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에 해당되는 글 36건

  1. 2010.05.12 구김살 7
  2. 2010.04.18 소원을 말해봐 5
  3. 2010.04.09 씁쓸 7
  4. 2010.03.31 나에게 주는 선물 23
  5. 2010.03.28 8
  6. 2010.03.22 생각대로 되지 않아 12
  7. 2010.03.07 노년의 생일 19
  8. 2010.02.26 관계. 실망. 단계별 증상
  9. 2010.02.19 재개발 8
  10. 2009.10.15 홍옥이 나왔다 19

구김살

삶꾸러미 2010. 5. 12. 16:53

천진난만한 아이들에겐 정말로 구김살 없는 표정과 태도를 온전히 실감할 수 있지만, 어른이 되고 난 뒤에도 구김살이 없기란 참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다들 훌륭한 가면을 쓰고 살기 때문에 언뜻 보아서는 물론이고 꽤 가까이서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구김살 여부는 잘 알 수 없다. 성격에 따라서는 과거의 구김살도 다리미로 완벽하게 펴 산뜻하고 매끄럽게 살아가는 이도 있으니, 구김살 없는 어른이 드물다는 나의 전제부터 틀렸다고 누가 반박한다면 싸울 생각은 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생각은 변함없다. 이 팍팍한 세상에서 구김살 없이 성장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누구나 갖고 있는 구김살을 어떻게 스스로 잘 파악하고 관리하고 펴는 노력을 펼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구김살의 사전적인 뜻, "(주로 '없다'는 부정의 표현과 함께 쓰여) 표정이나 성격에 서려 있는 그늘지고 뒤틀린 모습"을 살펴보노라면 더욱 의미심장해진다. 심리학엔 완전 문외한이지만 어쩐지 심리학적으로 접근해야할 문제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심리학을 공부한 친구에게 주워들은 풍월로는 확실히 그렇다. 심리치료를 공부한 뒤 개인병원에서 마음을 다친 아이들과 자폐아동 치료를 돕던 친구는 성당 봉사활동으로 기도모임에서 어른들의 다친 마음 치유를 이끌다가 결국엔 그 일을 본업으로 삼게 되었다.

독실한 신앙과 기도로도 어쩌지 못하는 마음의 구김살, 영혼의 상처가 얼마나 지독한지 친구의 얘기를 들어보면 덩달아 가슴이 아프다. 그 친구만 해도 그렇다. 친구는 어려서부터 소금과 짠맛을 즐겼다. 고1때였던가, 가정 시간에 자기는 토마토는 물론이고 수박도 소금에 찍어먹는다는 사실을 밝혀 모두를 놀라게 했을 정도였다. 얼마 전까지도 고깃집에 가면 소금을 미리 두어접시는 더 달라고 해 옆에 끼고서 찍어먹었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소금에 길들여진 체질이라 건강에 이상이 없다고 자신했다. 우린 평생 그렇게 먹어왔으니 그럴법도 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리투아니아였던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곳으로 얼마 전 성지순례를  다녀온 친구는 거기서 만난 신부님에게 뜬금없이 엄마를 용서하라는 말을 들었단다. 엄마를 용서하는 마음을 갖지 않으면 아무리 소금을 집어삼켜도 마음의 구멍을 채울 수가 없다고. (통역까지 필요했던 외국 신부님이 첫눈에 친구의 소금 취향을 어찌 알았을지 그건 미스터리다. -_-;;)

심리학적인 분석의 결과라고 해야할지 영성의 힘으로 파악한 문제의 핵심이라고 해야할지 나로선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친구의 문제는 엄마 뱃속에 있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친구의 어머니는 둘째를 낳고 싶지 않아했던 터라 차마 직접적인 행동엔 옮기지 못했지만 임신 기간 내내 후회를 하며 아이가 어떻게든 잘못되기를 바랐다. 결국 친구는 칠삭동이로 태어나 인큐베이터에서 생사의 고비를 넘기며 남은 기간을 채워야 했는데, 늦둥이 막내딸임에도 넘치는 사랑보다는 터울이 많은 오빠에 비해 늘 차별을 받으며 자랐다. 어려서부터 "안 낳으려다가 어쩔 수 없이 낳은 자식이라 그런지 애가 이래저래 좀 처진다"는 말을 친구는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야 했다. 그런데도 친구는 나이 들어서 낳은 딸을 키우기 힘들었을 엄마를 이해하려 노력하며 약간 불만을 품었을 뿐 내면 깊이 엄마에 대한 미움과 한이 자리잡고 있을 줄은 몰랐단다. 그리고 그 증오심이 엉뚱하게 소금을 탐닉하는 것으로 표현됐을 줄은 더더욱 몰랐을 테고. 건강검진 결과로도 친구는 '전혀' 소금 체질이 아니었음이 드러났고, 지나친 나트륨 섭취 때문에 몸에 이상이 생길 정도였다. 그토록 오랜 세월 남들의 다친 마음을 들여다보면서도 본인의 마음을 파악하는 데는 소홀했던 친구는 자기 문제가 뭔지 알고 난 뒤 정말로 엄마에 대한 해묵은 감정을 다스려 용서하려고 노력했고, 여전히 남들보다는 짜게 먹는 편이지만 예전만큼 소금에 탐닉하진 않게 되었다.

친구의 도움으로 꽁꽁 감추어져 있던 오래된 내면의 문제를 찾아내 마음의 구김살을 펴려고 노력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하나같이 놀랍다. 그들에게 상처를 남긴 장본인이 대부분 가족이나 최측근이기 때문이다. 부러울 것 하나 없어 보이는 부와 행복을 누리며 자식농사마저 성공해 화목한 가정을 꾸려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였던 어느 아주머니는 자신에게 아무런 문제도 없으며 다만 무뚝뚝한 남편이 좀 불만이라고 생각했지만, 심리치료의 단계를 거슬러 올라가보니 모성과 애착의 결핍이 원인이었고 사춘기 이후 50대가 되도록 "엄마!"라고 불러본 적이 없을 정도로 모녀간의 골이 깊었단다. 치료과정에서도 '엄마'라는 말을 차마 입밖에 내지 못할 만큼.

모성이나 부성의 부재 자체가 문제인 경우도 있고, 너무 잘난 형제에 치여 마음을 다쳤거나 둘도 없는 친구에게 배신을 당한 상처로 알게 모르게 마음앓이를 한 이들의 사연을 가끔 친구에게 전해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주변 사람들을 새삼스러운 이해(또는 편견)의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다. 나의 짐작이 전적으로 맞다고 주장할 순 없겠으나, 이러저러한 상처 때문에 이런저런 성격이 생겨났을 수도 있겠구나 하고 빈약한 이론과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식이다. 구김살이 까칠함으로 발현된 것이 분명한 나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찾아보게 됨은 물론이다. 심지어 엄마 없이 자란 아이들이 모두 문제아가 되는 건 아니지만, 살인 같은 극단적인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의 개인사를 추적해보면 반드시 모성의 결핍이 두드러진다든가 하는 이론에 귀가 솔깃해지도 한다.

