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해당되는 글 28건

  1. 2010.01.04 눈타령 8
  2. 2010.01.03 눈의 종류 8
  3. 2009.12.28 17
  4. 2009.12.22 동짓날 19
  5. 2009.12.18 영하 10도 4
  6. 2009.11.27 Sting 4
  7. 2008.12.23 밤에 내리는 눈 17
  8. 2008.11.22 추운 건 싫다 20

눈타령

추억주머니 2010. 1. 4. 15:50

여기다 눈 얘기를 자꾸 쓴 탓은 아닐 텐데 오늘 서울에 내린 눈은 40년만에 처음이라는 대폭설이다. 2시쯤 본 뉴스에서 서울 적설량이 현재 25.8cm라고 했음. @.@
언덕 중턱에 사는 나로선 이런 날 외출이 무서워 그냥 집에 콕 박혀 있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인데, 집앞 골목길은 여러 이웃들이 힘을 합쳐 거의 다 쓸고 길을 냈지만, 골목에서 모퉁이를 돌아 이어지는 큰 언덕길 눈밭은 이미 죄다 밟히고 다져져 비나 넉가래로는 치울 형편이 아니라 염화칼슘만 여기저기 뿌린 뒤 모두들 포기하고 돌아서야 했다. 위쪽 동네에서도 사람들이 눈을 치우며 내려와 골목 어귀에서 만났는데, 비질을 하는 부모들 옆에서 신나게 뛰노는 아이들을 보니 옛날 생각이 절로 났다.

나의 본적 주소지이자 (지금은 동네가 완전히 달라졌지만 주소에도 <산31번지>라고 되어 있다!) 내가 어린 시절 살던 할머니댁은 언덕 위에 있었다. 조부모님은 이북에서 피난 내려와 부산서 살다 다시 상경하셨으니 서울 변두리 산동네에 정착한 게 어느정도 이해가 가는데, 서울 토박이인 외할머니댁도 똑같이 한강 건너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점은 좀 신기하다.

아무튼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면 할머니댁이든 외할머니댁이든 언덕길에서 비닐포대 썰매를 타며 꽤나 즐거워했다. 물론 그 때도 겁이 많아서 다른 아이들처럼 경사가 제일 급한 곳부터 길게 타고 내려가진 못하고 완만한 부분만 즐겼는데, 우리가 그렇게 비닐포대로 반들반들하게 언덕길을 빙판으로 만드는 건 어른들에게 대단히 혼날 일이어서 조만간 동네 어른들 가운데 누군가 연탄재를 들고 나와 우리의 놀이터를 망가뜨리기 십상이었다.
어른들이 그렇게 우리의 썰매장을 망가뜨리고 나면 아이들은 어른들에 대한 복수를 감행했다. 연탄재가 덜 뿌려진 곳을 골라 일부러 더욱 매끄럽게 발로 문질러 눈을 다진 뒤에는 마치 처음 눈이 내린 상태처럼 보이도록 눈을 보슬보슬 뿌려놓는 것이었다. 혹시라도 재수없게 그곳을 밟은 사람은 영락없이 미끄러져 자빠지도록! 지금 생각해보면 아찔하지만, 그땐 그렇게 만들어놓은 빙판 언덕길에 누군가 와장창 넘어지는 걸 구경하는 게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ㅎㅎㅎ

오늘 내다본 집앞 언덕길도 그 오래 전 할머니댁 언덕처럼 꽤나 반들반들 발자국이 찍혀 있어, 비닐포대만 있다면 한번쯤 주욱 미끄럼을 타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한쪽 옆에 줄지어 서 있는 자동차에 처박히면 어쩌나 싶기도 하고, 이 동네에 이상한 여자 산다고 소문 날까봐 차마 시도는 하지 않기로 했다. 솔직히 누군가 아이들 가운데 비닐포대를 구해 썰매를 타고 논다면 슬쩍 한번 빌려타자고 나설 자신은 있는데, 요즘 아이들은 썰매를 눈썰매장에서나 타는 것으로 아는지 아쉽게도 저 아까운 언덕길에서 썰매 타고 노는 아이가 한명도 없다.

