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을 말해봐

투덜일기 2010. 4. 18. 02:53

주말에 떼로 다니러온 조카네 식구들과 다 같이 저녁을 먹으러 음식점엘 갔는데 막 자리를 잡고 앉으려는 찰나, 뒷차로 온 조카들이 뛰어와서 내게 말했다.
"고모, 소원을 말해봐. 우리가 들어줄게."
"진짜? 아무 소원이나 말해도 돼?"
"응. 아무거나 얼른 소원을 말해봐. 우리가 다 들어줄게."
순간적으로 나의 뇌리엔 여러가지 소원이 스치고 지나갔다. 일본 절에서도 빌었던 부실한 왕비마마의 건강을 기원할까, 부질없는 인세 대박을 빌어볼까, 여전히 가시지 않은 꿈의 차 미니쿠퍼를 빌어볼까, 한옥집서 사는 로망을 빌어볼까...
"고모, 빨리!"
"알았어. 요번에 나오는 책 대박 나서 미니 쿠퍼 사는 게 고모 소원이야."
그러자 두 녀석은 동시에 내쪽으로 귀를 내밀며 말했다.
"우리가 들어준다고 했지? 잘 들었어. 고모 소원. 킥킥킥."
그러고 나서 녀석들은 소녀시대의 <소원을 말해봐> 후렴구를 흥얼거리며 소녀들의 손짓 안무를 흉내냈다.

대체 나는 녀석들에게 뭘 더 바랐던 것일까. 소원을 들어준다는 게 말 그대로 귀 기울여 들어주는 것이라는 사실에 바보처럼 마음에 구멍이 뻥 뚤리는 것 같은 실망이 스쳤다. 고얀 녀석들. 그래도 고모 놀려먹는 걸 신나하면서 즐거이 내 소원을 귀 기울여 들어줄 조카들이 있다는 건 축복이겠지.
Posted by 입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