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맞이 식겁

삶꾸러미 2012. 10. 4. 09:00

추석 전날, 식탁에서 엄마랑 동생은 밤을 까고 나는 나물을 다듬는 중이었다. 명절은 자기에게도 잔칫날임을 잘 아는 조카네 개 파랑이, 꼬리를 흔들며 여기저기 기웃거려봐도 아직은 먹을 것도 없고 퉁박만 받기 일쑤였다. 자꾸만 다리에 기어올라 아양을 떠는 녀석에게 저리 가라고 이르고는 주방으로 뭘 가지러 갔던가. 우연히 나는 파랑이가 식탁 밑에서 뭔가를 집어먹는 광경을 목격했다. 마침 개주인인 큰동생 내외는 빠뜨린 물건을 사러 외출 중이었는데, 잠시 뒤 파랑이가 갑자기 컥컥거리기며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식탁 밑으로 떨어진 밤껍질을 낼름 주워먹은 듯했다. 개문외한인 나와 막내동생이 보기엔 녀석이 숨을 못쉬어 당장이라도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어린 조카가 목부분을 어루만지고 입안을 들여다보았지만 소용없는 일. 사람이면 뒤에서 껴안고 상복부 마사지라도 한다지만, 개는 그럴때 어떻게 해야하는지 우리가 어떻게 알겠나. 파랑이는 입도 못 벌리고 그릉그릉 캑캑 괴로워했다. 하필 주인도 없는데! 

 

버둥거리는 파랑이를 안고 동생과 나는 다급히 동물병원으로 달려갔다. 막내동생은 얼마 전 친구 가족들과 놀러갔었는데, 그날따라 아픈 개를 집에 두고 갈 수 없어 함께 데려왔다는 친구네 개가 시름시름 앓다가 새벽에 결국 죽는 광경을 목격했다며 심난해 했다. 입도 못 벌리고 몸부림치던 파랑이는 다행히 차에 타고 가는 도중 입을 벌리고 캑캑 헐떡거리기 시작했다.

 

추석연휴라 문을 닫았으면 어쩌나 걱정했던 동물병원은 열려 있었고, 의사에게 파랑이 상태를 이야기하니 그나마 밤껍질이라면 다행이라고 했다. 똥으로 나올 확률이 높은 거라서 외과적인 수술까지는 필요없을 것 같다고. 일단 엑스레이를 찍어보자면서 석장이나 찍었는데, 밤껍질은 또 엑스레이에 안나오는 이물질이란다. 일단 식도에선 넘어갔으나 이물질에 놀란 위가 약간 뒤틀려 있는 상황이고, 지켜보아야 알 수 있으니 소화를 돕는 주사 2대를 놔주겠다고. 어휴...

 

우린 완전 식겁해서 벌벌 떨었는데 전화로 소식을 전해들은 개주인은 가끔 뭘 잘못 삼켜서 좀 그러다 마는데 뭐하러 병원까지 갔느냐고 천하태평이었다. 우쒸! 우린 진짜로 파랑이 숨넘어가는 줄 알았단 말이다! 명절 앞두고 웬 난리인가 별별 생각이 다 들면서 순간적으로 온갖 최악의 시나리오를 다 쓰고 앉았던 것도 모르고 나 원 참. 원래도 파랑이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최대한 불쌍을 짓고 바들바들 떨면서 모두에게 사랑의 손길과 맛있는 것을 갈구하는 놈이다. 해서 바들바들 떠는 것이야 그러려니 하겠는데 집에 와서도 약간 몸을 뒤채며 경련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찌나 신경이 쓰이던지.

 

밤껍질이 위와 장의 벽을 긁어대면서 빠져나갈 거라 토할 수도 있으니, 수의사는 문제 생기면 다시 병원에 데려오라고 말했었다. 잔칫날 앞두고 파랑이도 나름 포식의 꿈에 부풀어 있었겠으나, 놀란 위에 인간의 음식이 들어가면 안될 것 같아 요주의 애견인들에게 신신당부를 해두었고, 결국 추석날까지 별 탈 없이 잘 지나가 한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애완동물은 정말 아무나 키우는 게 아님이 확실하다. 엄청난 병원비도 그렇고(4만7천원!), 말도 안통하는 애들이 어딘가 모르게 아프면 무서워서 어쩐담.

 

요번 추석엔 노동의 후유증이 어찌나 강렬한지 집으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이미 몸이 막 늘어지고 어질어질 현기증이 났다. 바닥난 체력탓 수면부족 탓이 크게 작용했겠지만 아마 본격적인 노동도 하기 전에 파랑이 때문에 식겁한 것도 영향을 미쳤을지 모르겠다. 명절 노동의 최소화를 위하여 그나마도 온 친척들이 저녁까지 내리 먹고 버티던 악습을 걷어치우고,  점심 먹고 헤어지기로 결정한 지 수년째. 하도 길이 막혀 15분 거리를 한 시간이나 걸려 집에 돌아와선 다 저녁 때가 됐거나 말거나 곧장 쓰러져 자버렸는데 열몇 시간을 자고 일어나서도 온몸이 결렸다. 머리는 또 왜 지끈지끈 아픈지 좀 서러울만큼 연휴 내내 힘이 들었다. 볕 좋은 가을날씨 즐길 틈도 없이 연휴는 다 가버렸는데, 묵직한 몸은 여전하다. 오늘부터 출근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뭐, 이러면서 기운내려고 용쓰는 중.

 

 

Posted by 입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