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다'에 해당되는 글 233건

  1. 2010.11.19 비겁한 밥벌이 3
  2. 2010.11.17 모녀의 취향 19
  3. 2010.11.15 신기한 금요일 18
  4. 2010.11.09 어떤 친구 4
  5. 2010.11.01 11월 13
  6. 2010.10.31 이산가족 7
  7. 2010.10.29 생선가시 2
  8. 2010.10.13 양치기 중년 9
  9. 2010.09.23 명절 서울 5
  10. 2010.09.18 악 귀찮아 12

비겁한 밥벌이

투덜일기 2010. 11. 19. 02:38

기획력 있는 번역자들과 달리, 나처럼 줏대없이 주어지는 일로 번역을 하다보면 못마땅한 책과 씨름해야 할 때가 더러 있다. 누가 간절히 부탁하거나 일감이 똑 끊기면 어쩌나 밥벌이 걱정을 해야하는 상황에 몰리면, 스스로도 민망한 자기합리화 과정을 거쳐 일을 맡게 되는 식이다. 당신 정도 경력이면 이제 마음에 드는 책만 골라서 해도 되지 않겠느냐고 반문하는 이도 간간이 있지만, 모르는 소리다. 먹고 살려면 말이다. -_-; 더욱이 인세 욕심에 눈이 어두워져 매절 계약일 마다하고 인세 계약일만 찾아하는 바람에 일년 내 수입이라고는 얼마 안되는 계약금 몇 건으로 버텨야 했던 해도 있었음을 감안하면, 죽도록 싫거나 너무 어려운 책, 또는 몹쓸 출판사의 일만 아니면 대개는 약간의 망설임과 고민 끝에 못 이기는 척 계약에 응한다.

문제는 그렇게 별 애정 없이 맡은 책의 경우, 프로답지 못하게 아무래도 홀대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그러니까 독자의 입장에서 어떻게든 책에 흥미를 느껴야 진도도 빨라지고 정성이 더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가능하면 어떤 책이든 애정을 품어보려고 자기최면을 걸곤 한다. 그리고 쉽든 어렵든 '골빠지는' 과정을 거쳐 번역원고가 마무리되면, 좀 모자란 자식이라도 똑같이 정을 쏟는 부모(에 비하면 너무 비약이 심한가? 맞다, 심하다)처럼 돌변해 칭찬일색으로 치장하여 민망하기 그지없는 역자후기까지 양산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주 가끔은 도대체 이런 책을 종이 아깝게 왜 만드나 싶은 생각이 들거나 도저히 최면이 안 걸리는 '문제작'이 있다.

예를 들면, 얼마 전에 원고를 넘긴 청소년 소설이 그렇다. 번역의뢰를 받고 상담을 하며 대강 훑어본 느낌으론 소재나 줄거리가 흥미로울 수 있겠다 싶었다(소녀의 탐정놀이 비슷;;). 분량도 얇은 데다 청소년 소설이니 내용도 문체도 수월하여 아주 가뿐하게, 잘하면 한달 안에 '해치울' 수 있는 '만만한' 작업이 될 듯했고, 더욱이 책 나오면 '조카가 좋아하겠다'는 생각부터 들어 덜컥 계약에 응했다. 헌데 아뿔싸. 눈높이를 낮추어 아무리 조카 같은 청소년 독자의 눈으로 봐도 통 스토리도 재미도 없고 유치하고 구성도 단순하여 영 마음에 들지를 않았다. ㅠㅠ 그러니 점점 일을 하기가 싫어질밖에... 한달만에 해치우겠다고 생각했던 작업은 계속 늘어졌고, 그런 책을 쓴 작가도, 번역서를 출판하겠다고 나선 출판사도 밉기만 했다. 물론 제일 등신 같다고 느껴진 건 쉬운 맛에 덜컥 번역하겠다고 나선 나였고. 

어쨌든 지난달에 번역 원고를 넘기며 양심 고백을 했다. 야심차게 4권짜리 시리즈물로 기획했다는 건 알지만, 일단 원고를 읽어보고 나서 계속 다음 시리즈도 출간할지 진지하게 재고해 보라고. 요즘 청소년들도 눈이 높아서 웬만해선 만족시키기 어려운데 이건 좀 아니다 싶다고. (처음 책을 추천했거나 검토한 사람 물 먹이는 짓이라 조심스럽기는 했다) 하지만 담당자는 책에 대한 자신이 있는 건지 일단 대뜸 다음 책을 계약하러 오라고 청했고 '다음주쯤' 출판사에 오면서 '역자후기'를 '재미있게' 써오라고까지 부탁했다. -_-; 날짜를 콕 찝어 정해주어도 외출이 어려운 나에게 '다음주쯤'이라고 했으니 내가 어찌했을 것 같은가. 게다가 재미 없어 멀미날 것 같은 책을 위해서 '재미있는 역자후기'라니!

한번쯤 독촉전화를 받으면 발등이 앗뜨거라 싶어 뭔가 써지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통 그런 자극도 없으니(전화 공포증 때문에 내쪽에서 먼저 어떻게 하기로 했는지 전화걸어서 물어볼 수도 없고, 후기를 못 썼으니 제발저려서 어떻게 전화를 건담!) 한달이 다 되어가는 오늘까지도 나는 옮긴이의 말을 아직 한 줄도 쓰지 못했다. 대개는 번역을 하면서 후기에 써먹을 아이디가 떠오르거나 인상적인 구절이 있을 때 미리 메모를 해두곤 하는데 이 책은 전혀 그런 빌미가 없던 터라 정말 완전히 막막강산이다. 다른 일도 해야하는데 이도저도 제대로 못하고 갈팡질팡 제 머리만 쥐어박고 있으려니 어찌나 한심스러운지. 그래도 이렇게 자아비판을 공개적으로 하고 나면 낯이 뜨거워 뭔가 어떻게든 진전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끼적이긴 했는데, 만날 이렇게 제 얼굴에 침뱉는 얘기만 쓰는 번역가라는 걸 출판사에서 알아채면 정말로 밥줄이 끊기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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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녀의 취향

투덜일기 2010. 11. 17. 16:23

넉달만에 동창모임 오찬에 나가셨던 왕비마마가 4시를 넘기고도 귀가하지 않았다. 걱정이 돼서 전화를 걸었더니 친구분들과 쇼핑을 다니다 이제 귀가 중이라는 대답. 그간 다리 허리도 아프고 심리적으로도 불안하여 홀로 외출은 꿈도 못꾸던 양반이 최근 매일 꾸준한 산책과 운동으로 이룬 쾌거이니 나로선 박수라도 칠 일이었다. 그리고 일흔살 노여사님들 다섯 분이 대체 어디로 쇼핑을 다니셨는지(강남 모처로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고), 쇼핑 품목은 무엇일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요가하러 다녀와 보니 그새 귀가하신 왕비마마는 희색이 만면한 얼굴로 기다렸다는 듯이 새로 장만한 겨울외투를 보여주었다. 헌데 소재만 좀 달랐지 기존에 있던 외투와 색깔(진한 갈색)이며 길이와 스타일이 거의 똑같았다. 어차피 사온 물건이니 그냥 잘 샀다고, 예쁘다고 칭찬해드리면 좀 좋으련만 까칠한 딸의 입에서 좋은 말이 나갈 리가 없다. -_-; 이왕 사는 거 왜 똑같이 생긴 걸 샀느냐고 타박부터 튀어나왔다. '맞는 사이즈가 없어서'라는 왕비마마의 대답을 들으니, 타박부터 앞세운 것이 민망해져 얼른 잘 사셨다고 칭찬을 해주었는데 문제는 그게 다가 아니었다.

