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어땠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삶이 따분하고 지겨워져 뭔가 막 더 배우고 싶어서 동네 도서관과 구청 교육 프로그램을 뒤졌던가? 아, 기억났다. 친구가 동네 구청 취미 프로그램에서 단돈 몇만원에 몇달간 베이킹을 배우는데, 재미도 있고 수업 끝나면 그날 만든 맛있는 빵을 한 아름씩 갖고 온다며 나도 찾아보라고 권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동네엔 구직을 위한 프로그램밖에 없었고, 그나마도 신청 시기가 안 맞았다. 그러다 눈에 띈 마을강사 양성 교육 공문.

4주였던가.. 여름 방학 내 꽤 긴 기간 교육 전문가와 현장 교사들의 수업을 들었고, 각자 다양한 아이디어로 자유학기제를 위한 프로그램을 짜서 제출하면 인근 학교와 연계해주겠다고 했다. 할까말까 망설이다 대충 요식행위로 만들어 낸 프로그램은 당연하겠지만 아무 선택도 받지 못했다. 그럼 그렇지. 알바도 아니고 자원봉사도 아니고 부업도 아니고 몹시 어중간한 시도는 관두고 본업에나 충실하자 싶었다. 그러다 돌연 다음해에 한 학교에서 수업 의뢰를 받았고, 그렇게 시작한 자유학년제 수업이 올해로 벌써 5년째다.

해마다 관둘까 말까, 들이는 시간과 품에 비해서 형편없는 강사료를 생각하면... 종종 본업에 지장을 주는 스케줄을 생각하면 그만두는 게 맞다 싶다가도, 또 불안한 미래를 1년 전에 미리 상상해보면 뭐라도 하고 있는 게 정신건강에 좋지 않을까도 싶고, 일단 학교에서 만나는 예쁜 아이들이 주는 특별한 에너지가 있다. ㅠ.ㅠ 물론 재작년 같은 경우엔 몇몇 거친 아이들에게 성희롱을 당한 적도 있고, 다 때려치우고 싶을 만큼 좌절을 겪기도 했다. 근데 또 그러다가 한두 명에게라도 묵묵히 위로를 받으면 다시 버텨나갈 힘이 생기고...

코로나바이러스로 전 세계가 흔들렸던 2020년 학교는 정말 위기상황이었고, 중학교 1학년 자유학년제 수업도 파행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거리두기 단계에 따라서 비대면과 대면 수업을 병행한 학교도 있지만, 아예 전면 온라인수업으로만 결정한 학교도 있어서, 난생 처음 온라인수업을 여러가지 종류별로 준비해야하는 나로서는 그야말로 '멘붕'이었다. 구청측에서 여러가지 심화교육도 마련해주고, 먼저 온라인수업을 경험한 동료 선생님들이 쏠쏠한 노하우를 공유해주시고, 유튜브로 온갖 온라인플랫폼을 찾아 독학을 하고... 밤새워 PPT와 동영상을 만들었다 지웠다 반복하며 8월 내내 미쳤지 미쳤지, 이짓을 내가 왜 하고 있나 징징 울고 싶었던 것 같다.

째뜬 구글클래스룸과 EBS온라인클래스와 줌 화상수업을 오가며, 헐떡였던 2학기 자유학년제 수업이 1월 4일로 마침표를 찍었다. 창의적인 글쓰기와 번역 문장 연습을 주로 하는 프로그램 특성상, 대면수업이 아니면 학생들과 소통하기가 엄청 어려울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온라인 수업이어서 좋은 점도 꽤 있었고, 2020년에 만난 아이들은 역대 최고로 성실하고 뛰어난 학생들이었다. 교실에서 만났더라면 더 뛰어난 성과를 얻었을 것 같아서 아쉽지만, 반대로 온라인으로 소통해서 내가 더 편견없이 공정하게 아이들을 대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교실에서 수업을 하면 발표력 좋고 참여도 좋은 몇몇 학생들 위주로 소통이 진행될 수밖에 없다. 물론 매시간 활동지를 쓰게 하면서 일일이 들여다보고 격려하고 어떻게든 뭔가를 써내게 하려고 나로선 온갖 수단을 쓰지만;; 한 학기 내내 입 꼭 다물고 비협조적인 아이들에게는 나도 골이 나서 포기하기 쉽다.

온라인 수업을 듣고 연계 과제를 제출해야 출석으로 인정된다고 서슬퍼런 경고를 해도, 아랑곳하지 않는 아이들도 당연히 있다. 당당히 백지를 매번 내는 식이다. 교실 수업이었다면 활동지 써주기 전엔 집에 안보낸다고 복도에서 기다린다고 협박을 해서라도 받아내는 편인데, 온라인 댓글로는 아무리 피드백을 신경써도 결국 제대로 글쓰기를 못시킨 경우가 있다. 줌으로 하는 실시간 쌍방향 수업엔 담임 선생님이 전화로 아무리 깨워도, 자느라고 못 들어온 아이도 있었고. ㅠ.ㅠ  그 학생은 다음 주 홀로 학교에 등교해 종일 학교 컴퓨터로 화상 수업을 들었지만,  그 다음주엔 그 수법도 통하지 않았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비대면 수업을 한 학기 경험한 소감은, 나름대로 보람찼다는 것이다. 열네살 아이들은 아직도 참 어리고 순수하지만 동시에 놀라울 정도로 깊은 생각과 다양한 아이디어를 내서 깜짝 놀랄 때가 많다. 열심히 하는 아이들은 교실 수업이든 온라인 수업이든 똑같이 훌륭한 결과물을 보여주었다. 나도 동영상 수업을 들어보면 집중력이 떨어져서 자꾸 딴 생각을 하거나 슬며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걸 깨닫고 부끄러운 적이 많다. 어른도 그럴진대 진짜로 재미있는 수업이 아니면 아이들에게 외면당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누구도 하기 싫어하는 글쓰기를 시키는 수업이라니!  나로선 재미나게 해본다고 최선을 다하지만 그 마음이 과연 통할지는 미지수였는데... 놀랍게도 많은 아이들이 열심히 피드백으로 내게 용기를 주었다. 쌤 수업 재미있어요! 어떻게 이렇게 재미있게 수업을 하시나요.. 등등... 음화홧. 