친구가 전하는 치료 사례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어린 시절에 겪은 마음의 상처로 평생 고통을 겪는 사람들은 사실 주변에 널렸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엄마가 재혼하는 바람에 할머니 손에 자란 남매는 사춘기 때부터 성 다른 형제들과 다시 엄마 슬하에서 살았지만, 엄마에게 한번 버림 받았던 충격으로 한 사람은 우울증, 한 사람은 알코올의존증에 시달린다. 인생의 멘토라고 여길 만큼 각별하게 따랐던 여교사에게 고교시절 내내 성추행을 당했던 여학생은 커서 정신병을 얻었다. 여러 형제 가운데 가장 사랑받는 막내딸이면서도 잘난 형제들과 비교되어 늘 위축되었던 아이는 서른살을 넘기면서 조울증에 걸리고 말았다. 낳아준 엄마의 얼굴도 모른 채 할머니 손에서 자라며 친부의 결혼과 이혼, 재혼을 지켜본 어떤 딸은 가족들에게도 거짓말을 일삼다 사기꾼처럼 엄청난 금전사고를 일으켜 친적들에게조차 의절당하고 말았다. 너무 극단적인 예를 나열하긴 했지만, 아무리 사소한 상처도 본인에게는 저도모르게 큰 충격과 후유증을 남길 수 있음을 생각할 때 겉모습만으로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누가 어떤 일을 얼만큼 심한 강도로 겪었는지 속속들이 알 수도 없는 일이고.

너무 끔찍해서 잘 안보는 프로그램이긴 하지만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같은 방송만 봐도 문제 있는 아이의 원인 제공자는 늘 부모와 환경이다. 그래서 그런 환경과 부모의 태도를 한두 달만 바꿔 놓아도 아이는 확연히 달라진다. 과연 그 아이들의 마음에 새겨진 구김살도 깨끗하게 펴지거나 사라질지 아직도 의문이 들지만, 중년 이후라도 자기 문제를 파악하고 애써 노력을 기울이면 다친 마음을 어느 정도 치유하는 게 가능하더라는 사례를 보면 희망을 품고 싶어진다. 요즘 열심히 챙겨보는 드라마 <신데렐라 언니>를 보아도 하나같이 구김살 많은 인간들의 각축장인데, 최소한 그들은 자기 상처가 무엇인지 알고 그걸 인정하기도 하고 회피하는 모습을 보여 허구의 캐릭터인데도 안쓰럽고 정이 간다. 물론 내 주변엔 내면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고 인정해도 상처가 너무 깊어 도저히 펴지 못해 허덕이는 이들이 존재하지만, 드라마 속 세상에서만은 좀 덜 현실적으로 그려지더라도 그들이 주름살을 차츰 펼쳐가길 비는 중이다. 아마 나도 열심히 구김살을 다림질하는 중이기 때문일 거다.
Posted by 입때
,

소원을 말해봐

투덜일기 2010. 4. 18. 02:53

주말에 떼로 다니러온 조카네 식구들과 다 같이 저녁을 먹으러 음식점엘 갔는데 막 자리를 잡고 앉으려는 찰나, 뒷차로 온 조카들이 뛰어와서 내게 말했다.
"고모, 소원을 말해봐. 우리가 들어줄게."
"진짜? 아무 소원이나 말해도 돼?"
"응. 아무거나 얼른 소원을 말해봐. 우리가 다 들어줄게."
순간적으로 나의 뇌리엔 여러가지 소원이 스치고 지나갔다. 일본 절에서도 빌었던 부실한 왕비마마의 건강을 기원할까, 부질없는 인세 대박을 빌어볼까, 여전히 가시지 않은 꿈의 차 미니쿠퍼를 빌어볼까, 한옥집서 사는 로망을 빌어볼까...
"고모, 빨리!"
"알았어. 요번에 나오는 책 대박 나서 미니 쿠퍼 사는 게 고모 소원이야."
그러자 두 녀석은 동시에 내쪽으로 귀를 내밀며 말했다.
"우리가 들어준다고 했지? 잘 들었어. 고모 소원. 킥킥킥."
그러고 나서 녀석들은 소녀시대의 <소원을 말해봐> 후렴구를 흥얼거리며 소녀들의 손짓 안무를 흉내냈다.

대체 나는 녀석들에게 뭘 더 바랐던 것일까. 소원을 들어준다는 게 말 그대로 귀 기울여 들어주는 것이라는 사실에 바보처럼 마음에 구멍이 뻥 뚤리는 것 같은 실망이 스쳤다. 고얀 녀석들. 그래도 고모 놀려먹는 걸 신나하면서 즐거이 내 소원을 귀 기울여 들어줄 조카들이 있다는 건 축복이겠지.
Posted by 입때
,

씁쓸

책보따리 2010. 4. 9. 17:07

어제 간만에 멀리 사는 친구들을 만나느라 강남 교보엘 갔었다. 그곳이 나름 중간 지점이라서 거의 지정 모임장소처럼 되고보니, 그런 날엔 서점 볼일도 같이 챙기는 편이다. 찾아볼 책도 좀 뒤지고 요새 책시장은 어떤가도 좀 살펴보려니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나 법정스님의 책들이었다. 책의 가치여부를 떠나서 명사의 죽음은 늘 (나쁘게 말해) 책 장사의 방편으로 이용되어 왔지만, 그야  무엇이든 떠나보내고 난 뒤에나 새삼 돌이켜보는 인간의 어리석은 경향을 반영한 상술이니 무조건 나무랄 수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법정스님의 책들은 절판 유언 때문에 더욱 기이한 소유욕과 과열 시장을 만들어냈고 이래저래 계속 말이 많았고, 알게 모르게 그 여파가 나 같은 존재한테도 영향을 미치는 듯 해 씁쓸하다.

각 출판사에서 법정스님의 절판 유지를 받들어 올해까지만 책을 판매하기로 협의했다는 뉴스를 들었고, 올 연말까지면 출판사에서도 팔아먹을 만큼 팔아먹은 뒤고 건망증 심한 이 나라 독자들의 기이한 독서열풍 또는 소유열풍도 사라지겠군 싶었다. <무소유> 초판본이 중고책 시장에서 수십만원에 거래되는 지경이라니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면서, 또 <단군이대 최대 불황>이라는 출판계에 그나마도 책이 움직이는 빌미를 제공한 스님한테 책으로 밥빌어먹고 사는 사람들 모두 고마워해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 정도였다. 강남 교보에도 벽에 따로 마련된 베스트셀러 진열대에는 법정스님의 책이 몇권이나 꽂혀 있었으며, 친절하게도 스님의 책만 모아 여러 군데 자리잡고 있는 특별 책 판매대에는 <무소유>가 4월 몇일 이후에 입고될 예정이며 선주문을 받는다는 팻말이 걸려 있었다. 출판사도 매우 다양했다.