문고리에 걸어두었던 또 하나의 패딩외투를 꺼내며 '하도 싸서 니 꺼도 사왔으니 입어보라'는 말씀. 헉... 내 눈엔 이보다 더 흉측할 순 없을 듯한 '빤딱이' 남색 원단에다 '프린세스' 라인(패딩에 웬!!)이고, 심지어  목엔 회색과 청색으로 '여우털'이 부숭부숭 징그럽게 달려 있다. (물론 왕비마마는 그 '여우털'이 '포인트'라고 강조했다) 그야말로 할머니들이 가뿐하게 동네 마실 다니실 때 입으면 딱 좋을만한 물건을 비록 나이는 40대지만 곧죽어도 '영플라자'에서만 옷을 사입는 딸에게 사다주시다니.. ㅠ.ㅠ 

사실 우리 모녀는 취향이 너무도 달라서 자기 마음대로 골라 서로에게 선물한 옷은 원래 성공하기가 힘들다. 왕비마마가 거동이 그나마 자유로웠던 5년전까지는 내가 그렇게 타박을 하고 퇴짜를 놓아도, 백화점 갔다가 괜히 집어들고 오시는 옷이 종종 있어서 너무도 괴로웠다. 내가 즐겨입는 옷들이 다 너무도 후줄근하고 추레하고 칙칙하다고 여겨 못마땅해 하는 왕비마마가 골라오는 옷이야 너무도 뻔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나마 내가 충동적으로 사오는 왕비마마의 옷은 성공률이 5할대는 되는 편이었지만 그래도 두번에 한번은 색깔이며 디자인 때문에 바꿔야 하거나 아예 반품하는 경우도 있었기에, 그간 모녀는 옷을 사다주고도 괜히 욕을 먹어 각자 삐치는 역사의 반복을 교훈 삼아 다시는 자기 마음대로 옷을 사다 내밀지 않기로, 그러니까 옷을 사주려거든 같이 가서 입어보고 고르기로 암묵적인 약속을 했었다. 그런데 새삼 도대체 왜??!! 

옷이 너무 '미워서' 절대로 입을 수 없다는 나의 입장과 동네 마트 갈 때라도 막 입으면 되지 않느냐는 왕비마마의 옥신각신은 서로의 취향에 대한 비난으로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친구분이 사입고 온 옷이 좋아 보여 다들 따라가 한두벌씩 샀다는 그 옷의 판매처가 정확히 어딘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가격으로 보아 '반품불가'가 확실하다) 반품이나 교환은 애시당초 불가능한 마당에 모녀가 실랑이를 부려봤자 소용 없는 일이다. 결국 입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라는 최후통첩과 함께 (나 또한 자꾸 강요하면 차라리 헌옷 기부함에 넣어버리겠다고 협박했음 -_-;) 왕비마마는 아침에 다시 입어보라며 문제의 패딩을 내 방에 걸어놓고 물러나셨다. 하지만 오늘 다시 쳐다봐도 내 눈엔 역시나 몸서리 처지게 싫고;; ㅠ.ㅠ 

재킷도 외투도 다들 '넣고 꿰맨 것 같이' 몸에 딱 맞는 스타일이 유행일 때에도 나는 넉넉하고 큼지막한 옷이 좋았다. 그래서 과거엔 가끔 남동생들 옷을 빌려 입거나 아예 내 옷을 크게 사서 어린 동생들과 나누어 입는 것도 좋았다. 할머니의 유품 가운데서 내가 골라 가진 큼지막한 순모 니트 외투는 그야말로 할머니 같다고 왕비마마가 질색팔색을 하든 말든 여전히 십수년째 나의 애용품이다. 아버지의 유품중에서도 수많은 옷가지는 거의 다 아름다운 가게에 기증했지만 그 전에 동생들도 올케들도 최대한 자기 몸에 맞는 걸 골라 간직했고, 나 역시 왕비마마가 내겐 어울리지 않는 '잠바떼기'라고 못마땅해 하시는 아버지 옷 두 어벌을 챙겨 입고 다녔다. 적어도 옷차림에 관한 한 나는 별로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편이다. '내' 눈에 예뻐 보이고 좋으면 그만이고, 남들이 뭐라든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 10년, 20년 된 낡은 옷을 버리지 못하는 건 나름의 역사와 추억이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정말로' 마음에 들기 때문이라, 유행에 크게 뒤떨어졌든 아니든 그런 옷을 입고 나서면 슬며시 기분이 좋아진다.

반면에 왕비마마는 남의 눈에 어떻게 보이느냐가 최우선이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도 가을이면 겨울옷 입는 걸 꺼린다. 남들이 겨울옷을 꺼내 입은 걸 보아야만 그제야 안심하고 입는 식이다. 외투를 입으면 반드시 단추나 지퍼를 채워야 집을 나선다. 앞섶을 풀어헤친 모양새는 불량스럽고 단정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본인에겐 너무도 어색하단다. 땀을 삐질삐질 흘릴망정 집밖에선 재킷이나 외투의 단추를 잘 풀지 않는다. +_+ 겨울이면 놀라울 정도의 겹쳐입기 신공을 벌이느라 여러 옷을 풀어헤치고 목도리까지 치렁치렁 늘어뜨리고 다니는 딸의 차림새가 왕비마마에겐 얼마나 '거지 같이' 보일지 알만하다.

원래도 체구 차이가 크게 나서 옷을 같이 입는 모녀들처럼 (정민공주는 이미 제 엄마와 고모 옷을 수시로 빼앗아 입고 있지만;;) 옷을 나눠입고 살아본 역사가 없긴 하지만, 체구가 같았더라도 아마 왕비마마와 나는 극과 극인 취향 때문에라도 절대 옷을 공유하지 못했을 것이다. 수십년간 지켜보고 같이 살며 서로 못마땅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양반이 왜 새삼 이런 일을 벌이셨는지 원. 그나저나 저 흉측한 물건을 어떻게 하나 그게 큰일이다. 으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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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한 금요일

투덜일기 2010. 11. 15. 14:12

지난 금요일 저녁의 일부는 마치 잠깐 딴 세상에 다녀왔거나 시간의 블랙홀 같은 데 빠져 요상한 경험을 하고 돌아온 느낌이었다. 서로 연관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나에겐 '신기하게' 느껴진 경험 두 가지.

갈까말까 좀체 끝나지 않는 나의 고민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는 듯이, 확인사살을 하듯 참석을 독려하는 담당자의 전화를 이틀에 걸쳐 받는 바람에 결국엔 약속 시간에 맞춰 뚜벅이로 집을 나섰다. 그런데 저녁 7시가 조금 못된 시간 강남의 어느 전철역에서 한강다리 쪽으로 걸어가는 동안 줄곧, 나 말고는 인도에 '민간인'이 하나도 없었다. 가로수나 가로등처럼 5미터 간격으로 양쪽에 줄지어 서 있는 경찰관들 빼놓고는. -_-; 그나마 이어폰을 꽂고 있었기에망정이지 멍하니 걸어가는 중이었다면 너무 어색해서 괜스레 발목이라도 삐끗할 것처럼 삼엄한 분위기였다. 더욱이 인도 바로 옆 차도에도 시내 방향으로는 차가 한 대도 지나가지 않았고 그냥 텅 비어 있었다. 반대편 모 호텔 앞쪽 차도엔 차들이 빽빽하게 서 있던 것과 대조적이어서 더욱 기묘했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한쪽 도로에만 차들을 지워버린 거나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상상이 들 정도였다. 드디어 내가 골목으로 꺾어져 들어가야할 무렵 즈음 경찰 오토바이가 한 대 앞장서 가더니 이어 비상등을 켠 검정색 세단 두 대가 휙 지나갔다. 어느 나라 국기인지 모를 소형 깃발을 양쪽에 휘날리면서. 