아무래도 나는 언덕과 인연이 많은 운명인지, 내가 다녔던 중고등학교 모두 산꼭대기에 자리잡고 있었다. 주소로는 무려 <종로구>인 서울 중심지에 그렇게 높은 학교가 있다는 걸 사람들은 아직도 잘 모르는 것 같다. 지금이야 염화칼슘이 흔하지만 내가 중학생 때는 염화칼슘의 존재조차 알지 못할 시기였다. 해서 겨울방학 이전에 눈이 좀 많이 내린다 싶으면 우리 학교는 무조건 단축수업을 했다. 산꼭대기라 워낙 춥기 때문에 우리 학교는 겨울 교복으로 바지를 입어도 무방했는데, 특히 추위에 약한 나는 교복 바지를 2개나 맞춰 돌려 입으며 당연히 안에 내복까지 껴입고 다녔다. 마침 근처에 화교학교가 있기도 해서, 중학교 시절 나는 교복바지 때문에 화교학교에 다니느냐는 질문을 참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어쨌거나 눈이 심상치 않게 많이 내리는 날엔 어김없이 단축수업을 알리는 방송이 흘러나왔고, 우리는 환호를 하며 하산준비를 했다. 경사가 3, 40도 이상인 언덕이라 그야말로 눈밭 하산길은 만만치가 않아, 기다란 동앗줄 같은 밧줄이 군데 군데 드리워졌고 체육 선생들이 중간에 서서 벌벌 기는 아이들의 손을 잡아주기도 했다. 그때도 멋내는 데 열중한 아이들은 제 아무리 추워도 반드시 치마 교복에 메리제인슈즈 같은 학생 구두를 신고다녔지만, 나처럼 바지교복을 갖춰입은 아이들은 눈이 많이 내리면 책가방을 썰매삼아 타고 내려오는 경우도 있었는데, 2학년때였던가 그날은 정말 순식간에 폭설이 내려 책가방 썰매가 얼마나 스릴 넘치고 재미나던지, 몽둥이를 휘두르는 (길 미끄럽게 한다고;;) 체육선생을 피해 몇번이나 오르내리며 책가방 썰매를 즐긴 적도 있었다.

하지만 같은 재단에 건물만 달라진 고등학교에 올라가자 눈오는 날 단축수업은 그야말로 전설이 되고 말았다. 그새 염화칼슘이 도입되었던 것. 아마 중고등학교만 있었다면 굳이 염화칼슘을 그렇게 미친듯이 뿌려대지 않았을 텐데 그 산꼭대기에 대학건물까지 있었으니 서서히 많아지기 시작한 교직원들의 자동차 운행 때문에라도 염화칼슘을 무더기로 살포했던 것 같다. 눈이 많이 내려도 단축수업을 하지 않는 서글픈 현실을 개탄하며, 나는 책가방 썰매 타고 가파른 학교 언덕길을 하산했던 무용담을 신이 나서 들려주었지만 다른 중학교 출신들은 좀체 믿으려하지 않았다. 중학교 동창들 가운데서도 교복바지파가 드물어 증언도 부족한 터라, 책가방 썰매 하교길은 그야말로 믿거나 말거나 한 전설로 남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스키장이든 눈썰매장이든 가본지가 까마득하다. 보드는 타본 적도 없고 두발로 타는 스키도 잘 타지 못하는 터라 리프트 탈 때마다 추위에 벌벌 떨어야 하는 스키장엔 지금도 가보고픈 생각이 전혀 없지만, 썰매 운전도 운전이랍시고 방향조절을 꽤 잘하는 편이라고 생각하므로 ^^ 에버랜드에서 타던 스키썰매는 약간 그립다. 다 미친듯이 내린 눈 때문이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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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종류

놀잇감 2010. 1. 3. 02:33

이번 겨울 전체 예보에 눈이 많이 내린다고 했던가? 절대 기억할 수 없어 민망하지만 어쨌든 새해들어 또 눈이 내렸다. 이번엔 날씨가 그리 춥지 않아 파르르 부서지는 눈은 아니다. 에스키모들에겐 눈의 이름이 수십 가지라던가 수백 가지(설마 수백 가지는 아니겠지? +_+) 나 된다고 들었는데 우리말엔 함박눈, 싸락눈, 진눈깨비, 세 종류 뿐인가 싶어 찾아보니 아니란다.
<눈의 종류>로 검색해보니 놀랍게도 많은 표현이 있었다.