어제 만난 친구 하나도 번역을 하고 있으니 수다 중에 당연히 출판계 이야기가 나왔고 자연스레 법정스님의 책 이야기로 이어졌다. 그 친구도 나도 작년말부터 나온다 나온다 말만 앞세운 번역서의 출간이 계속 미뤄지고 있는 이유가 법정 스님 책의 열풍 때문이라는데 동의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이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는 법정 관련 출판사들이 저마다 대량으로 책을 제작하고 있는 터라 상당히 많은 인쇄소며 제본소에 다른 신간이 끼어들 여유가 별로 없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불황이라 신간을 내도 팔릴지 말지 모르는 와중이니 일단 잘 팔릴 책, 50% 할인해서 물량공세로 밀어낼 책, 홈쇼핑에서 전집으로 판매대박을 낸 책들 먼저 인쇄에 돌입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물론 그러다가 결국 출판시장이 망하거나 말거나. -_-;

돌아가신 분에 대해서 이런 저런 뒷말로 새삼 욕되게 하는 건 예의가 아닌 줄 알지만, <말빚>을 청산하고 싶다는 위대한 유지에 딴죽을 걸 입장도 아니지만, 삐딱한 심성으로 계속 지켜보자니 법정스님의 절판 유언은 결과적으로 한국 출판계 최대의 마케팅 전략으로 비쳐진다. 정말로 세상을 떠남과 동시에 그간 출간한 책을 절판하여 말빚을 청산할 작심을 하고 계셨다면, 스님은 왜 입적 직전까지 새책의 서문을 구술해서라도 출간되도록 밀어주셨으며, 최측근 출판권력의 손에 모든 저작권과 사업 이권을 위탁하고 있었을까? 그러고선 대뜸 유언에는 절판하라 말씀하신 저의는 무엇일까?

스님의 유명세와 출판계의 욕심에 밀려 몇달간 골빠지게 작업한 책의 빛 볼 날이 자꾸만 미뤄지는 바람에 속좁게 구시렁거리고 있는 소인배의 푸념이라 욕을 먹어도 할 수 없다. 잘 알지도 못하는 내 눈에도 분명 지금 돌아가고 있는 책세상 형국이 비정상이란 것만은 확실하니까. 어쨌거나 법정스님 책을 내는 유명 출판사들이 어서 올해 말까지 팔아먹을 책들을 창고에 그득그득 쌓아놓아, 이제 그만 충무로와 을지로에 있는 인쇄소와 제본소가 다른 책을 찍을 여유를 되찾길 빌 뿐이다. 작년에 내 이름을 달고 나올 예정이라던 몇권의 책들이 올해를 몇달이나 넘기고도 아직 코빼기를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지금 작업하고 있는 책들도 예년에 비해 원고 채근이 덜한 게 죄다 법정스님 책 때문이라는 건 순억지겠지만(대체 해마다 <단군 이래 최대 불황>이라는 출판계 사정이 좋아질 날은 있는 걸까?), 브라질 나비의 날갯짓이 미국땅에 허리케인을 불러온다는 이론이 순 헛소리만은 아니라는 데 자꾸 심증이 간다. 나의 긴 한숨따위는 이런 좁은 공간에서 푸념으로 맴돌다 사라질 뿐이겠지만.
Posted by 입때
,

나에게 주는 선물

놀잇감 2010. 3. 31. 14:57

우유부단한 것도 가끔은 장점으로 작용하는 터라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지름신에 넘어갈 때면 늘 속으로 중얼거린다. 이건 그동안 잘 살아온 나에게 주는 선물이야, 라고. 게다가 작년부터 변변찮은 수입을 염려하여 퍽 금욕적으로 살 수밖에 없었던 탓에 알게 모르게 욕구불만이 가득 쌓여 더욱 까칠하고 음울한 인간으로 살았던 건지도 모르겠다는 자각을 핑계삼아 최근 마구 질러대고 있다. 발등에 불 떨어지면 더욱 블로그질에 탐닉하는 쌘이처럼 나 역시 바빠서 제대로 즐길 겨를도 없지만 어쨌거나 특히나 정신없는 3월의 마지막날에도 이렇게 틈틈이 블로그질을 하며 자랑까지 나섰다. 가열찬 블로그질은 늘 하기 싫은 일이 더더욱 하기 싫다는 욕망의 표현임에 틀림없다!



Posted by 입때
,

투덜일기 2010. 3. 28. 16:13

우리집 마루 한쪽 벽엔 조카들의 키를 재기 위한 눈금이 그려진 기다란 스티커가 붙어 있다. 정작 제 부모들은 제 자식들 키 크는 추세에 크게 관심이 없는 것 같은데, 볼때마다 쑥쑥 자라는 녀석들의 키를 거의 다달이 표시해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괜스레 뿌듯해하는 걸 보면 난 확실히 '단신'에 대한 컴플렉스가 심한 인간이다. 남자들도 180cm가 안 되면 <루저>라는 발언이 방송에도 나올 만큼 키 작은 걸 심각한 장애취급하는 사회이다보니 어쩌겠나. 부디 조카들은 훤칠하고 우월한 키로 세상을 굽어보며 살면 좋겠는걸.

키가 큰 사람들은 대부분 성장기의 어느 시점에 갑자기 키가 확 자라는 시기를 경험하므로, 큰동생은 중3땐가 1년만에 14센티미터가 자랐다고 하고, 친구 하나는 초등학교 6학년때 너무 갑자기 키가 커서 밤마다 다리가 아파 엉엉 울어야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런 경험들이 죄다 남의 이야기일 뿐이다.  국민학교 입학했을 때 전교에서 제일 작았다는 전설속의 아이는 중학교 때 잠시 중간키 부류에 속하는 기쁨을 누렸을 뿐,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어느 집단에서든 제일 작은 축에 속하는 어른으로 살고 있다. 친구들 중에 나보다 작은 사람은 중학교 때 친구 1명과 고등학교 때 친구 1명 뿐이다. 고등학교 졸업 무렵 나보다 작았던 아이들을 확률적으로만 따져도 좀 더 많은 단신들을 사회에서 맞닥뜨려야할 것 같은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심지어 나는 스무살까지 느릿느릿 조금씩 키가 자라서 이만큼 된 것인데도!

사실 살아가는 데는 키의 크고 작음이 엄청난 변수로 작용하는 것 같지 않은데도 키가 작아서 좋은 점을 굳이 찾자면 내가 좋아하는 아이들이랑 쉽게 친해질 수 있다는 것 정도이고(아이들은 자기들보다 몸집이 지나치게 큰 어른들에겐 본능적으로 두려움과 거부감을 느낀다나 뭐라나;;) 그 외엔 그저 단신이라는 게 단지 외형적인 불만으로 남는 것 같다. 바지는 살 때마다 길이를 줄여 고쳐 입어야 하고, 굽 높은 신발에 길이를 맞춰 자른 바지는 단화를 신을 때 질질 끌려 못 입는다는 점(예외는 스키니진인데 워낙 유행이긴 하지만 다리가 더욱 짧아보이는 것 같아서 별로 마음에 들진 않는다), 무늬가 큼직큼직한 옷을 입으면 우스꽝스러워 보인다는 점, 무슨 옷을 입든 조금이라도 키가 커보이고 싶은 욕망에서 평생 벗어날 수 없다는 점... ㅠ.ㅠ

정말이지 요즘 아이들의 발육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좋아져, 우리집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있는 중학교 아이들만 봐도 하나같이 늘씬늘씬 키가 크다. 하기야 그 옛날 20여년 전에 내가 교생실습 나갔을 때도 내가 맡은 여학생반에서 나보다 작은 애들은 1번과 2번 딱 둘 뿐인 듯했다. 자존심 상해서 앞번호 아이들과 정확하게 키를 재보지는 않았지만 눈높이로 대강 어림짐작했을 때 그랬다는 얘기다. 그러니깐 이제 6학년이 된 정민이가 내 키를 따라잡을 시기가 되었다는 건 예상하고 있었다. 수년째 다달이 키를 표시해두면서 그 날이 언제일지 두려워 하고 있었을 뿐.

