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덜일기 2010. 3. 28. 16:13

우리집 마루 한쪽 벽엔 조카들의 키를 재기 위한 눈금이 그려진 기다란 스티커가 붙어 있다. 정작 제 부모들은 제 자식들 키 크는 추세에 크게 관심이 없는 것 같은데, 볼때마다 쑥쑥 자라는 녀석들의 키를 거의 다달이 표시해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괜스레 뿌듯해하는 걸 보면 난 확실히 '단신'에 대한 컴플렉스가 심한 인간이다. 남자들도 180cm가 안 되면 <루저>라는 발언이 방송에도 나올 만큼 키 작은 걸 심각한 장애취급하는 사회이다보니 어쩌겠나. 부디 조카들은 훤칠하고 우월한 키로 세상을 굽어보며 살면 좋겠는걸.

키가 큰 사람들은 대부분 성장기의 어느 시점에 갑자기 키가 확 자라는 시기를 경험하므로, 큰동생은 중3땐가 1년만에 14센티미터가 자랐다고 하고, 친구 하나는 초등학교 6학년때 너무 갑자기 키가 커서 밤마다 다리가 아파 엉엉 울어야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런 경험들이 죄다 남의 이야기일 뿐이다.  국민학교 입학했을 때 전교에서 제일 작았다는 전설속의 아이는 중학교 때 잠시 중간키 부류에 속하는 기쁨을 누렸을 뿐,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어느 집단에서든 제일 작은 축에 속하는 어른으로 살고 있다. 친구들 중에 나보다 작은 사람은 중학교 때 친구 1명과 고등학교 때 친구 1명 뿐이다. 고등학교 졸업 무렵 나보다 작았던 아이들을 확률적으로만 따져도 좀 더 많은 단신들을 사회에서 맞닥뜨려야할 것 같은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심지어 나는 스무살까지 느릿느릿 조금씩 키가 자라서 이만큼 된 것인데도!

사실 살아가는 데는 키의 크고 작음이 엄청난 변수로 작용하는 것 같지 않은데도 키가 작아서 좋은 점을 굳이 찾자면 내가 좋아하는 아이들이랑 쉽게 친해질 수 있다는 것 정도이고(아이들은 자기들보다 몸집이 지나치게 큰 어른들에겐 본능적으로 두려움과 거부감을 느낀다나 뭐라나;;) 그 외엔 그저 단신이라는 게 단지 외형적인 불만으로 남는 것 같다. 바지는 살 때마다 길이를 줄여 고쳐 입어야 하고, 굽 높은 신발에 길이를 맞춰 자른 바지는 단화를 신을 때 질질 끌려 못 입는다는 점(예외는 스키니진인데 워낙 유행이긴 하지만 다리가 더욱 짧아보이는 것 같아서 별로 마음에 들진 않는다), 무늬가 큼직큼직한 옷을 입으면 우스꽝스러워 보인다는 점, 무슨 옷을 입든 조금이라도 키가 커보이고 싶은 욕망에서 평생 벗어날 수 없다는 점... ㅠ.ㅠ

정말이지 요즘 아이들의 발육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좋아져, 우리집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있는 중학교 아이들만 봐도 하나같이 늘씬늘씬 키가 크다. 하기야 그 옛날 20여년 전에 내가 교생실습 나갔을 때도 내가 맡은 여학생반에서 나보다 작은 애들은 1번과 2번 딱 둘 뿐인 듯했다. 자존심 상해서 앞번호 아이들과 정확하게 키를 재보지는 않았지만 눈높이로 대강 어림짐작했을 때 그랬다는 얘기다. 그러니깐 이제 6학년이 된 정민이가 내 키를 따라잡을 시기가 되었다는 건 예상하고 있었다. 수년째 다달이 키를 표시해두면서 그 날이 언제일지 두려워 하고 있었을 뿐.