가랑눈 · 가루눈 · 길눈 · 도둑눈 · 마른눈 · 만년눈 · 밤눈 · 복눈 · 봄눈 · 소나기눈 ·
솜눈 · 숫눈 · 싸라기눈 · 자국눈 · 진눈 · 진눈깨비 · 찬눈 · 첫눈 · 함박눈


사실 내가 흔히 썼던 <싸락눈>이 표준말인지도 그간 자신이 없었다. 며칠 전, 얼마 안 쌓인 눈길을 달려 밥먹으러 가면서 마침 다들 출판계에 종사하는 친구들이라 싸락눈의 맞춤법을 물었더니 놀랍게도 다들 갸우뚱했다. 함박눈은 확실히 알겠는데, 알알이 부서지는 그 가느다란 눈에 대한 이름이 무엇인지 의견이 분분했다. 
싸락눈? 싸라기눈?  싸래기눈? 싸리눈?

집에 돌아와 찾아보니 표준어는 싸라기눈이고, 싸락눈도 사전에 등재되어 있으니 역시 표준말인 셈이다.
싸라기눈: 빗방울이 갑자기 찬 바람을 만나 얼어 떨어지는 쌀알 같은 눈
싸락눈: 싸라기눈의 준말.                                     [출처: 국립국어원]
 
그런데 왜 이렇게 낯설은 건지 원. 싸락눈. 싸라기눈. 둘 다 사투리같다. 크크.

게다가 내가 싸락눈이라고 우겼던 지난주초 폭설 때 눈은 쌀알처럼 뭉쳐지지도 않고 아예 파르르 부서지는 눈이었으니 <가루눈>이라고 했어야 옳다. 가랑비가 있듯이 가랑눈도 있고, 마른눈이 있으면 진눈도 있다는 게 재밌다. 눈만 오면 눈사람을 만들러 뛰쳐나갔던 어린시절을 떠올리니 확실히 함박눈이라고 다 진눈은 아니었던 것 같다. 솜덩이 찢어 던지듯 펑펑 내렸어도 잘 뭉쳐지는 습기 많은 눈이 있었는가 하면, 싸락눈 못지않게 잘 안뭉쳐지던 마른 함박눈도 분명 있었던 게 기억난다.