사실 동생들이 다 키가 큰 편이고 막내올케 역시나 몹시 큰 편, 큰올케도 심히 작은 편은 아니라 조카들 역시 또래들보다는 그간 대체로 키가 컸다. 유독 정민이만 저학년때 작은 편에 속한다고 하더니 작년부터 부쩍부쩍 자라 1년에 거의 10센티미터를 컸고 6학년에 올라가서는 여학생들 중에서 세번째로 크다고 자랑을 했다. 애 키우는 엄마들 못지않게 육아상식이 많은 내가 알기로는 ^^;; 아이들 키가 1년에 평균 6cm 정도 자라는 게 정상 속도란다. 두달에 1cm씩 큰다는 얘긴데, 놀랍게도 최근 우리 조카들은 만날 때마다 평균 이상으로 키가 쑥쑥 자라는 게 눈에 보이는 듯하고 그 결과가 실제로 우리집 벽에 고스란히 눈금으로 남아있다.

초등학교 1학년때 이미 3학년으로 보일 만큼 늘씬한 키를 자랑하던 준우도 반에서 제일 크다나 두번째로 크대고, 요번에 초등학교 입학한 지환이도 또래보다 큰 편이고, 심지어 이제 겨우 다섯살이 된 지우도 발육이 월등하다. 우리집에 올 때마다 조카들을 눈금 벽에 세워놓고 키를 표시하면, 녀석들은 꼭 나와 다시 제 키를 비교한다. "전에는 고모 어깨에 닿았는데 이제는 턱까지 올라갔다!" 이러면서 기뻐하고...  그러면 나는 과연 다시 온 집안에서 제일 키 작은 사람으로 전락할 날이 얼마나 남았는지 머릿속으로 셈하며 비감에 젖는 한편 늘씬한 조카들이 마냥 자랑스럽다.

집안 서열에서는 왕비마마 다음으로 내가 2위지만, 지난 왕비마마 생신날 이후로 나의 키 서열은 정민이와 동률 6위로 떨어지고 말았다. 정민이가 연초에 150cm를 넘어서면서 내 키를 따라잡을 날이 머지않았음을 알고는 있었지만 석달도 가기 전에 나와 똑같아질 줄은 예상밖이었던지 그날 나는 약간 충격을 받고 말았다. 정민이는 신났다고 눈금 표시 옆 벽에 날짜와 함께 <고모와 정민 키가 같아짐>이라고 적고는 구름표시를 해두기까지. 그러더니 얼마전까지도 고모를 올려다봤는데 이젠 굽이 꽤 있는 운동화를 신으면 고모가 내려다보인다면서 자기도 잘 적응이 안된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으휴. 

그나마 정민이는 6학년때 나와 키가 같아졌지만, 조카들 가운데 발육이 가장 훌륭한 준우는 이 추세라면 5학년도 돼지 않아 나를 따라잡을 확률이 높다. ㅠ.ㅠ 어린 녀석들이 발은 또 얼마나 빨리 자라는지 6학년짜리 발이 나보다 커진건 벌써 옛날이고 이젠 2학년짜리 신발도 내가 물려신게 생겼다. 자전거 열풍 이후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인라인 스케이트를 둘째조카한테 넘기긴 했지만 지금도 딱 맞으니 아마 올해 안에 작아졌다고 다시 반납할 게 확실하다. 조카들한테 운동화 물려받아 신는다는 이모나 고모의 이야기를 더러 듣기는 했지만 내가 막상 그런 입장이 되고보니 왜 이리 민망한지, 조카들의 우월한 성장이 뿌듯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온다.

160cm에 가까운 키라 옛날 사람치고 큰 편이었다는 왕비마마는 척추골절과 척추협착증 수술을 연이어 겪으며 자세도 굽었고 실제로 키도 많이 작아져 지난번 정기검진때는 허리를 잘 펴지 못해 무려 154cm로 기록되기도 했다. 요번에 여권을 다시 만들며 왕비마마는 그래도 꿋꿋하게 159cm라고 박박 우기셨지만 요즘 나란히 다녀보면 확실히 엄마 눈높이가 나와 비슷하다. 과거엔 드물게 엄마보다 키가 작은 딸로 살며 자존심이 좀 상했었는데, 노년의 엄마 키가 쪼그라든 걸 보니 마음이 더욱 좋지 않다. 젊어서도 작은 나는 나중에 늙으면 얼마나 더 작아질까 생각하면 더 서글퍼지기도 하고. 평균 이상인 사람들은 평생 대수롭지 않게 살아갈 키에 평생 연연해하는 나의 컴플렉스, 이제 좀 자유로워지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된다. 

Posted by 입때
,

수두룩한 나의 단점 가운데서 혹자는 나더러 생각이 너무 많다고 지적 한다. 나도 잘 알고 싫어하는 단점이다. 소심함, 우유부단함과 함께 세트 메뉴로 몰려다니며 종종 내 어깨와 머리를 짓누르니까. 심지어는 앞으로 해야할 일, 일어나지 않을 일도 여러 경우의 수대로 홀로 상상해보고 추측하고 짐작하면서 미리 염려하는 경우도 있다. 어쩔 땐 내가 이러이런 말을 하면 상대가 저러저러한 말로 대꾸할 테고 또 내가 이러저러한 얘기를 하면 저러이러한 반응이 나올 것을 예상하다가 버럭, 있지도 않은 사건에 꽁해져 마음에 응어리를 맺거나 홀로 이유없이 화를 내고 앉았기도 한다. 하지만 살다보면 생각대로 되지 않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밀린 일이 생각대로 진척되지 않는 건 너무도 뻔한 게으름 때문이라고 쳐도, 하루 일정 계획해 놓은 게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무너지는 일은 다반사이며, 한 이틀 푹 자고나면 가라앉을 줄 알았던 입천장도 아직 너덜거리고, 요가 넉달만에 열세살 조카는 키가 5센티미터나 크고 체중도 줄어 허리선이 생겨났는데 중년의 고모는 체중감량은커녕 늘어난 유연성 따위도 전혀 모르겠고, 일주일만에 아기발처럼 변한다고 선전하며 각질이 허물 벗는 뱀 껍질처럼 벗겨지는 모습을 보여주던 마법의 묘약 같은 각질제거제는 나한테만 효과가 나타나질 않으며, 4월이 코앞인데 아직 날씨는 겨울이고, 진심은 언제고 반드시 통할 거라 믿었던 오랜 관계에 금이 가거나 뒤통수를 맞기도 한다. 물론 생각대로 되지 않아 제일 못마땅하고 속상한 건, 마음껏 자유를 누리며 일년에 한번씩은 제법 긴 여행으로 머리를 식힐 수 있는 여유와 여건이 허락될 것이라 <생각>했던 내 중년의 삶이다. 

