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다'에 해당되는 글 233건

  1. 2011.02.11 글쟁이의 가난 9
  2. 2011.02.09 방전 7
  3. 2011.01.29 일의 범위 18
  4. 2011.01.28 사춘기 8
  5. 2011.01.26 눈길 11
  6. 2011.01.07 그놈의 공부 20
  7. 2011.01.04 인지상정 14
  8. 2011.01.02 '-대'와 '-데' 10
  9. 2010.11.26 몸값 18
  10. 2010.11.23 개 혐오주의자의 개 관찰 10

우편함 맨 밑바닥 광고물 아래 깔려 있어 온 줄도 몰랐던 어느 출판사의 작년 하반기 인세보고서를 이제야 개봉하고는 키득키득 웃었다. 

출고 44권, 반품 46권.
실판매 -2권 (마이너스 두 권이란 뜻이다)
폐기 103권
증정및 홍보 217권.
총판매누계 3701권. (총 제작부수는 4천권이었다)

결과적으로 지급할 인세액 란에는 마이너스 천원이 기재되었다. 계산하기 좋게 책의 정가도 딱 만원이었고, 번역인세율은 정직하게 5%(창작인세 10%, 번역인세 5%면 갑과 을이 서로 공평하다 인정하는 적정수준이다)였기 때문이다. 이 금액을 추후 판매분 인세에서 정산하겠다는 요지의 인세보고서다.
참고로 이 책으로 내가 작년 상반기에 지급받은 인세는 268부에 해당하는 13만원 정도의 금액이었다. 만 3년 반 동안 꼬박 이 책으로 발생한 인세의 총액을 계산해봐도 180만원 정도에 불과하다. 1년 평균 60만원이 채 안된다. 만약에 내가 이렇게 안팔리는 책으로만 인세로 계약해 일년내내 작업했더라면 두달에 한권씩 떡찍어내듯 번역했다고 해도 연봉이 88만원세대의 절반도 안됐을 거라는 얘기다. 켁.

책이 2007년에 나와서 초판 1쇄를 2천부 찍었고, 그나마 2년만에 2쇄, 3쇄를 1000부씩 더 찍었다는 걸 기뻐했던 순간도 있었으나, '좋은' 책을 주로 많이 내면서 모든 번역료를 인세로 정직하게 지급해온 이 출판사에서 책을 좀 팔아 이윤을 내보겠다고 상업적인 실용서를 낸 결과가 이러하니 다른 인문교양서의 실적은 어떠할지 출판계의 상황이 눈에 선하다.

오래된 지인이 편집장으로 있던 이 출판사와 이 책을 계약하며, 최소한 5, 6천부는 팔릴 것을 예상한다며 좀 오래 걸려서 그렇지 매절 번역료와 거의 비슷한 수준의 원고료는 챙겨줄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당시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건 아니었지만, 내심 주기적으로 수입이 들어오는 인세 계약이 여럿 쌓이면 꽤 짭짤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후 2년쯤 욕심을 내며 계속 인세 계약에 응했던 책치고 2쇄 인쇄에 들어간 책은 거의 없다. 죄다 초판도 다 소화를 못했다는 뜻이다. 6만부 팔리면 미니쿠퍼를 살 수 있겠다고 호기롭게 꿈꾸었던 책들은 그 이십분의 일도 팔려나가지 않았다. 큭큭.

물론 아직도 버리지 못한 '번역인세 대박'의 꿈과, 초기비용을 줄이려는 출판사의 정책이 맞물려 지금도 번역작업의 둘 중 하나는 인세 계약이고 그에 대한 불만은 없다. 어차피 지켜보니 출판은 도박이나 로또 맞추기와 별 다를 게 없다. 그런 엄청난 행운이 나한테 떨어질 확률은 번개 맞을 확률보다 적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정직한 퍼센티지의 인세계약과 인세지급이 장기적으로 번역하는 사람들에게 혜택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막강한 마케팅 전략으로 많이 팔릴 것을 예상하는 상업적인 책을 대뜸 인세로 계약해주는 출판사는 없지만, 생활을 위해서라도 나 역시 간간이 매절계약을 선호하니 그 또한 불만은 없다. 다만 아무 생각 없이 달려오다가 일년치 손익계산서를 손에 들게 되면, 간간이 한숨이 나올 정도의 연봉에 아득해질 뿐이다.

지병과 가난으로 아사한 젊은 시나리오작가를 두고 많은 논란이 오고가는 가운데, 새삼 저런 인세보고서를 열어보니 나 또한 만감이 교차했다. <빵굽는 타자기>를 읽으며 폴 오스터도 성공한 작가가 되기까지 글줄로 밥벌이를 하느라 꽤 오래 힘겨운 시절을 보냈다는 내용에 한편으로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 고까운 느낌이 들었었다. 어차피 이제 그는 성공한 작가가 아닌가 말이다. 며칠전 무릅팍 도사에 나온 공지영도 가난한 시절의 에피소드를 뽐내듯 말하던데, 그들이 아무리 과거의 지난함을 토로하더라도 이미 그들은 부와 성공을 거머쥔 기득권자들이다. 물론 이렇게 엄살을 떨고 있는 나 역시 일감이 없어 이런저런 쪽일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을 일부 번역가들에게는 젠체하는 '중견'으로 보일 것임을 잘 안다. 이른바 번역계의 중산층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중산층이 무너져 워킹 푸어가 되어가고 있는 건 번역계도 마찬가지;;)

하지만 최상위 1%의 사람들이 90%이상의 부를 소유하는 현상은 글쟁이 사회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 같다. 총 판매부수가 900만부라는 베스트셀러 작가도 모은 돈이 하나도 없다고 엄살 떠는 판국에(물론 그 사람은 주변인이 다 써버렸다고 변명했다) 밑바닥에서 부정기적인 수입으로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은 오죽할까. 인세욕심에 눈이 어두워 불을 켰던 3, 4년전의 나도 아마 비빌 언덕 없이 완전 홀로 사는 신세였다면, 오피스텔 보증금을 다 까먹고 난 뒤 며칠에 한번씩 굶어야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내 경우엔 억누를 수 없는 식탐이 자존심과 수치심을 모두 이겨 주변에 손을 벌리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말이다.

내 편견속의 글쟁이는 언제나 가난했다. 배부른 자의 손과 머리에선 청아한 생각과 문장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편견이 대체 어디부터 비롯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정도의 가난과 사회적 홀대와 역경은 감수해야 글줄로 밥벌이를 하겠다고 나설 자격이 된다는 것이 이 사회에 팽배한 의식인 것 같다. 그러다 개천에서 용 나듯, 가뭄에서 콩 나듯, 정말로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는 글쟁이가 탄생하지 않는가. 그러나 현실은 참혹하다. '글'만 써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작가의 비율은 지극히 적으며, 다들 부업으로 삶을 영위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니 번역만 해서 굶지 않고 살 수 있는 나 정도면 감지덕지해야 할 것만 같다. 그런데 나름 중견이고 중산층인 내가 간간이 굶지 않은 이유의 절반은 캥거루족인 덕분이란 현실은 슬플 수밖에 없다. 만일 내가 부양가족이 있는 홀벌이 '가장' 번역가였다면 부업이 필수였거나, 더욱 코피터지게 일감을 찾아 헤매야했을 것이다. 그간 인세를 100억은 벌었을 작가도 통장에 잔고가 없다는데 나까짓 게으른 인간의 통장 잔고가 비어 있는 건 당연한 일. 최고은 작가와는 엄연히 다른 상황이면서 덩달아 넋두리하는 것 같아 부끄럽지만, 전체적으로 열악한 문화산업의 구조와 글쟁이를 홀대하는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낸 서글픈 비극이라는 생각이 자꾸 든다. 결국 타인의 죽음에 제 밥그릇 타령만 하고 앉아있는 이 모진 현실에서 정년이 없어 선택한 이 길은 과연 언제까지 뚫려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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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전

투덜일기 2011. 2. 9. 05:19

반드시 창작이 아니더라도 글과 관련된 직업은 대개 '말이 빠져나가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간중간에 채워넣지 않고 계속 줄줄 뽑아쓰기만 하면 어느 순간 번쩍번쩍 배터리 잔량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경고등이 켜지다가 완전히 방전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같은 번역가라고 해도 공력이 월등한 분들은 자가발전기 같은 게 늘 작동하고 있어서 별도의 충전이 필요하지 않을 거라고 상상하며 씁쓸해 한 적도 있었으나, 그런 분들도 쉴 새 없이 빠져나가는 말을 다시 채워넣는 과정을 간간이 거쳐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물론 사람마다 빠져나간 말을 채워넣는 방법은 다를 것이다. 문화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고, 여행을 하는 이도 있지만 대부분 다시 책 속에서 말과 글을 골라 주워담아 비어가는 머리를 채우 것이 보통이다.