수십년 전 거국적인 행사나 귀빈 방문이 있을 때마다 걸핏하면 여의도광장으로, 경복궁 옆이나 광화문 앞길로 교복을 입은채 동원됐던 나의 학창시절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이미 도로가 통제되어 몇 정거장쯤 전에 미리 버스를 내려 정해진 집결지까지 마냥 걸어가야 했는데, 주로 아침이나 대낮이긴 했어도 꼭 그렇게 경찰들이 줄지어 서서 '길'을 경호하고 있었다. 가깝게는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 텅 비어 있던 평양 거리와 인도에 일사불란하게 도열해 진달래꽃을 흔들어대던 북한 주민들도 떠올랐다. 말도 안되는 '국격'이니 뭐니 떠들지 말고 차라리 그런 독재적인 사고방식만이라도 차별화를 두려 했다면 전 세계 외신에 또 한 번 서울과 평양을 혼동하게 만들 남부끄러운 장면을 연출하진 않았을 것 같은데, '저들'은 참말로 이해가 안되는 족속들이다. 그렇게 높이려는 국격이 겨우 북한과 동격의 수준이라니... 북한이 세계적으로 누리는 독보적인 위상이 그리도 부러웠던 것일까?

출판 기념회 같은 자리에 많이 쫓아다니는 편이 아니긴 하지만 더러 가보면 그냥 뷔페 음식 차려놓고 간단히 인삿말이 오간 뒤 담소하는 분위기가 전부였다. 애당초 내가 담당자의 초대에 응했던 것도 그렇게 큰 부담은 없을 거라는 막연한 예상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산이었다. 금요일의 행사는 놀랍게도 단상에 마이크가 차려지고 공식적인 인삿말과 짧은 강연까지 식순에 따라 진행되는 엄청난 분위기였다. 심지어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이름표 달기'와 '일으켜 세워서 인사시키기'도 자행됐고, 2부엔 여흥을 돋울 초대가수도 등장했다. +_+ 안내되는 자리에 앉은 순간 이미 나 정도의 내공으론 참석해선 안될 자리였구나 싶었던 나는 마치 연예인 구경하듯 유명 번역가들을 좌우로 흘끔거리며 안절부절 못했다. 문인들이 이런저런 자리에서 서로 안면을 잘 트고 지내는 것과 달리 번역하는 이들은 웬만해선 서로 안면이 없음을 잘 안다며, 출판사 대표와 담당자가 곳곳에 앉아 분위기를 무마해주기는 했어도, 초중반엔 정말 민망하고 뻘쭘했다. 이날의 경험을 교훈 삼아 앞으로 다시는 뭣도 모른 채 그런 자리에 가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그나마 수확이라면 저명한 번역가들도 어김없이 열악한 번역료와 불규칙한 수입과 자기관리와 '마감지연' 문제로 고민하고 있음을 깨닫고 동병상련의 기쁨을 맛보았다는 정도? ㅋㅋㅋ 아 맞다, 나 만큼이나 그분들도 '전문' 번역가라는 말을 싫어했다. 소설가 앞에 굳이 '여성'을 붙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번역 장르에 대한 은근한 비하의 느낌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뉘앙스는 나만 느끼는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리고 글과 말은 달라서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반드시 말을 잘하는 건 아니라고 믿고 있었는데, 거기 온 분들은 다들 달변이어서 놀라웠다. 계속 안면 있는 담당자와만 속닥거리다가 나중엔 나도 술기운으로 버텨내긴 했지만, 그날 지켜본 바에 따르면 '저명도'에 따라 사교성도 비례하는 느낌이었다. 그러니 나처럼 숫기도 없고 지명도도 떨어지는 인간이 얼마나 좌불안석이었을지! 아무려나 신기한 경험이었다는 것으로 외출 결과 보고 및 지난 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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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친구

투덜일기 2010. 11. 9. 12:58
고1때 짝이었다. 학교졸업후 이민을 가버린 또 한 명의 친구와 셋이 3년내 단짝이라 계속 반이 달라졌는데도 하교는 꼭 같이 하는 충성을 서로에게 보였고, 각자 삶이 달라진 대학시절에도 줄곧 자주 만났다. 고3때도 내내 수시로 학교 등나무 벤치로 불려나가, 교회 오빠와의 연애상담을 도맡았던 터라 이후에도 친구의 연애고민을 들어주는 것이 내 주된 임무였다. 주변에선 둘의 키가 작다는 것 말고는 공통점이 하나도 없는데 같이 어울리는 게 신기하다고 했다. 남자친구가 늘 우선순위라 약속을 하고도 걸핏하면 바람을 맞히는(그땐 삐삐도 휴대폰도 없던 시절이라, 약속장소에서 기다리며 공중전화로 친구 집에 계속 전화를 걸어 가족에게 메시지를 남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 친구를 내가 왜 늘 참아주는지 나도 신기했다. 그래도 고등학교 때 친구는 평생 가는 거니까, 라고 믿었던 것 같다. 며칠 뒤 눈물과 애교로 참회하며 사과하는 친구의 변명에 넘어가기도 했다. 남자친구가 채워줄 수 있는 부분이 있고, 동성친구가 채워줄 수 있는 부분이 있는데 그날은 남자친구가 필요한 날이었다나. (아 그럼 미리 전화해서 약속을 취소하거나 자기는 못나온다고 하던지!)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것을 즐겼던 친구는 대학시절부터 대학로 카페에서 피아노를 치는 아르바이트를 했고, 몇 번의 편입과 전과를 거치느라 학교를 세군데나 옮긴 뒤에도 결국 최종 직업은 피아니스트였다. 피아노를 치는 공간도 대학로나 미사리 카페에서 강남에 있는 별 다섯개짜리 호텔로 격상되었다. 그럴 거면서 굳이 수학과는 왜 졸업했는지 원. 내가 피아노 치는 남자에 대한 선망이 있듯, 공주 드레스를 입고 피아노 치는 여자에 대한 선망을 품은 대다수의 남자들 덕분에 친구는 주변에 남자가 끊이질 않았다. 집이 갑자기 기울어 빚쟁이들에 쫓기느라 친구의 가족들이 야반도주로 뿔뿔이 흩어져야 했을 때 친구는 동생을 하나 데리고 우리 집에 들어와 코딱지 만한 내 방에서 함께 몇달 지내야 했는데, 심지어 그 기간에도 심야에 울리는 전화는 모두 그 친구의 남자친구에게 걸려온 것이었다. 9시 이후엔 남의 집에 전화를 걸지 않는 것이 예의라고 가르쳤던 우리 아버지가 주무시다 말고 일어나, 딸 남자친구도 아니고 딸 친구의 남자친구 전화를 받아 바꿔주시는 상황이(당시 전화기는 안방과 거실에만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얼굴 뜨겁지만, 친구는 예의 애교 넘치는 말투로 생글생글 웃으며 죄송해요, 아버님, 한 마디로 아무렇지 않게 넘겼다.

스물여덟살 때였던가. '니가 한번 봐 달라'며 수없이 내게 소개했던 애인들 가운데서 친구는 드디어 한 남자와 결혼을 결심했다. 이상하게 나쁜남자가 매력적이라면서 늘 날나리 같은 남자를 선호하던 친구는 대기업에 다니는 검소하고 성실한 남자를 선택했고, 나는 드디어 친구의 방황이 끝나나 보다며 진심으로 기뻤다. 결혼식날 토요일 12시 예식에 맞춰 아침 7시까지 신랑신부를 픽업하는 역할이 내게 주어졌을 때도 기쁘게 승락했다. 그 남자는 친구도 없나, 하는 의문도 그땐 들지 않았다. 다만 전날 눈이 내리는 바람에 안산까지 출퇴근길에 흙탕물을 홀라당 뒤집어쓴 차에 신랑신부를 태울 수가 없어서, 깜깜한 새벽에 일어나 양동이에 뜨거운 물을 퍼담아 들고 나가서 골목 가로등 불빛 아래 손수 세차를 하면서 약간 서글프긴 했다. 친구 결혼식 때문에 세차하랴 꽃단장 하랴 새벽부터 부산을 떠는 나를 보며 부모님은 혀를 끌끌 찼다. ㅁㅅ이가 너 이 고생 하는 거 알아주기는 하냐고.