소소한 것부터 아주 큰 것까지 생각대로 되는 것보다는 되지 않는 것이 더 많은 게 인생인 것도 같다. 그러니까 쓸데없이 만날 생각만 길게 앞세우지도 말 것이며, 생각대로 되지 않아 안타깝고 억울하고 속상하고 맘 상해 괴로움에 연연하는 대신 생각대로 된 것에 대한 기쁨으로 살아가야 할 터인데 인간의 욕심으론 그게 잘 안된다. 성인이나 고승의 반열에 오를 만큼 대범하게 연연해 하지 않고 매사에 기꺼이 욕심을 놓아가며 사는 걸 바라는 것도 아니고, 원래부터 크게 성공하겠다거나 억만장자가 되겠다는 탐욕 따위를 품지도 않았으니 생각을 조금만 덜하고 탐심도 조금 버리면 되련만...

3월도 끝자락을 향해가는 22일에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날씨처럼, 앞으론 내 생각대로 되는 것보다 황당하고 기막힐 정도로 뒤통수를 치는 일이 훨씬 더 많을 것이라 예상하며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멍청한 나는 또 그런 예상마저 미리 생각해두겠노라며 미련을 떨 것이 뻔하지만. 
Posted by 입때
,

노년의 생일

투덜일기 2010. 3. 7. 18:13
떠들썩한 환갑잔치를 내가 처음 목격한 것은 스무살 무렵이었다. 당시 수원에 살던 같은 과 친구 하나가 어렵사리 말문을 열더니 난데없이 주말에 시간 되면 밥을 먹으러 오라며 수원의 어느 갈비집을 알려주었다. 터울이 많은 손위 형제들을 둔 막내였던 친구는 부모님이 옛날 분들이라 환갑엔 꼭 동네잔치를 한다고 했다. 내 조부모님의 경우 환갑은 물론이고 칠순도 조촐하게 집에서 가족모임으로 치렀던 터라, 환갑잔치의 실체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했던 나는 흔쾌히 그러마고 약속했는데, 그날 목도한 사건이 워낙 인상 깊었던 모양으로 같이 간 친구와 내가 축의금 봉투를 가져갔는지 그냥 입만 가져갔던 건지도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무슨무슨 가든이었던 수원의 갈비집엔 큼직한 방마다 온통 잔치음식들이 차려져 있고 한 가운데 불판에선 갈비가 익어갔으며 마당으로 연결된 스피커에선 계속 흥겨운 풍악이 흘러나왔다. 결혼한 큰오빠와 큰언니가 낳은 자식들이 친구와 또래일 정도였으므로 잔치상 앞에 앉으신 부모님께 술잔을 올리며 차례로 절을 하던 자손들의 수가 꽤나 많았던 기억이 나고, 식사 후 여흥이 시작되자 춤과 노래가 쉴새없이 이어졌다. 잔치 주인공의 자손들 뿐만 아니라 자손의 친구들도 다들 앞에 나가 술잔을 올리고 축하인사를 드리는 게 예의인 모양이었지만, 숫기 없는 우리의 난감함을 알아차린 친구는 싫으면 굳이 안해도 된다고 말해주어 어찌나 고마웠던지 모른다.

친구 부모님의 환갑이나 칠순에 초대받았던 경험은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는데, 말로만 듣던 동네 잔치를 처음 경험한 때문인지 나는 그날 온종일 모든 것이 낯설고 신기하고 순간순간 불편하면서 재미있기도 하고 막판엔 지겹고 곤혹스러웠다. 노래를 잘하든 못하든 사회자가 지목하면 무조건 나와서 마이크를 잡고 목청껏 고함을 질러야하는 상황도 그렇고 떼로 몰려나와 춤을 추는 모양새도 처음엔 흥겹더니 술판이 무르익으면서는 취객들 때문에 눈쌀이 찌푸려지는 장면이 자주 연출되었다. 수시로 잔치판에 불려다니느라 우릴 챙겨줄 시간이 별로 없었던 친구는 그제야 지루해하는 우리 태도를 눈치 챘는지, 먼저 가도 된다며 우릴 배웅했다.

잔치집을 나오며 나는 당시에 아직 멀게 느껴지는 부모님의 환갑잔치를 염려했던 것 같다. 혹시라도 우리 부모님이 그렇게 떠들썩하고 요란한 잔치를 원하면 어쩌나 싶었다. 무엇보다도 구경꾼처럼 모여든 하객들 앞에서 한복을 떨쳐입은 채 무대처럼 마련된 잔칫상 앞에 나아가 술잔과 절을 올린 뒤 나중엔 큰딸이랍시고 노래까지 한자락 불러야 하는 상황을 내 숫기로는 못견딜 듯했다. 세월이 흘러 부모님의 환갑잔치를 고민해야하는 시기가 닥쳤다. 다행히도 우리 부모님은 요란한 걸 싫어하시는 분들이었고, 환갑은 청춘이라며 다들 잔치대신 여행을 떠나는 세태도 나를 도왔다. 하지만 30년 넘게 다닌 직장의 정년퇴직과 맞물린 아버지의 환갑을 그냥 멀뚱히 넘길 순 없었다. 평소 생신에도 몇몇 친지들이 모여 <밥>은 먹어왔으니, 날 잡아서 조촐하게 <밥은 먹어야 한다>는 것이 어르신들의 의견이었다. 외할머니는 우리 아버지가 아무리 마다해도 환갑 기념이라며 맏사위를 위해 고운 한복까지 맞춰 보내셨다.  

환갑 안한다는데 왜 귀찮게 구느냐며 화를 내다시피 했던 아버지는 결국 친가, 처가 가족들이 모여 <간단히 밥을 먹는> 그 자리에 장모님 소원대로 엄마와 나란히 한복을 입고 참석하셨다. 음식점에 미리 부탁해서, 그간 은밀하게 아버지의 옛날 앨범을 뒤져 어릴 때부터 최근까지 사진을 모아 삼남매와 올케들의 영상편지까지 담은 영상물을 틀었던 그날 우리 삼남매와 다른 친척들은 다들 뿌듯해했지만 정작 주인공인 아버지는 몹시 민망해하셨던 것 같다. 바로 다음해였던 엄마의 환갑은 연달아 민폐를 끼칠 수 없다는 엄마의 완고한 고집으로 부부동반 여행으로 대체되었고, 또 10년은 안심해도 좋을 듯했다. 

그런데 오래 걸릴 것만 같던 10년이 어느새 흘러 엄마의 칠순생신을 고민해야 하는 때가 도래했다. 친척분들 모두 환갑은 건너뛰는 분위기여도 칠순에는 다들 모여 맛있는 밥을 먹어왔고, 가뜩이나 홀로 남은 엄마의 칠순 생신은 그냥 넘겨선 안된다는 것이 역시나 집안 어르신들의 의견이었다. "늬 아버지를 봐라. 그렇게 빨리 갈 줄 아무도 몰랐지만 그때 억지로라도 늬 아버지 환갑 안 챙겼으면 어쩔 뻔했니? 니들이 두고두고 마음에 한이 됐을 거다."