예전에 소형 카세트플레이어나 CD플레이어를 들고 다닐 때 충전지를 쓴 적이 있다. 그때 배운 건 음악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배터리가 약해졌더라도 바로 충전기에 끼우지 말고 좀 더 방치해 완전히 방전시킨 다음 다시 충전을 해야 그나마 건전지가 오래간다는 사실이었다. 최근에 나온 휴대폰에 들어가는 리튬 배터리는 그럴 필요가 없어 수시로 충전해도 아무 이상이 없다고 누누히 들었어도, 한번 익힌 버릇이나 습관은 쉬 고쳐지는 것이 아니어서 나는 거의 매번 배터리가 저절로 꺼질 때까지 휴대폰을 방치하는 쪽이었다. 그리고 내 고집이 맞다는 듯이, 2, 3년씩 휴대폰을 써도 남들보다 배터리 성능이 쉬 떨어지는 문제를 겪은 적은 없었다. (물론 아이폰의 부실한 배터리 문제는 워낙 유명하여 나도 앞으로 어떻게 되려는지 두고볼 작정이다만;)

과거의 휴대폰처럼 여분의 배터리가 있다면야 완전히 방전이 되든 말든 아무 걱정이 없겠지만, 배터리 인심이 인색한 아이폰처럼 문제는 그 누구도 머리를 여유분으로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몇달에 한번씩 자진 방학을 해가며 한가로이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방전을 피할 방법은 오로지 하나 미리미리 채워넣는 것뿐인데 참 그게 잘 안된다. 더욱이 작년엔 독서를 또 얼마나 게을리했던가. 작년에도 아마 읽다 그친 수많은 책들은 방전된 머리에 뭐라도 채워넣어보려고 잠깐씩 애쓰다 성급하게 중단한 흔적들일 것이다. 외출 직전에야 휴대폰이 방전된 걸 알고 한 30분쯤 충전기에 꽂아 겨우 한 눈금의 배터리로 불안불안하게 반나절을 견딜 때가 많은 나의 꼬락서니와 어쩜 그리도 닮았는지.

쌀독 바닥에 깔린 한줌의 쌀알을 닥닥 긁어모으듯 억지로 쥐어짜 역자후기를 한 편 써 보내고 나니 정말로 완전방전이 되는 바람에 블로그에 쓰는 시답잖은 수다도 잘 떠오르지 않았다. 임시방편으로 또 반권쯤 책을 읽고 열심히 TV 영화를 찾아보았지만 잘 알다시피 이렇게 전전긍긍할 때는 배터리의 한눈금도 잘 차오르지 않는 법. 알량한 이 포스팅도 썼다 중단하기를 세번쯤 했나보다. 원래도 많이 비어 있는 머리를 가득 채우는 건 바라지도 않지만, 그럭저럭 밟아 넣어서라도 눈금을 좀 더 늘려야할 텐데 이젠 완전히 불량 전지가 되어버렸는지 진득하니 충전하는 과정을 통 못견디게 된 것 같아 걱정이다. 노상 걱정과 반성만 하지 말고 공부좀 하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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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범위

투덜일기 2011. 1. 29. 00:12

'번역가'를 직업으로 삼으면서 어쩔 수 없이 꼭 해야하지만 내가 무엇보다 하기 싫은 일은 누누이 이야기했다시피 '검토서'를 만드는 일이다. 번역에 앞서 책의 가치를 판단하는 일이므로 대단히 중요한 일임을 알지만, 대단히 편협한 독자로서 나는 책의 재미 여부를 말할 순 있겠으되, 과연 책이 잘 팔릴지 어쩔지 어떤 장단점이 있는지 '분석'을 하라고 하면 그저 멍하다. 노상 지지부진한 일의 진도 때문에 쫓기는 입장이라 대개 짬을 낼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하지만, 좀 시간 여유가 있다고 해도 책을 검토해달라는 부탁은 이제 그나마 거절을 잘하는 편이다. 책의 내용은 물론이고 검토소견까지 소상히 '공식 문서' 형태로 작성해야 하는 검토서를 만드는 일은 정말 토나올 만큼 싫기 때문이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얼치기로 아는 출판계 지인들의 부탁을 거절 못해서, 대규모 도서전 이후 원서들이 쏟아져들어올 때는 한달 내내 책읽고 검토서 만드는 일만 한 적도 있었는데, 기껏해야 10만원에서 20만원 정도밖에 주지 않는 검토비(가끔은 그 이상을 제시하는 경우도 있다만;;)도 들이는 품에 비하면 말도 안되는 수준이지만, 상당 수의 출판사에서 번역하는 이에게 검토를 맡기는 이유는 책의 내용이 쓸만하여 번역으로 이어지는 경우, 그 알량한 검토비도 '절약'할 수 있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번역가에 대한 상당 수 출판사의 대우가 겨우 그 정도다. 필요에 따라선 공짜로도 '가끔 써먹을 수 있는 인력'. 물론, 역시나 번역을 맡게 되더라도 사전 검토비는 칼같이 따로 미리 지불하는 '훌륭한' 출판사도 있다.

헌데 양심 불량 출판사의 경우엔 번역가를 또 다른 무보수 노동에도 동원하기 일쑤인데, 책 홍보를 위한 각종 언론자료 번역이 바로 그것이다. 대개는 번역원고를 넘기고 나서 직후나 한참 뒤 책이 출간될 즈음에 부탁을 받을 때가 있지만, 다행스럽게도 번역서 마다 전부 자료번역을 해야하는 건 아니다. 그리고 일부 '개념있는' 출판사에서는 당연히 각종 자료에 대한 번역의뢰도 원고료로 계산해 지불하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상당수의 출판사에선 그냥 은근슬쩍 담당자가 '도움'을 청하는 식으로 들이미는 것으로 끝이 난다. 번역가로선 당연히 책이 잘 팔리도록 도울 의무가 있으니 극구 거절할 입장은 아니다. 정 바쁘면 양해를 구할 수 있을 테고. 또 대부분은 그 자료라는 것이 그리 많지도 않아서 크게 부담되는 일감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긴 해도 게으른 나는 다른 일로 마구 바쁠 때 그런 영양가 없는 일을 하고 앉았노라면 자괴감이 든다. 흔히 번역한다고 하면 "한장에 얼마나 받아요?"라고 물으며 여권서류 번역일 쯤으로 알던 예전 대우와 달라진 게 뭐란 말인가? 물론 사내의 원칙이 어떠하든 담당자의 재량껏 앞뒤 표지와 날개글까지, 자료번역 원고까지 모두 매수계산을 해서 번역료에 반영해 지불하는 출판사도 많으니 무조건 분개할 일만도 아니다.책의 내용을 누구보다 잘 아는 번역가가 관련 자료도 번역해야 제대로 된 카피 한 줄이라도 더 뽑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나 역시 믿으니까.
 
검토서 만들기 만큼 싫은 일은 아니지만 내 경우엔 역자후기 쓰기도 만만칠 않아서 일주일 이상 고민할 때가 많다. 번역하면서 뭔가 틀이라도 잡아놓는 경우엔 다행이지만, 도무지 방향도 못잡고 헤맬 때는 멍하니 백지를 들여다보며 머리털만 쥐어뽑다가 이러면서 무슨 글줄로 밥벌이를 한다는 건가 자학에 빠지기도 한다. 게다가 원고와 역자후기를 다 넘겼다고 번역가의 책무가 끝나는 건 아니다. 역자교정 과정이 아직 남았으니까. 책에 따라서 대단히 수월하게 한번 쓱 읽고 넘길 수 있는 원고도 있지만, 꼼꼼히 다시 원서대조하고 편집자와 용어 협의에 힘쓰느라 2, 3주도 훨씬 넘게 걸리는 역자교정 원고를 앞두면 또 한숨이 나온다. 그 즈음 되면 같은 책을 서너번째로 읽는 셈이니 아무리 재미 있는 책도 멀미가 나지 않겠나. -_-;; 사실 그렇게 멀미나게 역자교정을 마치고 드디어 책이 출간되면, 아무리 여러번 보았더라도 오탈자 확인도 할 겸 마지막으로 읽어주어야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몇장 들춰보는 경우는 있어도 옛날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새삼 읽고 살펴 혹시라도 2쇄에 반영할 부분을 찾아두는 경우가 없었다. 주변에서 오탈자를 일러주어 출판사에 통보한 적은 있었지만...