올 겨울에 얼마나 더 눈이 내릴지는 모르겠는데, 새삼 눈의 종류를 찾아보았으니 이젠 눈 내릴때마다 어떤 눈인지 굳이 밖에 나가 확인하는 거나 아닌지. 마침 조카들이 놀러오는 날 또 함박눈이 온다면 나도 눈사람 한번 만들어봐야겠다. 이웃들은 매일 동숲에서 눈사람 마에스트로가 되기 위해 눈덩이를 굴린다는데, 나는 현실에서라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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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잇감 2009. 12. 28. 12:56
나는 어제 비로소 올 겨울 들어 처음 눈을 맞아보았다. 크리스마스 날에도 눈이 왔다지만 밖에 안나가봐서 모르겠고, 어제 온종일 내린 눈은 꽤나 무서운 기세였다. 오후가 되도록 아무도 동네 눈 치우는 소리가 안들려 걱정스러운 마음에 (오늘 아침 일찍 왕비마마의 병원 나들이가 잡혀 있던 터라 언덕길이 심히 염려됐다) 공주와 둘이 눈싸움을 빌미로 비를 들고 나섰더니 기상대 예상은 2.5센티미터라는데, 내 차 지붕에 쌓인 눈은 전날 쌓인 눈을 감안하더라도 이미 5센티미터도 훨씬 넘은 상태였다.
공주는 눈사람을 만들고 싶어 했지만 날씨가 워낙 추워 부슬부슬 부서져 내린 싸락눈이 잘 뭉쳐질 리가 없다. 괜히 부질없는 눈싸움 하느라 둘 다 옷만 잔뜩 버리고는, 동네 쌓인 눈 비질은 아랫집 두 아저씨에게 맡겨야 했다. 어제 그렇게 먼저 눈을 치웠는데도 그 이후 내린 눈이 또 2센티미터는 넘는듯. 우리 동네만 유독 눈이 많이 내린 걸까? 오늘 아침 아슬아슬 간신히 차고를 빠져나와 병원으로 향하는 길엔 언덕에서 빌빌대다 괜스레 세워놓은 자동차들 옆구리를 치받는 봉고차들 여럿 봤다. 눈길과 언덕에서 다마스나 봉고 형 승합차는 특히 취약한듯! 다행히 베테랑 운전 덕분인지 왕비마마를 태운 우리 차는 설설 기어 무사히 다녀왔는데, 어젠 그토록 새하얗고 뽀얗게 변했던 눈세상이 온통 시커멓게 더러운 회색 구정물 세상으로 바뀌었다. 눈의 미학은 정녕 내릴 때의 순간에만 존재하는 것인가 싶어 새삼 아쉽다.

해서 해묵은 휴대폰 사진을 애써 찾아봤다. 올초 내린 눈으로 조카들이 우리 마당에 만들어 놓았던 귀여운 눈사람 두개. 눈사람 생김새도 주인과 좀 닮은 것 같아 웃음난다. ㅋㅋ

2009. 1. 24. 지환&정민 작품: 나뭇잎 꾸미기는 모두 정민솜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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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짓날

투덜일기 2009. 12. 22. 15:03

대부분 음력인 전통 절기 가운데 이상하게도 입춘과 동지는 유독 양력이다. 이유를 찾아볼 생각은 않고 그저 의아하게 여기고만 있던 그 동짓날이 바로 오늘. 나에게 동지는 일년중 밤이 가장 긴날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그저 <팥죽 먹는 날>일 뿐이다. 친할머니댁에서 살 땐 할머니가 전날부터 팥을 삶아 놓고 찹쌀 새알심을 만들어 다음날 아침 일찍 큰 솥으로 하나 가득 팥죽을 끓여주셨다. 끼니로 먹고 간식으로 또 먹고 마지막엔 솥 아래 눌어붙은 팥죽 누룽지까지 알뜰하게 긁어먹으며 종일 몹시 흐뭇했던 것 같다.
부모님이 분가한 뒤로는 엄마가 가끔 동지 팥죽을 쑤어 마당 여기저기 뿌리고는 시루떡과 함께 고사를 지내기도 했지만 주로 외할머니댁에서 팥죽을 얻어다먹었다. 원래 동지 팥죽에 든 새알심은 자기 나이수대로 먹는 거라는데, 나는 새알심을 좋아하지 않아서 늘 세 개만 달라고 하곤 그걸 내 나이수대로 잘게 잘라 팥죽에 섞어 먹곤 했다. 물론 언제부턴가는 새알심 세 개를 내 나이수 만큼 자르는 것이 불가능해졌지만...

동지 팥죽을 좋아하지만 들척지근한 단팥죽은 싫고, 팥시루떡은 좋아해도 단팥빵과 팥빙수는 싫어하는 나의 이상한 취향은 아무래도 어려서부터 담백한 동지팥죽에 입맛을 들인 때문이라고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다. 붕어빵은 예외라고 쳐도 많이는 못먹는 걸 보면 모름지기 팥은 단 것보다 담백하게 조리할 때 더 맛있다고 느끼는 모양이다. 게다가 친할머니도 그렇고 외할머니도 그렇고 울 왕비마마까지 손맛은 또 얼마나 좋으신가 말이다. 제 아무리 유명하다는 집에 가서 팥죽을 먹어봐도, 수십년간 내가 즐겨왔던 소금간과 절제된 단맛이 조화로운 담백한 팥죽은 만날 수가 없었다.

