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는 있는가

투덜일기 2012. 12. 27. 16:22

열살짜리 조카랑 얼마전 산타클로스의 존재를 놓고 나름 심도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어쩌다가 종교 이야기가 나왔는지 잘 모르겠는데, 녀석이 뜬금없이 고모는 왜 옛날엔 할머니 따라서 절에 다녔는데 이제는 신을 안믿느냐고 물었다.

 

그땐 고모도 어쩌면 신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절에 가면 부처님한테 기도하고, 성당이나 교회에 가면 또 거기서도 신한테 기도를 했었는데 곰곰이 따져보니 없는 것 같더라고 뭉뚱그려 대답했다. 신은 그냥 약한 인간이 기댈 존재가 필요해서 만들어낸 것 같다고. 그 밖에 몇 가지 더 알량한 이유를 들어 자기변명 비슷하게 설명을 했던 것 같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녀석은 선선히 자기도 신은 없는 것 같다고 하더니만, "그런데 산타클로스는 확실히 있는 것 같아"라며 내게 동조를 비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작년부터였나 이미 산타클로스는 없다는 친구들의 폭로에 노출되어 퍽이나 혼란을 겪었음에도 산타클로스의 존재를 아직은 믿고싶어하는 눈치였다. 작년에도 산타가 정말로 없느냐는 아이의 물음에, "없다고 믿으면 절대 없겠지. 너 믿고 싶은 대로 해."라며 얼렁뚱땅  넘어갔는데, 때가 때이니 만큼 또 다시 고민이 되는 모양이었다. 녀석이 3학년이나 돼서도 아직 산타클로스가 있다는 쪽에 더 무게를 두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첫째, 엄청나게 말을 안들으면  정말로 산타의 선물을 받지 못하더라. - 제 누나와 본인이 그 좋은 예 (오래 전 허구한 날 쌈박질을 하던 남매 모두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지 못한 해가 있었다. ㅋㅋㅋ)

 

둘째, 자기가 다섯 살 때 산타할아버지한테 자기는 장난감 필요없고 꼭 벙어리 장갑을 받게 해달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애들이 놀려서 그냥 말로만 레고 받고 싶다고 했더니만, 진짜로 산타할아버지가 벙어리장갑이랑 조그만 레고 장난감을 같이 선물로 두고 갔었다. (벙어리장갑을 받고 싶은 건 정말로 '자기만 아는 비밀'이었다나 ㅋㅋㅋ)

 

셋째, 작년 크리스마스에는 정말로 갖고 싶은 선물이 하나도 없고(헐, 장난감 과잉의 시대!) 산타가 있는지 없는지도 고민이 많아서 산타할아버지 마음대로 선물을 주려면 주고 말라면 말라고 생각했더니....... ㅋㅋㅋ 5만원짜리를 두고 가셨단다. 차라리 산타가 용돈을 주면 나중에 마음에 드는 선물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을 자기도 한 적 있었다고! (크핫;; 니네 엄마아빠도 참!!!)

 

 

그럼에도 산타는 없고, 크리스마스 선물은 엄마아빠가 주는 것에 불과하다는 친구들의 주장에 경도되는 이유 역시 존재했다.

첫째, 작년에 '말도 잘 안듣고 못되고 만날 떼를 쓰는' 사촌동생 OO이는 무려 30만원이나 하는 3D닌텐도에다가 심지어 게임팩까지 6개나 한꺼번에 선물로 받았다. 말도 안 된다. 산타 할아버지가 전세계에 있는 어린이한테 선물을 줘야하는데 한 사람한테만 그렇게 비싼 선물을 줄 리가 없다. (오 녀석, 기특하게도 자본과 평등의 문제도 고민하는구나;;)

 

둘째, 자기 친구 @@이가 밤에 몰래 아빠가 트리 밑에 선물 두는 걸 숨어서 봤다. 선물도 @@이가 받고 싶은 게 아니었다.

 

 

산타의 존재를 믿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가짓수도 더 많고 본인의 경험과 관련되어 있으므로 결론은 산타가 있다는 쪽으로 내려진 모양이었다. 다만 떨칠 수 없는 의구심을 내게 설명해달라는 듯했다. 그렇다면 내 역할은 열심히 '구라'를 쳐서 아이의 동심을 한 해 더 지켜주는 것이 옳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설명은 어렵지 않았다. 녀석의 사촌동생 OO이가 작년에 받은 선물은 산타할아버지가 놓고 간 게 아닐 거다. 정말로 그렇게 말도 안듣고 떼를 쓴 아이였다면 선물을 받을 리도 없고, 정말로 산타할아버지는 공평하게 선물을 나눠줘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비싼 선물은 줄 수 없으니까. 그런데 OO이도 아마 선물 받을 욕심에 12월 들어서는 착한 일을 좀 하지 않았을까? 녀석은 좀 생각해보더니, 진짜 까불기는 하는데 자기 말을 잘 들을 때도 있다면서 스스로 그럴듯한 답을 생각해냈다. OO이가 받고싶은 선물은 너무 비싸서 산타할아버지가 준비할 수 없으니까, OO이네 엄마한테 텔레파시를 보내서 사주라고 했나보다! 그랬더니 이모가 돈이 너무 많아서 게임팩까지 막 사준 거라고.... +_+  (이 설명은 놀랍게도 산타가 아니라 부모에게 값비싼 크리스마스 선물을 대신 받은 수많은 아이들의 문제까지 해결해준다!)

 

두번째 친구 @@이의 경우도 산타를 의심하고 숨어서 지켜본 아이니까 산타할아버지가 찾아올 리 없고, 그걸 안쓰러워 한 아빠가 대신 선물을 준비했으니 엉뚱한 걸 받게 됐을 거라고.... (거짓말도 자꾸 하면 는다 끙;;)

 

 

어쨌든 녀석은 올 크리스마스에 무슨 선물을 받게 될지 고민이 많았다. 정말로 받고 싶은 선물은 3D닌텐도랑 게임팩인데 그건 너무 비싸서 산타할아버지가 사줄 수 없고, 산타가 엄마아빠한테 텔레파시를 보낸다고 해도 자기네 집은 절대 안 사줄 것이라는 점이 함정.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기다려보겠다고 했다. ^^;

 

나는 과연 녀석이 산타에게 무슨 선물을 받을지 자못 궁금했는데 어제 가보니 새까만 재규어 인형(!) 한마리가 트리 아래 누워있었다. 열살인데도 아직까지 복실복실 봉제인형을 엄청나게 좋아하는 녀석임은 알지만.... 산타할아버지가 알고 보낸 선물인지 아닌지 원 알 수가 있나. 침대에서 데리고 노는 게 아니라 인형을 트리 밑에 며칠째 얌전히 놓아둔 걸로 보아, 올해로 드디어 산타의 존재에 대해서 산통이 깨진 건 아닌지 겁이 나서 아직 조카와 추후 대화는 하지 못했다. ^^;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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