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 그림

추억주머니 2011. 3. 27. 16:02


풀 그림 이야기가 나오면 내겐 또 남다른 사연이 있다. 예전에 미니홈피에도 밝혔던 이야긴데, 풀로 그린 조카 그림도 하나 더 있겠다 그 추억도 마저 상기해야겠다. 부모님이 동생들을 데리고 분가하시고 나서도, 나는 초등학교 2학년 중간 무렵까지 본적지이자 출생지인 ***동 집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들과 살았다. 연년생인 남동생과 입학 터울을 둘 겸,
생일이 여름인데도 제법 똘똘하다는 것만 믿고 제 이름밖에 쓸 줄 모르는 나를 덜컥 7살에 국민학교에 입학시켜놓고, 할머니는 매일 전교에서 제일 작은 1학년 학생인 나를 업어나르셨다. 울 엄마는 또 첫딸 입학을 위해 제일 비싼 최고급 책가방을 사주었다는데 (가죽이었는지 아닌지 기억나지 않지만 암튼 빨간색이었던 그 가방은 무척 재질이 두꺼웠고 열고 닫기 불편했다) 그게 또 엄청 무거워, 할머니가 보기엔 책가방 무게 때문에 애가 뒤로 넘어갈 것 같았단다. ㅋㅋ

늘 교문 앞에서 수업 끝나기를 기다리던 할머니가 보이지 않던 어느 날, 나는 친구들과 가방 들어주기 가위바위보를 했다. 지금도 그때도 가위바위보에 젬병인 나는 당연히 꼴찌였다. 책가방을 앞 뒤로 매고 양손에도 하나씩 친구 책가방을 들었다. 꼴찌에서 두번째는 신발주머니를 모아 들었다. 낑낑대며 학교 앞 언덕길을 내려가는 나를 저 멀리서 발견한 할머니는 고래고래 소리를 치시며 달려왔다. 힘 없는 아이 괴롭히는 나쁜 놈들이라고... 친구들의 엉덩이까지 한대씩 퍽퍽 때려준 할머니는 내가 옆에서 괴롭힌 게 아니라 그냥 가위바위보를 해서 진 것 뿐이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막무가내였다. 그러고도 분에 못 이기셨는지 할머니는 울먹거리는 친구들에게 집이 어디냐고, 앞장서라고 말씀하셨다. 애들 부모에게 일러 다시는 손녀딸을 괴롭히지 말라고 당부할 작정이었던 거다. 그래서... 화난 그 아이들은 한동안 나와 놀아주지 않았다.  

한글도 못 떼고 들어가 이해력이 많이 떨어졌던 나는 1학년 미술시간 준비물을 알려준 선생님의 설명을 오해했던 모양이다. 미술책을 미리 들춰보았다면 그런 실수는 하지 않았겠지만, 어린애가 뭘 알았겠나. 늦둥이로 낳은 막내딸도 거의 다 키워놓아 국민학생의 학부모 노릇에 서툴렀을 할머니, 할아버지도 마찬가지고. 어쨌든 "풀에 물을 들여오라"는 선생님의 설명을 나는 집에 가서 그대로 전했고, 할머니, 할아버지는 고심 끝에 누렇게 말라붙은 (아마도 채 신록이 우거지기 전인듯..) 풀들을 마당에서 따다가 정성껏 물감으로 이런저런 색을 칠해 물을 들여주셨다.

다음날 곱게 '물들인 풀'을 갖고 학교에 간 나는 친구들이 다 나와 달리 '찍어 쓰는 풀통'에 물감을 풀어 색색깔로 물들여온 걸 보고 울음을 터뜨렸다. 이 사건은 어린 나에게 제법 큰 충격이었던 듯하다. 부모님 슬하로 옮기느라 전학을 했던 이후 국민학교는 몰라도, 입학한 국민학교 시절의 기억은 거의 사라졌는데도 책가방 사건과 더불어 이 사건은 또렷이 남아있으니 말이다. 그날 나의 담임이셨던 '호복순' 선생님(이 이름도 절대 잊혀지질 않는다^^)은 우는 나를 달래시곤 옆 친구에게 색깔풀을 나눠주라 하셨고, 미술시간은 친구의 준비물을 빌어쓰며 무사히 넘어갔다.

정민공주에게 내가 언제 이 사연을 들려주었는지 모르겠는데, 어린 정민이에게도 몹시 인상적인 이야기였던 듯 가끔씩 불쑥 고모 어렸을 때 미술시간에 '물 들인 풀' 준비물을 잘못 해간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면서 선생님이 왜 준비물을 잘못 해간 고모를 혼내지 않았는지, 친구는 왜 암말 없이 자기 물감을 나눠주었는지(자기 그림 그릴 것도 모자랄지 모르는데!) 꼬치꼬치 묻곤 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려준 날은 어김없이 풀을 쑤어 물감 풀을 만들어 바쳐야 했고.. -_-;

2007년 1월. 장 뒤뷔페의 우를루프 정원 전시회를 함께 다녀온 날도 공주는 위대한 예술가에게 영감을 받았는지 물감풀을 청해 풀 그림을 시도했다. 파란색 풀과 빨간색 풀 두 가지나 만들어야 했는데 찹쌀가루(마침 밀가루가 집에 없었다)를 아낀 탓에 풀이 너무 묽어 다른 때보다 작품엔 열악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작품이 마르지도 않은 상태에서 개구쟁이 동생이 밟고 지나가는 바람에 사진으로만 남은 공주의 풀 그림을 천재 시리즈에 넣을까 말까 하다가 뺐는데 결국 이렇게 올리게 되는군. ㅎㅎ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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