사실 동생들이 다 키가 큰 편이고 막내올케 역시나 몹시 큰 편, 큰올케도 심히 작은 편은 아니라 조카들 역시 또래들보다는 그간 대체로 키가 컸다. 유독 정민이만 저학년때 작은 편에 속한다고 하더니 작년부터 부쩍부쩍 자라 1년에 거의 10센티미터를 컸고 6학년에 올라가서는 여학생들 중에서 세번째로 크다고 자랑을 했다. 애 키우는 엄마들 못지않게 육아상식이 많은 내가 알기로는 ^^;; 아이들 키가 1년에 평균 6cm 정도 자라는 게 정상 속도란다. 두달에 1cm씩 큰다는 얘긴데, 놀랍게도 최근 우리 조카들은 만날 때마다 평균 이상으로 키가 쑥쑥 자라는 게 눈에 보이는 듯하고 그 결과가 실제로 우리집 벽에 고스란히 눈금으로 남아있다.

초등학교 1학년때 이미 3학년으로 보일 만큼 늘씬한 키를 자랑하던 준우도 반에서 제일 크다나 두번째로 크대고, 요번에 초등학교 입학한 지환이도 또래보다 큰 편이고, 심지어 이제 겨우 다섯살이 된 지우도 발육이 월등하다. 우리집에 올 때마다 조카들을 눈금 벽에 세워놓고 키를 표시하면, 녀석들은 꼭 나와 다시 제 키를 비교한다. "전에는 고모 어깨에 닿았는데 이제는 턱까지 올라갔다!" 이러면서 기뻐하고...  그러면 나는 과연 다시 온 집안에서 제일 키 작은 사람으로 전락할 날이 얼마나 남았는지 머릿속으로 셈하며 비감에 젖는 한편 늘씬한 조카들이 마냥 자랑스럽다.

집안 서열에서는 왕비마마 다음으로 내가 2위지만, 지난 왕비마마 생신날 이후로 나의 키 서열은 정민이와 동률 6위로 떨어지고 말았다. 정민이가 연초에 150cm를 넘어서면서 내 키를 따라잡을 날이 머지않았음을 알고는 있었지만 석달도 가기 전에 나와 똑같아질 줄은 예상밖이었던지 그날 나는 약간 충격을 받고 말았다. 정민이는 신났다고 눈금 표시 옆 벽에 날짜와 함께 <고모와 정민 키가 같아짐>이라고 적고는 구름표시를 해두기까지. 그러더니 얼마전까지도 고모를 올려다봤는데 이젠 굽이 꽤 있는 운동화를 신으면 고모가 내려다보인다면서 자기도 잘 적응이 안된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으휴. 

그나마 정민이는 6학년때 나와 키가 같아졌지만, 조카들 가운데 발육이 가장 훌륭한 준우는 이 추세라면 5학년도 돼지 않아 나를 따라잡을 확률이 높다. ㅠ.ㅠ 어린 녀석들이 발은 또 얼마나 빨리 자라는지 6학년짜리 발이 나보다 커진건 벌써 옛날이고 이젠 2학년짜리 신발도 내가 물려신게 생겼다. 자전거 열풍 이후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인라인 스케이트를 둘째조카한테 넘기긴 했지만 지금도 딱 맞으니 아마 올해 안에 작아졌다고 다시 반납할 게 확실하다. 조카들한테 운동화 물려받아 신는다는 이모나 고모의 이야기를 더러 듣기는 했지만 내가 막상 그런 입장이 되고보니 왜 이리 민망한지, 조카들의 우월한 성장이 뿌듯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온다.

160cm에 가까운 키라 옛날 사람치고 큰 편이었다는 왕비마마는 척추골절과 척추협착증 수술을 연이어 겪으며 자세도 굽었고 실제로 키도 많이 작아져 지난번 정기검진때는 허리를 잘 펴지 못해 무려 154cm로 기록되기도 했다. 요번에 여권을 다시 만들며 왕비마마는 그래도 꿋꿋하게 159cm라고 박박 우기셨지만 요즘 나란히 다녀보면 확실히 엄마 눈높이가 나와 비슷하다. 과거엔 드물게 엄마보다 키가 작은 딸로 살며 자존심이 좀 상했었는데, 노년의 엄마 키가 쪼그라든 걸 보니 마음이 더욱 좋지 않다. 젊어서도 작은 나는 나중에 늙으면 얼마나 더 작아질까 생각하면 더 서글퍼지기도 하고. 평균 이상인 사람들은 평생 대수롭지 않게 살아갈 키에 평생 연연해하는 나의 컴플렉스, 이제 좀 자유로워지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된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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