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서울

투덜일기 2010. 9. 23. 17:23
서울이 고향이라는 말처럼 이상하게 들리는 말도 드문 것 같지만, 어쨌든 서울서 나고 자랐으니 누가 물으면 내 고향은 서울이라고 해야하나? 아니면 할아버지의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라고 해야하는 건가? 그럼 만주에서 태어나 자라다 한국전쟁 통에 부산으로 피난 내려가 십대까지 보낸 아버지의 고향은 또 어디인가? 내 혈통의 절반을 차지한 엄마는 그야말로 대대로 서울 토박이인데 그건 또 어떻게 반영해야하나? 이것저것 생각하면 골치가 아파온다.

어쨌든 할아버지, 아버지 모두 살아계실 때도 우리 가족 명절 기반은 서울이었고, 우리집에서 동생네 집으로 차례의 주관이 넘어간 지금껏 상당수 서울 시민들이 귀향해 텅텅 빈 것 같은 명절 서울을 지키며 교통량이 만날 명절 때만 같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고 산 게 수십년이다. 연휴 시작무렵 차량 몇십만 대가 톨게이트를 빠져나갔네 어쩌네 하는 뉴스를 듣지 않아도 명절 때 가끔 시내를 다녀보면 정말로 한산해서 평소보다 시간이 절반밖에 안걸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건 나의 착각이었거나, 명절 때 움직이는 쪽이 아니라 친척과 가족들의 방문을 받는 쪽이라 몰랐던 것일 뿐이었는지, 명절의 서울은 이제 그리 한산하지 않다. 사실 작년까지만 해도 설날과 추석에 온종일 왁자지껄 친척들과 먹고 마시다 늦은 밤에 헤어져 집에 오는 길은 한산하게 느껴졌었다. 명절 연휴의 길이에 따라 상황이 약간 달라지긴 했어도 명절 당일엔 길막힘 따위 모르고 살아왔다는 뜻이다. 그런데 가족회의 결과 우리집도 올해부턴 며느리들의 휴식과 친정방문을 위해(이전까지 우리 엄마를 비롯해 작은어머니들은 물론이고, 올케들까지 명절엔 온종일 시댁과 함께한 뒤 다음날에나 친정에 갈 수 있었다.) 점심까지만 다 같이 먹고 헤어지기로 했기 때문에, 명절 당일 오후에 도로엘 나서보니 교통혼잡이 상상 이상이다.

하기야 요번엔 추석 전날 서울에 물폭탄이 쏟아지는 바람에 동생네 집으로 가는 길도 수월하지가 않았었다. 20분도 안 걸리는 거리를 1시간도 넘게 걸려 꾸물꾸물 기어가며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기분이 묘했다. 명절마다 고향으로 내려가는 사람들은 늘 이렇게 막막한 기분이었겠구나 싶었다. 이미 지난 설날에도 경험했지만, 어제 오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도 마찬가지였다. 각 지방에서 아침 일찍 차례를 마친 사람들이 다 벌써 돌아온 것인지, 아니면 그냥 서울 안에서 친척집을 오가는 차들이 서로 엉킨 것인지, 그 둘 다인지 간선도로 지선도로 할 것 없이 길마다 자동차가 꽉꽉 들어차 기어가고 있었다.

명절 때마다 7, 8시간씩 고속도로에서 고충을 겪는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하찮은 수준이기는 했어도, 명절 교통체증을 실감하며 이렇게 다들 고생을 해가며 찾아가는 고향과 가족과 만남의 의미가 무엇일까 새삼 멍했다. 전날부터 기름냄새 온 몸에 배어가며 장만한 각종 전과 음식은 맛있었고, 일년에 몇번 그렇게 대대적으로 모여 얼굴 맞대고 왁자지껄 떠들고 노는 자리를 몹시 소중히 여기는 사람임에도 확실히 명절은 적잖은 스트레스다. 핏줄로 어쩔 수 없이 엮인 나와 달리 엄연히 따지면 남이나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 결혼이라는 고리로 묶여 노동에 힘쓰며 짜증스러워할까봐 눈치가 보이면서, 동시에 또 그렇게 가족 내에서도 편을 가를 수밖에 없는 상황에 한숨이 나온다. 거기다 이젠 명절날 몰랐던 교통 체증 속 운전까지 까칠한 인간의 성미를 돋울 줄이야.

착하긴 해도(어쩌면 착하기 때문에) 명절증후군과 스트레스를 느끼는 올케들에게 한 사람씩 돌아가며 안식년 휴식제를 실시하든지, 5년씩 돌아가며 차례와 제사를 모시는 순환제를 도입하든지 하자고 제의했던 건 어쩌면 나도 늘 꿈꿔마지않는 '명절에 해외여행가기' 를 실현하고 싶은 욕심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생선전 밀가루 묻히기부터 시작해 명절 음식 장만을 도운 역사가 7살무렵부터 따져도 무려 얼마인가. 지겨울 때도 됐다고 생각은 하는데, 사실 명절 서울을 떠나 어디 다른 하늘 아래 가 있는다 해도 아직은 마음 편히 즐길 자신이 없긴 하다. ㅋ 참 바보 같은 가족형 인간이다 난. 그러니 앞으로도 한참은 명절 서울의 막히는 도로사정에 툴툴대는 수밖에 없을 듯. 암튼 고속도로도 막힌다는데 서울 시내 도로도 동시에 막히는 건 어찌된 영문인지 그걸 모르겠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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