아버지 환갑 때도 음식점을 알아보고 친척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해 초청하는 과정을 내가 주동한 전적이 있었으며, 그땐 부모님 몰래 큰동생이 영상물 만드느라고 사진 고르고 녹화하고 제법 법석을 떨었는데도 즐겁기만 하더니 이번엔 왜 모든 과정이 온전히 스트레스로만 여겨지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이번에도 주인공이신 왕비마마가 민망하다며 모임 같은 거 절대 하고 싶지 않다고 버티고 계시긴 하다. 하지만 "남편 앞서 보낸 여자가 무슨 염치로 생일잔치를 하느냐"는 엄마의 자학성 핑계는 용납되기 어려운 발언이다. 친척 어르신들은 엄마가 혼자 남았기 때문에 더더욱 칠순을 그냥 넘기면 안된다는데!

잔치가 아니라 그냥 밥 한끼 먹는 것 뿐이라며 엄마를 계속 달래는 한 편, 두 동생 부부와 의논하여 마땅한 장소를 물색하고 음식을 정하고 참석인원을 확인해 연락을 취하며, 나도 모르게 어린 시절의 치기 어린 소망이 다시 떠올랐다. 어쭙잖게 니체를 읽고 전혜린을 읽던 중고등학생 시절 나는 왠지 모르게 친구들에게 "딱 예순살까지만 살고 죽겠다"고 장담하고 다녔었다. 생존해 계셨던 할머니 할아버지의 삶과는 상관없이, 단지 나의 노년이 너무도 끔찍하게만 생각됐던 것 같다. 조부모님이나 부모님은 최대한 오래 사시는 게 좋겠지만, 나는 홀로 씩씩하게 딱 예순살 까지만 살다가 깨끗하게 죽겠노라고 말하면 친구들은 "그래 어디 두고보자"며 나를 흘겨볼 뿐이었다. 그런데 요번에 엄마 칠순을 준비하며 문득 세월이 흘러 나중에 누가 내 칠순 때문에 고민하고 스트레스 받는 것도 싫고 칠순이라며 주인공으로 떠밀리는 게 싫어서라도 차라리 <일흔살 되기 전에 죽어야겠다>는 생각을 저도모르게 하고 앉았더라는 뜻이다.

예순살까지 살겠다던 어린 시절의 나는 분명 환갑 잔치 따위는 염두에 둔 적이 없었고 다만 그 이후 노년의 삶이 막연히 구질구질할 것이라 상상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칠순 생일의 부담으로 또 다시 내 수명을 재단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되살아나다니. 나란 인간은 도대체 어디가 잘못된 것일까.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아도 엄마의 칠순을 <가족모임> 행사로 치르는 게 맞는 것 같기는 하다. 밥먹기 행사 대신 칠순에도 가족여행을 떠나는 집이 있다지만, 울 엄마의 건강으로 보나 시기적으로 보나 그건 실행되기 어려운 대안이다. 어차피 매년 우리끼리 생신밥은 먹어왔으니 그걸 좀 확대시킨 것뿐이라고 여기면 될 일이다. 문제는 부모님 형제가 많아놔서 그 자손들까지 모이면 4, 50명이나 된다는 점이다. 삼남매가 나누어 분담한다고는 해도, 규모가 그리 만만치는 않다. 분위기며 음식 맛, 입을 옷까지 시시콜콜 미리 걱정하는 나 같은 소심증 환자에게는 더더욱!

사실 욕을 좀 먹을 각오만 한다면, 친척 어르신들이 아무리 들쑤셔도 엄마 본인의 뜻대로 칠순같은 거 안 챙긴다고 통보한 뒤 시치미 뚝 떼고 그냥 조용히 지나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엄마 건강이 좋지 않아 그렇게 되었다는 쓸만한 핑계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결국 남들(친척도 남이라고 치면) 눈 의식해서 자식으로서 속물스럽게 생색을 내려는 태도 때문이 아닌가 싶다. 옛날부터 환갑이나 칠순 때 잔치를 여는 목적은 장수를 축하하기 위함도 있지만 자손들이 그 정도 거나하게 잔치를 해줄 수 있을 만큼 번창했음을 자랑하려는 노인들의 허세에서 비롯된 게 아니던가. 해서 일부 노인들은 자식들의 능력이 되든 말든, 잔치 때문에 빚을 지든 말든 남부끄럽지 않게 소리꾼들까지 불러다가 왁자지껄 노는 잔치를 강요한다던데, 울 엄마가 그런 부류의 노인이 아니라는 사실은 깊이 감사할 일이지만 그냥 조용히 밥 한끼 먹는 것뿐이라고 여기래도 난감해하며 지레 생병을 앓아 속을 썩이는 상황도 녹록치가 않다.

과연 울 엄마의 진짜 속마음은 무얼까. 말로는 모임 안 했으면 좋겠다지만 내심 뿌듯해하며 잔칫날을 기다리고 계시는 건 아닐까. 아니면 내 의지에 반하는 칠순잔치의 억지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면 차라리 일흔살 되기 전에 죽어버리겠노라는 생각이 들만큼 회의를 느낀 내 마음처럼 엄마도 정말로 싫은 걸까. 그렇게 싫다는데 연회 예약을 취소하는 대신 엄마에게 그냥 못 이기는 척 따라오라고 말하는 나의 태도는 과연 옳은 것일까. 홧김에 다 확 취소해버리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도 몇번씩 드는데, 정말로 그러면 울 엄만 잘했다고 칭찬을 해줄까.

어쨌거나 이젠 누구를 위한 것인지도 모르겠고 한달 넘게 나의 스트레스 지수를 극도로 높인 왕비마마의 칠순 모임이 겨우 엿새 뒤로 다가왔다. 토요일이 후딱 지나가면 좋겠다.
Posted by 입때
,

인간관계에서 실망하거나 실패를 느낄 때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제각각일 것이다. 주변에서 맺고 끊기를 잘 못해서 쓸데없이 방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이라는 오명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더더욱 당연하겠지만 여전히 가끔씩 인간에게 깊은 상처를 입고 전전긍긍하는 일이 있다. 잘잘못을 따지기 이전에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관계에 어떤 이유로든 금이 가는 상황은 그리 쉽게 넘길 수가 없다. 서로 안보면 그만인 관계에서도 그간의 역사와 추억이 남긴 흔적 때문에 괜한 배신감에 허덕이게 되니, 아예 안 보고 살 수는 없는 관계에서라면 그 뒷감당이 더욱 어려워진다.

살아보니 내가 최선을 다했다고 해서 그 최선이 모든 이들에게 다 좋게 받아들여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선한 의도로 한 행동이 어떤 이들에겐 부담이 될 수도 있으며 상처나 오해를 낳기도 한다는 건 깨달은지 오래다. 그런데 그걸 잘 알면서도 막상 나의 의도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반응을 뜻밖의 상대로부터 맞닥뜨렸을 때, 나는 바보처럼 충격에 사로잡힌다. 세상 누구에게나 착하게 잘 보이고 싶은 욕망 따위는 없는 까칠한 인간임에도 그렇다.

서로 꽤 오래 공을 들인 관계에서 오는 실망에 대한 나의 첫 반응은 대개 자기비하와 자책이다. 다 내 탓이다. 내가 잘못한 거지. 결국엔 내가 죽일년이지. 동기가 선했다고 모든 결과가 용서되는 건 아니잖아. 내가 변해야 해. 선선히 잘못을 인정하고 바꿔나가야 해... 이러면서 제 발등을 찍고 또 찍으며 반성한다. 며칠 해결책을 찾아보겠다고 고민하느라 불면에 시달리는 건 예사다. 그러면서 온갖 과거의 사건들을 재현하고 되짚어보고 기억을 환기한다. 

