 있는 상황임에도 우울증세가 심해질 때는 의사가 가장 중요하게 지표로 삼는 질문이 하나 있다. 환자 입에서 <죽고 싶다>는 말이 나오는지의 여부에 관한 것.
주치의 선생님에게 들은 바로는 자살의 약 45%가 우울증과 관련이 있으며 우울증 환자의 15%가 자살을 한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평범한 사람들이 일상에서 푸념하듯 <죽고 싶다>고 넋두리를 하는 것과 우울증 환자가 <죽고 싶다>고 하는 말을 똑같은 맥락으로 받아들여서는 절대로 안된다. 그리고 만약 환자의 입에서 <죽고 싶다>는 말이 나왔다면 가족과 지인들은 각별히 환자를 지켜보아야 하며, 장시간 환자 혼자 두어서도 안된다. 우리 엄마의 우울증이 심해져 주치의에게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어요>라는 말을 하는 단계에 이르면, 의사선생님은 나에게 신신당부를 한다. 어머니를 혼자 두지 말라고.
우울증을 앓던 유명인들의 자살 소식을 들을 때 내가 가장 안타까운 부분도 그 점이다. 주변에서 조금만 더 환자에게 신경을 써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 우울증 환자들이 얼마나 극단적인 생각과 충동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지, 이제는 부디 더 많은 사람들이 깨닫고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길 빌 뿐이다.
또한, 죽을 용기로 악착같이 살면 될 것을, 나약하기 때문에 죽음을 선택했다고 여기는 편견도 곤란하다.
우울증 환자들이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그 순간, 그 방법이 가장 쉽고 모든 이들의 행복과 문제해결을 위한 방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타인으로서 섣불리 그 깊은 고뇌와 아픔을 비난할 자격은 없지 않을까.
우울증에 관한 한, 전도라도 하듯 그 위험성을 기회 닿을 때마다 떠들고 다녔기 때문인지 내 주변엔 우울증을 앓았거나 극복했거나 현재도 앓고 있음을 내게 털어놓는 지인들이 꽤 되는데, 다행히 거의 완벽하게 병을 떨쳐내고 얼마전엔 2년 가까이 복용하던 항우울제도 끊을 수 있게 된 지인 한분의 경험담은 지금 생각해도 등골이 서늘하다.
갑자기 밀려든 무기력감과 극심한 불면, 불안감에 휩싸여 괴로워하면서도 아직은 병원을 찾을 엄두를 내지 못한 채 바깥세상과 스스로를 단절시키고 피폐해진 삶을 살던 한달여 동안, 그분은 끊임없이 죽음을 해결책으로 떠올렸다고 했다.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릴까, 문설주에 목을 매달까, 수면제를 사모을까 따위의 방법을 고민하고 연습까지 했다는 말을 한참 지난 나중에 들려주며 눈물짓던 그분의 모습에 얼마나 놀랬던지. 그분이 가족의 배려로 어렵사리 우울증을 극복하고 건강한 삶을 되찾을 수 있어서 정말 다행스럽다.
사실 우리 엄마도 몇년 전에 한번 홀로 안방에 들어가 수상한 시도를 한 적이 있을 정도였으니, 우울증 환자를 쉴새없이 지키고 돌보는 가족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다행인 것은 다른 여러 병처럼 우울증이 완치될 수 있다는 점이다. 증상이 없더라도 6개월 이상 꾸준히 약물치료를 해야 효과가 있으며 50-90%이상이 재발하기 때문에 더 오래 약물치료를 받아야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래도 완치율이 상당히 높다는 사실(80%라고 들은 것도 같은데 정확한 퍼센티지는 잊어먹었다 -_-;;)은 꽤나 고무적이다.
문제는 우울증이 도저히 완치되지 않고 약물치료를 수십년간 지속하는데도 재발하는 우리 엄마 같은 환자들일 것이다. 물론 처음엔 몇년에 한번 잠깐씩 우울증이 심해질 때만 약물치료를 했지만, 몇년이었던 발병주기는 점점 짧아졌고, 최근 10년간은 하루도 빠짐없이 약을 드시는데도 우울증의 증세가 까닭없이(명절이 다가온다든지, 도배라든지, 가족의 죽음이라든지 확실한 외적원인이 있을 때도 있지만) 심해져 평소 복용하던 약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어 입원을 해야할 때도 있다.
암을 치료하는 약이 개발되기도 했지만 아직도 감기를 치유할 약은 존재하지 않듯, 우울증에도 만사형통으로 특효인 약은 없는 듯하다. 너무도 복잡하고 신비로운 인체와 두뇌의 시스템 때문이겠지만, 항우울제는 사람마다 잘 맞는 약이 다르고, 심지어 같은 사람이라 해도 상황에 따라 약효가 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의 약물과 통원치료로는 도저히 일상을 유지하기가 어려운 경우, 의사는 환자에게 입원을 권유하기도 하고 환자 스스로 입원치료를 바라기도 한다. 대중매체에서 소비하고 재현하는 정신과 병동의 왜곡된 모습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편견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 대부분의 정신과 병동은 일반 병실과 마찬가지로 개방 병동이며 다른 환자들처럼 보호자나 개인이 고용한 간병인의 보살핌을 받는다. 다른 질병과 똑같이 의료진이 환자를 옆에서 관찰하며 수시로 맞는 약을 처방하고 증세의 호전 여부를 살피므로, 환자에게 잘 맞는 약물을 찾기 위해선 입원치료만큼 효과적인 방법이 없을 것이다.