아직도 해가 뜨지 않아 어두웠던 오전 7시, 이미 살림집에서 함께 살고 있던 친구의 집 초인종을 누르자 신랑이 부스스 새집을 지은 머리로 문을 열어주었다. 심지어 신부는 자고 있었고... 그제야 일어난 두 사람이 부리나케 씻는 동안 나는 신랑신부 예복과 폐백 때 입을 한복 따위를 영차영차 미리 차에 실었다. (친구가 아니라 머슴이었나?) (내 생각에) 남성편력 및 방황 끝, 행복 시작이라 여겼던 친구의 결혼생활은 3년을 채우지 못했다. 남자의 성실함과 검소함은 친구에게 따분함과 궁상으로 비치기 시작했다. 화려하게 즐기는 삶의 습관을 친구는 포기하지 못했고, 꼼꼼히 모든 수입을 관리하는 남편 몰래 딴 주머니를 차느라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나를 팔아 야밤에 놀러다니기를 거듭하던 친구는 결국, 무려 열살이나 어린 아르바이트생(수능 끝나고 호텔 주차요원으로 일하던)과 바람을 피우다 들통나 이혼했다. 결혼이라는 제도나 한 남자와의 약속 따위에 얽매일 수 없는 친구란 걸 나도 그 무렵 깨달았던 듯하다.

친구는 놀랍게도 그 문제의 남자친구와 거의 10년간 만남과 헤어짐을 거듭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은 친구에게 진리였다. 몇달씩 심지어 1년 가까이 연락이 없으면 연애든 일이든 잘 진행된다는 뜻이었다. 그러다 뜬금없이 연락이 와 만나자고 해 나가보면 어김없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헤어짐의 아픔을 토로했다. 그러고는 어김없이 일주일 쯤 뒤에 헤헤거리며 전화를 걸어 다시 만나기로 했다는 기쁜 소식을 알렸다. 드물게 곁에 애인이 없을 때만 찾는 친구로 전락한 나 역시 그 친구를 어느 정도는 포기하고 있었다. 그냥 세월의 힘과 관성으로 견뎌주는 관계랄까.

타고난 사교술과 수완으로 친구는 꾸준히 사업 규모를 늘려가는 모양이었다. 피아노 연주도 현악기 편성을 늘려서 호텔 로비에서 연주하는 것뿐만 아니라 결혼식이나 여러 행사에도 불려다녔다. 그야말로 엔터테이너의 길로 접어든 친구는 후배 연주자들을 거느리고 양성하는 사업가로 변신해, 몇년 전엔 법인을 차렸다고 했다. 행사 연주 한번에 최소한 몇백만원을 벌어들이는 그 친구의 시각으론 골머리를 써가며 컴퓨터 앞에 앉아 '푼돈'을 버는 내가 한심했는지, 몇년 전까지도 내게 '차라리' 고액과외를 하지 그러냐고 안타까워했다. -_-;

우리 집에서 가까운 호텔에 행사가 있을 때나 간간이 서로 얼굴을 볼 수 있었던 친구가 연애고민 이외의 난감한 부탁을 해오기 시작한 건 작년부터였다. 엔터테인먼트 사업이란 것이 원래 열악한 자본금으로 시작해 인적자원으로 외부의 투자를 끌어들여 운영하는 것이라는데(친구의 설명이 그렇다), 당연히 수입이 불규칙할 수밖에 없어 간혹 재정적인 어려움에 처한다는 길고 긴 푸념 끝에 친구가 화끈하게 말했다. 천만원만 빌려달라고. 보름 있다가 투자금 들어오면 갚겠다고. +_+ 누구나 통장에 그 정도 여윳돈은 늘 갖고 있어서 수시로 뺄 수 있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과거에 몇 차례 몇몇 친구에게 돈을 빌려준 경험으로 미루어, 친구에게는 그냥 주겠다는 마음이 없는 한은 돈을 빌려주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는 걸 알고 있는 나는 고민을 꽤 했다. 빌려줄까 말까의 고민이 아니라(물론 그럴 돈도 없었지만!), 어떻게 '잘' 거절해야 할까 고민이었다. 그냥 선뜻 선물로 줄 상황이 아니고서야 친구와는 돈 거래를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는 것을 납득시켜야 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나는 비겁하게 여윳돈이 없다는 변명과 사과로 친구를 돌려보내고 말았다. 그러면 할 수 없지 뭐, 라며 돌아간 친구는 그 일로 삐쳤는지, 또는 내가 필요 없어진 때문인지 몇달이 넘도록 연락이 없었다. 원래도 내 쪽에서 먼저 연락하는 법이 잘 없기 때문에 문득 생각이 나더라도 나 역시 잘됐다 싶을 정도였다. 오랜만에 만나서 돈 얘기나 하는 친구라니! 차라리 연애 고민 상담이 낫지... -_-; 그러다 올초에 또 한번 '딱 일주일만' 필요해서 그러는데 5백만원만 빌려달라는 연락이 왔다. 어휴... 급히 돈거래를 청하는 사람들은 어쩜 그렇게 변명거리가 다들 그렇게 똑같은지.

결국 나는 친구와 관계정리의 위험을 무릅쓰고 (어쩌면 그쪽을 바란 것인지도!) 미안하지만 친구와는 돈거래를 하지 않기로 했다는 말을 꺼내고야 말았다. 말로는 이해한다면서, 그래도 자기를 그렇게 못 믿는다는 게 섭섭하다는 말을 되풀이하던 친구는 알았으니 내게 다시는 돈 얘기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렇게 또 몇달이 지났건만 친구는 며칠 전 또 다시 '5백만원'의 용건으로 나를 찾았다. 그리고 이번엔 레퍼토리도 달라져 있었다. 요번 쇼케이스 진행하느라고 생각보다 비용이 많이 들어가서 그래. 오백이 안되면, 일단 삼백도 괜찮아. 너 설마 그 정도는 있지? 당장 너한테 없으면, 일주일 뒤에 드린다고 너희 엄마나 동생한테 얘기 좀 해봐라. 10일에 1억 투자 들어오기로 되어 있으니까, 딱 일주일만 쓰면 돼. 응?

친구의 억지에 기가 막혀서 성의 없이 대꾸하다 미안하다고 전화를 끊으려니 서글픔이 밀려들었다. 친구의 상황이 정말로 어떠하든, 그간의 역사가 어찌 되었든 이 친구에겐 내게 여유가 아주 많더라도 선뜻 천만원, 오백만원을 내어줄 수 있는 '관계'가 아니란 생각 때문이었다. 전화를 끊고 잠시 씩씩대던 마음으론 번호를 스팸등록 해놓을까도 싶었지만 그러지는 않기로 했다. 정말로 절실하게 돈이 필요한 상황은 누구에게도 닥칠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젠 친구의 번호가 뜨면, ' 또 애인이랑 헤어졌나?'라는 의문 대신 '또 돈 빌려달라고 할 건가?'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오를 것이고, 그래서 이미 우리의 관계는 무너져버렸음이 안타깝다. 수십년 된 우정이 겨우 요거냐고, 친구랍시고 그럴 줄 몰랐다고 그녀가 나를 욕하든 말든, 하는 수 없다. 나는 이만한 그릇의 사람인 것을. 고등학교 친구든 아니든 평생 가는 친구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사람이고, 멀어지는 친구 또한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만만한 대부업자로 여기는 친구 따위 나도 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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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투덜일기 2010. 11. 1. 12:14

변기에서 물이 샌다는 걸 처음 발견한 게 언제더라. 최소한 다섯달은 된 것 같다. 두달에 한번씩 나오는 상하수도 고지서의 금액을 두세번이나 예년과 비교하며 고민했으니 말이다. 처음엔 전달보다 만원쯤 더 많아진 금액을 보고도 여름이라 물을 많이 썼을 거라고 위로하며 넘겨버렸다. 그러다 급기야 두배를 넘어선 고지서를 받아들고도 계속 변기 수리를 미루기만 했던 데는 나름 핑계가 있었다.