나로선 당연히 힘이 나서 아이디어를 짜내고 PPT 자료도 더 열심히 다시 만들고, 구글설문지나 문서로 받을 과제도 정성들여 이리저리 고치고 최대한 활기차게 동영상을 녹화했다. 아이들이 낸 과제물엔 열심히 댓글로 피드백을 달고, 개성을 파악해 기록해두고는 계속 관심을 쏟았다. 물론 일일이 댓글로 응원을 보내고 조심스러운 글 한 줄에도 마구 칭찬을 날리느라, 당연히 시간을 많이 잡아먹어서 속으로 또 미쳤지 미쳤지 왜 이러고 앉았나 후회도 했지만...

그런 정성에 대한 보답일까, 아이들도 과제 댓글로, 수업 피드백으로 여러가지 긍정적인 이야기를 많이해주어 기뻤는데 8주차 마지막 수업 마지막 과제 끝에는 한 학생이 제법 긴 쪽지를 적어두었고, 그걸 읽으며 난 주책맞게 눈물이 핑 돌았다. 우와....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도, 공을 들인 노력과 진심이 통한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싶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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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으로 간직하려고 캡쳐해놓음 ^^;; 

글쓰기를 원래도 잘하는 학생들이 있다. 하지만 고만고만한 문장력이라도 좀 더 생각을 깊이 했다거나 정성을 들인 표현은 금세 표가 나고 점점 발전하는 게 보이는 아이들이 있으면 덩달아 나도 신이 난다. 처음엔 힘들어하다가 막판에 잠재력을 쑥 펼쳐보이는 아이들에게는 더욱 감동하는 편이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만, 칭찬의 중요성을 정말 매번 느낀다. 위에 쪽지를 보낸 아이도 그랬지만, 한두번은 칭찬을 해주어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괜히 해보는 소리겠거니 싶은걸까? 그럴 땐 뭉뚱그려 참 잘했어요, 라는 칭찬은 안통한다. 구체적으로 어디가 어떻게 좋은지, 어느 문장과 표현이 마음에 드는지 콕 찝어 말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가능하면 그걸 기억했다가 다음번에 또 이어서 칭찬해주고... 아 물론, 강사 주제에 그렇게 정성을 들이는 게 쉽진 않다. 가성비를 따진다면 그야말로 허튼짓일 수도 있고.... 

지금 하는 번역 일을 사랑하지만 힘들고 지칠 때면 그 옛날에 첫 직장 다니지 말고 그냥 교사를 했어야하는 건데, 그럼 지금쯤 당당히 명예퇴직을 하고 연금으로 먹고 살텐데,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할 때가 있었으나 이렇게 유사 교사체험을 한 뒤론 그 생각이 쏙 들어갔다. 일주일에 몇 시간 수업 준비로도 이렇게 진이 빠지는데;; 난 아마 뼈를 갈아넣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거라는 교사 선배들의 짐작이 맞을 것 같다. 학교 선생님들 모두 존경스럽다!

암튼 본업도 마감 못 맞추고 헐떡대면서, 딴짓하는 건 괜한 뻘짓 아닌가 싶다가도 또 어디가서 이런 보람을 느껴보겠나 싶은 마음에 2021년에도 결국 또 자유학년제 수업을 맡기로 했다. 번역가를 직업으로 추천하기에는 사실 현실적으로 너무도 막막한 부분이 많지만, 그래도 중1 아이들을 데리고 번역 수업을 해보면 해마다 장래에 번역가가 되어볼까 흥미가 생겼다는 아이들이 몇명씩 꼭 나온다. ㅋㅋ 해마다 영업 성공?! 그 아이들이 진짜로 번역가가 될지 그건 장담 못하지만, 그럴 생각에 글쓰기와 책읽기에 더 관심을 갖는다면 나로선 더 바랄 게 없다. 올해는 또 어떤 개성 넘치는 아이들을 만나게 될지 두려움 반 설렘 반이지만 온라인 수업 노하우도 얼추 생겼겠다 작년보다 조금이라도 더 재미있는 수업을 해낼 수 있지 않을까.

오래 버려두었던 블로그에 또 이렇게 끄적거리는 이유는 분명 또 일이 하기 싫어서일 것이다. 마감에 왜 일이 하기 싫을까. ㅠ.ㅠ 어쨌거나 뿌듯하고 벅찼던 느낌이 다 휘발되기 전에 이렇게라도 남겨두게 돼서 다행이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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