말 그대로의 '번역' 이외에도 번역가에게 주어지는 일의 범위가 이토록 다양하다 보니, 초창기에 에너지 넘치고 오지랖 넓을 때 작가나 해외 저작권사 쪽에 이메일 보내서 뭔가 작품에 대한 질문을 하거나 특별 서문을 먼저 부탁하는 따위의 정성은 꿈도 꾸지 않게 됐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기 싫다고나 할까. 해외 작가와 각별한 인연을 맺어서 작가 쪽에서 번역가를 독점 지정하는 경우도 더러 있지만, 나라면 미리 사양하고 싶다. 나도 안다. 비겁하고 불성실한 태도다. 하지만 정말로 '전문분야'를 갖고 있는 '전문번역가'를 꿈꾸는 대신 지겹지 않게 이것 저것 골고루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고 싶은 '종합출판인'을 목표로 삼고 있으니 나도 어쩔 수가 없다. 그러고 보니 번역할 때만 그러는 게 아니라, 작가 한 사람에게 반해서 그 사람 책을 모두 읽는 충실한 독자로서의 태도도 보인 적이 없다. 혹시 싫증나면 어쩌나, 라는 것이 나의 핑계지만, 이러면서 책으로 밥벌이 한다니 참 손가락질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어쨌거나 마감일을 6개월도 넘게 어겼으니 어떤 무리한 부탁을 듣더라도 해줘야할 입장인 판국에, 자료번역에 대한 부분도 모두 원고료로 계산해주겠다는 '개념 있는' 출판사의 일을 하고 있으니 감지덕지해야 하는데, 어쩐지 자꾸 허드렛일 같고 자투리일 같고 쓸데없이 시간 부서지는 일 같고, 원래 내 일이 아닌 것 같은 불평이 불쑥불쑥 피어난다. 출판사에 따라서는 이런 자투리 번역만 따로 맡기는 인력망도 갖추고 있느 곳이 있긴 하다만, 결국엔 내 배가 불렀다. 번역의 원래 범위가 여기까지라고 애당초 생각했으면 될 일인데, 굳이 변명을 하자면 그간 잡역부 취급했던 '일부' 출판사에 대한 고까움이 너무 커서 '책 번역' 이외의 모든 일엔 본능적인 거부감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요번엔 자료 분량이 워낙 많다고 또 변명;;) 그러니 여기다 고백하고 얼른 마음을 고쳐먹어야지. 책 팔아먹으려고 얼굴 팔리는 이상한 홍보에 동원하지 않는 게 어디냐. 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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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

추억주머니 2011. 1. 28. 21:34

사춘기에 대한 까마득한 기억을 돌이켜보면 대체로 '착하게' 보냈다고 생각된다. 갑자기 와락 화가 나거나 슬펐던 적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겉으로 크게 반항기를 내보일 만한 형편이 아니란 걸 이미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민학교에 다닐 때는 어려서 잘 몰랐던 것인지 정말로 무탈하게 넘어갔던 것인지 알 수 없어도, 암튼 지긋지긋할 정도로 역사가 오래 된 엄마의 우울증을 목격한 기억이 없던 반면, 중학생때 목도한 엄마의 심한 우울증은 너무 괴롭고 난감해서 나까지 속을 썩이면 절대로 안된다는 다짐을 불러올 정도였다. 그래도 중학시절의 반항 사건이 두 가지 정도 남아있는 걸 보면, 내가 기억에서 지워버려서 그렇지 사춘기의 엇나감이 더 많았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왕비마마의 증언에 따르면 조잘조잘 노상 집에 와서 학교 얘기를 털어놓던 애가 한동안 방구석에 처박혀서 책만 보지 않으면 한숨을 푹푹 쉬는 정도였을 뿐, 이제부터 고백하려는 거짓 일기장 사건 말고는 달리 속썩이는 일이 없었다니 앞으로도 나는 계속 '대체로 착한' 사춘기 소녀였다고 주장할 작정이다.

거짓 일기장 사건은 중학교 1학년땐가 난생처럼 수련회라는 걸 가면서 생겨났던 일이다. 이름도 우스운 '간부 수련회'라는 걸 며칠 가야했는데, 교복 대신 사복을 입고 가는 것도 모자라 준비물에 '잠옷'이 있었다. 요즘 수학여행 같으면 그냥 '편한 옷' 정도로 적혀 있었을 테고, '잠옷'이라고 적혀 있었어도 그냥 편한 옷 아무거나 챙겨가면 되겠거니 여겼겠지만 고지식한 나에겐 '잠옷'이라는 품목이 반드시 지켜야할 규정으로 생각됐다. 물론 당시 나도 집에서 입던 파자마 형태의 낡은 잠옷이 있었다. 다만 그게 국민학교 때부터 줄곧 입던 거라 소매와 바짓부리가 모두 껑충하게 7부쯤으로 짧아졌고 낡아서 프린트도 다 흐려진 쪼글쪼글한 몰골이라는 사실이 문제였다. 집에서 입는 건 상관 없지만 그런 잠옷을 학교 수련회에 가서도 입고 자야 한다니, 나로선 앞이 캄캄했다. 친구들 얘기를 들어보니, 다들 그 참에 잠옷을 새로 사달라겠다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내가 보기에 우리 집안 형편은 갖고 싶은 것을 아무때나 불쑥 사달라고 말해선 안되는 수준이었다. 부모님 입장에선 뜻밖의 지출인 수련회 회비도 은근히 부담스러워하시는 마당에 잠옷이라니. 그런데도 나는 정말이지 헌 잠옷을 수련회에 가져가기가 싫었고, 결국 잠옷 사달라는 말을 하는 대신에 영악하게도 일기를 이용하기에 이르렀다.

일기 내용은 빤했다. 수련회에 헌 잠옷 입고 가는 게 정말 창피해서 수련회도 가기 싫을 정도지만, 부모님한테 꼭 필요하지도 않은 새 잠옷을 사달라고 하는 건 큰딸로서 할 짓이 아니다. 다른 애들은 다 새 잠옷을 사온다는데 아 나는 어쩌면 좋단 말인가.. 어쩌구 저쩌구... 집안 사정을 크게 고민하는 (나름) 착한 딸 코스프레를 한 거다. 그렇게 새 공책에 딱 한장 일기를 써서 책상에 올려놓고 학교를 다녀와보니(원래 쓰는 비밀 일기는 늘 책가방에 넣어가지고 다녔었다 ㅋ) 아니나 다를까 엄마는 그날 저녁 연분홍색 바탕에 진분홍 땡땡이가 찍힌 예쁜 새 파자마를 내밀었다. 물론 엄마는 내가 새 잠옷을 얻기 위해 딱 한장짜리 거짓 일기장을 '일부러' 책상에 두고갔음을 알았고, 그 때문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고 나중에 털어놓았다. 못된 기집애, 그냥 사달라고 할 것이지... 라면서. 그렇게 해서 생긴 새 잠옷을 수련회에 들고 가긴 했지만, 나는 두고두고 그 잠옷을 입을 때마다 양심에 찔려서 괴로웠고 엄마 역시 잊을 만 하면 친척들 앞에서도 가짜 일기장을 언급하며 내 약점을 공략했다. 쟤가 은근히 영약한 애예요.... ㅠ.ㅠ

