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개의 봄

삶꾸러미 2011. 10. 18. 20:50

우울증이 심해지면 어김없이 반복되는 엄마의 자학 레퍼토리 가운데 하나는 쓸모없는 자신을 어디에든 '갖다 버리라'는 것이다. 심지어는 매달 후원금을 보내시던 불교 간행물 <연꽃마을>에서 운영하는 요양시설을 콕 찝어서 그리로 보내고 너는 자유롭게 편히 살라는 말을 하신 적도 있다. (그러나 무슨 연유인지 얼마전 엄마는 얼마 되지도 않는 월 후원금 자동이체를 끊어버렸다. ㅋㅋ) 그 말은 곧 엄마가 가장 피하고픈 상황이 어딘가에 버려지는 것이며, 낯선 곳에 버려지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깃든 투정을 반어법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노년이 되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칠순을 넘기면서 엄마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치매다. 얼마 전엔 나 몰래 보건소에서 운영하는 노인건강관리 프로그램에서 치매검사도 하고 왔단다. 한달에 한번 꼬박꼬박 정신과의와 상담을 하고 우울증 약을 먹는데도 안심이 되질 않았던 모양이다. 다른 건 다 잘했는데 단어 세 가지 기억했다 나중에 말하기 문제를 하나도 못 맞혔다면서 아쉬워하긴 했지만, 검사 결과 '양호' 판정을 받아온 엄마는 자기 치매 아니라면서 몹시 기뻐했다. 

가끔씩 내가 엄마에게 구구단을 외게 시키고, 불쑥 덧셈 뺄셈 문제를 내는 이유도 자꾸만 깜빡깜빡 잊는 건망증이 치매 초기증상일까봐 벌벌 떠는 엄마를 안심시키기 위함이다. 헌데 멀쩡한 젊은 사람들도 잠 잘 못자고 컨디션 안좋으면 말도 헛나오고, 구구단은커녕 단순한 셈도 못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니 일조량 떨어지면서 해마다 몹시 불안불안 조마조마하게 넘기는 가을에 접어들며 심신의 컨디션이 약간 떨어진 엄마가 불면과 건망증을 잠시 겪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심지어 나는 잠 잘 자고 컨디션 좋을 때도 암산이나 돈계산 같은 숫자와 관련된 사고는 단순한 것조차 잘 하지 못하며, 가끔씩 손에 멀쩡히 들고 있는 차키나 휴대폰을 찾아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는 인간이다. 치매초기를 의심하려면 차라리 나를 의심해야지, 수십년 전 사건부터 쓰레기 배출요일까지 나보다 더 잘 꿰고 있는 엄마는 염려할 게재가 아니다.

다른 노인들은 청년처럼 펄펄 뛰어다니실 나이인 71세에 울 엄마가 너무 엄살(?)을 떠는 것 같아 못마땅해 툴툴거리지만 내심 나도 겁이 나긴 한다. 친할아버지, 친할머니, 아버지 세분은 앓지도 않으시다가 졸지에 쓰러져 운명하셨고, 꽤 오래  병을 앓으신 외할머니도 끝까지 정신은 거의 말짱하셨기 때문에, 우리 엄마도 자잘한 지병은 있으시되 정신은 끝내 혼미해지지 않기를 바라고는 있으나 건강에 관한 한 누구도 자신할 수 있는 부분은 없다. 게다가 노인성 우울증이 치매로 이어지는 확률이 꽤나 높음(치매 초기가 노인성 우울증으로 시작된다던가?)을 알기에 마음을 놓을 순 없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점은 울 엄마의 우울증이 45년 역사를 넘긴 지병이라 노인성 우울증과는 양상이 다르고 (사실 엄밀히 말해 울 엄마는 조울증이시다), 꾸준히 치료를 받아오고 있으며, 평생 비빌 언덕이셨던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오히려 더 잘 견뎌내고 계셔 4년째 심하게 앓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쨌거나 못된 딸년인 나는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우환에 대비하여 이미 방향도 세워놓았다. 요즘은 치매노인 부양을 돕는 데이케어 센터가 동네마다 생겨나기도 했으므로 감당할 수 있을 때까지는 버텨보도록 노력하되, 힘에 부친다고 생각되면 당연히 요양병원에 모실 거라고.
 
하지만 요양병원에 방치하고 더는 돌보지 않는 수많은 노인 환자 문제를 언론에서 접하거나 열악하기 짝이 없는 일부 요양병원의 운영실태에 관한 뉴스를 보게 되면 이미 일어나지도 않은 일, 저지르지도 않은 일에 대한 죄책감을 느낀다. 이는 마치 결국엔 우리 엄마도 치매에 걸릴것임을 당연시하는 태도가 아닌가 말이다. 80세 이상 노인의 30-40%가 치매를 앓는다는 통계를 온전히 믿는 건 아니지만, 어떤 상황이든 미리 온갖 가능성을 상상하고 미리 걱정하는 나의 태도는 자꾸만 최악의 상황을 미리 대비해두어야한다는 쪽으로 결론을 짓는다. 이런 생각을 엄마에게 내비친 적 없는데도, 엄마가 가끔씩 우울증이 도졌을 때 들먹이는 '내다 버려라' 레퍼토리를 보면 엄마는 당신 딸년이 능히 그럴 수  있는 '냉정한' 인물임을 미리 알고 두려워하는지도 모르겠다. 병증이 좀 나아지고 나면 다시 "엄마는 너 없이는 못산다"는 절박한 레퍼토리로 방침을 바꾸시는 것을 봐도 그런 쪽으로 심증이 굳어진다.

요양병원에 병든 부모 수발을 내맡기는 것을 '현대판 고려장'에 비유하는 세태에 우리 엄마도 나도 공감하고 있는 것 같다. 몇년전 중풍에 걸려 요양병원 신세를 꽤 오래 지고 있는 친구분을 더러 면회하러 다녀본 엄마도, 거동 못하시는 아버지를 요양병원에 모셨더니 물리치료와 집단생활 덕에 오히려 건강을 상당부분 되찾으셨다는 친구의 고무적인 이야기를 들은 바 있는 나도, 요양병원에 대한 거부감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그래도 자식이 직접 살뜰히 모시는 것만 하겠나, 하는 인습적인 사고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지인 한분은 10년째 거동 못하시는 어머니를 간병인과 함께 집에서 모시고 있다. 자기 어머니는 정신이 온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워낙 언사가 요란하시어 단체생활에 부적합하다는 것이 이유인데, 내가 보기엔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일주일에 한번씩 간병인이 돌아가는 주말에 꼬박 하루 혼자서 간병을 하고 나면 심신이 완전히 지쳐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면서 왜 그 힘든 끈을 놓지 않으려는지. 하기야 그분은 나 역시 자기 같은 상황이 되어도 절대 엄마를 요양원에 보내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다. 나는 그 반대를 결심하고 장담하고 있음에도.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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