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짓날

투덜일기 2009. 12. 22. 15:03

대부분 음력인 전통 절기 가운데 이상하게도 입춘과 동지는 유독 양력이다. 이유를 찾아볼 생각은 않고 그저 의아하게 여기고만 있던 그 동짓날이 바로 오늘. 나에게 동지는 일년중 밤이 가장 긴날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그저 <팥죽 먹는 날>일 뿐이다. 친할머니댁에서 살 땐 할머니가 전날부터 팥을 삶아 놓고 찹쌀 새알심을 만들어 다음날 아침 일찍 큰 솥으로 하나 가득 팥죽을 끓여주셨다. 끼니로 먹고 간식으로 또 먹고 마지막엔 솥 아래 눌어붙은 팥죽 누룽지까지 알뜰하게 긁어먹으며 종일 몹시 흐뭇했던 것 같다.
부모님이 분가한 뒤로는 엄마가 가끔 동지 팥죽을 쑤어 마당 여기저기 뿌리고는 시루떡과 함께 고사를 지내기도 했지만 주로 외할머니댁에서 팥죽을 얻어다먹었다. 원래 동지 팥죽에 든 새알심은 자기 나이수대로 먹는 거라는데, 나는 새알심을 좋아하지 않아서 늘 세 개만 달라고 하곤 그걸 내 나이수대로 잘게 잘라 팥죽에 섞어 먹곤 했다. 물론 언제부턴가는 새알심 세 개를 내 나이수 만큼 자르는 것이 불가능해졌지만...

동지 팥죽을 좋아하지만 들척지근한 단팥죽은 싫고, 팥시루떡은 좋아해도 단팥빵과 팥빙수는 싫어하는 나의 이상한 취향은 아무래도 어려서부터 담백한 동지팥죽에 입맛을 들인 때문이라고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다. 붕어빵은 예외라고 쳐도 많이는 못먹는 걸 보면 모름지기 팥은 단 것보다 담백하게 조리할 때 더 맛있다고 느끼는 모양이다. 게다가 친할머니도 그렇고 외할머니도 그렇고 울 왕비마마까지 손맛은 또 얼마나 좋으신가 말이다. 제 아무리 유명하다는 집에 가서 팥죽을 먹어봐도, 수십년간 내가 즐겨왔던 소금간과 절제된 단맛이 조화로운 담백한 팥죽은 만날 수가 없었다.

3년 전 외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외할머니댁 동지 팥죽을 매년 빠짐없이 날라다 먹었고, 왕비마마는 이미 10년째 살림살이에서 손을 뗀 터라 이젠 동지에 맛있는 팥죽 얻어먹을 일은 없겠구나 아쉬워하고 있었는데, 뜻밖에 작년부터 다시 동지팥죽이 생겼다. 엄마가 다니시는 절에서 동짓날이 되면 팥죽을 넉넉하게 쑤어 신도들을 먹이고 난 뒤에도 집에 있는 가족들한테 맛보이라고 싸주었기 때문이다. 작년 오늘, 나는 난데없이 생긴 팥죽에 기뻐 얼른 한 입 퍼먹고는 희미하게 느껴지는 탄맛에 실망할 수밖에 없었지만 팥죽 구경도 못하는 동짓날보다야 낫지 싶어 흐뭇했다. 

오늘도 엄마는 아픈 다리를 이끌고서라도 굳이 절엘 가야한다고 우기더니, 조금 전 도저히 혼자선 집앞 언덕을 못오르겠다며 데리러 내려오라고 전화를 걸었다. 작년에 이어 이번에도 딸 주려고 얻어온 팥죽 통 무게를 못이긴 탓이다. 통이 그리 그지도 않은데 꽤 묵직한 엄마 가방을 대신 메고 비틀거리는 엄마를 부축해 집으로 올라오며 마음이 참담했다. 절에 갈지말지 망설이던 엄마가 힘겨운 외출을 시도한 건 팥죽 얻어오라는 딸의 은근한 압력 때문이었을까. 그깟 팥죽이 뭐라고! 올해는 팥죽이 맛있게 쑤어졌더라며 어서 먹어보라고 엄마는 자꾸 권했지만, 나는 속이 상해서 배부르다고 거절했다. 아마 올해 동지 팥죽은 평생 최악의 맛으로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년부턴 동지 팥죽 따위 안먹고 말테다. 반평생 동짓날=팥죽으로 알고 살았으니 이제부터 팥죽은 잊고 남은 반평생은 동지를 밤이 제일 길었다가 드디어 점점 짧아지기 시작하는 날로 세뇌할 작정이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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