이후 나의 사춘기가 평탄했던 건 거짓 일기장과 잠옷으로 생겨난 죄책감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내가 또 한번 눈물을 쫄쫄 흘리며 괴로워했던 사건이 있었으니, 그 또한 금전적인 문제에서 비롯됐다. 당시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주말마다 특별활동을 상당히 심도 있게 운영했고, 미술반이던 나는 격주 토요일마다 늘 이젤과 화구상자를 들고 경복궁 등지로 그림을 그리러 다녔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별도로 미술학원에 다닌 적은 없지만, 역시나 가끔 고궁으로 그림을 그리러 다니던 막내고모를 따라 몇번 어깨 너머로 배운 수채화 기법을 '흉내'내봤더니만 교내 사생대회에서도 막 상을 주질 않나, 학교 대표로 뽑혀서 '서부지역' 중학 사생대회에 파견되질 않나 결과가 꽤 우쭐했다. 그러다 드디어 중3때 학교 축제일. 그간 교내 및 교외 사생대회에서 지나치게 두드러진(?) 성과를 보인 탓에 나는 그림을 세 개나 전시하게 되어 개인이 내야 하는 표구비용도 만만치가 않았다. 그림 하나 당 5천원쯤 했던 것 같은데(당시 친구가 다니던 미술학원비가 한달에 2만5천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니, 꽤 큰 돈이었다) 축제 기간 동안에 그림을 걸려면 각자 자기 그림을 인사동이나 홍대앞 표구상에 가져가서 유리액자에 끼워 제출하거나, 학교에서 단체로 표구를 맡기도록 그림당 돈을 내야 했다. 집에 와서 부모님에게 사정을 이야기하니까 대번에 엄마는 꼭 그림을 전시 해야하느냐고, 그냥 액자 없이 '판떼기' 같은 데 붙이거나 이젤에 올려놓으면 안되는 거냐고 물었다. 액자 3개 값이면 한두달 치 쌀값이라는 둥... 결국 나는 알았다고, 전시 안하면 되지 않느냐고 쏘아붙이고는 꽝 소리 나게 방문 닫고 들어가 눈물을 흘리는 수밖에 없었다. 중학생 때 제일 친한 친구가 하필 우리집에서 100여미터 떨어진 곳에 살던 동네 최고 부잣집 딸이라 (당시 마당에 수영장이 꽤 크게 있고,  뜰 한 구석엔 팔뚝보다 큰 잉어들이 노니는 연못이 있었으며, 기사 딸린 검정색 세단이 가끔 토요일에 나와 친구를 경복궁으로 실어 날라주기도 했다) 그 친구는 일부러 인사동 표구상에서 최고급 액자로 표구를 맡겼다는 걸 알기에 내 처지가 더욱 비관스러웠던 것 같다.

학교축제일까지 근 열흘쯤 그야말로 나는 학교 다니는 게 죽을맛이었다. 그림 위치 선정 외에도 축제때 미술반이 해야할 일이 꽤 많아 이런저런 잡일에 동원되느라 방과후마다 미술실에 가면서도 나는 미술선생을 계속 피해다닐 수밖에 없었다. 표구비가 없어서 그림 전시를 안하기로 했다는 말을 어떻게 해야할지 도저히 입이 떨어지질 않았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미술반 아이들은 대개 미대 전공을 꿈꾸는 넉넉한 집안 아이들이라, 이젤과 화구상자도 고모가 쓰던 낡은 걸 물려받아야 했던 나 말고는 표구비로 전전긍긍하는 애들이 없었다. 그러니 더더욱 나는 마치 가난 때문에 재능을 마음껏 펼치지 못하는 그림천재라도 되는양 오만상을 떨었을 게 분명하다. 크크크. 집에선 입을 꾹 다물고 거의 한 마디도 하지 않았으므로 부모님을 축제에 초대하는 가정통신문도 당연히 전달하지 않았다. 내 그림은 걸지도 못하는데 뭣하러! 물론 나 혼자 심통을 있는대로 부리고 다니긴 했지만, 아마 무심한 엄마는 그림 표구비 때문에 내가 괴로워하는지 마는지, 학교 축제가 언제인지 별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친구네 엄마는 예의 그 검정색 세단을 타고서 축제 첫날 큼지막한 꽃다발과 함께 왕림하여 친구 그림 앞에서 기념촬영까지 하셨지만 말이다. ;-p 아, 맞다. 약간의 감동스러운 반전이 있기는 했다. 표구비를 못 냈으므로 당연히 내 그림은 한 개도 전시되지 않을 거라고 여겼던 것과 달리 놀랍게도, 미술실과 교무실 앞 복도엔 미술선생이 전시를 명했던 내 작품 세개가 모두 걸려 있었다. 비록 삐까번쩍하게 고급 액자로 새로 표구를 한 건 아니었지만, 미술실에 돌아다니는 옛날 그림 액자를 재활용해 미술선생이 내 그림을 전시해주었던 것. ㅠ.ㅠ 표구비 못내서 내 그림은 없을 거라고 다른 친구들에게도 다 얘기해놓았다가, 막상 내 이름표가 달린 그림을 마주하고 느낀 감동에다 이튿날 친구들이 그림 밑에 붙여준 장미꽃까지 곁들여져 중3 때의 추억은 신파스러우면서도 퍽 아련하게 남을 수 있었다.

쓰고 보니 사춘기 반항담이 아니라 가난 때문에 심통부린 이야기가 다 인것 같아 민망하지만, 암튼 세상 고민을 혼자 다 하는 것처럼 괴로워하던 나의 사춘기는 중3때로 막을 내렸던 것 같다. 고1때부터는 걸핏하면 병나는 엄마 대신 아침밥 챙기고 동생들 도시락 싸주고 그러느라 스스로 어른이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흔히들 하는 얘긴데 옛날 우리들은 나처럼 대개 사춘기가 짧고 굵게 금방 지나갔단다. 옛날 세대들이 확실히 삶이 덜 여유로워 철이 빨리 들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지금보다 부모의 간섭이 심하지 않아 반항할 일도 덜 있었다는 분석도 있다. 정답이야 모를 일이지만,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사춘기가 시작되어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계속 사춘기 성향을 보이는 요즘 아이들과는 확실히 다르다. 올해 중학생이 되는 조카를 봐도 그렇다. 5학년때부터 이미 발칵발칵 성질을 부리고 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는 걸 보며 벌써 사춘기에 접어들었나 보다는 심증을 가졌는데 점점 아주 가관이시다. 제 부모도 그렇고 나도 왕비마마도 본격적인 공주의 사춘기를 두려워할 정도다. 원래 사춘기 때는 뇌의 구조와 기능부터 달라서 번쩍번쩍 아무때나 스파크가 일고 번개가 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뇌관 같은 머릿속이 정리될 때까지는 어른들의 이해가 필수적이라던데, 여전히 철도 덜 났고 수시로 감정의 기복이 많은 나로서는 이해는커녕 제법 참고 지켜보다 덜컥 싸움을 할 태세가 되고 만다. +_+ 요번에 방학맞이 공주의 왕림기간 동안, 정말이지 작년 여름방학과는 다른 양상에 나도 왕비마마도 어쩔 줄을 몰랐다. 원래도 여기 오면 제멋대로 하는 경향을 보이곤 했으므로, 그러려니 했는데... 암튼 이번엔 확실히 받아주기 어려운 상황들이 많았고, 특히나 왕비마마께서 마음 상하는 일이 다수 발생했다. 심지어 기물파손(?)도 한 건 있었을 정도다. ㅎㅎㅎ 왕비마마께 가장 긴요한 물건인 간단형 리모컨을 공주께서 집어던져 망가뜨렸는데, 내가 중재자로 나서야 했을 정도로 할머니와 손녀딸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는 걸 보며 나는 더럭 겁이났다.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애틋하고 사랑스럽고 귀엽기만 하던 나의 공주는 이제 없구나 싶기도 하고. 원래는 심성이 착한 아이니까 자기도 주체 않되는 감정의 기복을 지혜롭게 헤쳐나갈 방법을 스스로도 발견하리라고 믿고 있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하면 고모는 언제나 네편이 되어주겠다고 했던 약속을 지킬 수 없을 것이라는 폭탄선언까지 해야했던 조카의 사춘기가 과연 어떻게 넘어갈지... 그나마도 여자애들은 좀 나은 편이고, 남자애들이 더 문제라는데 주르륵 공주 아래로 셋이나 되는 사내녀석들은 또 어찌 사춘기를 버텨나갈까! 사람이라면 누구나 거쳐가는 성장과정이므로, 뭐 고민해봤자 지켜보는 것밖엔 할 일이 없겠지만 취미가 조카사랑이라고 주장해온 얼치기 어른 고모에겐 벌써부터 큰 두려움이다. 지금까지도 애들 버르장머리 없게 만든 장본인이 나라는 비난을 계속 들어왔는데, 설마 조카들의 사춘기도 나 때문에 더욱 힘겨워지는 건 아니겠지? 어려서도 커서도 조카들이랑은 늘 속을 털어놓는 멋진 고모가 되는 게 꿈인데, 인품이 딸려서 과연 그런 경지에 오를 수나 있을지... 암튼 부모노릇엔 댈 것도 아니지만 오지랖 넓은 고모노릇도 뭐 쉽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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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길