3년 전 외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외할머니댁 동지 팥죽을 매년 빠짐없이 날라다 먹었고, 왕비마마는 이미 10년째 살림살이에서 손을 뗀 터라 이젠 동지에 맛있는 팥죽 얻어먹을 일은 없겠구나 아쉬워하고 있었는데, 뜻밖에 작년부터 다시 동지팥죽이 생겼다. 엄마가 다니시는 절에서 동짓날이 되면 팥죽을 넉넉하게 쑤어 신도들을 먹이고 난 뒤에도 집에 있는 가족들한테 맛보이라고 싸주었기 때문이다. 작년 오늘, 나는 난데없이 생긴 팥죽에 기뻐 얼른 한 입 퍼먹고는 희미하게 느껴지는 탄맛에 실망할 수밖에 없었지만 팥죽 구경도 못하는 동짓날보다야 낫지 싶어 흐뭇했다. 

오늘도 엄마는 아픈 다리를 이끌고서라도 굳이 절엘 가야한다고 우기더니, 조금 전 도저히 혼자선 집앞 언덕을 못오르겠다며 데리러 내려오라고 전화를 걸었다. 작년에 이어 이번에도 딸 주려고 얻어온 팥죽 통 무게를 못이긴 탓이다. 통이 그리 그지도 않은데 꽤 묵직한 엄마 가방을 대신 메고 비틀거리는 엄마를 부축해 집으로 올라오며 마음이 참담했다. 절에 갈지말지 망설이던 엄마가 힘겨운 외출을 시도한 건 팥죽 얻어오라는 딸의 은근한 압력 때문이었을까. 그깟 팥죽이 뭐라고! 올해는 팥죽이 맛있게 쑤어졌더라며 어서 먹어보라고 엄마는 자꾸 권했지만, 나는 속이 상해서 배부르다고 거절했다. 아마 올해 동지 팥죽은 평생 최악의 맛으로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년부턴 동지 팥죽 따위 안먹고 말테다. 반평생 동짓날=팥죽으로 알고 살았으니 이제부터 팥죽은 잊고 남은 반평생은 동지를 밤이 제일 길었다가 드디어 점점 짧아지기 시작하는 날로 세뇌할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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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하 10도

추억주머니 2009. 12. 18. 03:17
요샌 겨울이 돼도 영하 10도씩 내려가는 일이 거의 없었던 것 같은데 연일 강추위다. 이런 추위엔 본능적으로 동면모드에 접어들어 집구석에서 꼼짝도 하지 않아야 정상인데, 그놈의 요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외출을 하려면 아주 귀찮아 죽겠다. 어떤 날은 온종일 눈꼽도 안떼고 있다가 오밤중에 세수 한 번 하고 마는 게으름뱅이가 이틀에 한번은 제대로 씻고 떨쳐입고 나서야 하다니 말이다. 그나마 핫요가라 학원에만 가면 따끈따끈하기에망정이지, 추운데서 옷갈아입고 벌벌 떨어야 하는 요가였다면 애저녁에 관뒀을 거다.
째뜬 영하10도의 날씨는 중무장을 했어도 건물 사이로 휘몰아치는 도시의 칼바람엔 귀떼기가 떨어져나갈 것 같은 무서운 추위임을 새삼 실감했다. 목도리와 장갑으론 부족해 털모자를 썼어야 했다고 어찌나 후회를 했는지. 장갑 낀 손으로 귀와 코를 간간이 보듬다가 오래 전 추억이 떠올랐다. 아침 등교길에 춥다고 징징거리다 아버지한테 귓방망이를 얻어맞았던 사건.

