씁쓸

책보따리 2010. 4. 9. 17:07

어제 간만에 멀리 사는 친구들을 만나느라 강남 교보엘 갔었다. 그곳이 나름 중간 지점이라서 거의 지정 모임장소처럼 되고보니, 그런 날엔 서점 볼일도 같이 챙기는 편이다. 찾아볼 책도 좀 뒤지고 요새 책시장은 어떤가도 좀 살펴보려니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나 법정스님의 책들이었다. 책의 가치여부를 떠나서 명사의 죽음은 늘 (나쁘게 말해) 책 장사의 방편으로 이용되어 왔지만, 그야  무엇이든 떠나보내고 난 뒤에나 새삼 돌이켜보는 인간의 어리석은 경향을 반영한 상술이니 무조건 나무랄 수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법정스님의 책들은 절판 유언 때문에 더욱 기이한 소유욕과 과열 시장을 만들어냈고 이래저래 계속 말이 많았고, 알게 모르게 그 여파가 나 같은 존재한테도 영향을 미치는 듯 해 씁쓸하다.

각 출판사에서 법정스님의 절판 유지를 받들어 올해까지만 책을 판매하기로 협의했다는 뉴스를 들었고, 올 연말까지면 출판사에서도 팔아먹을 만큼 팔아먹은 뒤고 건망증 심한 이 나라 독자들의 기이한 독서열풍 또는 소유열풍도 사라지겠군 싶었다. <무소유> 초판본이 중고책 시장에서 수십만원에 거래되는 지경이라니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면서, 또 <단군이대 최대 불황>이라는 출판계에 그나마도 책이 움직이는 빌미를 제공한 스님한테 책으로 밥빌어먹고 사는 사람들 모두 고마워해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 정도였다. 강남 교보에도 벽에 따로 마련된 베스트셀러 진열대에는 법정스님의 책이 몇권이나 꽂혀 있었으며, 친절하게도 스님의 책만 모아 여러 군데 자리잡고 있는 특별 책 판매대에는 <무소유>가 4월 몇일 이후에 입고될 예정이며 선주문을 받는다는 팻말이 걸려 있었다. 출판사도 매우 다양했다.

어제 만난 친구 하나도 번역을 하고 있으니 수다 중에 당연히 출판계 이야기가 나왔고 자연스레 법정스님의 책 이야기로 이어졌다. 그 친구도 나도 작년말부터 나온다 나온다 말만 앞세운 번역서의 출간이 계속 미뤄지고 있는 이유가 법정 스님 책의 열풍 때문이라는데 동의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이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는 법정 관련 출판사들이 저마다 대량으로 책을 제작하고 있는 터라 상당히 많은 인쇄소며 제본소에 다른 신간이 끼어들 여유가 별로 없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불황이라 신간을 내도 팔릴지 말지 모르는 와중이니 일단 잘 팔릴 책, 50% 할인해서 물량공세로 밀어낼 책, 홈쇼핑에서 전집으로 판매대박을 낸 책들 먼저 인쇄에 돌입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물론 그러다가 결국 출판시장이 망하거나 말거나. -_-;

돌아가신 분에 대해서 이런 저런 뒷말로 새삼 욕되게 하는 건 예의가 아닌 줄 알지만, <말빚>을 청산하고 싶다는 위대한 유지에 딴죽을 걸 입장도 아니지만, 삐딱한 심성으로 계속 지켜보자니 법정스님의 절판 유언은 결과적으로 한국 출판계 최대의 마케팅 전략으로 비쳐진다. 정말로 세상을 떠남과 동시에 그간 출간한 책을 절판하여 말빚을 청산할 작심을 하고 계셨다면, 스님은 왜 입적 직전까지 새책의 서문을 구술해서라도 출간되도록 밀어주셨으며, 최측근 출판권력의 손에 모든 저작권과 사업 이권을 위탁하고 있었을까? 그러고선 대뜸 유언에는 절판하라 말씀하신 저의는 무엇일까?

스님의 유명세와 출판계의 욕심에 밀려 몇달간 골빠지게 작업한 책의 빛 볼 날이 자꾸만 미뤄지는 바람에 속좁게 구시렁거리고 있는 소인배의 푸념이라 욕을 먹어도 할 수 없다. 잘 알지도 못하는 내 눈에도 분명 지금 돌아가고 있는 책세상 형국이 비정상이란 것만은 확실하니까. 어쨌거나 법정스님 책을 내는 유명 출판사들이 어서 올해 말까지 팔아먹을 책들을 창고에 그득그득 쌓아놓아, 이제 그만 충무로와 을지로에 있는 인쇄소와 제본소가 다른 책을 찍을 여유를 되찾길 빌 뿐이다. 작년에 내 이름을 달고 나올 예정이라던 몇권의 책들이 올해를 몇달이나 넘기고도 아직 코빼기를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지금 작업하고 있는 책들도 예년에 비해 원고 채근이 덜한 게 죄다 법정스님 책 때문이라는 건 순억지겠지만(대체 해마다 <단군 이래 최대 불황>이라는 출판계 사정이 좋아질 날은 있는 걸까?), 브라질 나비의 날갯짓이 미국땅에 허리케인을 불러온다는 이론이 순 헛소리만은 아니라는 데 자꾸 심증이 간다. 나의 긴 한숨따위는 이런 좁은 공간에서 푸념으로 맴돌다 사라질 뿐이겠지만.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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