투덜일기 2011. 1. 26. 11:24

설날 전에 두번 남은 주말 가운데 큰작은아버지의 일정에 맞춰 잡은 성묘일은 마침 대폭설이 내린 지난 일요일이었다. 집에서 출발할 즈음 눈길을 걱정스러워하는 전화를 받기는 했으나, 정말이지 그땐 눈발이 우스워보였고 공주보필에 힘쓰느라 나는 뉴스니 일기예보니 하는 것에도 무지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강행한 파주 성묘길은 십여년만에 처음으로 여기저기 눈길에 서너대씩 차들이 뒤엉켜 있는 도로를 엉금엉금 달려, 작은 언덕도 못올라 빌빌 미끄러지는 차를 산소 입구에 세워두고 모두들 함박눈을 맞으며 버적버적 걸어올라가야 하는 난코스였다. 제일 먼저 출발한 나는 빌빌 기어갔어도 한시간도 안 되어 약속시간보다 20분이나 먼저 공원묘지에 당도했지만, 모두 다섯대가 다 모인 시간은 약속시간에서 한시간이나 지난 뒤였다. 그나마도 그간 쌓인 눈이 엄청나 발이 푹푹 빠지는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엔 접근도 못했고, 아버지 계신 납골당에 들어가 급히 이면지에 적은 조부모님 지방과 아이폰에 담긴 아버지 사진을 나란히 제단에 놓고 절을 올리는 사태가 벌어졌다. 손을 호호 불며 (부츠는 신고 갔으되 왜 장갑을 빼먹었던고!) 한참이나 눈길을 걷고나서 돌아온 다음날까지 뒷다리와 허리가 뻐근했다. 생각해 보니 뜻밖의 눈사태로 나는 울음바람도 잊었더라. 지난 추석 성묘땐 비가 철철 오더니, 설날 성묘땐 대설이라... 다 자손들 잘 되라는 뜻이라는 큰작은아버지 말씀에 비싯 웃으며 동감했다. 눈길 운전은 솔직히 겁났지만, 1킬로 미터에 한번 꼴로 여기 저기 구석에 차가 처박혀 있던 자유로를 달렸어도 열여섯 명이나 되는 가족들 모두 별 탈없이 무사히 귀가하였으니 그냥 눈구경 한번 잘했다 싶은 추억으로 남았다. 하지만 너무 춥고 장갑이 없어서 조카들이랑 눈싸움 한번 못한 건 두고두고 한이 되겠다.

그나마 돌아올 무렵엔 거의 눈이 그쳤다. 저런 길을 내가 다녀왔구나.... 사진으로 다시 봐도 놀랍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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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 첫째 조카의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공주의 부모들 뿐만 아니라 온 가족이 노심초사했다. 유치원엔 무려 세살부터 다녔지만 선행학습 따윈 부질없는 짓이라 여겨 한글도 입학 직전에 3개월 속성으로 겨우 깨친 조카와 달리, 다른 아이들은 책을 줄줄 읽는 정도를 넘어 독후감까지 거침없이 쓴다는 '소문'에 바짝 얼었던 거다. 염려했던 대로 12월 생이라 또래보다 좀 늦된 조카의 초반부 학교생활은 퍽 힘겨웠고 아이는 가엾게도 무책임한 공교육과 매정한 담임에게 마음의 상처를 꽤 입었다. 별달리 문제가 있는 게 아닌데도 단지 개성이 강하고 고집스러운 아이를 교사들이 무조건 '사회적응 장애'로 몰아세운다는 사실을 우리도 비로소 깨달았다. 몰개성하고 유순한 규격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교육 목표가 되어선 안된다는 걸 교육자들은 정말로 모르는지 화가 치밀었지만, 별 뾰족한 수는 없었다. 이후 초등학교에 입학한 조카들의 경우엔 어느 정도 미리 '준비'를 하는 것으로 교훈을 삼을밖에. 
 
어쨌거나 여전히 개성 넘치는 성격으로 잘 자라준 조카가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는 이 시점에서 우리 가족들은 또 다시 불안초조하다. 요즘 중학교는 또 어떤 난관으로 아이를 힘들게 할까 싶어서 말이다. 흔히들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넘어가는 시기를 잘 보내야 '공부 잘하는' 아이로 자리를 잡을 수 있다고 하는데, 그런 건 바라지도 않는다. 공부 재능도 운동신경처럼 타고나는 거라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다만 뭐든 '중간쯤' 하는 평범한 아이였으면 좋겠는데, 워낙 '미친 사교육 열풍'에 휩싸인 사회 분위기에선 그 '중간쯤'도 쉽게 하는 게 아닌 모양이다. 벌써 웬만한 아이들은 중학교 교과 과정을 미리 공부하느라 종합반엘 다니고 있다나 뭐라나.
 
까마득한 옛날 나도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상당히 겁을 냈다. 내가 배정된 중학교는 국민학교부터 대학까지 거느리고 있는 '사립학교'였고, 그 사립 국민학교 출신들이 워낙 많아 수준이 상당히 높다는 소문이었다. 아주 뛰어나진 않아도 '나름 우등생'이었던 큰딸의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울 엄마도 주변에 조언을 구했는지 당시 진짜로 종로통에 있었던 '종로학원'에 영어와 수학 과목을 등록해놓았으니 새해부터 열심히 다니라고 나에게 말했다. 과외 한번 받아본 적 없는 내가 '학원'이라니 어린 마음에 바짝 긴장을 했던 기억이 있는데, 결과적으로 나의 사교육 기회는 영영 오지 않았다. ^^; 딱 새해부터 과외금지령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중학교 입학 전 겨울방학 내내 '잉글리시 펜맨쉽'이라고 적힌 공책에다 펜촉에 잉크를 찍어(!) 인쇄체와 필기체 대소문자 알파벳을 그려 연습하고 외웠을 뿐, 연일 동생들 데리고 스케이트나 타러 다니면서 팽팽 놀았다.

예전과 시대가 완전히 달라지긴 했지만 마음 같아선, 특목고다 뭐다 해서 어쩔 수 없이 입시광풍에 휩쓸리는 친구들을 목도하게 될 것이 분명한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조카에게도 '마지막으로' 실컷 놀라고 해주고 싶다. '고모로서는' 말이다. 하지만 일주일에 한번씩 조카의 영어공부를 봐주던 얼치기 과외선생으로선 걱정이 태산이다. 특히 영어과목에 대해선 요즘 부모와 애들이 얼마나 극성을 부리는지 알기 때문이다. 영어에 목숨건 아이들은 이미 방학을 맞아 캐나다다 호주다 필리핀이다 해서 어학연수를 가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영어학원에 다니는 초등학생들도 토익 수준의 단어를 하루에 스무개, 서른개씩 외운다던가. -_-; 그간 조카가 영어단어 외우기를 죽도록 싫어해서 (한글 맞춤법 좀 틀려도 말하는 데는 지장이 없지 않느냐는 것이 공주의 주장;; 애당초 나도 영어 거부증을 면하게 해주려고 철자 달달 안 외워도 된다고 타일렀다가 그만 발등 찍혔다 ㅠ.ㅠ) 그냥 내버려뒀던 나도 요번엔 고삐를 죄었다. 방학동안 초등학교 기본 영어단어라는 800개는 점검하고 넘어가자고 말이다. 이미 다 머릿속에 들어 있는 낱말이니까 잘 꺼내 쓰기만 하면 된다고 살살 달래보지만, 실은 나 역시 조카에서 속성 암기 기계가 될 것을 강요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면서도 이게 과연 잘하는 짓인지 아닌지는 자신이 없다. 영어단어 외우라고 족치는 대신에 좋은 책이나 좀 읽고 곧 헤어질 친구들이랑 실컷 놀러다니라고 조언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모든 아이들이 다 공부를 잘하는 건 절대 불가능한 일인데, 왜 다들 공부공부 미친 타령을 해대고 있는지 안타까운 노릇이다. 나부터도 공부라면 학을 떼겠는데! (쌘이와 미아를 비롯해 아직 공부에 매진하고 있는 친구들 진심으로 존경스럽다;;)  그 옛날의 나와 똑같이 대체 왜 써먹을 데도 없는 어려운 수학이랑 과학을 공부해야 되느냐고 묻는 조카에게 나 또한 "살아가는데 다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뻔한 대답을 해주며 한숨이 나왔다. 영어권 나라로 여행 가고 싶으면 고모를 데려가거나 영어를 잘하는 친구랑 가면 되고, 어차피 프랑스에선 영어로 해도 안 통한다며? 라고 항변하는 조카에겐 이미 영어공부의 당위성도 없어서 말문이 막힌 내가 "꼴찌는 하면 안 되잖아!"라고 윽박질러놓긴 했으나 과연 조카의 속성 단어암기 프로젝트도 성공리에 마무리될지 모르겠다. 으휴. 꼴찌 좀 하면 또 어떻다고... 그 역시 학창시절의 재미난 추억이 될 거라 여기면 좋을 텐데, 부지불식간에 꼴찌는 곤란하다고 튀어나온 걸 보면 나 역시 학력지상주의에 물든 속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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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상정

