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꾸러미'에 해당되는 글 198건

  1. 2010.05.28 먹어서 낫기 4
  2. 2010.05.26 친구와 쟁반과 엄마 14
  3. 2010.05.12 구김살 7
  4. 2010.03.18 마지막 선물 14
  5. 2010.03.18 몇 가지 2
  6. 2010.03.05 외할아버지 6
  7. 2010.02.22 과메기 24
  8. 2010.02.04 부적 20
  9. 2009.12.10 인사하는 버스기사 아저씨 18
  10. 2009.11.05 지인과 지기 사이 13

먹어서 낫기

삶꾸러미 2010. 5. 28. 15:31

그리스, 로마 시대는 물론이고 19세기까지도 내과의사들은 대부분 식물학자였단다. 병의 원인이 무엇이든 과학자와 식물학자들은 병을 고칠 해답을 식물에서 찾아왔고, 신약개발 얘기를 들어봐도 과학자들이 아직도 식물을 연구하고 있다는 게 맞다. 한방에서 아직도 요긴하게 참조하는 동의보감도 거의 다 식물 약재 비법 아닌가 말이다. 밥이 보약이고 밥상으로 병을 고친다는 말은 그래서 나왔을 거다. 독초도 조금만 먹으면 약으로 쓸 수도 있다잖은가. 어차피 인체는 스스로 치유하고 나으려는 에너지와 비밀스런 방편을 갖고 있는 유기체이므로, 치명적인 상황만 아니라면 잘 먹고 잘 자고 잘 살면 병은 낫게 되어 있다. 어리석은 인간이 자기 몸을 잘 못 돌봐서 그렇지.

보호자로서 평균 일주일에 한번은 대학병원을 들락거리고는 있지만 의학과 약효에 대해서는 정말이지 점점 회의가 들어 웬만해선 병원을 찾지 않는 나의 성향이 더욱 고착되는 중이다. 국내 최고의 의료진이라는 사람들이 환자를 두고 하는 말은 거의 다 가정이고 가능성이지 않으면 협박이다. 이런저런 약을 먹거나 주사를 맞으면 나을 거라고 환자에게 확신을 주는 게 아니라, 일단 한번 복용해보고 주사도 맞아보자는 식이다. 의료과실을 입증하는 게 쉽지도 않은 나라지만, 어쨌거나 그런 의료사고의 가능성을 최대한 피해가려는 수법이 눈에 보인다. 어디까지나 모든 부작용과 문제점에 대한 책임은 환자가 지라는 거다.

의료진도 어쩔 수가 없는 부분이 있음을 모르지는 않는다. 인간의 신체와 정신이 하도 오묘해서 같은 약도 사람에 따라서는 효과가 달리 나타나며 웬만한 위약의 플라시보 효과는 무려 30%에 달한다니 가끔 불치병이 기적처럼 나았다는 사례들은 엄밀히 말해 인간과 인체의 정신력과 체력의 승리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임상효과가 입증된 약일지라도, 대조실험을 해보면 약에 대한 신뢰성을 지닌 집단은 탁월한 효과를 보는 반면에 약효에 대한 회의를 품은 집단은 약이 잘 듣질 않는단다. 딱 울 왕비마마 같은 분 얘기다. 멀쩡한 음식도 '혹시나 상했나' 의심하는 마음을 품으면 반드시 탈이 나는 왕비마마는 주치의에 대한 신뢰도에 따라 드시는 약의 효과가 죄다 다르다. 특히나 진통효과를 내는 약이나 주사나 패치 따위에 대한 불신은 놀라울 정도라 남들보다 30%(플라시보 효과 만큼이다)는 약효가 떨어질 게 틀림없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반면에 나로선 통 믿음이 가지 않는 민간요법이나 '카더라 통신'에 대한 신뢰와 효과는 비록 단기간일지라도 대단하게 나타난다. '친구분의 권유 대로 매일 사과발효 식초를 먹었더니 머리와 다리가 확실히 거뜬해졌다'고 믿는 식이다. 결론은 하나다. 모든 것은 왕비마마의 마음과 생각에 달렸다는 것.

모전녀전이라고 나 역시 회의와 불신이 많은 인간이지만 식탐녀 답게 먹는 것으로 어느 정도는 몸을 다스릴 수 있다는 부분엔 믿음이 간다. 특정음식에 심한 알레르기를 보이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확실히 모든 인체는 해로운 음식에 어떤 형태로든 거부반응을 보이며 이로운 음식엔 긍정적인 반응이 나타난다. 고혈압 당뇨 환자에게 육류를 줄이고 열심히 유기농 채소를 먹게 하면 반드시 혈압과 혈당 수치가 좋아진다. 왕비마마의 귀에 못이 박히도록 잔소리를 하고 끼니마다 나물반찬과 샐러드 따위를 떨어뜨리지 않은 결과 1년 반만에 약을 반으로 줄일 수 있었기에 자신있게 하는 말이다. 운동량을 늘여서 체중만 줄이면 당뇨 약을 끊어도 될 터인데 그것까지는 이룰 수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중년에 접어든 내 몸도 마찬가지다. 평생 변비 같은 건 모르고 살지만 외식을 했다든지 불균형하게 끼니를 떼워 푸성귀를 좀 덜 먹은 다음날은 확실히 화장실 가기가 어렵다. 이젠 몸도 적응했는지 채소와 과일을 좀 덜먹었다 싶은 날은 오밤중에라도 나도 모르게 우적우적 오이와 양배추 과일 따위를 씹어먹고 앉았다. 이 또한 심리적인 작용임을 잘 안다. 음, 나 오늘 채소를 좀 덜 먹었네. 내일 배변이 어려울지도 몰라. 그런 생각이 몸을 지배해 현실로 벌어진다는 얘기다. 어쨌거나 이런 미묘한 심리와 몸의 경향을 나는 다 '먹는 것'으로 해결하려 들고 있다는 뜻이다. 갑자기 닭고기가 먹고 싶으면 몸에 동물성 단백질이 부족하다는 의미고, 새콤달콤한 과일이 땡기면 몸이 비타민을 원한다는 뜻으로 나는 해석한다.
 
몇달째 감기기운으로만 들락거리던 바이러스의 힘이 드디어 창궐하여 목이 붓고 콧물이 줄줄 나는 상황에 놓이면 즉각 나는 보신용 음식으로 대처한다. 예로부터 몸이 아파 입맛이 떨어지면 죽을 먹는 게 전통이지만 나는 '죽쑤는' 것도 싫고 별 씹을 것 없이 우물거리다 삼켜야 하는 죽도 싫다. 말이 보신용 음식이지, 맥 떨어지고 입맛 떨어지는 상황에서 그냥 머리에 '퍽' 하고 떠오르는 음식이 곧 내 몸이 원하는 보신용 음식이다. 이번에 그렇게 '퍽'하고 떠오른 음식은 난데없이 '치킨수프와 미나리'였다. 오래 전 <**한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 시리즈 책이 공전의 히트를 치기도 했지만 원래도 치킨수프의 뉘앙스는 서양인들이 몸 아플 때 먹는 심신의 보양식이다. '국물' 음식이 드문 서양식 가운데 그나마도 따끈하게 몸을 덥혀주는 음식이기 때문일 거다. 뜬금없이 미나리 생각은 왜 났는지 모르겠는데 미나리 특유의 상큼한 향이 그리워진 걸 보면 코감기로 둔해진 후각이 콕 찝어서 미나리 열망을 뇌에 전달한 모양이었다. ^^