우선은 동네 어귀에 있던 수리점이 문을 닫았다. 작년에 엄마네 화장실 수리하면서 받아둔 명함으로 곧장 전화를 걸었더니만 그 지경이었다. 그렇다면 어디에다 연락해서 사람을 불러야 하나, 난감해진 나는 에라 모르겠다 잠시 잊어버리는 쪽을 택했다. 고요한 밤에 유독 크게 들리는 졸졸 새는 물소리를 들으면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물부족으로 먹는 물도 없어 병에 걸리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데!) 퍼뜩 인터넷으로 변기 출장수리 회사를 알아보긴 했지만, 너무 거창한 느낌이 들어 꼬리가 내려갔다.

그러고 또 그간 너무 바빴다. 대체 마감중이 아닐 때가 언제 있었느냐고 주변에서 퉁박을 주기는 하지만 밀린 일들이 차곡차곡 쌓여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상황이라 심적으로 어찌나 부담이 됐던지 화장실 변기 수리 따위는 우선순위에서 멀찌감치 밀려나고 말았다. 차라리 변기로 이어지는 수도를 잠가놓고 물을 받아 붓는 쪽을 택하거나 엄마네 화장실을 다닐망정, 사람을 불러 견적을 받고 수리를 맡기는 번거로운 절차를 회피했던 거다.

그러다 문득 오늘 우편물 꺼내러 현관에 내려갔더니 문앞에 명함이 한장 떨어져 있었다. "@@누수탐지수리공사. 출장문의 환영." 유레카! 곧바로 명함을 집어와 전화를 거니 20분 만에 올 수 있다고 했고, 한시간도 지나지 않아 단돈 6만원과 커피 한잔 서비스로 모든 문제가 말끔히 해결되었다. ㅠ.ㅠ 이렇게 쉽게 해결될 일을 대체 난 몇달 간 끙끙댔던 것인가. 몇달 간 수리비보다 훨씬 더 많이 하수구에 흘려보낸 수돗물 값은 또 어떻고. 친절한 아저씨는 영수증을 끊어주며 수도사업소에 연락해서 팩스로 수리내역을 보내면 그간 더 낸 상하수도비를 얼마간 돌려받을 수도 있다고 권했지만, 내가 그런 어려운 일을 시도할 리가 만무하다. 그저 문제상황이 종료되었음이 기쁘고 감격스러울 뿐.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는데, 요즘 나의 행태를 보면 매사가 이런 식이다. 뭐든 머릿속으로 이리저리 고민만 하다가 결국엔 계속 미루고 또 미루다 실행에 옮기는 건 하나도 없어 늘 쫓기는 사람처럼 전전긍긍. 머리맡이며 탁자에 읽다가 말고 (내가 지금 한가롭게 책이나 읽을 때냐!) 던져둔 책이 몇권이며, 이 블로그에도 쓰다가 말고 (시답잖은 신변잡기로 블로그질 할 시간에 일 한 줄이라도 더 하지!)  비공개로 남겨둔 글이 몇개던가. 한숨.

이렇게 어영부영 11월. 올해도 겨우 두달 남았다. 여름부터 질질 새던 변기 문제를 하루아침에 뚝딱 해결해주고 돌아간, 내게는 슈퍼맨 같았던 누수탐지수리공사 아저씨처럼, 어디론가 전화만 걸면 질질질 흘리고만 사는 내 인생을 바로잡아주는 해결사의 도움이 절실한 게 아닐까. 하기야 변기수리 하나도 어디에 전화를 걸어야 할지 몰라 헤맨 기간이 다섯 달이니 그마저도 요원하긴 하다. 우선은 어디로든 전화를 걸 마음부터 다잡아야 하는데, 이놈의 전화공포증이 어딜 가나 문제다. 난 왜 어디든 전화 거는 게 이리도 싫은지 원. 이것 봐라, 또 전화 핑계를 대고 앉았다. 온갖 핑계와 변명으로 점철된 이놈의 마감인생, 아침부터 얼굴이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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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가족

하나마나 푸념 2010. 10. 31. 09:45

냉랭한 남북기조 때문에 명맥이 끊겼던 이산가족 상봉이 다시 이루어져 뉴스에 연일 등장하는 장면을 보니 마음이 아프면서 보기가 싫어 고개를 돌리게 된다. 수십년씩 헤어져 살아야 했던 혈육을 만나는 기쁨과 그간의 한을 모르는 바 아니다. 당장 나라도 졸지에 형제부모와 헤어졌다가 수십년 만에 만나야 하는 상황이라면 얼마나 기가 막힐까. 이런저런 사정을 감안해 '안' 찾는 것이 아니라 강제적인 억압 때문에 가족을 '못' 찾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리움이 짙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북한과 남한이라는 너무도 다른 환경이 아니더라도, 오래 헤어져 산 가족의 재상봉은 반드시 행복이 보장되지 않는 것 같다. 그저 생사여부를 확인하고 어떻게 살았는지, 어쩌다 헤어지게 되었는지 한 많은 사연을 주고받으며 해묵은 감정을 해소하고 나면, 또 언제 그랬나 싶게 각자 살던 대로 예전처럼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는 생각이다. 혹독한 현실 때문에 괴로워하느니, 차라리 그냥 아련한 그리움과 추억으로 포장한 채 살아갈 수 있었던 때가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심하게 연로해지셔서 상봉 차례가 돌아오기 전에 슬픈 일을 당할까봐 전전긍긍하고 계실 수많은 이산가족 어르신들을 모르거나 무시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곁에서 내가 직접 지켜보니 그럴 것 같다는 짐작이다.

평안북도 출신인 우리 할아버지는 지난 80년대 전국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던 KBS 이산가족 찾기 방송 덕에 여동생을 찾은 적이 있다. 그분은 부산에 살고계셨기 때문에 역시나 부산에 살고 있던 큰고모와 먼저 상봉을 한 후, 할아버지께 연락이 왔고 고모할머님과 할아버지의 감격적인 통화가 이루어진 뒤, 고모할머님 내외가 오빠(우리 할아버지)를 만나러 서울로 올라오셨다. 가뜩이나 북적대는 우리 집안은 잔치 분위기였고, 온 가족이 모여 음식을 준비해 놓고 잊고 살던 고모할머님을 기다렸다. 할아버지와 고모할머니는 서로 얼싸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셨고, 그걸 지켜보는 우리는 다들 마음이 짠했다. 헌데 똘똘하고 애교가 많은 막내동생이라 퍽 예뻐하셨다는 할아버지의 추억담 속에 존재했던 고모할머니는 세월에 찌들은 검은 얼굴과 시장통에서 국밥장사를 하며 거칠어졌을 입담과 엄청난 주량, 난감한 주사로 우리를 놀라게 했다.

그날의 추억은 마구 찍어댄 사진으로 남아 (할아버지와 고모할머니는 불콰한 얼굴로 어깨동무를 하고 얼굴을 맞댄 채 웃고 계시거나 음식이 차려진 상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계신다) 할아버지 앨범에 들어 있지만, 내 머릿속에 남은 그날 저녁의 분위기는 참으로 난감하고 곤혹스러움의 연속이어서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 하룻밤인가 이틀 할아버지댁에서 주무시고 서울 구경도 함께 다닌 뒤 부산으로 내려가셨던 여동생 때문에 이후에도 할아버지는 속이 상해 홀로 약주를 많이 드셨다. 알고보니 그분은 혼인신고도 하지 못하는 남자(고모할머니의 남편인 줄 알았던 분은 그러니까 따로 처자식이 있는 유부남이었다)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도 그저 '동거인'으로 데리고 살고 있었고, 조강지처한테 버림받은 병든 그 동거남을 어려운 형편으로 수발중이었다. '아들' 이 아니라 '동거인'의 지위로 살아야 했던, 나에겐 '고종당숙'이 되는 그분도 삶이 엉망인듯 했고.