삶꾸러미 2011. 1. 4. 22:16

늦깎이로 다시 공부하던 시절 '인지상정'이 별명이었던 황당한 인물이 하나 있었던 터라, 미안하게도 한동안 '인지상정'이라는 말은 내게 본래의 의미('사람이면 누구나 가지는 보통의 마음';;)와는 상관없는 비아냥거림의 뉘앙스를 담고 있었다. 탈식민 담론이 오가던 이론수업에서 발표를 하며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인종차별이 인지상정이라고 했던가, 암튼 앞뒤가 맞지 않는 짜깁기 발제문을 설명하며 터무니 없이 사용한 '인지상정'이란 말이 던진 파문과 충격이 어찌나 컸던지 다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이없는 시선을 주고받았던 기억이 있다.

벌써 그 시절도 까마득한 추억이 돼가고 있다보니, 나는 또 내 나름대로 그 의미를 변용해서 쓰고 있는 듯하다. 누구나 가지는 건 아니겠지만 나로선 이러저러한 마음을 품는 것이 '인지상정'이라는 식으로. 택시 기사분에게 오히려 커피값을 받았다는 파피의 포스팅을 읽고 생각난 건데, 여전히 우유부단함과는 별도로 '불의'라고 여기는 점에 대해서는 까칠한 쌈닭의 면모를 갖추고 있는 반면에 나와 어떻게든 관련이 있는 직업군의 사람들에게는 질끈 눈을 감아주는 너그러움이 생겨났음을 실감한다.

예를 들어 이런 거다.
오늘 오후에도 겪은 일인데 아주 경미한 접촉사고의 경우, 범퍼에 살짝 흠집만 난 정도는 그냥 너그러이 보내준다. 아까 병원 갔다가 갈림길에서 막무가내로 후진하던 BMW에게 앞범퍼를 받혔다. 자기가 받은 줄도 모르고 그냥 가려던 어리바리 운전자를 빵 소리로 일단 잡아 세운 다음 "우쒸..."하면서 기세 좋게 차에서 내렸다. 마침 주차안내요원 코앞이라 확실한 목격자도 있었다. 콩 하고 받힌 거라 페인트가 살짝 묻어나긴 했던데, 상대 운전자가 따라 내리자마자 "죄송합니다"하는 순간, 그냥 보내주자 싶었다. 전에도 그렇게 보내준 적 많지만 평소 외제차 모는 인간들의 고압적인 태도에 열받을 때가 많았던 터라 얼굴부터 찌푸리고 내렸다가, 범퍼가 망가진 건 아님을 확인하기도 했으니 금세 마음이 풀렸다. 나의 선의(물론 나도 비슷한 선의를 받은 적 있다)가 내 주변의 모든 운전자들에게 퍼져나가 혜택을 비는 마음이랄까.

음식점도 그렇다. 작은아버지들을 비롯해 친구, 후배들 중에서도 '요식업계'에 종사하는 주변인들이 점점 많아지다보니 위생에 심히 문제가 있다거나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은 한 음식점에서 웬만해선 까탈을 부리며 불평을 터뜨리지 못한다. 내가 쓸데없이 음식점에서 진상을 떠는 유형은 아니지만, 그리고 그분들은 물론 친절이든 위생이든 맛이든 어느 면에서나 훌륭히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겠지만, 일부 음식점에서 몇몇 종업원의 무개념 행동에 벌컥 화가 났다가도 예전처럼 전투적인 태세로 항의하질 못하겠다. 내 아무리 소심하고 우유부단해도 불의는 참지 못했거늘! 요번 통큰 치킨 사태 때도, @@치킨에 입사한 사촌동생을 떠올리며 통큰 치킨 판매 중단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프랜차이즈 치킨이 다 비싼 건 아니다>라고 애써 주장했다. ^^; 

비행기를 타도 승무원을 수시로 불러대 괴롭히지 않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항공승무원이 얼마나 고된 직업인지 지인들에게 익히 듣기도 했지만, 사무장으로 승진했다던 선배가 상당한 거구로 좁은 통로를 왔다갔다 오가며 양손에 적, 백포도주를 나눠들고 따라주는 모습을 직접 보면서 어이쿠 찔렸다. 장거리 여행땐 초반에 술 팍 마시고 잠드는 게 최고라면서 한때 꽤나 성가시게 땅콩 달라, 치즈 있냐며 호출버튼을 눌러대거나 치솔 내놔라 베개 달라 슬리퍼 없냐 진상떨던 내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_- 물론 이젠 승무원들 쉬는 시간엔 절대 귀찮게 하지 않는, 아주 착하고 얌전한 승객이 되었다. (설마 승무원 안 괴롭히려고 최근 몇년 간 장거리 여행을 못떠나는 건 아니겠지;; ㅠㅠ)

버스 운전하는 친구 생각해서 버스 운전기사 아저씨들한테 꾸벅 인사도 잘하고, 택시 운전하시는 지인 떠올리며 우수리는 미리 동전으로 챙겨 거슬러받기 좋게 돈을 내거나 3백원 미만은 거스름돈 안받는 원칙을 세웠으며, 은행다니는 지인 생각해서 창구업무는 웬만해선 회피하고 현금지급기만 상대하며, 스님된 친구 목사된 친구 생각해서 땡중이란 말도 사기꾼 목사라는 말도 삼가는 중이다(워낙 타락한 종교인이 많아서 그쪽 욕은 '아예 중단'할 수가 없다;;). 까먹어서 그렇지 내가 각별히 신경쓰게 된 직업군이 또 있을텐데.... 물론 한두번의 나쁜 경험으로 무작정 싫은 눈으로 짜증스레 바라보는 편견의 직업군도 어마어마하겠지만서도.

제발이 저려서 책을 읽으며 남의 번역에 대해서 함부로 왈가왈부하지 못하는 것도 같은 범주에 드는 느낌인데 그건 나만의 인지상정이 아니라 동병상련에 더 가까운건가, 아님 혹시 제 밥그릇 감싸기? 암튼 세월이 흐르면서 몇가지 면에서는 유해진 것인지 통이 커진것인지 확실히 너그러워졌다. 다만 이런 태도가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의 어물쩡 타협이나 비리 옹호로 변질되지 않도록 경계도 게을리해선 안될 것이다. 나이 드는 것도 서러운데, 어려서 내가 혐오했던 '중장년'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건 절대 안될 일이다. 그러려면 계속 까탈스러움을 잃지 말아야하는 건가... -_-a 
흐이구 왜 이렇게 어려운 얘기를 쓰기 시작했는지 마무리가 안 되누만. 뭐 그렇다는 얘기다. 이러다 내 별명도 조롱의 뜻을 지닌 인지상정이 되면 안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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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와 '-데'

놀잇감 2011. 1. 2. 16:40

2011년 첫 포스팅은 과연 언제, 무슨 수다로 하게 될까 내심 궁금했는데 두둥, 우리말 얘기라니 고무적이다. ㅋㅋㅋ 새해연휴고 뭐고 역자교정에 힘쓰느라 허리가 휠 지경이긴 하나, 블로그질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요번 교정을 보면서 그간 내가 '잘못' 알고 있던 우리말을 또 하나 발견했다. 출판사에 친절하게 오타 지적하는 메일을 보내거나 게시판 글 올리는 독자들 가운데는 본인이 잘못 알고 있으면서 나무라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데, 지금껏 나도 역자교정하면서 틀리게 고쳐 되돌려 보낸 경우가 있을 정도로 찾아보지도 않고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말이다. '-대'와 '-데' 가운데서 나는 말을 전달하는 경우 종결어미가 대부분 '-대'여야만 하고, '-데'는 '~하던데'나 의문형인 '왜 그러는데?'의 형태로만 옳은 용법이라고 '믿고' 있었으나 아니란다. 켁. 그동안 블로그 돌아다니면서 '~~했데'라고 쓴 걸 보면 눈쌀을 찌푸리며 폄하했는데, 내가 틀렸다는 얘기! 