아직은 사흘째 밤마다 열이 올라 후끈후끈 덥고 팽팽 코를 풀어대느라 코밑이 빨갛지만 온갖 채소를 듬뿍 넣은 치킨 수프와 미나리숙주 무침을 이틀 내리 먹어주었더니 얼추 감기가 나아가고 있는 기분이다(순전히 기분일지도).  열이 나는 건 내 몸의 백혈구가 바이러스 퇴치를 위해 열심히 싸우고 있다는 의미라 기특해서 얼음물을 마셔가며 열심히 지원을 해주고 있다. 어차피 감기 바이러스는 2주면 물러간다는데 꾸역꾸역 먹어서 나으려는 식탐녀의 노력으로 며칠 안에 똑 떨어지지 않을까 싶다. 왜냐하면 오늘은 비타민B군 섭취를 위해 돼지고기를 삶아서 쌈밥을 해먹을 것이기 때문. 거슬러 올라가면 음식과 약은 기원이 같다는 진리를 신봉하게 된 자의 몸부림은 곧 식탐이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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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바쁨을 핑계로 일년에 한번쯤밖엔 얼굴을 못 보고 사는 친구가 지난번에 만났을 때 내게 말했다.
"너 기억나니? 너희 엄마가 나 결혼할 때 쟁반 선물하신 거. 그거 지금도 열심히 쓰고 있는데 아직도 새것 같아, 꽃무늬도 안 질리고 볼때마다 새롭다. 신기하지? 게다가 요즘 보기 드문 '메이드인코리아'야.... "

15년도 더 된 일이라 나는 정말 깜짝 놀랐다. 신혼부부들이 대개 그러하듯 친구도 여러번 셋집을 옮겨다녔고 심지어 뒤늦은 유학생활을 하는 동안엔 살림살이를 장기 이삿짐 보관소에 맡겨두었다가 귀국 후엔 시댁으로 들어가 아이 낳으면서 분가하는 파란만장한 세월이 지났는데, 그 옛날 '꽃무늬' 쟁반을 잃어버리거나 버리지 않고 친구가 아직도 쓰고 있다니.

그랬다. 요새와 달리 예전엔 엄마들이 딸의 혼수를 미리미리 장만해 바리바리 싸두었다가 시집보내는 걸 즐겨하던 관습이 있었고 울 엄마도 당신 딸이 다른 집 딸들처럼 '때가 되면 가리라' 생각하며 몇가지 혼수를 사두는 우를 범한 적이 있었다. 내 기억으론 반상기와 커피잔 세트, 쟁반 세트, 티스푼 세트, 냄비 세트, 큰 접시 따위였던 것 같다. 나와 의논 절차도 없이 엄마가 마음대로 사들인 혼수의 존재를 나는 짬이 날 때마다 비웃었다. 결혼은 생각도 없는 딸을 위해 무슨 혼수씩이나! 나는 쓸데없는 짓 하지 마시고 어디 되팔 데 있으면 팔거나 남들 줘버리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럴 때마다 나를 째려보던 엄마는 이웃 동네에 살아서 자주 들락거렸던 그 친구가 결혼한다는 소식에 조심스레 나를 떠보았다. "너 진짜로 시집 안 갈 거면, 저거 다 ㅁㅅ이 줄까? 걔 어머니 안계시다면서... 혼수 준비는 혼자서 한다니? 새로 산 선물이 아니라서 기분 나빠할래나 모르겠다만."

소박하게 결혼을 준비하던 친구는 흔쾌히 혼수 구경에 응했고, 마음에 안드는 물건은 반드시 거절하라는 나의 신신당부에 염려 말라고 큰소리를 쳤다. 엄마가 사들인 혼수들은 그때 나도 처음 구경하는 셈이었는데, 촌스러움의 극치일지 모른다는 나의 염려와 달리 다행스럽게도 엄마가 고른 그릇들은 '꽃무늬'가 잔잔해서 대체로 무난하게 예뻤던 것 같다. 사서 바리바리 싸두기만 했던 물건들이 누구에겐가 요긴하게 쓰일 수 있다는 사실에 엄마는 기뻐하는 표정으로 혼수 구입 계기와 사연 따위를 주절주절 늘어놓았고, 착한 친구는 계속 감탄의 말을 내뱉으며 엄마와 장단을 맞춰주었다.

하지만 그날 결국 친구는 쟁반 세트가 든 상자 하나만 들고 우리집을 나섰다. 명목상의 이유는 너무 좋은 물건들이고 엄마가 애써 장만하셨으니 정말로 나 시집보낼 때 혼수로 들려보내는 게 옳다는 것이었다. 친구는 울 엄마한테 이렇게 말했던 듯하다. "제가 다 가지면 안될 것 같아요. 저도 결혼 안할 줄 알았는데 어쩌다 보니 가게 되더라고요. 쟤도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포기하지 마세요. 호호호...." 나는 파르르 떨면서 친구를 째려보았고, 친구를 배웅하며 그릇들이 촌스러워서 니 맘에 안드는 거 맞지 않느냐고 투덜거렸었다.

친구는 사람 일 모르는 거라면서 유행 안타게 생긴 그룻들이니까 나중에 시집 가게 되면 진짜로 가져가라고, 안 가게 되더라도 그냥 집에서 꺼내놓고 쓰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그 뒤로도 그 골칫덩이 혼수품은 장농 위에 한참이나 붙박이로 있다가 이웃집 막내딸 혼수로 저렴하게 넘기거나 친척들 생일 선물로 쓰였고, 유일하게 남긴 냄비 세트만 하나둘 씩 꺼내 쓰기 시작했는데 십수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 비닐도 벗기지 않은 냄비가 두개나 싱크대 수납장에 들어 있다. ^^
헌데 정작 울 엄마는 쟁반 얘기를 물어보니 옛날에 사놓았던 혼수를 ㅁㅅ이라는 친구한테 주기로 했던 사실도, 쟁반만 선물하게 된 사연도 전혀 기억하질 못하신다. 오히려 그 시절에 그 아줌마 참 오지랖도 넓었다면서 민망하단다.
"아무려나 엄마, ㅁㅅ이는 그 쟁반 꽃무늬가 지금 봐도 세련되고 예뻐서 죽을 때까지 쓸 거래. 요즘 흔한 중국산이랑 다르게 튼튼해서 대도 물려 쓰겠대. 그 쟁반 쓸 때마다 '라니 엄마가 주신 쟁반이지' 그렇게 생각하며 살았대. 뿌듯하시겠수?" 

착한 친구는 정말로 별것 아닌 그 쟁반이 인상적이었던지, 나중에 친구들 자식이 장성해서 결혼하게 되면 축의금 대신에 뭔가 뜻깊은 선물을 하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해보자는 이야기까지 했다. 그 친구와 얘기할 땐 그래 그렇겠다, 아무 생각 없이 맞장구를 쳤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못할 노릇이다. 선물 고르기가 얼마나 골치아프고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인데, 늙어서 친구 자식들 결혼선물까지 고민하고 앉았자고!? 그 애들이 퍽이나 반기겠다!

