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왕비마마라고 칭하되 딸이면서도 나에겐 스스로 '무수리'라는 칭호를 붙여 비하하고 자학하는 건 꽤나 오래 된 버릇이다. 아마도 직장을 관두고 번역일을 시작하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부모님에게 '프리랜서 번역가'란 곧 백수나 마찬가지로 여겨졌고(실제로 첫해 6개월은 그러했다;;), 늘 시간이 남아도는 인력이므로 언제 어디서든 부모님이 명하면 동원되는 것이 마땅한 잉여 존재 취급을 받았다. 주로 운전수, 심부름꾼의 역할이다가, 엄마의 우울증 와병 기간이 길어지고 잦아지자 밥순이의 임무와 강도도 예전보다 커졌다. 그러다 심한 우울증에 당뇨 합병증까지 겹쳐 엄마가 생사를 넘나드는 지경까지 갔다가 극적으로 회복되고 나서는 당연히 가사일이 모두 내 차지였다. 물론 아버지 생전에는 청소며 설거지, 세탁까지 종종 거들어주시면서, 이 집안엔 왕비마마 하나, 무수리 하나, 머슴 하나가 산다고 우스갯소리를 하셨지만서도.

 

째뜬 신데렐라와 함께 무수리는 주변에서 흔히 나를 부르는 별칭이었다. 특히 내가 궁궐에 다니는 걸 좋아하면서 아무래도 전생에 궁에 사는 공주였나보다고 킥킥대면 친구들은 공주가 아니라 무수리였겠지! 라며 놀렸다. 무수리는 궁궐에서 궁녀를 보필하는 최하층 하인이지만,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는 무수리 출신으로도 승은을 입어 왕의 어머니가 되었으니 신세 고단한 이름이라 해도 뭐 어떤가 싶었고, '왕비마마 엄마를 보필하는 무수리 딸'의 조합이 더욱 재미나게 느껴지기도 했다. 엄마가 왕비면 딸은 공주가 맞다면서, 왕비마마는 제발 딸 부려먹는 못된 엄마 만들지 말라고 나의 무수리 드립을 몹시 싫어하시지만 자조적인 나의 무수리론(?)은 물러서지 않았다.

 

헌데 궁궐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배운 오늘 수업에서 나의 무수리론이 끝장나고 말았다! 궁궐의 각 처소에 소속된 내인(=나인)들이 거느린 하인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그 가운데 무수리는 궁녀들이 공동으로 부리는 하녀 중 '물 긷기 담당'을 칭하는 이름이란다. 당시 궁궐엔 처소별로 전각마다 우물이 없었기 때문에 물 긷는 일이 퍽 중요한 임무여서 '수사(水賜)' 또는 '급수인'(汲水人)'이라고도 했다. 특별한 선발기준은 없었으나 내인들의 소개로 민간 아낙네들 중에서 일 잘하는 여인으로 뽑았다고. 게다가 그들은 대개 기혼자들로 출퇴근을 했단다! 헐...궁궐에 출퇴근하며 물긷는 튼실한 아낙네가 무수리였다니. 어려서부터 내가 보아온 사극에선 젊은 궁녀들더러 죄다 무수리라고 했던 것 같은데! 결국 나의 무수리론은 고증 없이 대충 쓴 사극 대본의 폐해였던 모양이다. ㅠ.ㅠ

 

그러므로 영조에게 적잖은 출신 컴플렉스를 제공했던 어머니 숙빈 최씨가 무수리였다는 설도 잘못된 것이라고 오늘 수업을 맡은 교수님이 지적하셨다. 숙빈 최씨가 숙종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게 된 이유가, 나인 시절 폐서인 된 인현왕후의 생일날 한밤중에 방에서 기도를 올리다 밤궁궐을 거닐던 왕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무수리라면 일단 퇴근을 했을 터이니 밤중에 궁궐에 있을 수가 없다는 것! 당연히 무수리 주제에 궁궐 안에 자기 방도 가질 처지가 아니었다. 혼자서 쓰는 방도 아니고 궁녀 둘이 함께 쓰는 방이 배정되는 것도 입궁 후 15년이 지나 관례를 치른 이후였으며, 단독 처소를 갖게 되는 건 입궁후 무려 25년, 35년을 지내 상궁에 올라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무수리를 비롯한 궁녀의 하인들은 궁녀 처소에서만 움직이므로 아예 왕족을 만날 일조차 없었단다. 따라서 숙빈 최씨 무수리 설 또한 극적인 신데렐라 성공 스토리를 위한 후대인들의 과장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고.

 

궁녀 처소에서 물만 긷는 하녀가 무수리였다니... 어휴. 궁녀의 역할과 임무를 배우다가 십수년도 더 이어온 나의 무수리론이 단숨에 뒤집혀 폐기될 줄이야! ㅋㅋㅋ 오늘 배운 내용으로 다시 내 역할에 그나마 잘 맞는 배역을 고른다면, 궁녀 중 가장 어린 나이에 입궁하여(4-5세) 제일 먼저 상궁이 되며, 왕의 측근에서 보필하기에 궁녀 중 가장 엘리트라는 '지밀상궁', 또는 왕 본인이나 정승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궁녀들의 수령격인 '제조상궁'이라 하고 싶으나... 나는 왕을 보필하는 자가 아니라 왕비를 보필하는 자라는 것이 문제다. 그러니 그냥 소주방 나인이 제격인가 싶기도 하고... ㅋㅋㅋ 어쨌든 이로써 그간 나는 무수리가 아니었으며 무수리가 될 수도 없었음이 드러났다. 왕비마마의 조석 수라를 주로 담당하고 간간이 세탁과 청소, 가마 수행, 의녀 놀이, 심지어 손톱발톱까지 깎아드리는 전천후 소임을 맡고 있지만 결정적으로 출퇴근직이 아니지 않은가! ^^;; 오늘은 재미난 역사공부와 더불어 놀라운 깨달음까지 얻었으니 특히나 일석이조의 수업이었던 셈이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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