-대: '-다고 해'의 준말. 직접 경험한 사실이 아니라 남이 말한 내용을 간접적으로 전달할 때 쓰인다.
예) 저 사람 아주 똑똑하대.
     철수도 오겠대?

-데: 과거 어느 때 화자가 직접 경험한 사실을 현재의 말하는 장면으로 그대로 옮겨와 보고하듯이 말할 때 쓰이는 말로 '-더라'의 의미다.
예) 걔가 오늘 약속 못 지키겠데!
     그 사람 집이 시골이데. 

사실 예문을 보아도 하도 오래 잘못 알고 있었던 터라 아래 문장들은 눈에 몹시 설다. -_-; 요는 전달하려는 사실이 직접 경험인가 간접 경험인가의 차이다. 이렇게 여기 적어두기까지 했으니 앞으론 헷갈리지 말아야지. 수십년간 책 읽으며 종결어미 '-데'를 오타라고 생각했던 과거 모든 착각의 순간을 또 한번 반성한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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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값

투덜일기 2010. 11. 26. 14:40

처음도 아니고 두번째 계약인데 굳이 출판사로 나오라고 할 때 알아봤어야 했다. 2시에서 3시 사이에 아무때나 오라더니만 아침부터 일찌감치 다시 전화를 해서 나의 단잠을 깨워 2시까지 오라고 콕 찍어줄 때부터 조짐이 안좋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재미없으니 시리즈물의 계속 출간을 재고해보라고 내가 충심어린 부탁을 했던 청소년 소설의 두번째 책을 얼떨결에 계약하고 돌아와선 스스로가 한심해 엊저녁부터 계속 제머리를 쥐어박는 중이다.

어차피 책이 잘 팔릴지 안 팔릴지 예측하는 혜안 따위는 갖추지 못한 인간이니 출판사에서 계속 시리즈를 내겠다면 번역은 내가 맡아야한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중간에 어떤 문제가 있든 시리즈물의 번역자가 바뀌는 건 독자를 위해서도 좋지 못한 일이다. 다행히 편집 담당자는 책이 재미있다고 했으니, 내가 청소년물을 즐기기에 너무 '늙어'버렸나보다고 짐작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다음책을 논의하러 갔었던 것이고.

하지만 시장에서 콩나물값 깎는 것도 아니고, 사람 불러다가 계약서까지 뽑아놓고 눈앞에서 원고료를 깎는 건 너무했다. 이메일이나 전화로 그런 의향을 물어왔다면 내가 아무리 소심하다고 해도 당연히 거절했을 것이다. 다른 데는 내년 계약 건부터 어렵더라도 조금씩 몸값을 올려주는 형국인데 새삼 번역료를 깎아달라니. 시리즈물의 번역료를 권당 달리할 수도 있다는 건 난생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번역가별로 몸값이 거의 정해져 있긴 해도 책에 따라 번역료가 약간씩 조절되는 경우는 물론 있다. 분량이 너무 엄청난 책의 경우 출판사에서 미리 양해를 구하는 수도 있고, 상대적으로 번역하기 쉬운 책과 어려운 책은 출판사에서도 이미 알고 있지 않겠나. 지난번 계약도 가벼운 '청소년물'임을 빌미로 나로선 최대한 양보한 선에서 번역료를 책정했던 터였다. 하지만 출판사에서 책정한 제작비에 맞춰서 두들겨 패듯 가장 만만한 '인건비'인 번역료를 막무가내로 깎으려 드는 곳을 간혹 만나게 되면 정말이지 맥이 쭉 빠진다. 시리즈물이라서 뒷권은 번역하기 더 수월할 거라는 짐작의 근거는 대체 무엇인지.

일단 사무실로 불러들이면 내가 소심해서 면전에서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따위의 극적인 행동은 하지 못할 거라는 걸 저쪽에서 알아차리고 있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작전은 유효했다. 나름 굳은 얼굴로 입장을 밝히기는 했어도 결국 달변의 설득에 넘어가 자포자기 심정으로 계약서에 사인을 해주었으니 말이다. 저들이 칼자루를 쥐고 있는 '갑'이라서 '을'인 내가 져야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결과적으로 겨우 몇십만원가지고 서로 밀고 당기기를 하고 있다는 상황이 서글퍼져 어서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비루한 밥벌이 아닌 직업이 어디 있을까마는 드물게 겪는 이런 장면은 그저 도망치고 싶을 뿐이다. 시리즈물 끝나면 다시는 상대하지 않을 출판사로 블랙리스트에 올리는 것으로 소심한 복수를 하는 수밖에.

내키지 않아도 가끔씩 가게 되는 파주 출판도시는 이상스레 정이 가지 않는다. 삐까번쩍한 건물들이 즐비해도 인기척은 전혀 없이 회색빛으로 가라앉은 그곳에 가면 괜히 숨이 막힌다. 씁쓸한 심정으로 서둘러 집에 오니 파주에 있는 또 다른 출판사에서 보낸 증정본 택배상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도 올해 출간되는 마지막 책일 것이다. 책표지를 쓰다듬으며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나의 몸값이 여기 담겨 있으니 그만 잊어버리자고 마음먹었다. 헌데 새삼 구석에 던져둔 계약서를 보니 자꾸 울컥해서... 여기다 일러바쳤으니 이제 정말 툭툭 털고 웃어버릴란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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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개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구구절절 자꾸만 포스팅하는 날이 올 줄은 정녕 몰랐으나 이렇게 되고 말았다. 더욱이 내가 아는 한 지상 최고의 애견인이신 메리제인님의 눈물겨운 동거견 이야기를 엿보기도 했고, 이웃이신 키드님께 훈련소에 간 장금이 사연을 전해 듣고 보니 여전히 나에겐 불가사의이자 골칫거리인 개들 때문에 연일 겪는 괴로움을 고해바치지 않을 수가 없다. 하기야 좀 지나고 보니 '인간'을 한 종으로 일반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듯 개들도 도저히 한 가지 종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구석이 많다. 품종에 따른 차이인지, 그저 녀석들의 두뇌나 성격 차이인지 나로선 영영 오리무중이겠으나 암튼 걔네들을 한꺼번에 '개새끼'라고 싸잡아 부르는 게 내가 보기에도 부당하다고 여겨질 정도다. 알면 알수록 모를 개들의 세계.

사례1.
이름: 호야. 품종: 시츄. 숫놈.
친구네 개다. 2007년 8월에 한달된 녀석을 입양해 지금껏 기르고 있으니 3살인가, 4살인가. 암튼 내가 아는 개들 중에 가장 모범견이다. 처음 놀러갔을 때도 전혀 짖지 않았고, 몇번 와서 추근대기는 했으나 우리가 질색하는 걸 알고는 단숨에 물러가더니 이제는 만나도 소 닭보듯 무관심하다. 완전 고맙다.
두 딸을 비롯해 나의 친구가 정성들여 배변훈련을 시켰기 때문인지 실수 따위 단 한번도 한 적이 없단다. 어릴 땐 배변판에 쉬야를 하더니 지금은 아침 저녁에 두번 시간 맞춰 밖에 데리고 나갈 때 볼일을 보기 때문에 배변판도 집안에 깔아놓을 필요가 없어졌단다. 저도 데려가는 외출과 두고 가는 외출을 정확히 알아듣고 현관에서 배웅 태세를 취하거나 따라나설 준비를 귀신같이 한다. +_+ 중국 황실에서 키우려고 개발한 품종이라 왕궁에 어울리게 호들갑스럽지 않은 성격을 지니게 됐을 거라는 게 친구의 주장이다. 사실일까? 나는 짖는 걸 본 적이 없어서 목소리도 모를 정도다. 친구가 자기 사진 대신 녀석의 사진을 전화번호부에 저장해달라고 해서 감히 아이폰 앨범에 들어있다. 사진을 찍으려고 들면 이렇듯 가만히 앉아서 도도하게 포즈를 취해준다.