친구와 쟁반과 엄마 이야기는 그저 나만이 간직한 사연으로 족하다. 게다가 어쩌면 친구가 쟁반을 소중히 쓰고 있는 이유가 '메이드인코리아'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나만해도 하도 '세계의 공장' 중국 제품이 판을 치고 있는 터라 '메이드인코리아'라고 하면 옷이든 그릇이든 신발이든 새삼 눈여겨 보게 된다. 언제부터 국산 물건이 이렇게 드물게 되었는지 원. 사실 이 글도 메이드인코리아 얘기를 하려고 제목도 그렇게 붙였다가 이야기가 엉뚱하게 전개되는 바람에 제목도 바꾸고 말았다. ㅋㅋ 째뜬 우리집 쟁반은 몇년 전에 내가 죄다 내버리고 새로 개비하는 바람에 말레이지아산 아니면 중국산이다. 그런데 오래 두고 봐도 질리지 않을 그릇에 대한 안목이 부족한 탓인지 벌써 마음에 안든다. 살림에 관심 많은 친구들 말로는 그릇 욕심 내기 시작하면 살림 거덜난다던데, 나야 값비싼 유럽산 명품 식기 같은 데 눈길을 줄 리 없으니 다음엔 혹시 메이드인코리아 쟁반이 있나 한번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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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김살

삶꾸러미 2010. 5. 12. 16:53

천진난만한 아이들에겐 정말로 구김살 없는 표정과 태도를 온전히 실감할 수 있지만, 어른이 되고 난 뒤에도 구김살이 없기란 참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다들 훌륭한 가면을 쓰고 살기 때문에 언뜻 보아서는 물론이고 꽤 가까이서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구김살 여부는 잘 알 수 없다. 성격에 따라서는 과거의 구김살도 다리미로 완벽하게 펴 산뜻하고 매끄럽게 살아가는 이도 있으니, 구김살 없는 어른이 드물다는 나의 전제부터 틀렸다고 누가 반박한다면 싸울 생각은 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생각은 변함없다. 이 팍팍한 세상에서 구김살 없이 성장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누구나 갖고 있는 구김살을 어떻게 스스로 잘 파악하고 관리하고 펴는 노력을 펼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구김살의 사전적인 뜻, "(주로 '없다'는 부정의 표현과 함께 쓰여) 표정이나 성격에 서려 있는 그늘지고 뒤틀린 모습"을 살펴보노라면 더욱 의미심장해진다. 심리학엔 완전 문외한이지만 어쩐지 심리학적으로 접근해야할 문제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심리학을 공부한 친구에게 주워들은 풍월로는 확실히 그렇다. 심리치료를 공부한 뒤 개인병원에서 마음을 다친 아이들과 자폐아동 치료를 돕던 친구는 성당 봉사활동으로 기도모임에서 어른들의 다친 마음 치유를 이끌다가 결국엔 그 일을 본업으로 삼게 되었다.

독실한 신앙과 기도로도 어쩌지 못하는 마음의 구김살, 영혼의 상처가 얼마나 지독한지 친구의 얘기를 들어보면 덩달아 가슴이 아프다. 그 친구만 해도 그렇다. 친구는 어려서부터 소금과 짠맛을 즐겼다. 고1때였던가, 가정 시간에 자기는 토마토는 물론이고 수박도 소금에 찍어먹는다는 사실을 밝혀 모두를 놀라게 했을 정도였다. 얼마 전까지도 고깃집에 가면 소금을 미리 두어접시는 더 달라고 해 옆에 끼고서 찍어먹었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소금에 길들여진 체질이라 건강에 이상이 없다고 자신했다. 우린 평생 그렇게 먹어왔으니 그럴법도 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리투아니아였던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곳으로 얼마 전 성지순례를  다녀온 친구는 거기서 만난 신부님에게 뜬금없이 엄마를 용서하라는 말을 들었단다. 엄마를 용서하는 마음을 갖지 않으면 아무리 소금을 집어삼켜도 마음의 구멍을 채울 수가 없다고. (통역까지 필요했던 외국 신부님이 첫눈에 친구의 소금 취향을 어찌 알았을지 그건 미스터리다. -_-;;)

심리학적인 분석의 결과라고 해야할지 영성의 힘으로 파악한 문제의 핵심이라고 해야할지 나로선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친구의 문제는 엄마 뱃속에 있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친구의 어머니는 둘째를 낳고 싶지 않아했던 터라 차마 직접적인 행동엔 옮기지 못했지만 임신 기간 내내 후회를 하며 아이가 어떻게든 잘못되기를 바랐다. 결국 친구는 칠삭동이로 태어나 인큐베이터에서 생사의 고비를 넘기며 남은 기간을 채워야 했는데, 늦둥이 막내딸임에도 넘치는 사랑보다는 터울이 많은 오빠에 비해 늘 차별을 받으며 자랐다. 어려서부터 "안 낳으려다가 어쩔 수 없이 낳은 자식이라 그런지 애가 이래저래 좀 처진다"는 말을 친구는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야 했다. 그런데도 친구는 나이 들어서 낳은 딸을 키우기 힘들었을 엄마를 이해하려 노력하며 약간 불만을 품었을 뿐 내면 깊이 엄마에 대한 미움과 한이 자리잡고 있을 줄은 몰랐단다. 그리고 그 증오심이 엉뚱하게 소금을 탐닉하는 것으로 표현됐을 줄은 더더욱 몰랐을 테고. 건강검진 결과로도 친구는 '전혀' 소금 체질이 아니었음이 드러났고, 지나친 나트륨 섭취 때문에 몸에 이상이 생길 정도였다. 그토록 오랜 세월 남들의 다친 마음을 들여다보면서도 본인의 마음을 파악하는 데는 소홀했던 친구는 자기 문제가 뭔지 알고 난 뒤 정말로 엄마에 대한 해묵은 감정을 다스려 용서하려고 노력했고, 여전히 남들보다는 짜게 먹는 편이지만 예전만큼 소금에 탐닉하진 않게 되었다.

친구의 도움으로 꽁꽁 감추어져 있던 오래된 내면의 문제를 찾아내 마음의 구김살을 펴려고 노력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하나같이 놀랍다. 그들에게 상처를 남긴 장본인이 대부분 가족이나 최측근이기 때문이다. 부러울 것 하나 없어 보이는 부와 행복을 누리며 자식농사마저 성공해 화목한 가정을 꾸려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였던 어느 아주머니는 자신에게 아무런 문제도 없으며 다만 무뚝뚝한 남편이 좀 불만이라고 생각했지만, 심리치료의 단계를 거슬러 올라가보니 모성과 애착의 결핍이 원인이었고 사춘기 이후 50대가 되도록 "엄마!"라고 불러본 적이 없을 정도로 모녀간의 골이 깊었단다. 치료과정에서도 '엄마'라는 말을 차마 입밖에 내지 못할 만큼.

모성이나 부성의 부재 자체가 문제인 경우도 있고, 너무 잘난 형제에 치여 마음을 다쳤거나 둘도 없는 친구에게 배신을 당한 상처로 알게 모르게 마음앓이를 한 이들의 사연을 가끔 친구에게 전해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주변 사람들을 새삼스러운 이해(또는 편견)의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다. 나의 짐작이 전적으로 맞다고 주장할 순 없겠으나, 이러저러한 상처 때문에 이런저런 성격이 생겨났을 수도 있겠구나 하고 빈약한 이론과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식이다. 구김살이 까칠함으로 발현된 것이 분명한 나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찾아보게 됨은 물론이다. 심지어 엄마 없이 자란 아이들이 모두 문제아가 되는 건 아니지만, 살인 같은 극단적인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의 개인사를 추적해보면 반드시 모성의 결핍이 두드러진다든가 하는 이론에 귀가 솔깃해지도 한다.

친구가 전하는 치료 사례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어린 시절에 겪은 마음의 상처로 평생 고통을 겪는 사람들은 사실 주변에 널렸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엄마가 재혼하는 바람에 할머니 손에 자란 남매는 사춘기 때부터 성 다른 형제들과 다시 엄마 슬하에서 살았지만, 엄마에게 한번 버림 받았던 충격으로 한 사람은 우울증, 한 사람은 알코올의존증에 시달린다. 인생의 멘토라고 여길 만큼 각별하게 따랐던 여교사에게 고교시절 내내 성추행을 당했던 여학생은 커서 정신병을 얻었다. 여러 형제 가운데 가장 사랑받는 막내딸이면서도 잘난 형제들과 비교되어 늘 위축되었던 아이는 서른살을 넘기면서 조울증에 걸리고 말았다. 낳아준 엄마의 얼굴도 모른 채 할머니 손에서 자라며 친부의 결혼과 이혼, 재혼을 지켜본 어떤 딸은 가족들에게도 거짓말을 일삼다 사기꾼처럼 엄청난 금전사고를 일으켜 친적들에게조차 의절당하고 말았다. 너무 극단적인 예를 나열하긴 했지만, 아무리 사소한 상처도 본인에게는 저도모르게 큰 충격과 후유증을 남길 수 있음을 생각할 때 겉모습만으로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누가 어떤 일을 얼만큼 심한 강도로 겪었는지 속속들이 알 수도 없는 일이고.