당시 내가 아직 고등학생이라 어른들은 쉬쉬하는 분위기였지만, 결국 그렇게 눈물의 상봉을 한 오누이는 살가운 만남을 계속 이어가지 못했다. 남과 북이 아니라 겨우 서울과 부산 사이의 거리였는데도 말이다. 그간 살아온 환경이 서로 너무 달랐고 할아버지가 보기엔 '망가진' 삶을 살아온 여동생이 못마땅했으며, 비빌 언덕이 생겼다고 여긴 가난한 누이는 오라비에게 금전적인 지원을 바랐다. 나중에 할아버지는 그 고모할머니의 이야기도 꺼내지 못하게 할 정도로 역정을 내셨기 때문에, 나로선 제대로 묻지도 못하는 상황이었고 부산에 사시는 큰고모가 대표로 간간이 소식을 전하는 눈치였다. 굳이 탓을 한다면 힘겨운 세월과 가난 때문이라고 여겨야겠지만,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이 어쩌다가 '그 따위'로 아무렇게나 살게 되었는지 할아버지는 몹시 괴로워하셨다.

이산가족 상봉의 뒤끝이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걸 누구보다 곁에서 느끼셨을 것 같은데도, 큰고모 역시 남북이산가족 찾기로 가족을 만나러 금강산에 다녀오셨다. 이북에 두고온 형제들을 만나러 갔다는 연로하신 큰고모의 모습은 2003년 당시 뉴스에도 나올 정도였다. 우리 할머니와 재혼한 할아버지의 전처 소생이 큰고모 한분 뿐인 줄 알았던 나로선 깜짝 놀랄 일이었다. 바리바리 선물을 싸들고 금강산 상봉장에 다녀오신 큰고모의 이야기를 나중에 들으니, 동생과 사촌이라면서 상봉장에 나온 북한의 가족들을 큰고모는 하나도 몰라보겠더라고 했다. 이야기를 나눠보아도 공유한 추억이 없어 전혀 모르는 사람들 같더라고. 당연히 감격적인 눈물의 상봉은 없었고, 옷차림이나 분위기로 보아 '꽤 사는 것 같더라'는 북한의 가족들은 고모가 가져간 선물에도 그리 반색하지 않았다고 했다. 뭐 그야 상봉인들에 대한 북한 당국의 교육탓이었을 것이라고 짐작되긴 하지만, 이산가족 상봉행사에 참석했던 큰고모는 고대하던 어머니 소식(큰고모가 당시 75세이셨으니 그분은 90세도 넘어 당연히 돌아가셨겠지만)도 거의 듣지 못해 괜히 갔나 싶어 후회스러웠다고 말씀하셨다. 사흘간이었다던가, 남북 이산가족 상봉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서로 전화나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일부 가족들은 중국을 통해서 편지를 주고받거나 돈까지도 보내는 방법이 있다고는 한다) 애틋한 형제의 정을 느낀 것도 아니니 뭘 더 어쩐단 말인가.

상황은 다르지만 70년대에 미국으로 입양됐던 친구 하나도 몇년 전 30년 만에 친부모를 찾으러 한국에 왔었고, 홀트아동복지회와 지방경찰청의 도움으로 친부모를 찾았다. 아이를 버린 부모는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듯했고, 친구도 눈물을 흘리며 그들을 용서했다. 한국 땅에서 고아원에 버려져 살았을 삶보다 미국에 입양되어 살았던 인생이 훨씬 더 나음을 알기 때문이라면서. 2년뒤 친구 부부는 그간 낳은 갓난쟁이 딸을 데리고 한번 더 한국을 찾아와 생모를 만났지만, 친구의 태도는 달라져 있었다. 아이를 낳아 키워보니, 남편이 못마땅하고 살기 어렵다는 이유로 자식을 버린 생모를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다고 했다. 홀로 남매를 키우기 어려워 해외입양을 선택한 생부가 오히려 이해될 것 같다나. 생모 쪽에서도 '미국사람'이 되어버린 나의 친구에게 그저 죄책감을 갖고 있을 뿐 별 정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친구는 생모가 아기 입히라며 사들고 온 옷가지와 색동저고리에 감사 인사를 하기는 했지만, 돌아서서 내겐 "촌스러워서 집에 돌아가자 마자 다 버릴 것"이라고 공언했다. 그리고 헤어지던 날, 자긴 두번 다시 한국에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일 때문이라면 몰라도 적어도 친부모를 만나러 오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결정타는 생모의 입에서 나왔다. 말이 안통하는 양쪽을 위해 계속 뒤치닥거리를 해오던 나에게 생모가 넌지시 물었었다. 미국서 쟤네들이 좀 사는 것 같으냐고. 사진작가와 기자면 먹고 살만 하지 않겠느냐고. -.-; 내 친구가 어떻게 나오나 한번 실험해봐야겠다면서, 생모는 대구 산다는 자신의 손녀딸(그 아주머니는 재혼해서 새로이 딸아들 낳아 잘 살고 있었다)이 쓸만한 '유아용 카시트'를 미국에 돌아가면 사보낼 수 있겠는지 내 친구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난감해진 내가 부피가 커서 배보다 배꼽이 더 클 거라고 만류해 보았지만, 일단 물어는 보라나.
 
친구가 미국으로 돌아가 카시트를 사서 대구로 보내주었는지 어쨌는지 나는 모르겠다. 어쨌든 그 질문을 받은 내 친구는 순간적으로 파르르 떨다가 흔쾌히 그러겠다고 대답했고, 그날의 만남을 정리해 생모 가족과 헤어지고 나서 나와 친구, 친구의 남편은 허탈한 마음에 술을 마셨었다. 해외입양아가 친부모를 찾고, 서로 말이 안통하면서도 어떻게든 인연의 끈을 이어가려고 애쓰는 건 TV에서나 나오는 일이로구나 싶었다. 친구 부부는 뿌리를 알기 위해서였으니, 친부모를 찾은 게 잘한 일이라고 말했지만, 그 과정을 줄곧 지켜본 나로선 과연 그 상봉이 잘한 짓이었는지 자신이 없었다. 어차피 헤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의 가족이었다면 그냥 헤어진 채로 그리움과 의혹, 좋은 상상의 기억만 품고 사는 게 더 '아름답지' 않을까 싶었다.

이제 더는 그런 꿈을 꾸지 않지만, 어린 시절엔 노상 전쟁통에 피난을 가다가 가족을 잃어버리거나 사방에서 폭탄이 터져 홀로 어느 낯선 곳에 숨어 있는 악몽을 꾸다 울며 깨어나곤 했다. 꿈이라 다행이라며 어린 마음에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만약에 현실에서도 내가 그렇게 이산의 아픔을 지니고 살았다면, 나 역시 현실의 괴리가 어떻든 일단은 가족을 찾으려들 것이 확실하다. 나중에야 차라리 찾지 말 것을 그랬다고 후회하게 되든지 말든지. 그렇기 때문에 남은 생이 얼마 안되는 수많은 이산가족 어르신들이 하루빨리 더 많은 상봉기회를 누리기를 빌고 있기는 한데, 그 마음이 그리 편치만은 않다. 할아버지도, 고모할머님도 이제는 다 돌아가신 분들이라, 마음에 상처를 입었더라도 그때 만나기를 잘하셨다고 생각하는지 여쭤볼 도리도 없다. "꿈에 그리던 얼굴을 한번이라도 봤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흔한 말이 그분들에게나, 지금 이산가족을 상봉하고 있는 실향민들에게나 서글픈 진실이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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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선가시

투덜일기 2010. 10. 29. 20:23

밥먹을 때 혼자 생선가시를 발라 먹기 시작한 게 언제인지는 당연히 잘 기억나질 않는다. 하지만 대충 짐작컨대 열살 언저리가 아니었을까? 할아버지의 호통 교육으로 젓가락질은 국민학교 이전에 이미 통달한데다, 밥상머리에서 오래도록 엄마의 시중을 받기엔 두 동생이 있어 어려웠을 테고, 그때도 이미 잘난척 했던 나의 성격이 그런 걸 허락치  않았을 것 같다. 엄마가 살쪽을 우리에게 나눠준 뒤 당신은 남은 살에서 생선가시를 대충 발라서 입안에 넣고 마구 씹다가 남은 가시를 뱉어내는 방식을 어려서도 몹시 못마땅해 했던 기억이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남동생들은 머리가 굵어진 뒤에도 생선을 먹을 땐 꼭 엄마가 거들어줘야 했다. 막내는 아예 비린것을 싫어해서 웬만해선 젓가락도 대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억지로 먹이려고 자꾸 밥그릇에 생선살을 올려주는 편이었고, 큰동생은 생선가시를 바르는 게 아니라 생선 몸통을 헤쳐놓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영악한 나는 생선 종류가 달라지더라도 중간 뼈대와 등, 배에 난 가시의 구조를 알면 완벽하게 생선살만 발라먹는 게 어렵지도 않은데 다들 왜 헤매는지 도대체 이해가 가질 않았다.