5학년 때였나. 내복과 외투를 다 껴입고도 마당에서 얼굴 춥다고 징징대는 딸에게 목도리를 두르고 마스크까지 씌워줬던 아버지는, 내가 "그래도 밖으로 나온 눈이 춥다"고 계속 징징대자 참지 못하고 손지검을 했었다. 아버지는 아마도 뒤통수 정도를 갈기려고 했다가 얼떨결에 뺨을 때린 것도 같았는데, 그 이전까지 매라고는 가끔 동생들과 단체로 손바닥 정도나 맞아보았던 나는 너무도 큰 충격에 징징대던 울음까지 뚝 멎어버렸다. 더 혼나지 말고 얼른 학교나 가라고 채근하는 엄마 말대로 멍하니 집을 나서 학교로 향하며, 나는 아픔보다도 난데없는 배신감에 소리없이 뜨거운 눈물을 계속 쏟았던 것 같다. 아빠는 언제나 내 편이라 여겼던 고명딸의 자존심도 여지없이 무너졌음은 물론이다. 그날 저녁까지도 충격과 분노에서 벗어나지 못한 어린 나는 아빠랑은 눈도 마주치지 않았고, 내 눈치를 보며 자꾸만 말을 거는 아빠에게 단답형으로만 대답했다.
결국 흐지부지 아빠와 화해를 한 건 틀림 없지만 아빠가 내 뺨을 때렸다는 사실은 어린 마음에도, 아니 3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는 <대사건>이었다. 아버지도 그렇고 울 엄마도 그렇고 자식들을 사랑의 매로 다스리는 분들이 아니어서, 집에 분명 회초리는 존재했지만 특별한 체벌의 기억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기껏해야 방학숙제 밀렸다고 삼남매가 쪼르륵 서서 손바닥을 몇 대 맞았던 정도였는데, 내가 아빠에게 뺨을 맞다니.
물론 내가 아버지에게 뺨을 맞은 것은 인생을 통틀어 그 추웠던 겨울 아침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귓방망이 맞은 충격 때문에 며칠간이나 화를 풀지 않고 아빠의 눈길을 외면했던 나의 <시위> 때문이었는지 어쩐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삼남매 가운데서 아버지한테 뺨맞은 자식은 내가 유일할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동생들 만나면 한번 물어봐야겠다.

지구온난화 탓도 있지만 주거여건을 따져봐도 확실히 그때 겨울이 지금보다 훨씬 추웠다. 마루엔 널빤지가 깔려 당연히 난방이 안돼 추운 겨울날 맨발로 방에서 나와 디디는 것이 고역이었던 그 옛날의 한옥은 당연히 세수도 마당 수돗가에서 엄마가 솥에 데워놓은 더운물을 떠다가 해야 했다. 요즘 아이들에겐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처럼 들릴 삶의 모습들이 불과 내 어린시절의 추억이란 게 놀랍다. 자다 말고 내복 바람으로 옥외 화장실에 가야하던 그 때의 매서운 추위를 떠올리며 요즘 추위쯤 <요까짓것> 코웃음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고 본성이 간사한지라 그게 잘 안된다. 추운 거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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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ing

놀잇감 2009. 11. 27. 16:33

내가 스팅을 좋아하는 건 그의 목소리가 가장 큰 요인이다. 목소리 좋은 남자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비음과 허스키한 음성이 절묘하게 뒤섞인 목소리로 조곤조곤 불러주든 시원시원 질러대든, 그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정말 황홀하다. 2005년이었던가 그의 공연을 보고 나와서 나는 단언했었다.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대머리 아저씨라고. ^^;