사례 2.
이름: 파랑이. 품종: 말티즈. 숫놈.
영광스럽게도 내 블로그에 여러번 등장한 바 있는 조카네 개다.
누군가 키우다가 올 봄에 양도한 녀석이라 정확한 나이 잘 모르겠다. 두살이라던가. 간혹 보면 저래서 개 팔자 상팔자로구나 싶을 정도로 푹신한 제 전용 침대에 누워 널브러져 자고 있을 때도 있으나 주로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며 쉴새없이 꼬리를 흔들어 아양을 떨다가 큰조카 방 문 앞이나 책상 밑을 지킨다. 특히 과일을 미친듯이 좋아해서, 우리가 과일을 먹을 때면 가엾어 보이려고 목을 쭉~ 빼고 옆을 맴돌다 기필코 얻어먹는다.  
집에 누가 오든 무조건 짖는다. 근데 그게 겁을 줘서 쫓아버리려는 게 아니라 자기 안아달라고 반갑다고 짖는 거다. 애정결핍이냐 뭐냐! 낯선 사람들의 경우 주인이 짖지 말라고 하면 금세 조용해지지만, 나나 왕비마마처럼 제 편이라고 생각하는(아 대체 왜??) 사람들이 집에 오면 쓰다듬어주거나 한참동안 안아주며 아는 척 할때까지 주인한테 혼이 나면서도 계속 짖는다. 친척들이 우글우글 모여드는 명절 같은 날에도 날뛰며 돌아다니더니 추석날엔 급기야 주인장 안방 침대에 떡하니 똥을 싸놓은 웃기는 놈이다. 주인이 있을 때면 낑낑거려서 배변판이 있는 베란다 문 열어달라고 신호를 보내고, 배변판에 볼일을 본 뒤엔 잘난척 짖어대며 간식 먹으려고 미친듯이 달려온다. 그럴땐 아주 멀쩡한데, 가끔가다 혼자 집에 있을 때 방방마다 한번씩은 모든 침대에 볼일을 벌여놓았고 소파와 쿠션에도 여러번 사고를 쳐서 쫓겨날 위기에 처했었다. 그래서 옛날 난로 주변에 치는 철망 같은 '우리'에 갇혀 지내기도 했는데 요샌 힘과 요령이 생겨서 거기 가둬놔도 머리로 들어올리고 나온단다. 최근엔 외출할 때 베란다에 가둬놔도 혼자 문을 밀고 나와 온 집안을 돌아다닐 만큼 영약하다고...
아무래도 파랑이는 정민이랑 지환이처럼 자기도 내 조카라고 착각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다. 우리 조카들이 좀 엉기는 걸 좋아하는 편이라서 TV를 보거나 책을 읽을 때도 내 다리를 베거나 팔짱을 끼거나 옆에 꼭 붙어서 다리라도 올려놓는 편인데, 그러고 있으면 이 녀석도 어느 틈엔가 파고들어 내 발목에라도 턱을 올리고 동참하거나 흉측하게 발라당 드러누워 그윽한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어쩌라고!) 헤어질 때도 마찬가지다. 조카들만 한번씩 안아주고 돌아서면 아주 난리가 난다. 내 무릎까지 뛰어올라 자기한테도 작별인사를 하라고 종용하는 고약한 놈이다. 말티즈가 원래 좀 애정을 갈구하는 성격이라고는 해도, 개라면 뜨악하게 여기는 나나 왕비마마에게까지 매번 달려들어 엉기는 녀석을 보면 정말 모르겠다.

사례 3.
사진은 없다. 이름: 이쁜이. 품종: 말티즈. 암놈.
이모네 개인데 벌써 새끼를 세번이나 낳았다던가, 6살이라고 들은 듯. 몸집은 작은 놈이 엄청 짖어대고 사납다. 이모네는 아들만 둘이라서 딸 하나 키우는 셈 친다고 이모가 얘기하시는데, 정말로 자기가 막내딸이라고 여기는 듯 공주병 증세가 엿보인다. 소파 맨 끝이 자기 자리라서 다른 사람이 앉으면 엄청 짖어대는데, 이모랑 이모부가 말리면 말은 듣지만 냉큼 이모나 이모부의 무릎에 올라 앉아야 제자리를 양보한다. 얘 혼자 오래 놔두는 걸 두 양반 다 못 견뎌해서 서로 먼저 집에 들어가라고 다투실 정도다. 영리해서 배변실수 얘긴 들어본 적이 없고, 언젠가 이모가 계단 센서등이 고장나 넘어지는 바람에 다치셨을 때 엄청 울어대며 옆을 지켰다고 효녀 소리를 듣는다. 작년에 사촌동생이 딸을 낳는 바람에 손녀가 생긴 이모랑 이모부가 얘 때문에 아기를 많이 못안아주실 정도라고 들었다. 그나마 사촌동생이 지방에 살기 때문에 늘 같이 사는 건 아니라 스트레스가 심하진 않은 모양이다.

사례 4.
이름: 곰돌이. 품종: 똥개 (진돗개 잡종으로 의심됨)
온동네의 골칫덩이 아래층 똥개이므로 당연히 사진은 없다. 찍어줄 마음도 절대 없고! 
올해 이천에서 태어나 서울로 올라왔으므로 겨우 한살인데 이미 덩치는 거짓말 좀 보태서 나만해졌다. ㅠ.ㅠ 충성심이 뛰어난 건지 멍청한 건지 개 주인 아저씨와 아주머니 딸, 세 사람 이외엔 무조건 미친듯이 짖어댄다. 같은 집에 사는 나와 왕비마마, 또 옆쪽 아래층 가족들에겐 짖지 말라고 개주인들이 누누히 혼내고 야단치고 가르쳐도 소용이 없다. 혹시나 해서 내가 그간 온갖 뼈다귀(일부러 살도 많이 붙여서 가져다 주었었다!)와 비계덩어리로 아부를 떨어 보았으나 개주인이 별 효험 없을 거라고 경고하더니 정말로 그랬다. 동네 사람들의 반발로 잠시 다시 고향 이천으로 내려가 있던 달포 정도엔 원래 개주인인 할머니(아래층 아저씨의 어머니시란다)한테도 그렇게 짖어댔고, 제 아비도 몰라보고 짖어대다가 귀를 물리기도 했단다. 밥주는 사람한테는 개도 안짖는다는 옛말 다 거짓인가보다. 그 한달 동안 원래 주인인 할머니도 이놈의 개가 하도 짖어대는 바람에 무서워서 가까이 가지 못해 사료를 줄 때마다 밥그릇을 막대기로 디밀어야 했다고... 나 역시 뼈다귀로 놈의 환심을 사려 할 땐 자칫 물릴 것 같아서 매번 주인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골목에 사람만 지나가도 컹컹 짖어대는 놈의 목소리는 정말이지 괴로운 지경이다. 대부분은 저도 무서워서 짖는지 개집으로 쏙 들어가며 짖어대지만, 나는 만만하게 보이는 모양으로 마구 달려들어 쇠사슬을 끊기라도 할 듯한 기세로 짖기 때문에 무서워죽겠다. 한번은 개줄이 끊어졌는지 집앞에서 얼쩡대다 내가 차고에 차를 대자마자 그악스럽게 짖어댔다. 차문을 열고 내리려다 식겁한 나는 집주인을 불러 개 좀 잡아달라고 한 뒤에 겨우 차에서 내려 집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 뒤로 쇠사슬로 개끈을 바꾼 것 같기는 하지만, 나는 마당을 드나들 때마다 여전히 언젠가 저놈의 '개새끼'한테 물려죽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린다. ㅠ.ㅠ 아주 가끔 대낮에 집을 나서는 경우엔 나와 왕비마마를 멀끔히 쳐다보기만 하고 안짖을 때도 있으나, 밖에서 들어올 땐 낮이든 밤이든 어김없이 잡아먹을 듯 짖어댄다. 어휴... 그럴 때마다 개주인이 나와서 조용히시키기는 하지만, 그 집이 비었을 때는 후다닥 도망쳐 들어오는 수밖에 없어서 정말 짜증나고 두렵다. 주인을 철썩같이 알아보는 놈이라면 주인 말도 잘 듣고 훈련이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만날 보는 사람들한테는 짖지 말라는 꾸지람을 수백번도 더 들었을텐데도 못 알아먹는 멍청한 똥개!

아래층 똥개한테 물려죽기 전에 어서 이 동네를 떠야한다는 결심을 새록새록 다지고는 있지만 또 귀찮은 현실 앞에선 기가 죽는다. 이사는 스트레스 지수가 배우자의 죽음과 맞먹는다던데... 겨울도 다가오고.. 내년 봄에나... 뭐 이러고 앉아서 개소리나 해대고 있다는 얘기다. 으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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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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