너무 끔찍해서 잘 안보는 프로그램이긴 하지만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같은 방송만 봐도 문제 있는 아이의 원인 제공자는 늘 부모와 환경이다. 그래서 그런 환경과 부모의 태도를 한두 달만 바꿔 놓아도 아이는 확연히 달라진다. 과연 그 아이들의 마음에 새겨진 구김살도 깨끗하게 펴지거나 사라질지 아직도 의문이 들지만, 중년 이후라도 자기 문제를 파악하고 애써 노력을 기울이면 다친 마음을 어느 정도 치유하는 게 가능하더라는 사례를 보면 희망을 품고 싶어진다. 요즘 열심히 챙겨보는 드라마 <신데렐라 언니>를 보아도 하나같이 구김살 많은 인간들의 각축장인데, 최소한 그들은 자기 상처가 무엇인지 알고 그걸 인정하기도 하고 회피하는 모습을 보여 허구의 캐릭터인데도 안쓰럽고 정이 간다. 물론 내 주변엔 내면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고 인정해도 상처가 너무 깊어 도저히 펴지 못해 허덕이는 이들이 존재하지만, 드라마 속 세상에서만은 좀 덜 현실적으로 그려지더라도 그들이 주름살을 차츰 펼쳐가길 비는 중이다. 아마 나도 열심히 구김살을 다림질하는 중이기 때문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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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선물

삶꾸러미 2010. 3. 18. 15:30

"따지고 보면 '베푸는(?)' 사람의 자기 만족인것 같아요. 준혁의 마음을 알고 있었고, 또 그 마음을 한번도 제대로 돌아봐준 적 없는 세경으로선, 그렇게 해서라도 추억 한가지라도 더하고 싶었는지도 모르죠. 준혁이가 준 것에 비해 자신이 준게 너무 없다고 생각한 세경이 그 미안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고 싶었을 거란 점에선 그 '선물'은 결국 자신에게 주는 것인 듯." - 미아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문상의 절차가 어렵고, 낯선 이들과 홀로 애도의 인사를 나누어야 한다는 사실이 두려웠지만 나 말고는 거의 아무도 갈 사람이 없을 것이 확실한 친구의 빈소에 나만은 가야한다고 마음을 다잡으며, 친구의 마지막 가는 길에 인사는 해야하지 않겠느냐고 스스로를 다그쳤는데 다녀오고 보니 그 역시 나를 위한 행동이었다. 마지막 인사도, 마지막 선물을 대신한 조의금도 결국엔 나를 위한 위로의 행동이었던 거다. 내쪽에서 단 한번도 먼저 연락한 적이 없었던 최근에도 그렇고 그 옛날에도 친구에게 받은 것에 비해 준 게 너무 없다고 느끼므로 그 미안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고 싶어서. 그러고는 또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일상으로 돌아가 살아가기 위한 방편이었던 거다. 어쩌면 모든 선물이 받는 사람의 기쁨을 지켜보며 흐뭇해지고 싶거나 마음 빚을 갚고 홀가분해지려는 이기적인 행동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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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삶꾸러미 2010. 3. 18. 04:59

그동안 막연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깜박 잊고 있다가 요 며칠 새삼 깨달은 사실 몇 가지.
태어나는 데는 순서가 있어도 돌아가는 데는 정말로 순서가 없다는 것.
사십대 중반이란 자다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뜰 수도 있는 나이라는 것.
인간관계를 많이 맺는다는 것은 죽음으로 끝나는 그 관계의 종결을 목도할 가능성도 많아진다는 의미라는 것.
바로 지금이 앞으로 살아갈 나의 인생 가운데 가장 젊은 순간이라는 것.
남은 자는 또 그럭저럭 살아가기 마련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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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아버지

삶꾸러미 2010. 3. 5. 01:03

제일 많이 쓴 태그가 제일 큰 글씨로 보이는 나의 블로그 스킨에서 드러나듯이 이곳의 태그 1위는 단연 가족이다. 어쩌면 가족이란 안온한 울타리이자 동시에 나를 가두는 가시철망 또는 멍에라는 것이 내 삶의 화두일지도 모르겠다. 이미 갖고 있는 관계만으로도 무겁고 힘겨워서 내 스스로 새로운 가족은 만들고 싶지 않다는 것이 비혼의 가장 큰 이유일 테고. 어쨌거나 읽는 이들이 지겹든 말든 또 나의 가족 이야기다.

다 저녁때 외사촌동생에게 전화가 왔었다. 일제강점기에 징용 끌려갔다 생사를 모르게 된 외할아버지 이야기가 혹시 나올지 모르니 조금 전 mbc에서 하는 <후플러스> 방송을 울 엄마가 유심히 봐주셨으면 한다는 얘기였다. 내 머릿속에 <할아버지>라고 하면 떠오르는 분은 늘 한분이었던 터라 이제껏 이 공간에서 내가 언급했던 할아버지 역시 죄다 친할아버지셨는데, 이참에 처음으로 얼굴도 모른 채 함자로만 알고 있는 외할아버지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광복절 즈음과 삼일절 즈음이면 어김없이 뉴스나 특집 프로그램의 소재로 등장하는 <일제강점기 징용조선인>이 바로 우리 외할아버지의 이름표다. 어려서부터 어른들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울 엄마가 세살 때 외할아버지는 일본으로 끌려가셨고 해방되던 해 고향으로 돌아온다며 마침 일본 항구에서 만난 이웃에게 당신은 다음 배로 갈 터이니 먼저 고향에 도착하면 가족에게 안부를 전해달라셨다는데 이후론 행적이 묘연하다고 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끌려가 각지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하다가 고향으로 귀국하려던 조선인이 90만명에 이른다고 하니, 방송에서 우리 외할아버지의 사연과 아주 똑같은 경우를 만나는 경우도 매우 흔하다. 부산으로 가려는 조선인들이 너무 많아 작은 연락선으론 수용이 불가능하자, 낡은 목선을 단체로 빌려타고 귀국을 시도하면서 우연히 만난 친지나 이웃에게 소식 먼저 전하고는 영영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분들의 사연이 중복된다는 뜻이다. 풍랑에 배가 난파되었거나 오랜 뱃길에 병사하였거나 마지막 순간에 마음이 바뀌어 일본에 남았거나 또는 귀국 길에 새로운 삶을 찾아 고향을 등지고 어디론가 떠났거나 뱃길이 꼬여 이북으로 넘어가는 바람에 붙들렸거나, 이리저리 짐작만 할 뿐 그분들에 대한 진실은 아직도 대다수 어둠에 묻혀 있다.

강제징용에 끌려갔다 희생당한 분들에 대한 진상조사가 이루어지네 마네, 일본 각지에 남아 있는 재일조선인들의 유골을 회수하네 마네, 미쯔비시 같은 거대기업의 징용 조선인 관련 기록이 20만건이나 발견되었네 마네 하는 소식들이 들려올 때마다, 외할머니와 외삼촌은 한편으로 혹시나 하는 희망을 품고 결과를 기다렸지만 매번 실질적인 일의 진척은 단 한 톨도 없었으므로 언제부턴가는 다 소용없는 헛짓이라고 아예 외면하는 쪽을 택하셨다. 유골회수를 위한 진상조사 신청이라도 하려면 우리 외할아버지가 강제징용자라는 증거서류를 내놓아야 한다는데, 해방되자마자 전쟁 통에 보퉁이 짐만 꾸려가지고 피난 내려갔다 온 집안에 그런 게 남아있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과거 외할아버지가 일본에서 보내셨다는 편지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피난 보퉁이를 싸면서는 나라도 편지 따위 대신 귀중품과 생필품을 챙겼을 터이고 잿더미로 변한 서울에 돌아와선 우선 먹고 사느라 바빠 편지 꾸러미를 불쏘시개로 써버렸대도 당연할 것 같다. 