그러다 며칠이 지나면 두번째 반응기가 시작된다. 버럭 화가 나는 거다. 내가 뭘 또 그렇게 잘못했는데? 내 측근이라면서 잘해보자고 한 행동을 그렇게도 몰라주나? 소통부족으로 인한 오해는 어차피 쌍방과실 아닌가? 이렇게 상대에게 분노가 느껴지기 시작하면, 그간 우정이나 애정의 이름으로 최대한 눈감아주었거나 덮어두었던 상대의 단점과 그간 마음에 안들었던 부분들이 열 배쯤 과장되어 떠오른다. 심지어 장점으로 여겼던 부분까지 눈에 거슬리는 지경에 이른다. 자신을 비하하며 자책하던 부분들은 서서히 흐려져 생각도 나질 않는다. 이성 따위는 원래 없었던 양, 감정의 과잉 속에서 허덕댄다.

세번째 반응은 미움이다. 모든 게 상대방 잘못 같고, 혹시나 운 없이 이 시기에 마주치기라도 하면 그렇게 꼴보기 싫을 수가 없다. 관계의 환멸을 느껴 두번다시 안봐도 되는 인물이라면 이 단계에서 깨끗이 정리돼 나의 인간관계망에서 삭제되므로 더 문제될 게 없다. 돌아보면 왜 그런 소모적인 관계를 이어왔나 한심할 정도라서, 금세 잊는 것도 가능하다. 쓸데없는 인간관계가 하나 더 정리 됐으므로 심지어 기뻐할 수도 있다. 문제는 계속해서 마주쳐야 하는 운명의 인물이거나, 내 생각에 여전히 회복할 가치가 있는 관계로 여겨지는 경우다. 볼 때마다 미움에 휩싸이면서 앞으로 관계를 어떻게 이어갈 것인지 생각하기란 거의 고문이다. 나처럼 성격 더러우면서 마음을 정할 땐 우유부단하고 인간관계에 휘둘리는 사람에겐 더더욱.

마지막 단계는 이성이 슬글슬금 제자리를 잡으며 두 방향으로 나뉘는 것 같다. 회복할 가치가 없는 관계임에도 계속 얼굴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면 마음의 문을 닫고 겉으로는 태연한 척 호의의 가면을 쓰되 최대한 무관심하게 (실제로는 계속 미워하고 경멸하면서) 살아가기로 결정을 하거나, 어찌되었든 다시 이어가야할 관계라면 또 다시 마음 다칠 가능성을 예비하고라도 대화를 시도하여 더 나은 관계를 추구하는 방법. 물론 후자의 시도가 모든 이들에게 통용되는 것도 아니라, 단단한 돌벽 같은 이를 만나 나만 더 만신창이가 되는 수도 있다. 그러면 다시 2단계로 돌아가 벌컥벌컥 화를 내며 증오심에 휩싸이다 나홀로 정리 단계로 맺음하는 수밖에.

맺고 끊기를 잘하는 사람들은 마음을 다치면서 왜 계속 관계를 유지하는지 의문을 품겠지만, 나에겐 어쩌다보니 그런 관계가 더러 있다. 내쪽에선 말끔히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 놀라운 이유로 내 관계망에 들어와 박힌 사람들. 따지고 보면 많은 이들에게 가족은 그런 애증의 관계가 아닌가? 어느 한 쪽이 죽거나 매몰차게 의절을 해야만 끝이 나는 관계. 하기야 다른 관계도 아닌 가족 안에서 인간적인 실망감과 환멸을 느낀다면 후유증은 가장 클것이다. 어쨌거나 내쪽에서 전적으로 취사선택할 수 없는 관계의 불안한 지속은 참 어렵다.

최근들어 극저조한 기분의 원인을 이렇게라도 배설하면 좀 시원해질까 싶었는데, 아직은 3단계에 머물러 있는 터라 머리가 터질 지경이다. 시간이 얼마나 더 지나야 마지막 단계에 접어들 수 있을까나. 이놈의 펄럭거리는 감정 좀 쉽게 다잡으며 살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흔들리니 않는 나이가 불혹이라는 건 다 개뿔, 거짓말이다. 불행히도 난 아마 평생 이렇게 파르르 화르륵 펄럭펄럭 씨근대며 살아갈 것만 같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초연함인데, 지금 내게 있는 건 조바심 뿐이다.  
Posted by 입때
,

재개발

하나마나 푸념 2010. 2. 19. 15:00

지금으로부터 딱 5년전인 2005년, 내가 사는 동네에도 재개발 광풍이 본격적으로 불기 시작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몇년 간 줄곧 재개발 얘기는 있었지만 그저 오며가며 도는 풍문일 뿐이었는데, 2005년도엔 제대로 업자가 나서서 주민회의를 개최하고 계획안을 집집마다 돌리더니 주민동의서를 받기에 이르렀다. 당시 이 동네 재개발 계획안은 그야말로 화려번쩍했다. 오래된 다가구 주택 십여채를 허는 수준이 아니라 3천 세대가 넘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에 메이저 건설사를 끌어들이겠다나. 그땐 30년 넘은 헌집에서 탈피해 새집에서도 한번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고, 재개발을 해서 아파트를 받으면 이 낡은 집을 끼고 사는 것보다는 훨씬 이익이라는 논리가 당연한 줄 알았다. 물론 우리집 같은 다가구 주택은 지분이 작아서 큰평수를 받으려면 최소한 1억쯤 돈을 더 부담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지금 사는 집이 두 집을 터놓은 거라 지분이 두 개니까 분담금 대신 한쪽은 내놓으면 된다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하기야 그때도 재테크나 부동산에 밝은 이들은 펄쩍 뛰었다. 왜 지분 하나를 내놓느냐고, 두개 다 분양 받아서 나중에 팔면 돈이 얼만데 정신 나간 소리 한다고. 어쨌거나 우린 그냥 흐흐 웃고는 일단 재개발이 되봐야 아는 거라면서, 융자가 어떻고 중도금이 어떻고 하는 조언에 귀를 닫았다.

재개발에 대한 주민동의율이 80% 넘겼다는 축하 플래카드가 동네 여기저기 나붙은 뒤 한 1, 2년은 정말이지 금세 뭔 일이라도 벌어져 당장 집 비워주고 이사를 가야하는 건 아닌가 불안할 정도였지만, 5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이 동네 재개발은 잠잠하기만 하다. 20층을 넘기는 고층 아파트를 지어야 업자들에게 남는 장사인데 구청 앞이라 15층까지밖에 허가가 나질 않아 메이저 건설사는 관심을 잃었다는 풍문이었고, 3천세대 규모라고 떵떵 큰소리치던 단지 규모도 형편없이 축소되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재개발이 얼마나 빛좋은 개살구인지, 어디든 원주민의 입주율이 30%도 안되며 제집 갖고 편히 살던 사람들이 재개발로 쫓겨나 세입자로 전전하는 문제가 연일 신문방송에 오르내렸다. 집주인들도 대거 떨려나는 마당이니 전월세로 살던 사람들의 상황은 말할 것도 없었다. 갑자기 한꺼번에 집들을 다 부숴버리는 바람에 아예 들어가 살 집이 없어 전셋값이 폭등해 난리라고들 했다. 그러다 용산 재개발 현장에선 믿기 어려운 참극이 벌어졌다.