계속 복용하던 항우울제가 있는데도 증상이 심해져 새로운 약을 찾아야하는 경우, 통원치료를 할 때는 기껏해야 일주일마다 약을 바꿔먹으며 병세를 호전시켜야하므로 몇주일이 걸릴지, 몇달이 걸릴지 알 수 없다. 입원을 해서 의사들이 집중적으로 약을 바꿔 치료를 시도해도 제대로 맞는 약을 찾기까지 일주일쯤 걸리는 일은 예사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울증으로 입원을 하는 경우, 맞는 약을 찾아내고 일상으로 되돌아갈 기력을 회복하고 다시 자기 삶에 적응하기까지, 우리 엄마의 경험을 돌이켜보면 최소한 한달 이상 걸렸던 듯하다. 심한 경우엔 두달도 될 수 있고...
어쨌든 중요한 것은 환자 본인이든 주변 가족이든 우울증의 치료를 미루거나 소홀하게 여기면 안된다는 점이다.
언젠가 별다른 이유 없이 또 다시 엄마의 우울증--사실 울 엄마는 단순 우울증이 아니라 조울증 환자다--이 심해져 몹시 괴로웠던 어느날, 진료실에 함께 들어갔던 내가 주치의 선생에게 도대체 왜 우리 엄마는 우울증이 완치되지 않는지 물은 적이 있다.
의사 선생님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글쎄요, 사람마다 통증을 느끼는 정도가 다 다릅니다. 손가락을 칼에 조금 베었을 때 어떤 사람은 대수롭지 않게 쓱 문지르고 마는 반면, 어떤 사람은 몹시 아파하며 눈물을 흘리고 괴로워하지요. 어머니는 사소한 상처도 심하게 앓는 쪽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런 성향이 어떻게 변하겠어요?
의사의 대답은 별 도움도 위안도 되지 않았지만, 심약한 엄마를 좀 더 이해하는 수밖에 없다는 체념을 일깨워주긴 했던 것 같다.
얼마 전, 엄마는 또다시 의사에게 왜 약을 30년도 넘게 먹는데 병이 낫질 않느냐고 따져 물었다. 복에 겨운 사람들이나 우울증을 앓는거라고 남들이 손가락질 하는 것 같아서 창피하다고.
의사 선생님은 이번에도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울증이 뭐가 어때서요? 그 사람들도 속으로는 다 앓습니다. 그냥 하도 싸워서 정든 오랜 친구겠거니 생각하고 우울증 약도 평생 데려간다 생각하세요.
엄마도 의사의 말에 딱히 위로를 받은 표정은 아니었지만, 당뇨병처럼 우울증도 친구처럼 평생 끼고가야 한다는 사실을 최소한 받아들이려고 노력할 작정인 듯했다.
30년 넘게 우울증을 앓아오신 엄마를 지켜보며 자란 나의 가장 커다란 두려움은 일종의 정신병인 우울증이 유전이어서 나도 우울증환자가 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점이었다. 그러나 우울증의 가족력이 위험인자가 될 순 있어도 유전은 되지 않는다는 말을 엄마의 주치의에게 확인하고 나서 나는 그 오랜 두려움을 깨끗이 접을 수 있었다. 잘은 모르지만, 엄마가 착하디 착한 성격이라 젊은 시절 남에겐 모진 말 못하고 속에만 화를 담아왔으며 자존심이 강해 고민이 있을 때에도 혼자서 끙끙 고민하며 해결하려는 경향이 많아 생긴 스트레스가 아마도 발병의 원인일 것이라고 짐작했던 나는 꽤 어려서부터 의도적으로 고민거리가 있으면 친한 지인들에게 주저없이 털어놓았고 거의 모든 나의 삶을 가족과 친구들에게 드러내고 나누는 것이 정신건강을 위해 좋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 블로그도 그렇게 시시콜콜 끝없이 늘어놓는 수다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만큼만, 아니 드러내도 좋을 것 같은 부분만 공유한다는 자기검열의 제한은 있겠지만 아무도 관심없을 것 같은 사적인 이야기들을 구구절절 기록하는 행위는 확실히 심리적인 치유의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적인 블로그가 어떤 이들이겐 자기홍보와 자랑의 공간이겠지만, 나같은 이들에겐 확실히 익명을 활용한 고백과 배설의 공간이다.
이 공간에라도 간간이 우울하고 속상하다고 솔직한 넋두리를 털어놓는 한은 아마도 나의 뇌속에 이상한 호르몬이 생겨나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하는 순간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 믿을란다.
온종일 부대껴야 하는 두 모녀의 우울증 위험인자가 각별히 인지되던 어느 가을날,
한 여자는 돌연 우울증이 심해졌고, 한 여자는 우울증을 아는 대로 풀어 배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