생사도 알 수  없고 행적도 모른 채 그저 당연히 돌아가셨으리라고 짐작하는 외할아버지의 경우, 우리 가족은 유골을 찾는다거나 더 나아가 있을지 말지도 모를 보상금을 받는다거나 하는 희망은 버린지 오래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울 엄마가 세 살 때 헤어졌으니 자손들에게 얼굴도 기억날 리 없는 외할아버지의 존재는 그저 빛 바랜 흑백사진 속에서 하얀 한복을 입고 여자아이를 안고 있는 키큰 어르신의 모습으로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전주이씨 XX대군파 십몇대손>임을 귀에 못박히게 들어온 사촌동생은 입장이 좀 다른 모양이다. 실낱 같은 희망이라도 남아 있다면 할아버지의 마지막 행적을 찾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뜻일 게다.

사촌동생은 249명이라고 인원까지 정확히 언급된 징용조선인의 명단이라도 방송에 나올까 기대했던 모양인데, 냉소적인 생각으로 방송을 지켜본 내 짐작대로 새로울 것은 전혀 없었다. 일본 곳곳의 사찰에는 주소와 성명까지 똑똑히 기록된 재일 조선인의 유골함이 수두룩빽빽한데도, 훌륭하신 이 나라는 징용 조선인의 유골회수에 그다지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으며 국회에서 쌈박질을 해대는 동안 법안 통과가 늦어져 예산집행이 되지 않는 바람에 그나마 해마다 이맘때쯤 미미하게 이루어지려던 한일합동 조사는 무산되고 말았단다. 오히려 일본인들과 일본 사찰에서 그 오랜 세월 징용조선인의 유골함을 보관하다 더 적극적으로 한국으로 돌려보내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무작정 기다리며 보관하기 어려우니 담당자 마음대로 합골해서 아무렇게나 뒤섞어 놓은 곳도 있던데, 반백년이 넘도록 제 나라에서 찾아갈 생각도 안하는 남의 나라 백성 유골을 그렇게 다룬다고 해도 누가 나무랄 수 있을까.

조선으로 되돌아가다가 태풍에 난파된 배에서 떠밀려온 조선인의 시신이 엄청나게 쌓이는 바람에 손수 매장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는 일본 노인이 과거 조선인 유골 매장터라고 가리키는 대마도의 어느 바닷가엔 요즘 한국에서 흘러들어간 쓰레기 더미가 어지럽게 덮여 있었다. 이 나라에서 징용 조선인 문제를 대하는 권력자들의 태도를 상징하는 듯한 그 쓰레기를 보고 있자니 분노도 치밀지 않았다. 다만 그 쓰레기 더미 앞에서 고인들을 위한 묵념을 올리는 일본 노인의 인간적인 마음이 고마울 뿐.

물론 징용조선인의 유골 환수 문제는 전범 일본의 배상금 책임 문제와 엮여 있고, 강제노역에 끌려간 할머니들에게 배상금이랍시고 겨우 99엔을 내미는 모욕을 서슴지 않는 일본 정부의 떳떳한(?) 입장은 박정희 정권 시절 경제원조를 빌미로 정부차원에서 배상문제를 제멋대로 마무리한 이 나라 권력자들의 과오 탓임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잘못된 일은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 원칙이고, 힘없는 나라 탓에 남의 나라에 끌려가 억울하게 노동력을 착취 당하다가 죽은 국민들의 후손이 원한다면 그 유골이라도 되찾아 이 땅에 모셔오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이렇게 미온적이고 알량한 태도로 90만에 이르는 징용 조선인의 흔적을 찾고 유골을 반환하려면 앞으로 몇년이 더 걸릴지 당연히 알 수 없는 일인데, 국회에 앉아 있는 놈들은 얼마 되지도 않는 집행 예산 삭감이나 하고 앉아 있으니!

사촌동생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내일쯤 녀석에게 외할아버지의 흔적 찾기에 대한 희망은 포기하는 게 좋겠다고 전화를 할 것이다. 이 나라 권력자들은 올림픽에서 메달 따온 선수들에게는 <국격>을 높여 자랑스럽다고 플래카드 내걸고는 앞다투어 같이 사진찍고 생색내기 좋아할지 몰라도, 힘없고 돈없는 소시민들의 조상 찾기는 놈들이 보기에 <국격>이나 <국력>과는 전혀 상관없는 쓰레기 더미 뒤지기로 여겨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기야 굳이 내가 전화를 하지 않아도 사촌동생 역시 방송을 봤다면, 외할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 이 나라에 별로 기대할 것이 없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나의 가장 어린 시절은 대여섯 살 무렵인데, 놀랍게도 울 엄마는 세살 때의 기억을 갖고 있다. 하얀 한복을 입고 머리를 짧게 자른 키 큰 남자가 자신을 안고 마당을 왔다갔다 했다는 울 엄마의 말에, 외할머니가 희안하다며 "그분이 바로 네 아버지시다"고 했다니 우리로선 믿지 않을 수도 없다. 괜한 전화 한통에 울 엄마 역시 얼굴도 모른 채 느낌으로만 남아 있는 아버지에 대한 희망을 새삼 달구는 듯하던데, 혹시 외할아버지 함자가 나오는지 눈 부릅뜨고 지켜볼 터이지 걱정말고 주무시라고, 그래도 별 기대는 하지 마시라고 미리 언질은 했지만 내일 대뜸 엄마한테 화부터 낼까봐 걱정이다. 부디 "엄마는 그렇게 겪고도 아직 이 나라에 기대하는 게 있어!? 징용 끌려간 사람들 생사 확인해주려고 나섰더라면 벌써 해줬어야지!"라고 버럭 소리지른 대신 그냥 얌전하게 "우리 외할아버지 얘긴 전혀 안나오더라."고 이야기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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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메기

삶꾸러미 2010. 2. 22. 06:03

날 잘 알지 못하는 누군가 나더러 음식 메뉴를 고르라며 무얼 먹겠느냐고 물으면, 우유부단증이 심한 식탐녀인 나는 즉답을 회피하며 이렇게 말한다.  "보신탕, 추어탕, 곱창 이 세 가지 빼놓고 못 먹는 거 없어요, 다 잘 먹어요. 그러니깐 전 아무거나 좋아요."

헌데 생각해보니 못 먹는 음식에 하나 더 추가해야겠다. 천하의 식탐녀로서 내가 도저히 못먹겠다고 결론지은 음식은 다름 아닌 과메기다. 청어나 꽁치를 얼려서 반건조시킨 게 과메기인데, 초고추장에 찍어서 마늘편, 풋고추, 쪽파 따위와 함께 물미역이나 김, 묵은 김치에 싸먹는 게 보통인 듯하다. 사실 나는 원래도 심하게 비린 등푸른 생선을 그리 즐기지 않는다. 삼치와 꽁치 정도는 잘 먹지만 고등어는 아주 싱싱해야만 먹을 수 있다. 그래야 비린내가 덜 나니까.