헌데 최근 보이는 그의 행보랄까 음악세계는 점점 낯설다. <Songs from the Labyrinth> 앨범에서도 주절주절 시와 편지를 낭송하는 바람에 의아했는데, 이번에 크리스마스를 겨냥해 나온 캐럴 앨범 <If on a Winter's Night>은 무려 <복음성가집> 느낌이다.
사실 나는 스팅의 새 앨범이 나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가 뜻밖에 선물로 받고 희희낙락했었다. 크리스마스 카드 같은 예쁜 설경을 배경으로 검은 긴 코트를 입고 거니는 스팅! 거기다 유니버설 뮤직에서는 사은품으로 스팅 달력까지 끼워주었단다! 하지만 달력을 넘기다 발견한 스팅의 최근 모습에 난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마선이 훌쩍 올라갔어도 여전히 날렵하고 샤프했던 매력남은 어디 가고 부숭부숭 머리털과 수염을 기른 산적 같은 아저씨가 환히 웃고 있었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지만, 불과 4년 만에 이렇게 되다니.. ㅠ.ㅠ
그래도 스팅 공식 홈페이지에 가보니 유투브에 올라온 인터뷰에선 수염을 말끔히 잘라 산적같은 느낌은 없어져 다행. 괜히 달력에 든 사진들 때문에 심술을 품고 들어본 이번 앨범은 본인이 의도한 대로 하나같이 자장가 같아서 심심하고 나른하게만 들리더니만 자꾸 들을수록 마음을 깨끗하게 만드는 정화 효과가 있는 듯하다.
어서 저렇게 새하얗게 세상을 뒤덮은 폭설을 보고 싶기도 하고...

어쨌든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유럽 여러 나라의 민요와 캐럴보다 나는 두곡 실린 스팅의 곡들이 더 좋다. 몇번 들어보니 'Lullaby for an Anxious Child'는 쓸데없이 걱정 많은 나를 위로하는 자장가로 아주 딱이다. 재주가 없어 여기 올려 널리 들려줄 방도는 없지만 자랑하지 않을 수 없는 노래.
이번에도 나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Thank you, Sting, I love you! 더불어 고맙다,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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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내리는 눈

삶꾸러미 2008. 12. 23. 02:04


밤참 챙기러 부스럭대며 집안을 오가다 문득 베란다 밖을 내다보니
소리없이 눈이 내리고 있다.
올 겨울 들어 벌써 몇번째 내리는 눈인지 기억도 나질 않는데
원래부터 멀쩡히 존재하던 신대륙을 새삼 <발견>했노라며 억지스럽게 자기 이름을 붙여댄 식민주의자들처럼 멍청하게 나 역시 한밤중에 저 눈을 발견한 것은 오롯이 나라는 착각에 빠져 한참이나 좋아했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에 제일 먼저 발자국을 찍고 싶은 충동 역시 식민주의자의 못된 심보 같아서 참기로 했다.
혹시 귀찮음을 감추느라 아는 게 병인 양 쓸데없는 핑계를 같다 붙이는 것일지도.
아무려나 온종일 TV도 뉴스도 보질 않아 날씨예보 역시 모르고 있던 터라
공연히 선물처럼 느껴지는 한밤에 몰래 내리는 눈.

달리 불켜진 창 없는 우리 동네에선 내가 유일하게 즐기고 있다고 생각하며
따뜻한 찻잔 하나 감싸쥐고 오래도록 바라보련다.
늘 그러듯 내일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모두 사라져버릴 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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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건 싫다

투덜일기 2008. 11. 22. 11:15

갑작스레 영하로 뚝 떨어져버린 며칠 동안 차렵이불을 두 개 덮고 잤다.
원래 한겨울 용 이불은 퍽이나 두텁고 폭신한 무명 솜이불인데 12월도 되기 전에 그 이불을 꺼낸다는 건 죽도록 싫은 겨울이 벌써 완연하게 자리를 잡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처럼 느껴져 일부러 참았다.
원래 바닥생활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추위에 워낙 민감하고 싫어해서 도저히 침대생활은 자신이 없다.
옥매트나 전기담요를 깐다는 둥, 거금을 들여 돌침대를 샀다는 둥 침대 애호가 지인들의 겨울나기 방법을 들어보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따땃한 바닥에 이불을 깔고 자는 안락함을 포기할 수가 없고
굳이 겨울이 아니더라도 침대에 누워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느낌으론 숙면을 취하지 못한다.