다행히도 착한 올케들은 생선반찬을 식탁에 올릴 때마다 어린 조카들 뿐만 아니라 남편을 위해서도 일일이 가시를 발라 살만 먹기 좋게 마련해주는 성품이다. 그게 습관이 된 덕분에 심지어 같이 밥을 먹을 땐 우리 모녀를 위해서도 가시를 발라주는 지경. 애들과 남편을 위해 돌아가며 생선 가시를 발라주느라 생선을 굽거나 조리는 날엔 정작 자기는 잘 먹지도 못한다고 푸념하면서도, 지켜보면 노상 그러고 있다. 엄마도 위대하지만 아내도 위대함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가끔 나도 밥상머리에서 일손을 돕느라 조카들에게 생선살을 발라 숟가락에 얹어주다 보면, 녀석들이 밥을 다 먹을 때까지 정말로 젓가락을 쉴 수가 없고, 내 입으론 생선살 한톨 못들어간다.

물론 이젠 나에게도 밥상머리에서 늘 생선가시 바르는 시중을 들어들어야 하는 왕비마마가 계신다. 과거에도 그랬듯 왕비마마는 대충 큰 가시만 발라낸 생선 살을 마구 씹다가(잔 가시는 칼슘 섭취를 위해 먹어도 괜찮다고 주장하신다) 걸리는 가시가 있으면 뱉어내는 분인데, 그러다 꼭 가시가 목에 걸려 켁켁거리며 괴로워하시기 때문에 나는 절대 못하게 말린다. 일주일 단위로 병원에 다닐망정 생선가시 빼러 응급실 가는 일은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식단을 구체적으로 짜서 해먹고 사는 건 아니지만, 일주일에 한두번은 꼭 생선을 굽거나 조려 상에 올리는 편이라 어느새 생선가시 바르는 일도 나름 주간행사다. 

돌아보면 굴비를 좋아하셨던 할머니를 위해 말년에 생선가시를 바르는 일도 내 몫이었던 것 같다. 내가 어렸을 땐 당연히 할머니가 생선 살을 발라 내 밥숟갈에 얹어주셨겠지만, 눈이 어두워지신 할머니를 위해선 나나 엄마가 할머니 밥숟갈에 굴비 살을 올려드려야 했다. 그러면 할머니는 당신은 됐으니 너나 어서 먹으라고 말씀하셨지만, 잔 가시 하나 없이 '성공적으로' 살코기만 할머니 숟가락에 얹어 드리며 나는 몹시 뿌듯하기만 했었다. 그런데 엄마를 위해 생선살을 바르는 요즘은 뿌듯함보다 서글픔이 앞서고 그래서 자꾸만 심술이 난다. 할머니를 위해선 꼭 숟가락에 생선살을 얹어드렸으면서, 엄마를 위해선 가시만 따로 발라 치워놓고 직접 집어 드시라고 하는 것만 봐도 태도가 다르다. 벌써부터 매사에 너무 의존적으로 만들지 않기 위함이라는 의도가 깔려 있기는 하지만, 그 밑바탕엔 엄마가 완전히 힘없는 '할머니'란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심보가 녹아 있다. 

오늘 저녁에도 가시가 젤 없는 편인 삼치를 구워 먹으며 생각해보니, 내가 열살무렵에 생선가시 분야(?)에서 독립했다고 쳐도 엄마의 시중을 받은 게 10년이니 최소한 나도 10년은 군말없이 봉사해야 맞는 거다. 그 이후에도 계속 그런 봉사의 세월이 이어지면 감사할 일이고... 생선가시 때문에 툴툴대다 갑자기 철났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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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치기 중년

투덜일기 2010. 10. 13. 16:08

몇달 전 가요계의 폐단을 지적하며 이하늘이 쓴 말인데, 유독 귀에 콕 박힌다. 물론 이하늘은 자기를 거짓말쟁이로 몰아넣은 방송국과 PD를 비난하는 맥락으로 사용한 반면, 내 경우는 스스로 민망한 거짓말쟁이가 되어 가시방석에 앉은 상황이다. 마감일을 질질 끄는 것이 이 업계 사람들의 고질병이라고는 하지만, 계약 마감일에서 무려 두세 달이 지난 뒤에도 일주일씩 계속 약속을 어기고 있는 내 모습을 보노라면, 정말로 막판엔 아무도 믿어주질 않아서 늑대에게 잡혀먹힌 양치기 소년이 떠오른다. 

편집 담당자들이 번역하는 사람들한테 연락해서 가장 흔히 듣는 거짓말이 "마무리중"이라는 변명이란다. 맞다. 최근들어 나도 몇번이나 써먹었다. 정말로 대강 초벌 번역은 끝났는데 골치아픈 퇴고를 앞두고 그런 말을 했다면 거짓말이 아니지만, 번역분량이 아직 엄청 남았어도 미안해서 차마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가 없으면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흘러나온다. 마무리 중이긴 한데... 어쩌고 저쩌고. 편집 일을 하고 있는 지인의 말을 들으면, 저런 구차한 변명을 그들도 다 알아차린단다. 이 인간 또 거짓말 하고 있구나, 하고. 하기야 거짓말이 아니라면 일주일, 이주일 차일피일 원고를 지연시킬 이유가 없겠지.

번역의 질은 둘째치고라도 마감일에 관한 한 '비교적 신용 있는' 사람으로 분류되었던 과거의 나는 이제 사라지고 없다. 조만간 고질적인 마감 어기기 대장이라는 악명을 뒤집어 쓰고 매장당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이런 두려움이 없지도 않으면서 왜 도대체 매번 마감일을 못 지키고 악순환의 구렁텅이에서 허덕거리는지!? 나도 그게 궁금하다. 그렇다고 만날 팽팽 놀러다니기만 하는 건 아닌데 말이다. 발등에 불이 떨어져도 근거없이 느긋해져 배째라고 여기는 태도, 이것도 일종의 병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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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서울

투덜일기 2010. 9. 23. 17:23
서울이 고향이라는 말처럼 이상하게 들리는 말도 드문 것 같지만, 어쨌든 서울서 나고 자랐으니 누가 물으면 내 고향은 서울이라고 해야하나? 아니면 할아버지의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라고 해야하는 건가? 그럼 만주에서 태어나 자라다 한국전쟁 통에 부산으로 피난 내려가 십대까지 보낸 아버지의 고향은 또 어디인가? 내 혈통의 절반을 차지한 엄마는 그야말로 대대로 서울 토박이인데 그건 또 어떻게 반영해야하나? 이것저것 생각하면 골치가 아파온다.