내가 과메기의 존재를 알고 난생 처음 먹어본 것은 번역일 시작하고 나서 비상근으로 모 출판사 외서기획을 돕던 때였으니 꽤 오래 전이었다. 영업을 맡고 계신 상무님과 이사님이 특히 과메기를 좋아하여, 겨울철에 포항 쪽으로 수금 출장을 가게 되면 반드시 과메기를 잔뜩 사갖고 돌아와선 대낮에도 소주와 함께 과메기 파티를 벌였다. 다들 맛있다고 먹는 터라 나도 눈을 질끈 감고 시도해보았지만, 그 놀라운 비린내와 느끼한 맛에 나는 눈물이 솟을 지경으로 비위가 상해 씹지도 않고 꿀꺽 삼켜야 했다. 

첫 과메기 시식이 실패로 돌아간 후 식탐녀로서의 자존심이 상했던 나는 몇년 뒤 다시 과메기를 먹어볼 기회가 있었다. 강원도 고향에 일부러 부탁해 올려온 싱싱한 과메기라 하나도 비리지 않다고 호언장담하는 어떤 분의 말을 믿고 다시 시도해본 터였다. 역시나 과메기 때문에 그 자리에 모여든 사람들은 너도나도 냠냠쩝쩝 맛있다고 먹어댔지만 나는 초고추장을 듬뿍 찍어 김에 싼 과메기를 또 한 번 억지로 삼키며 눈물을 참아야 했고 그들의 입에서 풍기는 비린내조차 괴로울 지경이었다. 제 아무리 입맛이 상대적이라지만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비린 걸 <하나도 안 비리고 고소하다>며 먹어댈 수가 있는지 의아할 뿐이었다.

지인들 가운데도 과메기를 즐기는 이들이 있어 겨울만 되면 자기들끼리 일부러 과메기 술번개를 치기도 하지만 나는 워낙 그 맛에 데인 터라 같은 자리에 끼고 싶은 마음도 없다. 삭힌 홍어도 먹는 인간이 왜 과메기를 못 먹느냐고 그들은 의아해하지만, 다들 고소하기만 하다는 소곱창, 돼지곱창도 나에겐 특유의 냄새가 나 역하다고 여겨지는 판국이니 나로선 딱히 이유를 설명할 수도 없다. 그냥 못먹겠다고 할 밖에. 순대는 다 맛있는데 곱창만은 아무리 손질을 잘한 집이라도 냄새 나는 걸 어쩌라고. 과메기도 내겐 마찬가지!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과메기라는 말이 있는 줄도 몰랐는데, 어제 마트 생선 코너에서 인기리에 팔리고 있는 걸 보니 과메기가 이젠 퍽이나 대중적인 먹거리가 된 듯하여 놀라웠다. 제 아무리 오메가3가 많이 들었대도 나로선 도저히 먹기 어려운 과메기, 이웃분들 가운데는 과연 즐기는 분이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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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적

삶꾸러미 2010. 2. 4. 21:31

나에게 동짓날이 팥죽먹는 날이라면 입춘은 부적의 날이다. 예전 마당 있는 집에 살 땐 골목길을 지나치며 더러 대문에 <입춘대길>이라고 쓰인 입춘첩을 붙여놓은 집도 더러 볼 수 있었지만 요샌 통 구경할 수가 없으니, 그저 조용히 엄마가 절에서 얻어다준 새로운 부적을 지갑에 넣고 오래된 부적을 내놓고는, 집안화평을 비는 기다란 부적을 현관 문설주에 붙이는 것으로 간단한 입춘날 행사가 끝난다.

사실 모든 종교가 이승과 내생의 행복을 바라는 기복종교이긴 하지만 불교는 전래되면서 토속신앙과 특히 많이 접목된 탓에 원래 불교의식과는 상관없는 오묘한 미신이 참 많이도 스며들었다. 그래서 더욱 돈을 노리는 사이비 신앙행위가 판을 치기도 하며, 일부 탐욕스런 절에서는 다량으로 인쇄된 기복 부적을 사다가 신도들에게 돈을 받고 팔기도 하는 상황이니 혀를 찰 노릇이다. 면죄부를 팔아 치부했던 중세 기독교인의 환생도 아니고 뭐하자는 짓인지 원.

어쨌든 지니고 다니면 화를 면하고 복을 부른다는 부적에 대한 불교신자들의 믿음이 워낙 확고한 탓에 입춘날엔 대부분의 절에서 공짜로 부적을 나눠주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법회에 참석하는 신도들의 수가 많단다. 태어나서부터 줄곧 외할머니와 엄마 영향으로 불교와 친숙했던 내가 지켜봐온 바에 따르면, 입춘 부적에도 변화가 있었다. 처음엔 삼재인가 아닌가에 따라서 그냥 부적과 삼재 부적만 식구들 수대로 나눠주더니, 운전하는 가족들이 있는 신도들의 특별 부탁 때문인지 어느해 부턴가 나는 입춘마다 일반 부적 말고도 자동차에 두고 다니라는 <운전용> 부적을 따로 받았다. 그나마 자동차 부적은 해마다 안바꿔도 되는지 몇해 전부터는 그냥 같은 부적을 햇빛 가리개 안쪽 주머니에 찔러넣어둔 채 잊고 지내는 중이다.

난생 처음 차가 생겨 운전을 하게 되던 날은 더 재미있는 일도 있었다. 사촌형부가 몰던 차를 물려받은 그날, 엄마는 미리 절에서 특별히 주지스님이 챙겨주었다는 자동차 사고를 막아준다는 부적을 받아와서는 후드를 열고 떡하니 엔진 위에 견고하게 붙여주었고, 막걸리를 사다가 차 바퀴 네 군데에 나눠 부으며 무사고를 빌었다. ^^; 우리 동네 카센터 아저씨는 기독교인이었는데, 처음 엔진오일을 갈러 갔던 날 그 부적을 보더니 빙그레 웃으면서도 부적이 떨어지지 않게 더 꽉 붙여주었다. 불교신자들 뿐만 아니라 천주교신자 가운데서도 차안에 걸고 다니는 염주나 묵주 외에 그렇게 자동차 엔진에까지 뭔가를 붙이고 다니며 무사고를 비는 어머니들이 꽤 있다나.  

사실 내 자동차에는 엄마가 넣어주신 부적뿐만 아니라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무사고를 기원하며 사다주신 예쁜 조각 염주도 있고, 역시나 외할머니가 주동하신 부처님 금불사(절에 모신 부처님한테 새로이 순금을 다시 입히는 행사를 <금불사>라고 한다) 때 쓰인 오색실과 팥알이 들어 있는 작은 향낭도 걸려 있다. 물론 나는 그런 물건들의 <영험한> 효험을 전혀 믿지 않는다. 바퀴에 막걸리 뿌리고 엔진에 부적까지 붙였던 나의 첫차로 두어달 만에 나는 그렌저 문짝 두개를 보란듯이 우그러뜨려 거금을 물어줘야 했고, 운전연습을 시작한 큰동생은 주차장에서 남의 차를 찌그러뜨린 뒤 몰래 도망치는 사고를 저질렀으며, 수동이라 엔진 꺼뜨리지 않고 언덕길 운전연습 한답시고 동네 약수터의 벤치를 들이받질 않나 골목길에 주차한 자동차들의 사이드미러에 죄다 흠짐을 내놓지를 않나, 큰 사고만 없었다뿐 자질구레한 사고는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런데도 부적에 대한 울 엄니와 외할머니의 믿음은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거봐라! 큰 사고 아니라서 사람도 안다치고 그 정도니 얼마나 다행이니!" 