다른 사람들도 그랬겠지만 내 머리에도 재개발은 부자들을 위한 부동산 잔치라는 생각이 자리를 잡아갔고, 5년전 재개발에 찬성 도장을 찍어준 사실이 부끄러웠다. 내가 사는 이 집은 지은지 30년이 넘었어도 목욕탕이 좀 추울 뿐 금간 데도 없고 새는 데도 없는데, 아파트는 30년 넘으면 골조가 위험수준으로 망가져 다시 지어야 한대고 심지어 새로 지어 분양받은 아파트에 물이 줄줄 새는 경우도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왜 꼭 아파트가 이 나라의 평균 주거공간으로 어딜 가나 흉물스럽게 군집을 이루어야 하는지! 이미 온 나라에 지은 아파트를 가구 수대로 나눠주면 더 짓지 않아도 된다는데 말이다.

어쨌거나 며칠 전 지네들 마음대로 <재개발 추진위원회>를 만든 사람들이 (그나마도 파가 갈렸는지 비공인 재개발 추진위원회가 2군데나 된다 ㅋㅋ) 우편물을 보내왔다. 일부 주민들이 구청에 제출한 <재개발 철회 청원>에 대하여 결사 대항하겠다는 취지의 편지였다. 괜스레 흐뭇해서 웃음이 나왔다. 조합 결성도 요원하고 이 추세로는 한 10년 또 말로만 재개발 운운할 판국으로 보였는데, 반대하는 이들도 본격 활동을 시작했다는 이야기니 정말로 재개발을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가 아닌가. 

사실 왕비마마의 계단 사고 이후 얼른 계단 없는 집으로 이사를 해야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잠시 집을 내놓았을 때, 재개발을 노리고 집값을 후려쳐 장사를 하려는 부동산 업자들 대신 진짜로 우리 집에 살 마음이 있는 사람들이 진지하게 집을 보러 왔었다면 나도 큰 거부감 없이 집을 팔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미 이웃집을 샀다가 몇달만에 시세차익을 보고 집을 되판 부동산 업자가 득달같이 쫓아와서 집값을 후려치며 흥정을 붙이는데, 나는 정나미가 똑 떨어졌고 낯선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집을 내보여야 한다는 사실이 죽도록 싫어 얼마 안 가 집 안 판다고 선언하고야 말았다.

지금도 이재에 밝은 지인들은 재개발 추진이 극에 달했을 때, 즉 이 동네 집값이 최고로 올랐을 때 팔았어야 했다고 내 옆구리를 쥐어박는다. ㅠㅠ 하지만 멍청한 내 셈으로는 어차피 그 땐 다른 동네 집값도 비쌌으니 마찬가지라는 생각이라 그 말이 잘 이해되질 않는다. 서울지역 부동산이야 늘 비슷하게 오르내리지 않나? 어차피 내가 돈놀이 하듯 부동산으로 재테크를 하는 인간이 아닌 바에야 이 집에서 30년 가까이 살았듯 어딜 가든 또 집 한채 깔고 앉아 마냥 살아야 할 텐데... (돈 벌려고 몇년에 한번 이사 다니는 거 상상도 하기 싫다.)

아무려나 그래서 나는 재개발이고 나발이고 신경 안쓰기로 했다는 얘기다. 계단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곳으로의 이사 문제도 만날 이랬다 저랬다 마음이 바뀌지만, 점점 거동이 힘들어지고 있는 왕비마마의 노구를 생각하면 언제고 이사를 안할 순 없으니 미칠 노릇이긴 하다. 계단 걱정도 없고 앞으로 또 재개발 광풍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으면서 낡은 이 집에서 부채 없이 옮겨갈 수 있는 두 모녀의 보금자리는 과연 어딜지 아무리 둔한 머리를 두들겨도 묘안이 나오질 않는다. 나의 로망인 <안 춥게 개조한 아담한 한옥집>에서 <마당>도 누리며 살려면 로또에 당첨되거나, 한 20만부쯤 인세 대박이 나는 수밖에 없고... (둘 다 허황한 꿈인 걸 안다!) 

ㅋㅋ 그나마 당장 재개발로 살 집 구하러 다니지 않아도 되는 걸 감사해야 한다고 위로하는 의미로 쓰기 시작한 글이 결국엔 제욕심 차리겠단 결론으로 맺어지누만. 암튼 집값도 안오르는 동네에 눌러앉아 멍청하게 30년 가까이 사느라 그 흔한 아파트 한 채 못 만들고 부동산으로 재산을 불리지 못한 우리 부모님을 한심스럽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고, 나 또한 어린 마음에 그런 부모님을 못마땅히 여겼는데 막상 그런 결정을 내려야할 입장이 되고보니 핏줄 때문인지 똑같이 망설이고만 있다. 집장만 고민 같은 거 안하고 그냥 붙박이로 100년씩 한 군데서 살 수는 없을까나. 으휴.
Posted by 입때
,

홍옥이 나왔다

투덜일기 2009. 10. 15. 16:42

일주일 만에 장을 보러 갔더니 그새 홍옥이 나왔다! 빨리 홍옥을 사다먹을 욕심에 장을 보는 내내 조바심이 났다. 나의 식탐은 성격이 좀 오묘해서 고기와 생선류를 비롯한 음식에는 그저 뭉뚱그려 막연하게 <먹고 싶다>는 열망을 품는 반면에 과일류는 종류를 <콕 찝어서> 먹어야한다는 열망이 타오른다.
며칠 전부터는 그렇게 귤이 먹고 싶었다. 거의 매일 사과를 먹고 있던 터라 특히 비타민이 부족할 리도 없는데, 옛날처럼 한 박스 집에 쟁여놓고 손바닥 노래지도록 마냥 귤을 까먹고픈 욕망에 사로잡혔던 것. 요즘에 나오는 귤은 조생귤이라고 해서 껍질도 말랑말랑 좀 잘 까지겠나 말이다.
그래서 오늘은 장보러 가서 귤을 사와야지 마음을 먹었는데, 과일가게에 홍옥이 쌓여있는 걸 본 나는 광분해서 홍옥부터 잔뜩 담으라고 하고는 그래도 못내 아쉬워 귤도 한 보따리 사왔다. 모녀가 둘다 식탐도 많고 영양따져 골고루 먹어야하는 왕비마마 덕분에 우리집 엥겔계수가 좀 높은 편이기는 하지만, 대충 일주일치 과일값이 일주일치 식료품 금액의 4분의 1이다. 어휴... <잘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더라>며 먹는 것에는 절대 아끼는 법이 없는 나도, 카드로 결제하는 마트 비용은 그러려니 하는데 과일값을 현금으로 내려면 약간 손이 떨린다. 좀 전에 산 생선이며 채소 같은 반찬 가격과 대비하면 확실히 과일 값이 비싼 것 같아서...
하지만 집에 돌아와 얼른 홍옥을 씻어 와그작 깨물어 먹으니, 바로 이맛이다!
바야흐로 홍옥의 계절. 얼른 다 먹고 담주에 장보러 가면 또 사올 테닷!

Posted by 입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