내가 아파트를 싫어하는 이유엔 따뜻하지 않은 방바닥도 포함된다. 분명 실내 공기는 따뜻한데 바닥엔 별 온기가 없는 아파트의 방들... 참말로 정이 안간다. 
지은지 30년 가까이 됐어도 연탄 보일러, 기름 보일러를 거쳐 가스 보일러로 난방을 하는 낡은 우리집은 방바닥이 얼마나 따끈따끈한지 모른다. 물론 아파트보다야 외풍이 있어서 화장실과 마루는 춥지만, 조카들이 겨울이면 수시로 찜질방 놀이를 생각해낼 만큼 따끈따끈한 방바닥에 엎드려 귤을 까먹으며 책을 읽거나 TV를 보며 등을 지지는 재미를 선사하는 방구둘의 온기는 그나마 견디기 힘든 계절의 버팀목이다. 

하기야 방바닥이 아무리 따뜻해도 추운 걸 못참는 내가 또 다시 낡은 이 집에서 올 겨울을 나려면 두꺼운 이불은 필수이니 다음번에 영하로 기온이 내려가면 군말없이 한겨울용 솜이불을 꺼내 덮을 작정이지만
당분간은 차렵이불을 겹쳐덮는 걸로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추위만 이어지길 바라고 있다.

내가 이불 두장을 겹쳐덮고 잔다고 하면 지인들은 퍽 의아해한다. 자다가 보면 이불이 서로 따로 놀기 마련일 거라나. 하지만 잠버릇이 얌전한 편인 나는 자고 일어나서도 이불이 늘 그대로다. 어쩔 땐 잠자는 공주 자세로 두손을 가슴에 모으고 잠들었다 그대로 깨어날 때도 있다. -_-; 자면서 꼼짝도 하지 않는 것도 그리 건강한 수면법은 아니라지만 어쨌거나 나는 자면서 크게 뒤척이거나 돌아다니지 않는다.

얼마전 잠버릇 험한 조카들이 하도 이불을 차버려서 감기에 걸렸다는 올케의 얘기를 듣고 문득 궁금해졌다. 나는 어렸을 때도 이불을 차버리지 않았는지.
엄마의 얘기를 들으니 나도 어려선 이불을 차버리고 잤단다. 그래서 엄마가 중간에 늘 다시 덮어줘야 했다고. 그 말을 들으니 이불을 차버리고 추워서 바들바들 떨다 이불을 덮어주시는 부모님의 손길에 잠결에도 행복해 했던 느낌이 아련히 떠오르는 듯했다. 그게 가능했던 건 어린 시절 다섯식구가 한방에서 나란히 잠을 잤기 때문이다.
가끔 정민공주가 와서 자고 갈 때면 나는 거의 잠을 설친다. 험악하게 돌아다니며 자는 녀석을 다시 제대로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는 무수리의 밤을 보내야하기 때문인데, 어려서부터 대부분 따로 재우는 요즘 아이들은 자다가 으슬으슬 한기가 느껴질 무렵 엄마가 다시 이불을 꼭꼭 여며주는 손길의 기쁨을 모르고 살겠구나 싶은 것이 좀 안타깝다. 물론 침대에서 이불을 차버려 차가워진 몸으로 새우처럼 웅크리고 자면서도 깨어나지 않는다는 잠꾸러기 공주는 나랑 잘 때도 고모가 이불을 다시 덮어주건 말건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그렇다고 부모들이 매일 자다말고 새벽에 아이들 방에 건너가 이불을 덮어주려고 일부러 깨어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불 차버리고 자도 될 만큼 난방온도를 심하게 올리는 것 역시 안될 일이니, 잠버릇 심한 조카들의 겨울나기가 벌써부터 걱정이다.

풍요로워져서 좋은 것도 참 많지만, 온 식구들이 한방에서 겹쳐자던 불편한 어린시절이 요즘 조카들의 편한 삶보다 더 행복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오로지 따뜻한 이불 때문은 아닌 것 같다. 그때나 지금이나 추운 걸 싫어하는 마음은 똑같지만 그때의 추위가 지금보다 훨씬 혹독했던 걸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과거와 추억만 바라보며 사는 건 늙어감의 징후라고 했거늘, 요즘 왜 이리 옛날 생각만 자꾸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추운 건 싫다는 얘기.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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