자동차에 주렁주렁 매달린 염주와 향낭, 햇빛 가리개 주머니 안에 들어 있는 부적을 내가 굳이 치우지 않는 이유는 그 물건의 효험을 믿어서가 아니라 외할머니와 울 엄마의 마음 때문이다. 더욱이 외할머니는 돌아가신지 5년이 다 돼가는데도, 룸미러에 매달아둔 염주만 보면 성지순례 다녀오신 할머니가 한복 저고리 주머니에서 <옴>자가 양각으로 새겨진 그 염주를 꺼내 주시며 꼭 차에 매달고 다니라고 했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나에겐 기복용 부적이 아니라 소중한 추억회상용 유품이 된 셈이다. 팔순 노모가 육순 자식에게 길조심을 당부하는 게 인지상정인 것처럼, 공식적으로 무사고 10년이 넘은 베테랑인데도 울 엄마가 여전히 내 운전을 염려하는 걸 알기에 날 못 믿겠으면 부적이라도 믿으시라고 군말없이 오늘도 엄마가 가져다준 부적을 지갑에 소중히 간직했다. 어쩌면 이제껏 큰 사고 없이 잘 지내온 건 나를 염려하는 어르신들의 걱정을 덜어드리려는 조심 노력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부적에 효험이 있다는 말인가 아닌가. ㅋㅋㅋ 하기야 전우치 같은 도사님 부적을 백장이나 붙인들 본인이 조심하지 않으면 말짱 꽝일 터, 결국 부적의 힘은 자중의 힘인가 보다.

아무려나 입춘대길. 얼마 안남은 진짜 새해엔 정말 크게 좋은 일만 빵빵 터져주길 무신론자인 내가 아무데나 빌어도 이루어지려나?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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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좋아하는 대중교통수단은 누가 뭐래도 버스!
과거 내가 애용하던 노선들을 죄다 없애거나 바꿔버린 어느 재수없는 놈 때문에 간간이 화가 나긴 하지만, 그래도 일부러 버스타고 나가야 이용할 수 있는데다 수많은 계단이 무섭게 버티고 있는 지하철과 달리 2분만 걸으면 동네 버스 정류장이 있어 간선버스, 지선버스, 마을버스, 광역버스(물론 이 동네가 외져서 광역버스는 몇 정거장 나가야 탈 수 있다만;)까지 웬만한 동네까지 구석구석 안가는 데가 없으니 얼마나 편리한지.
게다가 지하철은 잠깐씩 나타나는 지상역 이외엔 줄곧 시커먼 지하에서 돌아다녀 밖을 내다볼 수도 없이 답답하지만, 버스는 앉든 서든 한가로이 창밖으로 세상 구경까지 할 수 있으니 심심할 새도 없다. 게다가 용인, 성남, 일산 같은 신도시에 갈 때도 지하철보다는 새빨간 색깔이 호화로운 광역버스가 훨씬 빠르다! 물론 가끔 길이 막혀 엉뚱하게 진을 뺄 때도 있지만 만인을 마주보며 앉아야 하는 지하철 좌석보다 한 방향으로 놓인 버스 좌석에서 꾸벅꾸벅 조는 묘미는 그야말로 달콤하기까지. ^^

버스예찬자이긴 해도 왕비마마 전용 기사이기도 한 두문불출 인생이라 종전엔 버스를 탈 일이 그리 많지 않았지만 요샌 요가강습을 받으러 다니느라 이틀에 한번꼴로 계속 버스를 이용하며 새삼 느낀 게 있다. 과거에도 승객이 탈 때 "어서오세요"라거나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하는 기사분들이 더러 있었고, 그게 낯설고 뜻밖이라 선뜻 답인사도 못한 채 우물쭈물 버스 뒤로 향했던 기억이 있다. 헌데 요즘 버스를 타보니 인사를 건네는 기사분들이 상당히 많다. 심지어 며칠 전엔 탈 때마다 "어서 오세요"를 외치는 것뿐만 아니라 내리는 승객에게도 일일이 "안녕히가세요"라고 인사하는 기사 아저씨를 만났다. @.@
중학교 때부터 나는 버스 기사 아저씨들을 존경의 눈초리로 쳐다보았었다. 특히 내가 다니던 학교는 대단히 꼬불꼬불한 개천변길을 한참 지나 있는 곳이었는데, 도저히 차문이 닫힐 것 같지 않을 만큼 만원인 버스도 기사 아저씨의 놀라운 곡예운전 몇 바퀴를 거치면 이리저리 쏠린 승객들 사이에 또 다시 공간이 생겨났다. 가끔 복잡한 시내로 접어들 때 넓은 길이 차로마다 꽉꽉 막혀 있어도 버스 아저씨는 귀신같이 제일 잘 빠지는 차로를 골라 아슬아슬 끼어들기를 했다. 버스 전용차로가 생긴 다음엔 말할 것도 없이 천하무적처럼 쌩쌩 달려 꼬물꼬물 기어가는 자동차와 택시들을 비웃었다.
중고등학교 때 내가 애용하던 버스는 <오둘둘>과 <8번> 버스였는데, 종점이 까마득히 멀어 우리 학교와 동네 주변에선 늘 배차시간에 쫓기는 모양인지 두 노선버스 모두 레이싱을 하듯 달렸으므로, 가뜩이나 길이 꼬불꼬불해 지금도 안전을 위해 손잡이를 잡으라는 안내방송이 나오는 그 구간에서 우리는 손잡이 잡지 않고 누가 오래 버티나 <빵빠레 내기>를 하며 까르륵대다 순식간에 집과 학교에 도착했었다.

지금도 그 기다란 버스를 요리조리 운전하며 앞뒷문 열랴, 다인승 인원 확인해주랴, 안내방송 틀랴, 거스름돈 바꿔주랴, 배차시간 맞추랴, 멀티플레이어도 그런 멀티플레이어가 없을 정도로 바쁠 기사분들이 타고 내리는 승객에게 인사까지 한다니! 물론 친절히 건네는 인사가 기분 나쁠 리는 결코 없다. 요샌 나도 익숙해져서 인사를 건네는 기사 아저씨를 만나면 "네"라거나 "안녕하세요"라고 대꾸할 수 있게 됐는데, 혹시라도 대꾸할 순간을 놓치면 민망하다. 대답없는 벽에 대고 대화를 하듯 좀처럼 대꾸하는 승객이 없는데도 계속 인사를 외치는 기사분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인사를 건네는 기사분들이 많아진 걸 보며 요즘 버스회사들이 친절을 중요시하나보다 여겼더니 그도 그렇지만 버스운행 실태를 감시하는 암행조사단 같은 게 있단다. 몰래 난폭운전 여부와 정류장 정차여부, 친절도 따위의 점수를 매겨서 인사고과에 반영한다나. 가끔 노인 승객이 넘어질 뻔할 만큼 너무도 난폭한 운전을 하거나 계속해서 휴대폰 통화를 하며 허투루 버스를 운전하는 기사를 봤을 땐 버스에 비치돼 있는 불편 신고 엽서를 써보낼까 할 정도로 화난 적이 있으니 가끔 회사에서 실태를 조사할 필요른 느끼긴 하지만, 단순히 감시 때문에 마음에서 우러나지 않는 친절은 별로 달갑지가 않다.
실태 조사기간 동안만 반짝 인사하는 시늉 따위가 무슨 소용이람. 나야 곡예운전이든 말든 빠르게 씽씽 달리는 걸 선호할 때가 많지만 그래도 최대한 안전하게 운전하며 타고 내리는 승객들 조심스레 배려하는 게 겉치레 인삿말보다 훨씬 중요하지 않은가 말이다. 한동안 하차벨을 누른 뒤 버스가 설 때까지 자리에 앉아 있다가 정차 후에 일어나 <안전하게> 내리라는 안내문이 붙어있던 적도 있었지만, 한국인들의 성질머리가 대개 급하기도 할뿐더러 하차벨을 누른 뒤 얼른 미리 뒷문 앞에 대기하지 않으면 기사분이든 나머지 승객들에게든 구박을 받을 것 같아서 한번도 그렇게 해본 적이 없다. 정차할 때까지 문앞에 서 있는 사람이 없으면 정류장에 섰다가도 금방 가버리지 않나? 더욱이 내릴 때도 매번 버스카드를 찍지 않으면 안되는 작금의 현실에서 끝까지 좌석에서 뭉기적거렸다간 내리는 뒤통수에 곱지 않은 시선이 여럿 꽂힐 것 같다.