어쨌든 할아버지, 아버지 모두 살아계실 때도 우리 가족 명절 기반은 서울이었고, 우리집에서 동생네 집으로 차례의 주관이 넘어간 지금껏 상당수 서울 시민들이 귀향해 텅텅 빈 것 같은 명절 서울을 지키며 교통량이 만날 명절 때만 같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고 산 게 수십년이다. 연휴 시작무렵 차량 몇십만 대가 톨게이트를 빠져나갔네 어쩌네 하는 뉴스를 듣지 않아도 명절 때 가끔 시내를 다녀보면 정말로 한산해서 평소보다 시간이 절반밖에 안걸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건 나의 착각이었거나, 명절 때 움직이는 쪽이 아니라 친척과 가족들의 방문을 받는 쪽이라 몰랐던 것일 뿐이었는지, 명절의 서울은 이제 그리 한산하지 않다. 사실 작년까지만 해도 설날과 추석에 온종일 왁자지껄 친척들과 먹고 마시다 늦은 밤에 헤어져 집에 오는 길은 한산하게 느껴졌었다. 명절 연휴의 길이에 따라 상황이 약간 달라지긴 했어도 명절 당일엔 길막힘 따위 모르고 살아왔다는 뜻이다. 그런데 가족회의 결과 우리집도 올해부턴 며느리들의 휴식과 친정방문을 위해(이전까지 우리 엄마를 비롯해 작은어머니들은 물론이고, 올케들까지 명절엔 온종일 시댁과 함께한 뒤 다음날에나 친정에 갈 수 있었다.) 점심까지만 다 같이 먹고 헤어지기로 했기 때문에, 명절 당일 오후에 도로엘 나서보니 교통혼잡이 상상 이상이다.

하기야 요번엔 추석 전날 서울에 물폭탄이 쏟아지는 바람에 동생네 집으로 가는 길도 수월하지가 않았었다. 20분도 안 걸리는 거리를 1시간도 넘게 걸려 꾸물꾸물 기어가며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기분이 묘했다. 명절마다 고향으로 내려가는 사람들은 늘 이렇게 막막한 기분이었겠구나 싶었다. 이미 지난 설날에도 경험했지만, 어제 오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도 마찬가지였다. 각 지방에서 아침 일찍 차례를 마친 사람들이 다 벌써 돌아온 것인지, 아니면 그냥 서울 안에서 친척집을 오가는 차들이 서로 엉킨 것인지, 그 둘 다인지 간선도로 지선도로 할 것 없이 길마다 자동차가 꽉꽉 들어차 기어가고 있었다.

명절 때마다 7, 8시간씩 고속도로에서 고충을 겪는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하찮은 수준이기는 했어도, 명절 교통체증을 실감하며 이렇게 다들 고생을 해가며 찾아가는 고향과 가족과 만남의 의미가 무엇일까 새삼 멍했다. 전날부터 기름냄새 온 몸에 배어가며 장만한 각종 전과 음식은 맛있었고, 일년에 몇번 그렇게 대대적으로 모여 얼굴 맞대고 왁자지껄 떠들고 노는 자리를 몹시 소중히 여기는 사람임에도 확실히 명절은 적잖은 스트레스다. 핏줄로 어쩔 수 없이 엮인 나와 달리 엄연히 따지면 남이나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 결혼이라는 고리로 묶여 노동에 힘쓰며 짜증스러워할까봐 눈치가 보이면서, 동시에 또 그렇게 가족 내에서도 편을 가를 수밖에 없는 상황에 한숨이 나온다. 거기다 이젠 명절날 몰랐던 교통 체증 속 운전까지 까칠한 인간의 성미를 돋울 줄이야.

착하긴 해도(어쩌면 착하기 때문에) 명절증후군과 스트레스를 느끼는 올케들에게 한 사람씩 돌아가며 안식년 휴식제를 실시하든지, 5년씩 돌아가며 차례와 제사를 모시는 순환제를 도입하든지 하자고 제의했던 건 어쩌면 나도 늘 꿈꿔마지않는 '명절에 해외여행가기' 를 실현하고 싶은 욕심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생선전 밀가루 묻히기부터 시작해 명절 음식 장만을 도운 역사가 7살무렵부터 따져도 무려 얼마인가. 지겨울 때도 됐다고 생각은 하는데, 사실 명절 서울을 떠나 어디 다른 하늘 아래 가 있는다 해도 아직은 마음 편히 즐길 자신이 없긴 하다. ㅋ 참 바보 같은 가족형 인간이다 난. 그러니 앞으로도 한참은 명절 서울의 막히는 도로사정에 툴툴대는 수밖에 없을 듯. 암튼 고속도로도 막힌다는데 서울 시내 도로도 동시에 막히는 건 어찌된 영문인지 그걸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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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 귀찮아

투덜일기 2010. 9. 18. 00:06
과연 나한테 필요가 있는가 반문했을 때 별로 크게 필요하지 않다고 여기면서도 결국 아이폰4G를 신청했었고 드디어 오늘 전화기를 받았다. 근데 시작부터 조짐이 안 좋았다. 미리 시간약속까지 하고 찾아간 대리점에선 하필 컴퓨터가 다운되는 바람에 다시 밀고 설치중이라면서 무작정 기다리라고 하지 않겠나. -_-; 팩스로 서류를 보내 본사 같은 데서 대신 개통 노력을 하는 듯하더니 암튼 40분 넘게 기다려 결국 개통에 성공을 하긴 했다.

근데 헐... 역시나 컴맹에다 아날로그 세대인 나는 낯선 휴대폰을 새로 장만했을 때처럼 매뉴얼 읽고 공부 좀 하면 되겠거니 여겼더만 앙증맞은 핸드폰박스 안엔 아예 매뉴얼이 없더라. *_* 간단한 팁 설명만 들어 있고, 나머지는 죄다 온라인으로 공부하라네... 게다가 계속 컴퓨터 문제로 전에 쓰던 휴대폰 전화번호부를 옮겨주지 못해 내일 다시 오면 해주겠다니, 완전 황당했다. 왜 하필 내가 개통하기 직전에 그 대리점 컴퓨터가 다운되고 지랄?? 기계도사들이야 택배로 받아서 스스로 유심칩도 끼고 개통에 응한뒤 척척 어플을 내려받아 사용하는 데 어려움이 없겠지만, 나는 내 수준을 잘 알고 있기에 최소한 전화번호부라도 옮겨받으려고 대리점 수령을 택한 거였는데, 맥이 탁 빠졌다.
 
게다가 전화 거는 거야 번호만 누르면 된다지만, 메시지 보내려니 그놈의 터치에 서툴러서 어찌나 글자가 잘못찍히던지! ㅠ.ㅠ 나름 문자는 꽤 빨리 보내는 중년 엄지족이라 여겼건만 이젠 완전히 더듬더듬 세번에 한번은 화살표를 눌러 글자를 지워야 하는 상황이다. 심지어 조카에게 보낸 첫 문자는 '핸드폰ㅐ'라고만 써서 그냥 날아가버렸다. -_-; 핸드폰 새로 장만했다고 자랑하려던 거였는데 그 짧은 문장도 완성 못하고 전송 버튼이 눌리다니... 순간적으로 혀를 깨물고 싶더라.

어플이고 자시고 일단 아이튠즈 깔아서 음악이나 담아놓으려는 것이 오늘의 목표량이었으나, 꼬진 컴퓨터로 최대한 추출해서 한시간 가까이 수백곡도 넘게 열심히 전화기에 담았건만 헐...(그나마도 열심히 초보자 가이드 찾아보며 실행한 거다) 음악감상은커녕 휴대폰에 음악파일이 제대로 들어갔는지도 확인이 안된다. ㅠ.ㅠ 악~~ 귀찮아!! 비서 같은 사람이 나에게 필요한 기능만 쏙쏙 다 다운받아 내가 쓰기만 하게 만들어주면 좋겠다. 우리집에선 당연히 와이파인지 뭔지 안뜨니 이것저것 막 눌러서 접속하기도 겁나고 (그래봤자 요금 이내수준일텐데도!) 일단 용어가 낯설어서 뭘 좀 해보려다가도 진행이 안된다. 우웩~~ 내가 왜 이런 고생을 사서 시작했나 후회부터 앞섰다. 으휴... 일단 내일 전화번호부라도 좀 옮기고 나면 내 물건 같은 느낌이 들려나. 아직은 순전히 애물단지 같아서 정이 안간다. 흑흑.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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