요즘 새로 도입되고 있는 시내버스는 차체가 낮고 승하차 문 바닥에 연결판이 설치되어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타고 내릴 수 있게 디자인되었다. 어떤 버스에는 휠체어 장애인의 승하차시 10분 정도 시간이 소요될 것이므로 다른 승객의 배려를 바라는 안내문이 붙어있기도 하던데, 나는 차츰 이 나라도 변해가나 싶어 반갑다가도 과연 배차시간에 쫓기는 기사분이나 어디서든 <빨리빨리>에 길들여진 한국인들이 얼마나 협조해줄지 걱정스러웠다. 아직 그런 저상형 버스를 타고 내린 장애우의 시승담을 어디서도 본 적 없지만, 내릴 때는 몰라도 어설픈 내 눈썰미로는 앞문과 툭 튀어나온 앞바퀴 위 짐칸 때문에 정말로 휠체어가 버스에 오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또 다시 현실성 없는 생색내기용 디자인은 아니었기를 바랄 뿐.

어쨌거나 승객에게 인사하는 버스 기사 아저씨들의 숫자가 앞으로 더 많아질지 아닐지, 그에 답하는 시큰둥 승객들의 변화는 이루어질지 궁금하다. 내 생각 같아선 그냥 서로 뻘쭘한 승하차 인사는 건너뛰고 빠르고 안전한 버스 운행에만 신경써주면 고맙겠는데...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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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 아는 사람
친구: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
벗: 비슷한 또래로서 서로 친하게 사귀는 사람
동무: 1. 늘 친하게 어울리는 사람.  2. 어떤 일을 짝이 되어 함께 하는 사람
지기: <지기기우>의 준말. 자기를 잘 알아주는 친구. 자기를 잘 이해해 주는 참다운 친구.

쓸데없이 개인사를 많이 털어놓는 블로그라 부지불식간에 글에 등장하는 <지인>들이 꽤 되었는데, 결국엔 나에게 그만큼 쓸데없이 <지인>들이 많다는 이야기도 되는 듯하다. 물론 나의 블로그에 자신이 등장했음을 아는 <지인> 정도라면 그냥 아는 사람이 아니라 <친구>이거나 <지기>인 경우가 많아, 뭉뚱그린 <지인>의 호칭에 슬며시 불만을 표하기도 한다. 하지만 <친구>라고 하면 어쩐지 <벗>과 비슷하게 비슷한 또래여야 할 것 같은 강박증이 들어 나이가 밑이거나 위인 친구에게는 막연하게 거리를 두는 <지인>이라는 표현을 들먹이고 말았던 것 같다.
이번에 새삼 <지인>부터 친구를 뜻하는 여러 낱말을 찾아보고 나니 반성이 필요하긴 하다. 영화 <아는 여자>에서 <그냥 아는 여자>라는 정재영의 소갯말에 이나영이 얼마나 상심했는지 남녀관계를 떠나서 얼마나 공감했던가. 이쪽에선 뭔가 특별한 관계라고 여겼는데 저쪽에선 <그냥 아는> 사이로만 규정하고 있거나 믿음을 저버리는 해악행위까지 서슴지 않는 위해인물임음을 깨달았을 땐 마음의 상처를 피할 수가 없다. 얼른 관계 재수정에 돌입해 처리하면 그만일 수도 있겠지만, 기대에 대한 배신감이랄까, 인간 자체에 대한 실망까지 겹쳐 그간의 모든 다른 관계까지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게 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 쪽에선 정말로 <그냥 아는> 사이로 남았을 뿐인 관계인데도 상대쪽에서 뭔가 특별한 관계로 인식하고 있다는 낌새를 보이면 차마 냉정하게 쳐내지 못하고 뒷구멍에서나 구시렁거리게 된다. 세월이 좀 더 지나면 어떻게든 정리가 되겠지, 그런 한심한 바람이나 품으면서.

작년에 휴대폰을 바꾸면서 전에 있던 휴대폰에 저장됐던 번호를 모조리 옮기긴 했지만 상당수의 번호를 과감히 지우고 정리한 뒤엔 <가족> 외에 딱히 유용하게 정리해두진 못했던 그룹별 번호 정리에 돌입했었다. 휴대폰을 을 잃어버려 나쁜 사람 손에 들어가는 경우를 대비하여 <가족> <친구> 따위의 솔직한 그룹명은 피하는 것이 좋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설마 그런 일이 나에게 벌어지겠어 싶은 생각에 난 고집스레 가족/친구/동창/후배/선배/er/비즈니스/기타/받지마 9개의 분류를 정했다. 물론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한 이들은 첫 그룹인 <미지정>에 남겨둔 채로. (예를 들어 ㅌㄹ 주민들은 아직 미지정 그룹에 속한다 ^^; 블로그이웃이라는 그룹을 만들 수도 있겠지만, 좀 더 세월을 견디다 고민 없이 친구 그룹에 넣을 수 있는 사이가 될 날을 꿈꾸는 중이다;;)

처음 그룹을 일일이 나눌 땐 벨소리도 다르게 해서, 전화오는 소리만 듣고도 척, 어떤 부류의 인물인지 알아보겠다는 심사였으나 당연히 뻘짓이었다. 내가 9종류나 되는 벨소리를 기억할 리가 없지 않은가.
우선은 가장 많이 울려대는 <가족>의 전화를 차별화하고, 자다가도 안잔 척 목소리를 맑고 씩씩하게 내야 하는 <비즈니스> 전화의 벨소리만 식별하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친구>와 <동창>을 굳이 나눈 이유야 뻔한 것일 텐데, 내 경우는 <후배>와 <친구>의 분류에서 이리저리 고민을 좀 해야했다. 나이로는 밑이지만 이래저래 연이 닿은 지인들과 차츰 동등한 우정을 쌓아가다 보면 그냥 <후배>라고 칭하기 미안한 느낌이라 <친구>라고 불러야할 것 같기 때문이다. 나이로는 선배뻘이지만 당연히 친구 폴더에 정리된 사람들도 물론 존재한다. 하기야 싸이월드 시절 일촌에도 급수를 나눠야한다고 여겼던 것처럼, <친구>도 사람마다 심리적 거리감이 퍽 다르다. 사전상의 뜻처럼 가깝게 오래 사귀었어도 새삼 멀어지는 과정에 있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오래 사귀지 않았어도 누구보다 가까움을 느끼는 친구도 있으며, 멀찌감치 오래 사귀어 친구로 여겨지는 이들도 있다. 유독 <지기>라고 마음속에 꼽아두게 되는 이도 있음은 물론이다.

쓸데없이 넓고 얄팍한 인간관계는 과감히 청산하는 것이 나에게 이롭다는 생각은 이미 10여년 전부터 해왔지만 게을러서, 매몰차지 못해서, 맺고 끊음이 불명확해서 질질 이끌려온 관계로 엮인 <지인>들이 아직도 꽤나 많은 것 같다. 가끔 나를 친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인맥확장을 위한 디딤돌이나 그밖의 쓸모로 <이용>하려는 지인들에게 뒤통수를 맞은 적도 몇번이나 되면서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는 생각에 씁쓸하다. 이제부턴 정말로 서로 마음 다치지 않을 사람들로만 벗과 동무를 삼아 <지기>로 발전시키는 데 노력을 기울일 테다. <그냥 아는> 사람들에게 허투루 쏟아부을 에너지와 감정이 이젠 몹시 아까워졌다. 드디어 내게도 방만한 인간망 정리의 시기가 왔나보다(사실 이 말도 10년전부터 되뇌긴 했다. ㅠ.ㅠ). 늦었더라도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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